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사유의 끝을 밝혀내는 예단자

청아당 2025. 1. 30. 17:37

사유의 끝을 밝혀내는 예단자

 

무아(無我)나 공()의 끝을 손쉬운 방법으로 알아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특권층의 고유한 영역으로만 치부되던 시절에서 특권을 누려오던 시절이 보편화돼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의 진리인 그 끝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감각과 통찰력으로 그리고 영적 경험을 통해 수련의 최고봉에서 우주의 세계를 탐사했다면 지금은 과학과 철학이라는 칼끝으로 우주의 속살을 아낌없이 파내다 보니 과거의 방법인 사유의 끝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과학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낸 것만은 확실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발생한 사실(내란죄)을 두고 선과 악으로 나뉘는 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는데 이를 "공존의 기술" 또는 "공존의 규칙"으로 예단해나간다면 손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상생과 화합은 소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에 공존의 기술이나 공존의 규칙을 기반으로 길을 터 나간다면 충돌하는 과정속에서도 안전한 낙하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종교의 핵심인 믿음은 신이나 하나님조차 소원자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는 것은 아니기에 목사나 스님들조차 손사래를 치는 것은 다 이유 있는 믿음에서 나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믿음 하나로 그 모든 것을 치유 받거나 소원성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에 상응한 대가 없이는 함부로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 신의 가호가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신의 은총을 받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사유의 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삶이기에 그렇다.

 

과학도 중요하고 철학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먹고 살아나가야 하기에 그렇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과거에서부터 추구해온 과학과 철학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재가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의 삶도 현실적인 삶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톱니바퀴가 굴러가려면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작용해야 하는 미묘한 동작이나 작용이 필요함을 느낄 수가 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이자 현재의 나이기도 하다.

 

수없는 윤회(굴레)를 통해 나아가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는 모두가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더욱 그렇다.

 

물체든 사람이든 또는 사유이든 환상이든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돼 있기에 그렇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리지나 연근지로 이어져 있기에 한 호흡 속에서 한솥밥을 먹을 수밖에 없다.

 

싫다고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싫다고 자기 신체 일부를 잘라낼 수 없는 일이라서 더욱 그렇다.

 

2025130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