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우주적인 생각
15장 공존하는 선악
공존하는 선악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14장 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공존하는 선악은 마음을 다루는 학문이며 마음의 속성이나 기질을 알지 못하고서는 공존하는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마음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져있음을 강조한다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마음은 그 모든 바탕이 되고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음만 잘 조절할 수 있어도 삶의 질이 높아지며 성자들이 꿈꾸는 세상을 완성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이론은 이미 맹자나 순자가 주장한 시대나 그 이전 시대부터 존재할 수 있다.
다만 체계적으로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이론을 정리해놓지 못했을 뿐이지 지금에 와서 새롭게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이름으로 이론을 내세운다고 특별할 것까지야 없다고 본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이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인 현상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이름만 붙여준 것뿐이다.
지금도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에 대해 고민하며 고민 아닌 고민을 해오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미력하나마 해답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자신만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천국과 지옥의 간격을 좁혀 줄뿐만 아니라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안전장치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주장하는 공존하는 선악으로 신조차도 해결하지 못한 그 모든 일을 대신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잣대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렇게밖에 흘러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나 우주적인 행보는 신들조차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이기에 보다 큰 생각으로 보다 큰 안목으로 우주적인 행보를 걷자는 데에 큰 의의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공존하는 선악으로 그동안 고민해온 인간적인 고뇌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죄를 짓고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이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것처럼 몰아가는 공존하는 선악이 싫을 때도 있지만 누구나 죄를 짓지 않고서는 이 지구상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기에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것처럼 몰아가는 공존하는 선악일지라도 고맙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공존하는 선악은 중용을 중시한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심 잡힌 성자들의 행동처럼 공존하는 선악은 천칭이 되고 삶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미 밝혔듯이 공존하는 선악이라 할지라도 악보다는 선을 선호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다.
이것은 인과응보라는 측정기준에 의해 그 대가를 반드시 받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의 측정기준인 7:3의 비율을 보아 잘 알겠지만 사람들은 천성으로 악보다는 선 쪽으로 기울기를 더 좋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악보다는 선이 많은 세상이 있기에 사람들은 힘든 가운데서도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안정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다운 일로 느껴지듯이 공존하는 선악은 그 어느 곳에 던져놓아도 자생하는 민들레처럼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이미 기존의 고민을 정리해놓은 완성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랜 세월동안 공존하는 선악의 길목에서 고민하고 해결할 수 없었던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에 노출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고뇌를 개인적으로 어떻게 하면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30년 가까이 고민해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대했을 때 이 두 가지 설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보다는 이 둘의 관계를 중용의 위치와도 같은 중요한 위치에서 해석해야함을 30여년 전에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를 명쾌하게 정리하기란 실로 쉽지 않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였다고 본다.
지금에야 비로소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명제로 정리하게 됨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물론 3년 전 2004년 4월에 <우주적인 행보 속에서( http://www.yhedang.com/cgi-bin/technote/read.cgi?board=질문과답변&y_number=1266&nnew=2 )>라는 제목으로 잠깐 언급하고 6월에 <깨달음과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사후세계( http://www.yhedang.com/cgi-bin/technote/read.cgi?board=질문과답변&y_number=1295&nnew=2 )>라는 제목으로 정리함으로써 공존하는 선악의 이론적 기반을 다졌다고 본다.
하지만 계속해서 공존하는 선악의 보다 더 극명한 이론적 기반을 정리해야하겠다는 생각 하에 지내왔지만 오늘에야 큰 틀을 유지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존하는 선악에 대한 보다 더 세밀한 이론을 준비해나가야 하겠지만 큰 틀을 잡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질 때 가장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우리는 항상 이 둘의 경계에서 생활할 때가 많다.
성자들이 선만을 위한 삶을 강조해도 이론과 실제상황은 다르듯이 현장에서 덫에 걸린 짐승이 몸부림치듯 이 둘의 경계에서 헤맬 때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이제부터 이 공존하는 선악을 들고 우주를 향해 마음껏 달려보자!
그 끝이 어디라도 좋을 만큼 힘있게 달려보는 일로 나아간다면 당신의 미래는 결코 암울하거나 어느 기준에 짓눌려 고독하게 지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동안 숱한 잣대에 짓눌려 “하지마라” 라는 덫에 걸려 생활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자신은 잘못된 인생을 산 것처럼 자책하면서 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눅이 들어 포기부터하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부터는 자신감을 갖고 한 번의 실수 또는 두 번 세 번의 실수가 자주 발생하더라도 선을 향한 집념으로 나아간다면 당신은 분명 선택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듯이 한번 강하게 뿌리를 내린 자신감은 이 우주를 들었다 놓을 만큼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자, 마음 놓고 공존하는 선악을 들고 달려보자! 그것도 힘차고 우렁찬 목소리로 앞을 향해 달려보자!
결코 실망할 수 없는 공존하는 선악의 기준에 따라 삶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보자!
당신의 미래가 밝고 아름답게 빛나듯이 공존하는 선악 또한 밝고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1. 성선설과 성악설
목적지를 인천에서 부산을 지정해놓고 출발하면 내비게이션(navigation : 항해, 항행; 비행, 항공.)은 최단거리를 계산해내며 가장 빠른 인터체인지와 고속도로정보를 알려준다.
그리고 혹시라도 운전자의 예측할 수 없는 지리적 변동에 의해 다른 곳으로 운전대를 돌린다면 내비게이션은 끈질 지게 운전자를 설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나침반이 항상 북쪽을 향하도록 설계되어있는 것처럼 내비게이션은 어떤 방향으로 차가 움직여도 부산을 향한 안내 설명이 뒤따라온다는 점이다.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계획을 변경하여 그에 맞는 계획을 수정할 수 있지만 전자적으로 개발된 기계는 한번 입력된 정보로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내기를 바란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바로 이러한 맹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목적지를 정해놓은 후 그곳으로 출발해야만 하는 내비게이션처럼 성선설과 성악설의 기준은 이원론적 기준으로 편 가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세워 논 기준에 맞아들어 가면 그것이 옳은 것처럼 끌고 가는 일은 한편으론 올바른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기준이 변경되면 무용지물이 되어 지거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학계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기론을 놓고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으로 이론적 배경을 놓고 분리되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를 놓고 둘로 나누지 않으면 안심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이든지 옳고 그름을 놓고 예리한 칼로 몸통을 잘라내듯 하나를 둘로 나누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체면과 도덕심을 내세우는 선한 지킬 박사와 사악한 마음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는 악한 하이드 씨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일이지만 동일한 몸에서조차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성선설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선한 면이 많은 것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악한 면이 많은 것 같은 사건을 자주 접하게 된다.
