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뭉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뭉친다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운명과 확률에 대해 논했다.
결과를 중시하는 상대성원리가 운명을 결정짓는다면
무작위로 요동치는 양자역학은 확률에 가깝다.
운명은 운명대로 존재하고
확률은 확률대로 존재한다.
운명이 거대한 전자석이라면
확률은 그 주변에 달라붙는 쇳가루에 비유될 것이다.
운명의 주변에 어떤 것들이 랜덤화되어 달라붙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학이 패턴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면
물리학 또한 패턴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
인간의 속성은 우주에 무작위로 널려있는 비정형화되어져 있는 것들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재정렬하여 고착화시키는 작업을 즐기고 있다.
자유방임을 즐기는 자연하고 반대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주종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오래된 노예근성과 환경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나 도교가 철학을 추구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오직 믿음만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볼 수도 있다.
AI 시대에 살고 있는 물리학도가 묻는다.
100년 후에는 엄청난 과학이 발달되어져
지금의 종교는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100년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의 동아줄인
종교를 내려놓을 수는 없다고 했다.
종교는 어떠한 형태로든 변모를 할 것이며
시대에 걸맞은 규모와 형상을 갖출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1000년 가까이 살았어도
과거의 조상들이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왔어도
과학이 발달하여 영구불변한 모습으로 영원히 살 수 있어도
언젠가는 흩어지고 없는 인물이 된다고 했다.
자연의 속성은 뭉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뭉치기에 그렇다.
그것이 소립자로 뭉치던?
과학으로 뭉치던?
아니면 신비의 기적을 통해 뭉치던?
한번 존재하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변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갈 것이다.
우주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우주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갈 것이다.
아마존에 이름 모를 생물이나 동물들이 생성소멸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조상들이 생성 소멸하여 없어졌지만
지금의 나와 연결되는 것은 시간과 거리이다.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그 누군가는 그 자리에 있었기에 참변을 당한다.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들인가? 라는 질문이다.
전자석의 주변에는 쇳가루가 몰려든다.
전자석의 크기나 규모가 커질수록 흡인력과 척력은 거대해질 것이다.
운명과 확률은 바로 이 빈틈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은 세상의 그릇만큼 된다.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은 우주의 그릇만큼 된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그것도 이론이 아닌 실천적 경험인 수행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험이 최고의 가치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 경험을 뒷받침하여 입증할 수 없는 현상들이라면 한낱 물거품과도 같은 것이다.
경험과 이론은 쌍두마차처럼 떨어질 수 없는 인과관계로 존재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은 필설로 해결되지 않는다.
분명 존재하고 경험했던 것들인데 남들은 손으로 만져보거나 느껴볼 수 없다면
그것은 사장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과학이 필요한 것은 바로 경험할 수 있는 단광기기의 실현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피부로 자극받으면서 느낄 수 있는
단광기기의 실현이다.
타임스페이스를 뚫고 경계를 넘나들거나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든 자유롭게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단광기기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관문이기에
우주의 모든 현상을 체험할 수 있는 단광기기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이나 의문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우주를 꿰뚫는 본질은 하나이다.
뭉치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뭉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소립자이든 영구불변한 물체이든 가리지 않고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이동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렇다.
방금 명상을 하거나 커피숍에 앉아있다가
시간이 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처럼
한곳에 영원히 있을 것 같은 공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요의 극점일지언정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진공 속에서도 양자역학이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요동치며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