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청아당 칼럼

깨달음을 얻어도 흔들리는 마음

청아당 2006. 5. 22. 20:50
 
 2004/11/17   
   청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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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을 얻어도 흔들리는 마음
깨달음을 얻어도 흔들리는 마음

깨달음을 얻으면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유지한 채 모든 것을 초월하며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삶과 깨달음을 놓고 본다면 분명 깨달음이 상위개념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위치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삶보다 깨달음이 위에 있기를 강조하지만 삶에서 지쳐있을 때를 위한 이상향으로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
마음은 깨달음보다 위에 존재한다.
깨달음을 얻고도 마음을 잡기위해 고승들이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깨달음을 놓지 않으려고 깨달음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마음은 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삶은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마음은 더욱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살다보면 아는 일이지만 결국 깨달음도 현실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나이를 먹을수록 깨달음과 현실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현실이야말로 깨달음의 보고이자 실천의 장이다.
깨달음은 모든 것을 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꿈과 이상에 젖어 바람처럼 사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느끼는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경제를 빼놓는다면 살아가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드시 부를 얻기 위한 경제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삶을 지탱해나가려면 경제없이는 단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오죽하면 원죄의 뿌리인 세속을 멀리하는 종교마저도 경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도시가 싫은 사람들은 시골이나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 하고 시골이나 산속이 싫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와 살고 싶어 한다.
산속에 산다고해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야할 자유가 주어져있다보니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야할 의지가 있다.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던지 자족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다.

삶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적인 삶이라면 깨달음은 허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삶이다.
삶은 피와 땀을 요구하며 실천력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게 한다면 깨달음은 허구적인 안락과 평안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허무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사람들은 환상과 이상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 같고 또 바람처럼 홀가분하게 사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삶은 모두가 소중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장난에 함께 덩달아 춤을 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깨달음에 대해 집착을 하는지는 몰라도 다 벗어놓고보면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힘들게 깨달았으니까 차별화를 두기위해 가장 높고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올려놓고 바라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지는 몰라도 사실 손에 넣고 보면 그렇게까지 높이 올려놓아야하는지 의문이 간다.

사람사는 일은 평범한 일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삶을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는 단점이 노출되어져 남보다 더 많은 삶의 회의를 달고 사는지도 모른다.
순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약해지거나 순수한 직업을 찾게 되어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지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무시한 삶은 살아가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현실을 무시하는 듯 한 언어에 갇혀 바람처럼 살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후회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보호하기위한 안전장치를 말장난으로 해놓았지만 깊이 있게 따져보면 하나도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 많다.
다 던져놓고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텅 빈 공허 속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느끼게 된다.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무시하면 남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삶에서 자연스러움을 빼놓는다면 살아있는 송장과 다름이 없다.
시대에 맞춰 사는 것이 사람사는 일이다.
항상 과거만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도 모든 것을 놓게 만드는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게 하는 선도사상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지나온 시대를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치열한 현실을 무시하고 유유자적하게 한량처럼 살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다 놓고 살기를 요구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삶은 재수정되어져야한다고 본다.

현실은 조직사회이고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중심축과 맞물려 있는 톱니가 빠져나간다면 함께 무너지게 되어져있다.
함께 가야할 길에서 빠져나간다면 응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그마한 힘들이 모여 큰 힘을 이루듯이 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서있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피를 나눈 가족애로 사회를 구성해 나가듯이 한솥밥을 먹으며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서로를 위해주는 일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서있는 자리가 힘이 들어도 다함께 가는 길이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힘있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바람을 가르는 삶도 뒤돌아보면 후회가 남는 법이다.
사람사는 일에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현실에서 달릴 수 있는 삶이 실상인 것처럼 현실에 서있으면서 허공에 떠있는 삶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눈뜨면 다가오는 현실을 현실 속에서 달리지 않고 꿈속에서 달리려고 한다면 결국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은 회의를 감수하면서 살아가야하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경험적인 삶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깨달음보다도 경험적인 삶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삶을 초월할 수는 있어도 경험적인 삶까지 초월하지는 못한다.
삶을 초월했다고 경험적인 삶까지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깨달음을 말장난으로 가지고 놀지 못하도록 하늘이 쳐놓은 그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삶과 깨달음이 현실 속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현실적인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양석현

청아당님 옥같은 문장에서 티같이 자주 오타를 일으키는 글자가 있어서요..^^;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유지한 체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유지한 채

참고 예) 그럴듯하게 꾸미는 태도: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인데도 모른 체 하였다.
이미 있는 상태그대로: 숨을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2004/11/19
양석현

현실의 삶에서 깨달음이 경험을 초월하지 못함을 지적하신 것이 마음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삶을 가늠하고 경험을 도외시하던 저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옛말에 선비가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식자들이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나 깨달음을 높이는 말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들도 삶의 실전 앞에서 그들의 지식이나 깨달음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받겠지요..^^

  2004/11/19
청아당

오타를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오타가 있다면 부담없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험적인 삶을 살다보면 현실속에서 모든 것이 검증받게 되어져 있다고 봅니다. 물론 검증 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검증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2004/11/19
박용금

주막에 들러 술이나 한잔 하고 가시구려!

  2004/12/15
장원용

술은 술이요, 물은 물이다.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이지만 깨달은 사람들의 숫자가 손가락으로 셀수 있을만큼이니 그곳에 도달하기란 분명 어려운 일이니, 순수성이 높은 글에서 뭔가를 흐리게 하는 글은 없었으면 합니다.

  2005/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