스포츠 정신에 입각한 운동선수들이지만 결승전을 앞두고 치열한 몸싸움을 하는 축구선수들이나 승자와 패자의 갈림길에 서있는 선수들의 양면성은 그야말로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라 말할 수 있다. 더구나 세계적인 월드컵 같은 축구경기는 양극화 현상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끔씩 익명의 네티즌들의 악성댓글로 인해 유명 연예인들이 죽는 일까지 발생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악을 즐기는 경우도 더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싸움을 즐기는 경향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서로 말려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편 가르기 식 싸움에 재미를 붙이듯 경기장에서 동서로 나뉘어 자신의 편을 응원하듯 뒤에서 남모르게 응원하는 경우를 삶의 현장이나 인터넷을 통해 자주 발견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성선설과 성악설처럼 둘로 나누어서 해석할 수 없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자주 벌어지다보니 이 둘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 관점과 견해에 따라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더라도 세상의 이치는 처음부터 하나가 둘로 나누어지는 원칙위에 성립되어져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국가 간의 전쟁인 미국과 이라크전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일이지만 언제든지 승자가 옳은 것처럼 묘사되거나 정당화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강자들은 뻔뻔함과 대범함 그리고 강한 승리 욕에 불타오르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분명 강자나 승자의 잘못이 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적이 합당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패자위에 군림하거나 자신의 엄청난 잘못을 덮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또한 고구려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한나라 철기군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는 아군을 보면 무기력함과 더불어 가슴 아픈 일이 되지만 주몽의 지혜로 철기군의 약점을 찾아내어 철기군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한나라 태수를 주몽이 죽일 때 그 통쾌함이 하늘을 찌르는 듯한 쾌감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도 이렇게 서로의 목적과 견해에 따라 상반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로의 입장에서는 패자위에 군림하기를 바랄 것이다.
단지 아군이라는 이름하에 적군이 무참하게 죽는 장면이 통쾌하게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사람을 죽이는 일인데도 그러한 일들이 정당화되어지고 합리화되어지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힘의 균형이나 국가 간의 균형은 제3자의 개입으로 여전히 복잡하게 유지 발전되어져가고 있지만 공존하는 선악은 과거의 적대국조차 우호국으로 바꿔놓는 힘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이나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은 분명 옳고 훌륭한 이론이지만 이 둘의 조화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톱니바퀴 없는 거대한 기계와도 같은 모양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늘 공존하는 선악에 노출되어져있는 삶의 방식에서 어느 한쪽만을 내세운다면 선악의 기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불필요한 잣대에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을 것이다.
기준은 이론적 기반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훌륭한 일들을 해내고 있지만 실천은 반드시 그와 일치하지 않거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듯이 성선설과 성악설의 조화는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2. 맹자의 성선설
이해를 돕기 위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그리고 악의 진리와 선의 진리를 먼저 살펴본 후 계속해서 새로운 내용을 살펴보자.
맹자의 성선설에 관련된 내용은 양쩌보의 《맹자의 성선론 연구》를 통해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양심본심은 성선의 근거이듯이 이미 선한 마음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고 나의 고유한 것이라면 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것은 성선론이 반드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맹자는 악이 발생하는 것이 다만 자기의 양심본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즉 윗 문장에서 말한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거나 ‘그 재질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상고시대에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그 어버이가 죽자 들어다가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에 거기를 지나가는데 여우가 파먹고 파리가 빨아먹고 있었다. 그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곁눈으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였다. 땀을 흘리는 것은 남들 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들것으로 흙을 담아다가 덮었다.’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어버이 시신의 비참한 상태를 보게 되면 바로 돌아가서 들것을 가지고 와서 시신을 묻는다. 본심인 불인(不忍)은 근거이고 돌아가서 시신을 묻는 것은 결과이니 양심본심이 있으면 반드시 진실로 선한 성이 있다.
이러한 도리는 맹자가 「진심(상)」제21장에서 더욱 간결하게 말하였다.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심에 근본하니 그 생기있는 안색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하며 사지에 베풀어져서 사지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그의 심에 근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오는 안색은 순수하고 온화하여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반영되어 사지에 이르니 사지가 말하지 않아도 다만 행동거지에 따라 다른 사람이 한눈에 환히 알 수 있다. 때문에 반드시 내재하는 인․의․예․지의 심이 있어야 비로소 외재하는 군자의 성이 있을 수 있고 내재하는 인․의․예․지의 심이 있어야만 반드시 외재하는 군자의 성이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을 수 있다. 즉 맹자는 실제로 이미 일종의 새로운 도덕본체론(道德本體論) - 본심본체론(本心本體論)을 창립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자에서 내재하는 것은 심이고 외재하는 것은 성으로 양심본심을 포용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타나는데 그 나타난 것이 바로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심은 선의 근거이고 성의 원두이다. 따라서 심이 없으면 선도 없고 성도 없으니 결국 모든 근거는 하나의 양심본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맹자의 양심본심을 본심본체라고 칭한다. 이것은 첫째, 양심본심이 성선론 속에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고 둘째, 양심본심의 도덕본체론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데 있다.”
《맹자》 「진심(상)」 제15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양능(良能)이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은 양지(良知)이다. 갓난아이는 그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가 없고 성장하여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인이요, 나이 많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의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천하에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양쩌보의 《맹자의 성선론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성선론에 관하여 맹자는 많은 논술이 있지만 직접 정면에서 입론한 것은 위에서 말한 몇 가지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술은 형식논리상에서 매우 많은 결점과 불합리한 점이 존재한다. 이것은 주로 다음의 두 방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개념이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주로 자연본능으로 사회속성방면을 논증하는 데에 표현된다.
둘째, 논증조건이 충분하지 않다. 비록 친정․동연․불인이 성선을 논증할 수 있는 조건일지라도 이러한 조건을 구비하면 바로 사람의 성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은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고 필요조건이다.
이로써 보면, 맹자가 친정․동연․불인으로 논한 성선은 물론 성선론을 위하여 정면적인 증명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주로 각종의 경로를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양심본심에 대한 인식을 유도하였다.
총괄하면, 맹자는 특히 생명체험(生命體驗)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기체내의 양심본심에 대한 깨달음을 계발할 것을 중시하였는데 비록 이러한 방법이 결코 형식논리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확실히 계발작용을 유도하여 사람들로 하여 결국 인․의․예․지가 나의 고유한 것임을 알게 함으로써 성선론을 믿게 하였다. 여기에 바로 맹자가 생명체험으로 성선을 논한 심오한 뜻이 존재한다.
다만 형식논리에만 의지하면 성선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몇몇 학자들은 맹자의 성선론 입론이 형식논리에 맞지 않는 곳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성선론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성선론의 본뜻 및 그 방법론적인 의미를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맹자 이후에 적지 않는 사람들이 논리상에서 성선론의 ‘결점’을 간파하였고 특히 근대․현대 이래로 형식논리의 발전에 따라 성선론의 논리적인 결점이 더욱 폭로되었다. 그렇지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성선론이 지금까지 이것에 의해 참으로 반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앞으로도 결코 반박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데 있다. 그 원인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비록 성선론의 형식논리가 가지는 논리적인 모순을 찾아낼 수는 있을지라도 자기에게 ‘선재적’인 그러한 양심본심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선론의 발명은 ‘자반(自反)’을 떠나지 않는다. 맹자는 자사학파의 영향을 받아 반구제기(反求諸己)를 잘하였으니 ‘자반’에 의지하여 자신에 내재하는 양심본심을 깨닫고 자기체내의 끊임없이 생겨나서 그치지 않는 도덕의 근원을 파악하였는데 이것이 성선론 발명의 직접적인 계기이다. ‘자반’이 없으면 성선론의 발명도 없다.
