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카드
가장 이상적인 여성과의 관계가 깨달음이다.
처음 느꼈고
처음으로 설레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원초적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처음으로 우주적인 생각을 얻는 일이다.
부처를 짓밟고
절대자조차 짓밟을 수 있는
고요의 극점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
숱한 현상을 넘어
근원적인 무의 세계에서 생각해 보아라!
그 무엇이 새로울 것이 있겠는가?
단지, 보이는 것이 전부요
삶의 장이 참 삶일 뿐이다.
처음부터 정신과 물질은 하나였고
우주와 내가 하나였다.
그 모든 물질을 극소립자로 환원시켜 보아라!
너와 나의 구분이 생겨날 수 있는지를…
처음부터 한 몸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가?
한 몸이자 모두가 하나라면
한사람만 깨달으면
모두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문제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깨달으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처음부터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면
꽃은 꽃으로써
존재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굳이 이름을 지어
꽃을 분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름 지어진 꽃들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러워 보이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뒤돌아서면
본래부터 한 몸이자 하나였기에
굳이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으로 달리다보면
뒤돌아보는 일이 서투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은 앞으로 달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이다.
자신을 뒤돌아보기 위해선
무언가 획기적인 충격요법을 쓰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명상이요,
호흡법인 것이다.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기에 이만한 수련법이 없기 때문이다.
외부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내면의 세계에선 한계를 찾을 수 없기에
무한한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나타난 조그마한 현상들에 귀기우리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우주에 구멍을 뚫을 정도의 집중력이 생겨나고
정성과 노력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길을 수없이 돌면서
소우주인 내면에서
결국 자신을 찾게 된다.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곧 우주와 교감한다는 것을 뜻한다.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손길에 인도되어져
빛의 폭풍 속에서
궁극적인 근원의 세계로 인도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 느끼는 중에
자신을 깨우치게 된다.
깨우친다는 것은
밖에 있는 스승이 대신 깨우쳐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깨우치는 것이다.
똑같은 영상을 보고도
느낌이 다 다르듯이
우주를 뒤흔들만한 느낌을 잡아내는 것이
깨우침의 핵심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수련에 임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순간일지라도
억겁의 세월을 압축해놓은 집중력으로
하늘도 감동할 정도로 노력하다보면
원초적 신비의 문은 열리게 되어져있다.
깨달음은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이 전부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가공하지 않은 천연의 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풍요로운 물질의 세계이든
무한한 정신의 세계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현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보아라!
정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많은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행복감이 그렇고
최고 경영자나 대통령의 지위에 있을 때 그러하지 않은가?
그리고 숱한 사람들이 정해 논 목표에 도달했을 때 그러하지 않은가?
하지만 정상에 오르고 난 다음 느끼는 행복은 어떠한가?
허탈하지 않은가?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가?
신비는 단 한번이면 족하지 않은가?
인생은 그런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
최고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깨달음의 세계를 선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변하는 마음을 잡아보겠다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달랠 길은 오로지
깨달음밖에 없기에
고행을 즐기고
수행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되고 가당치도 않는 일인가?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너도나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가?
우주적인 시야가 필요한 것이다.
비록 세속에 부딪혀 남들처럼 똑같이 살지만
생각만큼은
우주를 껴안고 싶은 것이다.
좀 더 고상하고
좀 더 잘난 척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말한 데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삶에 묻혀 의미 없이 살기보다는
우주의 원리를 캐고
삶의 원리를 캐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전체를 아우를 수 있지만
행동은 부분에 치우치기에
깨달음으로
우주를 껴안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생각인가?
남들과 똑같이 살면서
마음만이라도
우주를 껴안으며 살려는 의지가 대단하지 않은가?
결국
너와 나의 삶이 한통속이자 별다를 것이 없지만
구분을 지어
달리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함께 달리면서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허둥대는 모습보다는
여유 있는 모습이 좀 더 안정감을 주듯이
편안하지 않은가?
삶은 이런 것이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일에 싫증을 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사는 것이다.
어쩌면 선각자들이야말로
그 원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절대적인 지위에 머물 수 있기에
너도나도
절대적인 지위에 탐을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에게나
절대적인 지위를 함부로 내어주지는 않는다.
고통의 깊이를 맛본 사람에게만
아니 고통과 시련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족을 묶고
고통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무수한 덫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치사하고 간교한가?
쉽게 내어줄 수 있는 깨달음을
하늘이 내린 시련을 극복한 사람에게만 주려는 의도는
알게 모르게
하늘도 편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하늘은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극한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두처럼 던져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하늘이 정해 논 시험을 통과해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리는 마지막 카드이자
삶의 의문을 풀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모든 것을 놓고
끝자락 삶 속에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좌절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면
삶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겠는가?
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하늘이 우리에게 내리는 마지막 카드를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