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감
함께 산다는 것은
함께 느낀다는 것이다.
생각도
느낌도
같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심오한 철학적인 사유도
그리고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도
결국은 같은 느낌으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깨닫는 사람의 개성과 경험에 따라
표현방식은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결국은 같은 느낌으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가끔씩 깨우침에 서투른 사람들 중에
다른 사람들의 언어를 빌려와서
흉내를 낸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만이 가장 진실 되고
믿을만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깨달은 사람들은 거짓되고
위선자라고 말한다.
깨달음을 깨달음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거짓되고 위선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에 얽매여
깨달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삶은 현실이고
호흡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허공에 매달아 놓은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몰라도
깨달음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숱한 사람들을 보아라!
누가 깨닫고 누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던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말로 깨닫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아보이지 않는가?
깨달음은 마음으로 깨우치지만
삶은 몸으로 깨우쳐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둘의 조화가 현실에서 이루어졌을 때
깨달음의 가치는 빛을 발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떨어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삶은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음 속에 삶이 있고
삶속에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묘한가?
떨어질 수 없는 부부의 인연처럼
삶과 깨달음이 한 몸이라는 사실이
이미 꿈속에서도 보아왔고
현실에서도 보아왔던 꿈이 아닌가?
하늘이 내린 지독한 시련을 견뎌내야만
이러한 사실들을 깨우칠 수 있다는 사실이
얄밉기는 하지만
손만 내밀면
가까이에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누가 먼저 깨달았다고 해서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을 나무랄 사람들이 있겠는가?
다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갈 가족인데
함께 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춰야할 판이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서로에게 격려가 되어 질 수 있는 말 한마디면
충분한 것이다.
서로를 헐뜯고
자신만 잘 낫다고 떠들어보아야
격만 낮춰질 뿐이다.
사람 사는 일은 다 비슷비슷하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다.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는가?
아무리 잘난 자연도
말 한마디 없이
우리 곁을 지키고 서있는데
침묵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침묵이 있기에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자연이 자신의 신비를 말한 적이 있던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지 않던가?
어떻게 보느냐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던가?
우리가 말한다고
자연이 변해지던가?
원초적 느낌이 변하던가?
같은 느낌으로 산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자연이 말없이 서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논리는 말하는 사람에 의해 변할 수 있지만
자연은 자신의 모습을 지키지 않던가?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면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참인 것이다.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살다보면 경험을 통해 같은 생각으로 결론이 내려질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은 같은 생각을 하며 산다는 뜻이다.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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