성선론의 자반방법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장점이 있는데 첫째, 간략하여 행하기가 쉽다는 것이고 둘째, 채찍을 가하면 강해진다는 것이다.
첫째, 간략하여 행하기 쉽다 - 생각하여(思) 반성하고(反) 반성하여 진실해지면(誠) 사람들은 양심본심의 지도에 따라 인의를 달성하고 도덕을 성취할 수 있다.
둘째, 채찍을 가하면 강력해진다 - 성선론의 자반방법이 가지는 두 번째의 장점은 채찍을 가하면 강력해진다는 것이다. 채찍을 가하면 강력해진다는 말은 주희에게서 취한 것이다.
성선론 자체에서 분석하면, 채찍을 가하면 강력해진다는 것은 ‘절기자반’할 때에 양심본심이 명령을 내리면 사람들로 하여 반드시 그것의 요구에 따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총괄하면, 성선론의 기초는 양심본심이고 양심본심은 사람들이 윤리도덕의 문제를 처리할 때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성선론의 방법은 자반방법, 즉 자기의 도덕본체 - 본심본체를 반성하는 것이다. 자반방법은 성선론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자반방법이 없으면 성선론은 성립할 수 없고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3. 순자의 성악설
순자의 성악설에 관련된 내용은 양쩌보의 《맹자의 성선론 연구》와 윤무학 《순자》를 통해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먼저 양쩌보의 《맹자의 성선론 연구》에 나와 있는 순자의 성악설에 관련된 글을 살펴보자.
“맹자 이후 순자는 예의로서 국가를 다스리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선론에 만족하지 않고 성악론(性惡論)을 창시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예의를 학습하는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공자의 심성지학 속에서의 지성방면을 극대로 고양하여 후세의 지성을 중시하는 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공자의 심성지학 중에서 인성의 방면을 내버리고 결국 한 쪽에 치우쳤기 때문에 후세에 혹평을 받았다.
순자는 성악론을 주장하였지만 그의 논리기점은 성(性)에 대한 해설에 있다. 순자는 인생의 자연한 상황으로 성을 삼았다. ‘태어나면서 그러한 것을 성이라 한다.’, ‘성은 본래의 자질이 소박하다.’,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지만 사람에 있는 것을 성이라고 한다.’ 생의 자연한 상황을 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생이 자연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이와 같은 소박한 자질이고, 또한 선천적인 소박한 자질 때문에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는 것이다.
순자는 생의 자연한 것으로 성을 삼았으니 만약 구체적으로 나누면 두 가지의 다른 지적이 있다. 하나는 신체기관의 욕망을 가리킨다.
‘마치 눈이 색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며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욕을 좋아하며 사지가 유쾌하고 편안함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은 모두 사람의 성정(性情)에서 생겨난 것이고 느껴서 자연하고 일삼기를 기다리지 않은 이후에 생겨나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기를 원하며 고단하면 쉬고 싶고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는 것이니, 기다려서 그러한 것이 아니므로 우․걸도 같다.’
다른 하나, 즉 성이 두 번째로 가리키는 것은 신체기관의 능력이다.
‘눈이 검고 흰 것이나 아름답고 추한 것을 분별하고, 귀가 음성의 맑고 탁한 것을 분별하며, 입이 시고 짜고 달고 쓴 것을 분별하고, 코가 향기와 비린내를 분별하며, 피부가 차고 덥고 아프고 가려운 것을 분별하는 것도 사람이 항상 태어나면서 있는 것이니, 기다려서 그러한 것이 아니므로 우․걸도 같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성악론을 토론하지만 욕망의 일면에만 관심을 같고 능력의 일면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전면적이지 못하다.
비록 순자가 논한 성에는 두 가지의 가리키는 것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성악을 논할 때에는 도리어 두 가지의 도약이 있다. 하나는 능력으로 성악을 논하지 않고 욕망으로 성악을 논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 자체로서 성악을 논하지 않고 욕망이 그 발전에 맡긴 결과로서 성악을 논한다는 것이다.
이것에서 맹자와 순자가 벌인 논쟁의 핵심이 결코 성의 선악에 있지 않고 결국 무엇으로 성을 삼느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는 사람이 사람되는 도덕특질로서 성을 삼았기 때문에 성선(性善)을 주장하였고, 순자는 사람의 욕망발전의 결과로서 성을 삼았기 때문에 성악(性惡)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사물의 차이를 참고하면 관찰각도도 달라진다. 하나의 사물에는 여러 종류의 다른 속성이 있을 수 있는데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에 윤리심경이 있고 식색욕망도 있으니 만약 전자로서 입론하면 성이 선하게 되지만 후자로서 입론하면 성이 악하게 된다. 성선과 성악은 실제로 서로 같은 글자 내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가지의 이론이다.
둘째, 사물의 다른 속성은 다만 관찰각도가 서로 다른 까닭으로 사물의 한 방면의 속성으로 다른 한 방면의 속성을 배척할 수 없다. 어떤 한 사물에는 마땅히 자신의 근본적이거나 혹은 주요한 속성이 있는데 설령 이와 같을지라도 사물의 다른 속성으로 입론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선론과 성악론은 다른 문제에 직면하여 세워진 두 가지의 이론이니 이것으로 저것을 논박하거나 저것으로 이것을 논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의미도 없이 분쟁 속으로 빠져들게 될 뿐이다.”
이번에는 윤무학 《순자》에 정리되어져있는 순자의 성악설에 관련된 글을 살펴보자.
“사람의 본성은 악하며 그것이 선한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로움을 좋아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것이 없어진다. 나면서부터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잔적이 생기고 충과 신이 없어진다. 나면서 이목의 욕망을 갖고 있어서 소리와 색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음란이 일어나고 예의와 문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정을 따른다면 반드시 쟁탈로 나아가게 되어 분수를 무시하고 이치를 어지럽히는 데로 합쳐져 난폭함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반드시 장차 사법의 교화와 예의의 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사양으로 나아가고 문리에 합치되고 다스림으로 귀결된다. 이것으로써 살펴본다면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에 넣거나 불에 쬐어 바로잡은 연후에 곧게 되고, 무딘 쇠붙이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 날카롭게 된다. 이제 사람의 악한 본성은 반드시 스승이나 법도를 기다린 후에 바로잡히며 예의를 얻은 후에 다스려진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답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는 사람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본성과 인위의 구분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무릇 성이란 선천적인 것으로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는 것이다. 예의란 성인이 만든 것으로 사람이 배워서 능할 수 있으며 일삼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배울 수 없고 일삼을 수 없으면서 사람에게 있는 것을 성이라 하고, 배워서 능할 수 있고 일삼을 수 있으면서 사람에게서 완성되는 것을 인위라고 한다. 이것이 성과 인위의 구분이다.”
4. 악의 진리와 선의 진리
앞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선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악의 진리와 선의 진리에 대해 살펴보자.
