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중용의 道

청아당 2008. 9. 28. 20:50

중용의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자 불행한 일이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쪽으로 밖에는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손을 놓고

자연을 즐겨보아라!

무한하게 다가오는 우주가 다 제 것인 양

충족감을 느끼지만

뒤돌아서면

손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살아생전 치열한 현실 속에서 몸으로 부딪힌 삶이나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한 삶이나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일신이 편안하면 그것으로 족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게 살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

치열한 현실에 서있는 사람이나

홀로 수행에만 전념하는 사람이나

다 같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도록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다음 생을 준비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다 같은 사람인 것이다.

아니 다 같은 생활을

한 울타리 속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사람이 살듯이

그렇게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포용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너와 나의 구분을 없애는 경계선이자

나눔의 장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주며

중용의 를 이야기할 때

홀로서기를 할 수 있고

중심을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

어떻게 보면 편협된 생각 같지만

그래도 중심을 잡을 수 있어 좋은 것이다.

초행길에 한쪽으로 잘못 들어 갈림길에서 헤매는 것보다는

이미 두 곳을 다녀온 중용의 가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길은 다녀본 사람들만이 느끼는 곳이다.

수없이 많은 길을 다녀본 뒤에라야

길이 길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길 위에서 길을 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분명히 길인데도 또 다른 길을 물으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처럼

그 끝이 예약되어져 있지 않은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야할 길인 것이다.

끝이 보인다는 것은

생의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면

더 이상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기쁨도 슬픔도

논해서 무엇에 쓸 것인가?

중용의 는 처음 가는 길이 아니라

이미 다녀온 길인 것이다.

인생 50만 넘으면

서로가 주고받을 말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 자체가 이고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죽음을 앞둔 노인 앞에서 인생을 논할 수 없듯이

중용의

하늘을 감싸고

바다를 감싸고

땅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2008928일 일요일

 

중용의 를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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