『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청아당 칼럼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인다

청아당 2006. 5. 22. 20:51
  
 2004/11/27    
   청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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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인다

눈에 보이는 데로 아는 만큼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면에서 탁월한 면을 보일 것이라는 환상은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삶은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깨달음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이 흔들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쯤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지만 사람에게는 깨달음보다 더 소중한 것이 경험적인 삶이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벽을 허물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꿈같은 일이지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땅을 밟고 서있는 현실이다.

깨달음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가 있다.
하나가 선적인 깨달음이고 또 하나가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다.
선적인 깨달음은 어느 한순간 대오 각성하는 돈오를 말하는 것이고 호흡을 통한 깨달음은 기를 빛으로 빛을 단으로 느껴가는 과정에서 빛의 폭풍 속에 갇혀 우주적인 현상을 느끼며 깨닫는 고요의 극점(진아 포함)을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개념이지만 결국 마음을 통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어떤 방법으로 하든 궁극적인 깨달음만 얻으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깨달음은 마음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면에 잠들어 있는 마음만 흔들어 깨울 수 있다면 깨달음의 길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데에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손쉬운 방법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상에서 전문가로 들어서는 길도 쉽지 않듯이 전문가의 과정보다 더 어려운 깨달음의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늘은 아무에게나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반드시 하늘이 정해 논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한테만 보여주고 있음을 볼 때 수행자로서의 자세와 정성이 없이는 깨달음의 세계에 근접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선적인 깨달음과 호흡을 통한 깨달음은 서로 그 위치가 바뀔 때가 있다.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호흡을 통한 깨달음을 경험할 수도 있고 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선적인 깨달음을 경험할 수도 있다.
선적인 깨달음이 되었던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 되었던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현상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선적인 깨달음과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 위치가 바뀐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련자가 깨달음에 이르는 열량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 선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서로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도 내면에 잠들어 있는 마음만 흔들어 깨울 수 있다면 대오 각성하여 고요의 극점에 드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충분한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성공할 수 있듯이 어떠한 난관이라도 반드시 극복하려는 불굴의 정신인 수행자의 자세와 하늘을 감동시킬만한 정성만 갖추어진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꿈과 이상을 갖고 환상을 꿈꾸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수행자에게는 수행자에게 맞는 삶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생활에 맞는 삶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자들이 홀가분하게 걸어왔던 삶을 똑같이 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분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다르듯이 따라 하기 방식으로 그렇게 똑같이 살기를 바란다면 인간 상품밖에 더 되겠는가.
홀가분하게 거칠 것 없는 홀로된 몸과 가족이 딸려있는 사람들을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확연하게 나타날 것이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주어진 곳에서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홀로서기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히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신이 편안하다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데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살아가라고 말을 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자신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하게 일하고 배우고 명상하면서 삶의 구조방식이 다른 사람들한테 자신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형평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본다.
성자들처럼 똑같이 살지 못하거나 성자들이 정해 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놓은 선각자들도 문제지만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성자들의 깨닫기 전의 행동이나 깨달은 이후의 삶을 살펴보아 일상에서 텍스트로 받아들일만한 것들인가를 냉정하게 살펴볼 기회를 따로 가져보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성자들의 일부의 행동과 말에서 규범적인 부분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기 마련이다.
진아를 발견하고 고요의 극점에 들다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뼛속깊이 느끼게 된다.
너와 나를 구분할만한 근거도 없고 자연이 말없이 서있는 거와 다를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자들이 정해 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원죄로 몰아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신들부터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원죄를 묻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준이라는 것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워놓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포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 부족한 현실에서 원죄를 들먹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솔직히 현실에서 성자들처럼 살아간다고 해도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들을 가지고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수선을 떠는 모습들은 옆에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밖에서 배회할 때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달이 날 수도 있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생활하다보면 이미 하나로 동화되어져 뭐가 좋은지 따로 구분이 안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사람 사는 일은 성자가 되었던 범부가 되었던 다 평범한 일이다.
열심히 살아온 범부의 일생이나 성자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범부가 중년이나 노년에 가서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승들이 나이 들어 그동안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자책하는 일이나 성자들이 날마다 후회하는 일보다 오히려 더 나은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것은 자신을 세우면서 자신을 지탱해준 삶의 기둥이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한 아름다운 삶을 성자들이 걸어온 길과 다르다고 해서 자책하고 자신을 내던지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따라 하기 방식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으면 조용히 혼자 즐거워하면 그만인 것이다.
결코 사회생활을 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없는 상대적인 평가 아래에서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 정해 논 법도에 의해 몸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채 말로만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한량가적인 기질보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열정이 있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가 보이지 않는 족쇄에 갇혀 살면서 서로 자신의 삶이 더 낫다고 해보아야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된다.

사람에게 자극이 없다면 죽은 송장과 다름이 없다.
자극을 통해 반응이 일어나듯이 탄력성이 클수록 자극이 클 수밖에 없다.
이는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자극 없는 삶은 생각해볼 수 없는 거와 같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공존하는 선악으로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보다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현실은 냉정하고 치열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자신을 세우는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은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도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명상에 드는 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위해서이다.

처음부터 알고 가는 길일지라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 없듯이 경험적인 삶은 현실이자 뼈를 깎는 고통의 길이다.

현실을 무시한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현실과 이상이 서로 다른 상태에서 서로에게 좋은 것만 요구한다면 갈등 아닌 갈등으로 고민에 빠져들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실은 성자들이 존재했던 시대나 지금이나 어떤 한사람의 말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성자가 부활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자 한사람 때문에 좋은 세상이 온다면 성자가 존재했던 때에 그렇게 되었어야했다.
지금도 성자들에 버금가는 많은 각자(覺者)들이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성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꾸만 헛소리를 하여 오히려 갈등 아닌 갈등을 더 부채질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태어난 데로 자신의 능력대로 살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자신을 세우고 깨달음을 얻어도 크게 달라질 것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내세워 깨달음을 높여보아야 한낱 공염불밖에 되지 않는다.
현실은 현실적일 때 가장 아름답듯이 명상을 통해 홀가분하게 건져 올린 한량가적인 성자들의 말에 크게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깨달음도 현실이고 삶도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이 더 낫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은 현실적이고 반드시 이상적인 삶이 현실과 맞아떨어져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다.
삶과 깨달음이 현실 속에서 서로 융화할 때 자연스러운 것처럼 깨달음만으로는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성자나 성직자들도 직업이 수행과 관련이 깊어 장인정신에 의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정리해놓은 것처럼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성자나 성직자들처럼 똑같이 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자연이 제자리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해나가듯이 서로의 위치에서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그런 자리가 된다면 그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속세를 악의 소굴로 몰아가는 일이나 범죄의 온상지로 몰아붙이는 일은 자신만 가장 고결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취급하게 하는 몰상식한 처사에 불과하다고 본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자체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고결하게 살아가는 성자나 성직자들일지라도 먹는 음식에서부터 시작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한테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면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유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성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물에 짜여진 데로 그렇게까지 숨 막히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실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명료하며 예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은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걸어가는 길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걸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세워나가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홀로서기를 준비해나가야 성공할 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진리이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보는 것마다 다 아름답게 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시켜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비교의식을 갖고 덤비면 서로가 추해보이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서로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정신이야말로 현실적인 삶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