홍태수 교수께서 진리를 집대성해놓은 《진리를 아는 법》을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진리가 악의 진리이며, 인간을 완성시키는 이치가 있는 진리가 선의 진리이다
“진리의 혼돈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악의 현상의 이치인 악의 진리와 선의 현상의 이치인 선의 진리를 구분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진리하면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주고 암흑에서 헤매는 사람을 광명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것도 수학적 현상의 이치로서 진리가 되고, 칼로 찌르면 피가 난다는 것도 생리학적 현상으로 하나의 진리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도덕적 진리가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처럼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적 진리와 좋은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도덕적 진리의 구분을 떠나서 진리를 선과 악으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도덕이다 비도덕이다를 구분 짓는 것이 바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지금까지 ‘진리란 무엇인가?’할 때 진리는 인간을 유익하게 하고 인간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참된 이치로 알고 있었는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받은 것만큼 갚는다고 하는 복수의 원리도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게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니 기독교의 대표적인 진리라 할 수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보다는 ‘원수는 죽여야 한다’, ‘원수는 그에 맞는 보복을 해야 한다.’가 논리적으로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 원수란 자기에게 피해를 준 대상이기 때문에 그만큼 피해를 줌으로써 형평을 유지하는 것이 공정하기에 회교권에서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면서 나쁜 말을 한 자에게는 혀를 뽑아 버리고 도둑질한 손을 잘라 버리며, 못된 짓을 하게 한 눈을 뽑아 버리게까지 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진리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되므로 진리는 진리이되 악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선의 진리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게 아니라 악을 선으로 메우는 현상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현상적으로 공정성은 이루어졌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대를 악인으로 고정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상대 때문에 악인이 되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가 욕설을 퍼붓는다고 똑같이 욕으로 응수하면 상대만이 아니라 자기 또한 욕쟁이가 되고 상대가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서 같이 주먹을 휘두르면 상대만이 아니라 자기 또한 폭력배가 되고 상대가 가족 중의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서 자신 또한 상대를 죽이면 살인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받은 것만큼 갚는다고 하는 것이 공정성이며 진리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악을 받았다고 하여 악으로 갚는 것은 복수의 진리로서 악의 진리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진리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선의 진리여야 하는 것이다.”
5. 공존하는 선악의 기본원리
앞에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그리고 홍태수 교수의 악의 진리와 선의 진리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공존하는 선악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봐야 공존하는 선악의 기본취지를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공존하는 선악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선과 악의 경계에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경계에서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아우를 수 있는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단어를 찾아내야할 것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새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라 기존의 원리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진 단어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법도 문제가 있어야만 법이 만들어지듯이 원리가 있는 곳에 이론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목적과 행위에 따라 공존하는 선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선과 악을 구분할 때 선은 착함과 평화를 상징하고 악은 나쁨과 전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선은 착함을 말하고 악은 나쁨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말하고자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선과 악을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둘의 관계는 음양의 관계처럼 표리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양의 관계처럼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어 지듯이 선이 악으로 변할 수도 있고 악이 선으로 변할 수도 있는 음양의 조화로 보아야한다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의 기본 입장이다.
지금껏 숱한 세월이 흘러왔지만 음양의 관계가 여전히 건재하며 우주적인 조화를 꾀해오고 있듯이 선악도 음양과 손을 맞잡고 그림자처럼 움직여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어느 한쪽만을 내세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보니 이 둘의 조화를 유심히 살펴봐야할 것이다.
또한 선과 악은 이분법적인 잣대로 바라보아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이중적인 모습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칼을 이용하여 먹기 좋게 난도질한 산 생선회를 먹는 일에 있어서는 자연스러운 일에 해당될 수도 있지만 동물들이 산 짐승을 통째로 잡아먹는 일에 있어서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똑같은 음식을 먹는 일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산 음식을 먹을 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만 다른 동물들이 산 음식을 통째로 잡아먹는 일에 있어서는 전율을 느끼고 있듯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 못하게 하는 사실들이 우리 주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기준으로 선이라고 판단해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악의 행위가 될 수도 있지만 선으로 통하고 있듯이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은 공존하는 선악으로 풀이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마음이 악인데도 불구하고 선이라고하면 선이 되고 선인데도 불구하고 악이라고 하면 악이 되는 것처럼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은 목적과 행위에 따라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은 공존하지만 어떤 때는 선보다 악이 더 적극적인 효과가 클 때가 많다. 선만을 선호하면서 살다보면 좋은 점도 많지만 실제로는 경제적으로 압력을 받게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가족을 구성하면서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지면 아내가 그만한 경제력을 뒷받침해야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며 남모르는 한을 가슴에 쌓아나가야 하듯이 한량 같은 옛날 선비처럼 겉보기에 좋다고 일방적으로 선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양되어져야 마땅하다고 본다.
선은 음적인 면이 많아 부드럽고 겸손하여 자신을 크게 떨치지 못하지만 악은 양적인 면이 많아 강하고 거세며 활동적이기 때문에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선악은 공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음양의 이치처럼 부드러움과 강함으로 존재하고 또 어떤 때는 극과 극을 달리며 접전을 벌이기도 한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선악의 공존 속에서 활발하게 발전되어져 왔다고 본다. 이는 어느 한쪽만을 높이 치켜세우거나 할 틈도 없이 공존하면서 달려온 노고에 어떤 면에서는 크게 치하할 부분도 많다고 본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선악은 손을 맞잡고 달릴 것이다. 그 와중에 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을 좋아하게 되고 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악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성향대로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는 것이 이치인 것처럼 어느 한쪽만을 가장 높이 치켜세울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에 어느 한쪽만을 선호하게 된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혼란에 빠져들거나 무능력한 상태로 전락하여 생명 그 자체를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악을 선택한 사람은 인과응보에 의해 그만한 대가를 치를 준비를 톡톡히 하고 있어야하고 선을 선택한 사람은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후회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6. 인간적인 시스템
음양의 조화가 탄생되어지면서부터 선악은 공존하는 시스템으로 이루어져왔고 우주탄생이전부터 이어져온 순환을 지금에 와서 그만두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성자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내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당당하게 거부할 줄 아는 음양의 관계이기에 선악은 공존하며 끝없이 우주가 사라지고 다시 형성되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져갈 운명이라고 본다. 이는 인간적인 시스템뿐만 아니라 우주를 비롯하여 음양의 존재가 탄생되어지면서부터 출발한 일이기에 지금에 와서 공존하는 선악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공존하는 선악을 무시하고 선만을 선호해온 성자들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만 공존하는 선악을 지금에 와서 멈추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중의 하나라고 본다. 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순간순간 선악의 경계에서 순환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에 성자가 아니라 막 태어난 아기라 할지라도 공존하는 선악을 벗어날 길은 없다고 본다.
자신은 선만을 행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선악의 양면성은 성자들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선의의 경쟁을 하던 악의의 경쟁을 하던 둘 중의 하나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승리자와 패자의 관계는 선악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선악을 확대해석해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선악의 양면성에 걸리지 않은 것이 없다.
