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청아당 칼럼

고목처럼 되기 위해서는

청아당 2006. 5. 22. 20:47
 
 2004/10/30    
   청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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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목처럼 되기 위해서는
고목처럼 되기 위해서는

무심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초월 뒤에는 자유스러움이 다가오지만 그만큼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움직이지 않아도 다 알기 때문에 게을러지고 자유스러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비롯하여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동적인 삶이 없다면 무료해서 살아가야할 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것은 바로 동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성자들이 입이 닿도록 바른 삶만을 강조해왔지만 홀가분하게 건져 올린 한량 같은 성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무쇠돌이처럼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정이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있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야할 이유는 바로 이 맛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 정을 빼놓는다면 이미 죽은 나무나 다름이 없다.
인터넷과 정보화가 발달된 사회이지만 아직도 사람의 정이 통하지 않으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상과 공상에서 만날 수 있는 환상이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원동력은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꿈이 잘못된 꿈일지언정 그 꿈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에 알면서도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깨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만 막상 깨달음을 얻어도 별다른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무심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고상하게 산다던 신선 같은 노래도 사실 알고 나면 한낱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이야깃거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숱한 고행을 통과해야 하지만 초월 뒤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 깨달음에 대한 진상이다.
사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듯이 어쩌면 깨달음은 처음부터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깨달음을 얻어도 또 다시 동적인 삶을 살아가야할 사람들임을 잘 알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상을 피해 허송세월하는 수행자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이야말로 깨달은 사람들보다 더 앞서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따로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미 깨달음 속에서 동적인 삶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깨달음보다는 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평범한 삶이 더 자유스럽고 편안하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만큼 아는 만큼만 살아가야할 이유는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무료한 삶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서있는 나무들일지라도 바람 없이는 하루도 무료해서 견뎌내기 어렵듯이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깨달음이 전부인 걸로 착각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마음을 다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깨달음보다 훨씬 높은 데에 있다 보니 깨달음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가끔씩 마음을 잡았다는 깨달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집착을 잡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장난을 좋아한다. 특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꾸미기를 좋아한다.
깨달음만 얻으면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마음을 잡아가두어 무심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음식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도록 최첨단 보안장치를 설치해놓기를 좋아한다.

깨달음 뒤에도 배워야할 것이 많다.
깨달음만 얻으면 그 모든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만 가지고는 배가 고파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공부를 별도로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깨달음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 적이고도 소설적인 이야기들은 다 걷어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좋다.
깨달음은 현실을 떠나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이기도 하다.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지 깨달음을 높이고 손댈 수 없는 곳에 매달아두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그 모든 혜택을 따로 베풀지는 않는다.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수고를 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성자들이 처음 말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은 사람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숨 막힐 정도로 꿰뚫어보고 있는 성자들이 허튼 소리를 했을 리는 만무하다.
먹기에 불편한 보기 좋은 떡만을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을 그어놓고 벽을 높이 쌓아놓게 된 것은 추종자들이 스승에 대한 예의를 너무 높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고목은 저절로 고목이 되어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모여야 하고 갖은 풍파에 시달려보아야만 고목이 되어질 수 있다.
그것이 정적인 삶이든 동적인 삶이든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고목이 되어진다.
양석현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을 배제하고 닿지 않을 이야기만 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청아당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을 말씀해주시니 마음에 달리 다가오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정을 나누는 세상이야 말로 사람사는 세상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생각하는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살아가듯이 마음이 있는 대로 마음의 작용인 정을 따라 사는 것이 살아있는 동안의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신을 대할 때도 마음의 정을 가지고 주고 받는다면 사람들에게 보다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2004/10/31
청아당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가야 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00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