성자들이 모두 선한 일만 하거나 해놓고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들도 직접적으로 공존하는 선악의 굴레 속에서 생활을 해놓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선만을 행하라고 한다면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까지 성자들이 주장해온 데로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힘든 상황에 처해지는 것을 보더라도 성직자나 깨달은 사람들이 많더라도 모두가 깨달은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이는 윤회사상과 같이 숱한 생을 돌고 온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능력이나 과거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기존의 생각과 행동습관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다시 교육받거나 신입생처럼 공부해야하는 커다란 문제가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백지상태의 삶속에서 늘 새롭게 출발해야하는 인생역정은 모든 고난을 이겨낸 성자들처럼 또는 성직자들처럼 살아가는 일이란 참으로 힘든 일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인간적인 시스템이 선만을 행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형성되어져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자꾸만 선만을 강조한다면 공존하는 선악은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강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이 좋기에 선을 선호할 수는 있어도 의도적으로 선만을 행하라고하면 거부감부터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부드러운 선만을 행하고 강한 악을 멀리하게 된다면 음양의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아무리 선한 사람일지라도 수시로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져있는 상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그대로 인정하고 현실에 맞는 논리를 펴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처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룰 수 없는 것을 고집하며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를 펴나간다면 당하는 사람은 곤혹스럽거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선만을 강조해온 성자들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검증되지도 않은 불명확한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준 후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성직자나 수행자들을 위해 따로 호구책을 마련해놓은 것은 어떤 면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할 것이다.
본래의 의도와는 변질되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호구책을 마련해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물론 직업에는 귀천이 없기에 종교적인 직업을 통해 호구책을 이어간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뜻하지 않게 새로운 직종이 생겨난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7. 공존하는 선악은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성선설이나 성악설과 같이 우리가 굳이 선악을 구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러한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구분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상태에 속해있는 어중간한 선악이나 이 둘을 아우르는 중용의 위치에서 다만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울 뿐이다.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말이 새롭게 탄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껏 그렇게 행위 되어져온 상태에 대해 이름만 붙여준 것뿐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인위적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성선설과 성악설이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다만 직업과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변수를 갖고 공존하는 선악의 비율에 노출되어질 뿐이다.
우리는 가끔씩 인간의 편리한 해석으로 기준과 표준을 내세우며 자연의 현상들을 측정해오고 있지만 한편으론 오류투성이의 모순 속에서 살고 있기도 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그러한 모순 속에 잠들어있던 것을 깨워 세상 밖으로 내보낸 것에 불과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성선설이나 성악설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며 보다 깊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8. 선천성(순수의식 및 선험적)과 후천성(경험적)
선천성은 칸트의 순수의식과 선험적으로 대별될 수 있고 후천성은 경험적으로 대별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선천성은 순수의식이나 선험적 경험으로부터 더 먼 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대별하자면 그 의미와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험적인 경험을 뛰어넘어 순수의식을 지향하는 선천성이든 경험을 중시하는 후천성이든 작용과 행위에 따른 결과에 의해 공존하는 선악은 존재하고 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려면 유전적인 연결고리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부모이고 그 다음이 조부이고 또 그 다음이 증조부일 것이다. 계속해서 선대로 올라가면 자신이 존재하기까지에는 숱한 생들의 혼합체로 이루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가지에서 분기되어져 나왔는가에 상관없이 지금의 내가 존재하려면 과거의 숱한 생들과 만날 수밖에 없다.
선조들 중에는 똑똑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정신은 빼놓고 단순히 육체만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왔다고 볼 수도 없다.
생각을 해보아라!
자신의 대에서 더 이상 유전적 연결고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가능한지를 생각해본다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에는 얼마만한 숱한 생들이 공전(空轉)해야 하는지를 잘 알 것이다.
한 생명이 탄생되기까지에는 숱한 생들과 정신적, 육체적 결합관계로 이어져 내려올 수밖에 없듯이 불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윤회설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맥락에서 연결되어져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현실을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억겁의 세계는 과거의 사유방식에 문제가 많음을 볼 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칸트의 선을 지칭하는 이성과 악을 지칭하는 감성으로 대비시킬 수 있으며 엄밀하게 따지면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서양적인 사고방식이 똑같다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추구하는 바는 유사한 점이 많기에 성선설과 이성 그리고 성악설과 감성은 좋은 대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선천적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천적인가? 라는 질문에 적지 않게 당황할 수밖에 없다.
성선설 입장에서 보면 선천적이요, 이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후천적인 면이 많길래 똑같은 선을 놓고 선천성과 후천성을 겸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성악설 입장에서 보면 선천적이요, 감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후천적인 면이 많길래 똑같은 악을 놓고 선천성과 후천성을 겸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성선설이나 성악설 그 자체만을 놓고 따져보아도 선천성과 후천성을 겸비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선과 악을 통제하거나 제어를 하려면 배움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제도가 잘 갖추어져있어야만 하길래 선천성과 후천성을 함께 겸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배움이 많고 사회적인 제도가 잘 갖추어져있다고 해서 항상 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학식이 깊고 사회적인 지위를 갖춘 저명인사들이 더 악한 짓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를 놓고 구분하는 것 자체가 매우 혼란스럽다.
좀 더 엄밀하게 분석하거나 그 근원을 추적해들어 가다보면 이중성내지 양면성의 두 얼굴을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몸은 하나인데 그 작용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똑같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선으로 통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악으로 통하고 있듯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 못하게 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두 얼굴을 지닌 공존하는 선악이 탄생되어질 수밖에 없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결과는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지고 그 작용에 있어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놓고 따지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불필요한지도 모른다.
배움에 의해 악을 저지르는 일이 더 많듯이 보고 배우는 것이 없다면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발생되어지는 악의 존재가 더 심각한 수준에 이름을 볼 때 후천적일수록 악의 행위는 더 정당화되어지고 더 극성을 부림을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선과 악은 이중성내지 양면성이 있기에 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한 행동만을 일으킨다고 볼 수 없다.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 자극의 대상이 되어지고 그로인해 발생되어지는 효과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더하거나 감할 수 있기에 좋고 나쁨의 결과 또한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다.
단순히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를 놓고 따지는 것보다는 선과 악의 행위로 인해 파생되어지는 효과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본다.
어차피 이 세상은 공존하는 선악의 구조로 구성되어져있고 그리고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가 공존하는 선악으로 구성되어져있기에 그 누구도 공존하는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경계에서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아우를 수 있는 공존하는 선악을 내세워 기준을 삼고 좀 더 효율적인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동안 성자들이나 종교에서 현실을 무시한 채 악을 멀리하고 오로지 선만을 강요해온 잘못이 더 크지만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밖에 흘러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져있다면 지금이라도 일방적이고 명령조적인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탄력적이면서도 입체적인 공존하는 선악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일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는 인간적인 시스템을 벗어나 우주적인 본질이 공존하는 선악으로 이루어져있고 또 공존하는 선악은 그동안 갈등하고 고민해온 선악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밖에 나아갈 수 없다면 선택의 폭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숱한 성자들이 선만을 강조해왔지만 여전히 악의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더 극성을 부리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업에 의해 발생되어지는 윤회사상을 벗어나서 유전적 연결고리로 이해하더라도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청정무구한 산속에 기거하거나 신성한 종교적인 장소에 거한다고해서 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의식주 때문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기위해서는 선보다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태어난 순간 악의 행진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구조 자체가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구조로 형성된 인간적인 시스템을 나무란다면 인간세계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론 악보다는 선을 추구하며 살아가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평온과 안정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선을 추구하는 일이 옳다. 하지만 무조건 선만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론이라는 것은 현실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지 이상향만을 내세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론이 아니라면 한낱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기준이라는 것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세워놓았는가에 따라 달라지듯이 관점과 견해에 따라 기준은 얼마든지 변경되어질 수 있다고 본다.
똑같은 내용을 놓고 작가들마다 색다른 견해로 선과 악을 대표하는 작품을 쓰고 있듯이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종교를 최고로 떠받칠 수 있지만 학문적인 입장에서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은 종교를 그렇게까지 높이 떠받칠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듯이 현실적으로 공존하는 선악으로 풀이되어질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풀어나가면 된다고 본다.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를 놓고 따지는 것보다는 보다 현실적으로 그 과정과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파생되어지는 효과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9. 욕성․인성․지성
욕성(欲性)과 인성(仁性) 그리고 지성(知性)은 공자께서 주장한 심성지학의 구조이자 16장에서 다룰 공간․시간․지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욕성을 대표하는 것이 이욕이라면 인성을 대표하는 것이 덕이고 지성을 대표하는 것이 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인성은 마음을 바탕으로 사랑과 자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욕성이나 인성 그리고 지성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살펴보는 일보다는 이 셋을 묶어서 하나로 살펴보는 일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하나의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주어진 조건에 의해 발생되어지는 작용은 욕성도 되었다가 인성도 되었다가 지성도 되어 지기에 따로따로 떼어놓고 살펴보는 일보다는 이 셋을 하나로 묶어 살펴보는 일이 더 효율적임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개개인의 성향과 기질이 다르다보니 어떤 사람은 욕성에 더 가까울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인성에 가까울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지성에 가까울 수 있다.
인성과 지성만 강조한다고해서 모두 다 인자함과 지성인이 되지 못하듯이 욕성을 바탕으로 사건이 발생되어짐을 알 수 있다.
물론 욕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을 겸비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 하나의 행위가 일어나면 욕성이나 인성 그리고 지성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다만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욕성도 되었다가 인성도 되었다가 지성도 되어지는 것이다.
작용에 따라 한꺼번에 발생하는 일을 놓고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인성과 지성이 겸비된다고 해서 욕성이 사라지지 않듯이 무슨 일이든지 욕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만약에 사람에게 욕심이 없다면 인성과 지성은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욕성이 있기에 인성과 지성이 생겨나고 있듯이 욕성은 그 모든 뿌리가 됨을 알 수 있다.
부분적인 분석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 접근하다보면 처음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나 우주적인 생각이 필요한 것은 주어진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좀 더 폭넓은 사유로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시야는 넓을수록 좋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욕성이 악이라면 인성은 선이고 지성은 공존하는 선악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누차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에 대해 밝힌바 있지만 욕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면도 함께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성이나 지성 또한 선한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면도 함께 보유하고 있듯이 그 강약에 따라 선도 되었다가 악으로 변하기도 한다.
구분상 선한 면이 많으면 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악한 면이 많으면 악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경계에서 살펴보면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평소에 이분법적인 이성과 감성에 의해 좌우되어져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분법적인 논리보다는 삼분법적인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성과 감성의 발달로 인해 삼분법적인 논리로 확대해석해서 살펴보면 이성과 감성의 폭이 넓어져 욕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에 해당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삼분법적인 논리라고 말하기보다는 이분법적인 논리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보다는 삼분법적인 논리가 더 안정감이 있듯이 욕성과 인성 그리고 지성의 조화는 이성과 감성이 포용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포용하는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함을 알 수 있다.
10.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상향적인 욕심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상향적인 욕심 또한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식욕과 성욕이 있다. 그리고 상향적인 욕심이 있다.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상향적인 욕심은 선악이라는 이원론적 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요즘에는 외식문화가 발달되어져 여유만 있다면 웰빙(Well-Being)을 곁들인 담백하고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가족들과 함께 맛을 음미하는 경우가 많다.
식욕은 인간이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식욕을 해결하지 못한 아프리카나 후진국들의 나라를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음을 알 수 있다.
식욕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욕구이자 생사를 가름 하는 중요한 위치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식욕과 관련하여 인간과 동물들이 먹는 행위를 통해 살펴보자.
사자나 호랑이가 산 짐승을 통째로 잡아먹는 행위에 있어서는 전율을 느끼지만 사람이 사자나 호랑이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쾌감을 느끼는 일처럼 먹기 좋게 난도질해서 먹는 산 생선회나 육회를 보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 못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함을 알 수 있다.
동물들이 산채로 잡아먹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 악의 행위를 느끼지만 사람들이 산생선회나 육회를 먹는 일에 있어서는 선의 행위를 느끼듯이 보는 관점과 자신의 행위에 대해 똑같은 먹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선악으로 구분되어지는 일에 있어서는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으로 보면 먹는 행위는 둘 다 똑같은 행위이지만 기준에 의해 선악으로 구별되어지는 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인간의 기준이 그렇게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에는 성욕에 대해 살펴보면 성욕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준에 의해 불륜도 되었다가 로맨스도 되어지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인간은 동물적인 성욕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성보다는 남성이 성욕에 대해 밝히는 것을 보면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은 여성을 끊임없이 선호하며 함께 지내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불륜이라는 말을 각종 매스컴이나 언론에서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것처럼 모든 악의 근원처럼 밝혀지고 있는 성의 존재에 대해 과연 그렇게까지 나쁘게 평가받아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정말로 불륜이 나쁜 것일까? 하는 의문은 사람들마다 색다른 견해를 펼칠 수 있겠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불륜은 왜 일어나는가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불륜의 정당성 또한 만만치 않음을 살펴볼 수 있다.
서로가 좋으면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에 해당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이러한 일들은 가정파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기에 불륜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지 성적관계까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관계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되어질 각종 위험한 상황을 연상하다보니까 불륜자체가 악의 근원으로 취급받게 되어 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에 둘 다 자유로운 선남선녀라고 생각해보자. 이 둘의 관계는 그 어떠한 성적행위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일로 그려짐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확대 해석해보면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행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놓고 볼 때 이 둘의 관계는 분명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분명 한 가지 일을 놓고 둘로 나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로 치부되어질 수도 있지만 피해자입장에서는 두고두고 한을 남길 수 있는 커다란 피해로 각인되어질 수 있기에 성욕은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대표하는 기준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상향적인 욕심은 식욕과 성욕을 넘어서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을 경험하도록 각종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고자 어려서부터 5개 이상의 과외를 받는다거나 정치․경제․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경제적인 활동과 더불어 로비활동을 펼쳐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나가려는 욕심들은 상향적인 욕심의 대표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전원주택 또는 별장들을 마련해놓고 산과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런 입지적인 장소에서 지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위로 오르고자하는 상향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만한 입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많이 뛰고 더 노력해야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상향적인 욕심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입지적인 위치에 서기위해서는 각종 선악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공존하는 선악은 식욕과 성욕 그리고 상향적인 욕심에 이르기까지 존재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일상생활에서 만연화되어 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11. 작용과 반작용
공존하는 선악은 근본적으로 이기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따라붙듯이 이기일원론 또는 이기이원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빛이 사물을 비치면 그 반대편에는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다는 논리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물론 이 둘을 아우르는 역할도 잊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도 착실하게 챙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세월을 공존하는 선악의 굴레 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선악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고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상태에서 신의 존재를 인식하며 사후세계에서 받게 될 죄업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받을까 고민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전생을 들먹이면서까지 고달픈 삶을 등에 업고 조금이라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선한 행동을 위해 노력해오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착실한 삶의 행동인가?
전생까지 들먹이며 업을 해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비록 각박하고 모진 세상이지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죄를 짓지 않고 절대자나 성자들이 정해놓은 규율에 맞도록 살아갈까를 고민하는 모습은 굳이 프랑스 조각가 F.A.R. 로댕의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할 수 있다.
사람들은 업을 짓지 않으려고 은연중에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평온하게 유지되어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제3의 작용체인 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혼돈 속에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로 작용하고 있는 종교가 있기에 그나마 세상은 평온을 유지하며 사이좋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삶의 척도를 가늠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무신론자들을 생각한다면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종교가 지니고 있는 긍정적인 반응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것 같다.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 의해 세상은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을 세게 누르면 터져버리지만 적당한 압력으로 부풀어 오른 풍선을 누르면 공존하는 선악처럼 누른 만큼 반대편에서 부풀어 오름을 알 수 있다.
풍선의 예에서와 같이 선과 악이 적당한 비율을 유지하며 옮겨 다닌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발견은 그동안 선악의 기준에 맞춰 살기보다는 되는 데로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나 반성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선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이 악의 비율로 옮겨가면 옮겨간 만큼 선의 비율이 작아짐을 알 수 있다. 또한 악의 비율이 작아진 만큼 선의 비율이 그만큼 커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인가?
비록 그 원리는 간단할지라도 작용에 있어서는 참으로 신묘한 조화인 것이다.
만약에 우주가 조화를 무시해버리고 카오스적인 혼돈으로만 치닫는다면 이 우주는 혼돈 그 자체 속에서 폭발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우주는 조화를 최우선적으로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존하는 선악이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이듯이 우주도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조화를 내걸고 있는 것이다.
부피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권력이 이동하듯이 힘만 옮겨 다닌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하기도하지만 모든 원리는 우주적인 큰 틀에서 정해지고 있음을 볼 때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주적인 결정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 공존하는 선악을 측정하는 기준
공존하는 선악만을 내놓고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면 그것처럼 암담한 것도 없을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해낼 수 없었던 일과 같이 공존하는 선악도 그러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족스러울 정도의 포만감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공존하는 선악만큼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치화에 의해 측정이 가능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존하는 선악의 이론은 한낱 허구적인 일로 전락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천적이며 자연발생적인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론이 훌륭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표본 집단이나 여러 사람들을 비교해본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함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성선설이나 성악설이 사실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러한 이론들이 적용되어져야하는데 사람에 따라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인데도 어떤 사람은 분노와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선한 행동만을 골라가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선한 행동을 통해서 아름다운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악한 행동을 통해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에서 항상 선한 행동은 아름다운 감정을 일으키고 악한 행동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보는 사람의 관점과 견해에 따라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반드시 악한 행동이 모두에게 저주받을만한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선한 행동을 통해서 오히려 답답함을 일으키거나 주변사람들에게 악한 감정을 일으켜 폭력이나 교통사고 등 살인으로까지 비화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살인을 하더라도 정당방위로 법의 호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가끔씩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 못하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허리를 굽힌 채 지팡이에 의지하며 남루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할머니를 보면 우리는 무슨 생각에 잠길 수 있을까?
당당하고 멋들어진 행동으로 골반바지를 입은 채 배꼽을 내놓고 20대를 누비고 다니는 젊은 여성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는 할미꽃과 걸어 다니는 장미꽃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자극에 둔화되어진 노인과 자극에 민감한 젊은 여성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대 젊은 여성은 긍정적인 면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편으론 남성들로 하여금 성적 자극을 유발하여 성과 관련된 각종 범죄인 악의 근원지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영웅 뒤에는 미녀가 수식어처럼 따라붙듯이 대부분 남성들은 여성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여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성의 중무기인 바가지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결혼하면 부인한테 바가지 긁히는 일로 평생을 상심하며 지내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남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과 결혼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자들도 결혼을 하게 되면 부인한테 바가지 긁히는 일로 출발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러한 일이 싫어서 성자들은 결혼을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똑같이 살면 성자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좀 더 고상하면서도 우아하게 살고자 홀가분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성자들이기에 바가지 긁히는 강도가 더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천성적으로 남성들한테 바가지 긁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남성들이 재력적으로 충족시켜주는데도 바가지 긁는 일이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 여성들은 남성들을 자신의 노리개 감 인줄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체력적으로 보나 정신적으로 보나 단순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남성들보다 치밀하면서도 섬세한 면을 지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 모든 남성들을 누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성들은 그러한 여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죽기보다 더 싫을 때도 있지만 속 좁은 여성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음 넓은 남성들이 이해해줘야 여성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바가지 긁는 소리에 숨 막혀 죽을지언정 기를 펴고 사는 여성들을 위해 참아주는 것이 그래도 나을 것이다.
젊었을 때 미처 다하지 못한 잔소리까지 얹어서 바가지를 긁을 때는 여성들은 천성이 악한 면을 타고났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치매에 걸린 사람처럼 언제 바가지를 긁었냐싶게 잘해주는 면이 있는 게 여성들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바가지를 긁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바가지를 긁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습관적으로 내뱉는 잔소리가 더 많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아무리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일지라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여성들의 마음에 난감해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여성들은 남성들의 재능이 하늘을 찌른다할지라도 그 꼭대기에서 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치밀하게 거미줄을 쳐놓고 남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거미줄에 걸리는 즉시 바가지를 긁기 시작한다.
그러니 성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일지라도 그 부인들은 꼭대기에 앉아서 바가지를 긁는 재미로 살 수밖에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TV등에 자주 출연하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목사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한 일례를 들어보자.
신앙인으로서 보는 예수님과 자신의 남편으로서 보는 예수님의 모습이 판이함을 살펴볼 수 있다.
열성 신자인 여성신도에게 예수님과 결혼하겠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들어보면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원대한 꿈을 안고 수련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중에는 소중하게 간직한 목걸이나 금반지까지 팔아 여성이 뒷바라지를 해주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전도나 포교를 한답시고 나서는 성자들을 그 어떤 여성이 달갑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신앙으로 믿는 예수님은 괜찮지만 현실에서는 답답할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평소에는 예수님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던 여성신도들이지만 실제로 자신과 살기를 생각하면 마음에 썩 내키지 않는 것이다.
꿈과 현실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이번에는 노인의 행동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렇다면 노인의 행동은 과연 옳은 일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자극을 부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분명 남루한 노인의 행동을 보면 측은지심부터 일어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왜 젊어서 부지런하게 못 벌어 저렇게 남루한 차림으로 측은지심을 일으키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불거진다. 그렇다고 남루한 할머니를 따로 돌보아주거나 도움이 될 만한 행동도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단지 생각만으로 판단하는 이 두 가지 상이한 견해를 무엇으로 판단해야할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이 할머니는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미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또 자신이 어떠한 옷을 입고 지내는가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로 치더라도 객관적으로 보여 지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자연 그대로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이중성내지 양면성에 크나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남루한 할머니를 통해서 긍정적인 자극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세월은 고목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기에 할머니를 통해서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 그리고 6․25동란 등 숱한 인생역전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론 젊어서 부지런하게 벌지 않으면 미래에 할머니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도 있음을 자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현상을 놓고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목적에 따라 글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듯이 또는 그러한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생각이 제각각 다른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 개념 속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공존하는 선악은 단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추함과 아름다움의 대비 속에서 판단되어지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불리어지고 있는 현실을 접하게 됨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선과 악을 구분하기도 전에 공존하는 선악은 이미 그러한 상태를 판단하거나 지적능력을 갖추고 모든 것을 판단하듯이 그렇게 판단되어져버리는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굳이 선과 악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아도 저절로 형상기억장치를 지닌 합금처럼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름 없는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어 생기를 되찾아도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 이미 그러한 형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다만 뒤늦게 이름을 붙여주어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뿐 본래의 모습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존하는 선악에 대한 일례를 들자면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수시로 노출되어져있는 공존하는 선악에 대해 회의와 고뇌에 찬 힘겨운 생각을 보이고 있지만 딱히 해결할만한 기준이 없다보니 그동안 남모르는 고민에 빠져 회의 아닌 회의 속에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성현들이 정해 논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악의 소굴로 빠져드는 듯한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지내왔다.
이제부터라도 이성과 감성사이에서 고민해온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탈피하여 아래에 제시된 공존하는 선악의 측정기준에 맞춰 공정하면서도 객관성을 지닌 자신의 선악을 판단해보기 바란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생각이 들면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고 생각보다 중심이 잘 잡혔다고 생각이 든다면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교만보다는 겸손을 강조하는 일은 선악의 양면성을 떠나서 선호해야할 부분이라고 본다.
아래의 기준에서 보여 지고 있는 7:3의 기준은 선이 악보다 월등히 많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이 악보다 많아야할 이유는 간단하다.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평온한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시끄러운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인 평온을 유지하며 사람이 살만한 곳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 비바람이나 폭풍우를 동반하더라도 평온한 자연보다 길지 않은 것은 자연도 공존하는 선악의 기준을 통해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자들이 하나같이 선을 선호하는 이유를 잘 알 것이다.
교만과 충격적인 악보다는 겸손과 부드러운 선의 작용을 통해 평온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에 적어도 이 정도의 분위기는 갖추어 놓아야 마음 놓고 세상을 살만하지 않겠는가?
성자들이 그토록 선만을 선호하는 이유는 별개 아니다.
마음 편하게 세상을 살자는 것이다.
비록 가난과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성자들의 검소한 생활일지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일만큼은 모두가 꿈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악이 없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하지만 악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심심해서 살만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삶은 하나같이 도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성자들도 그렇고 영웅들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도전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도전 없는 삶은 살 가치를 느끼지 못하듯이 적극성을 띤 악의 행위가 없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악을 통해 자극을 받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탐구하며 끝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인류의 역사가 어쩌면 선의 세상에서 멈춰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적극성을 띤 악이 있기에 살만한 것이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게으름과 나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존하는 선악을 아무 때나 갖다 들이대며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시키려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금지한다.
이는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와도 같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기준이 정해져있지 않으면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현재 선악의 비율이 7:3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가를 항상 측정하는 습관을 가져야할 것이다.
혹시라도 위험수위에 임박하거나 이미 넘어섰다면 몸의 균형을 바로잡아주려는 전정기관과 세반고리기관처럼 중심을 잡아나가기 바란다.
물론 물리적인 측정기준에 있어 오차범위를 벗어나거나 기준에 미흡하다고 판단이 들면 언제든지 양심이라는 측정기준으로 전환시킬 수 있음을 주지하기 바란다.
물리적인 측정기준은 개개인의 측정기준에 따라 오차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지만 양심이라는 측정기준은 영적 에너지로 측정하다보니 물리적인 측정기준보다 더 섬세하고 오차범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저주파기기나 초장파기기의 주파수의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경고음이 들리거나 세기가 세어지듯이 양심에 가책이 크게 느껴질수록 악의 행위를 중단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경고음이 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악의 행위를 즐기거나 더 강도 높은 악의 행위로 빠져든다면 그 자신을 해체시키는 일까지 벌어질지도 모른다.
만약에 양심마저도 마비되었거나 작동이상이 발생한다면 제3자의 객관적인 조언이나 측정기준으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3자의 객관적인 기준은 적어도 주관적인 견해보다는 신뢰성에 있어 더 확고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존하는 선악의 갈래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가장 필요할 때라고 본다.
중용이라고 해서 항상 중간의 위치만을 고수하거나 유지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복원력에 의해 바로 서려는 오뚝이처럼 중심만 잘 잡아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본다.
공존하는 선악의 측정기준은 7:3의 비율에 의해 움직이고 있지만 악보다는 선을 선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유지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질 것이다.
13. 방어시스템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위기탈출 넘버 1” 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위험적인 요소가 곳곳에 산재해있음을 소름이 끼치도록 느낄 수 있다.
전자레인지에 넣어둔 계란이 폭발하는가하면 휴대용가스레인지에 기준보다 큰 불판을 올려놓았을 때 폭발하는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위험적인 요소가 즐비하게 생활을 점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위기탈출 넘버 1” 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었던 각종 위험적인 요소들을 우리들은 어떻게 안전하게 피하며 살아왔는지 아찔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유조차가 논바닥에 엎어져 기름이 유출되어지거나 유조선이 침몰하여 기름으로 바다를 뒤덮었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이 역시 아찔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유조차가 논바닥에 구르기 전이라든지 유조선이 침몰하지 않았을 때를 생각해본다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어시스템에 의해 그릇에 담겨진 악의 존재들은 그 나름대로 안전한 것이다.
방어시스템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문제가 되는 것처럼 악을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웬만한 악은 두렵거나 기피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것 같다. 독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 인체에 독을 가둬두거나 마셨을 때 문제가 되는 것처럼 악의 행위도 악 그 자체로서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악과 선이 만났을 때 강자가 약자위에 군림하듯이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선한 사람이 악에 의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악보다 더 큰 악의 행위로 맞서거나 약자가 아닌 강자의 입장에 서있었더라면 충분하게 방어하거나 가볍게 피할 수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이 갖추어져있다면 악의 존재가 미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세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각종 운동을 하여 괴한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수년에서 수십 년씩 정성을 들이기도 하고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더 좋은 학교를 나와 사회활동을 통해 성공가도를 달리려고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자신이 강해지면 웬만한 악은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기에 자신을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걸며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자들이 그토록 선만을 강조하며 모든 악의 근원을 없애고자 노력하는 일도 다 따지고 보면 악의 존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임을 알 수 있다.
악의 세상보다는 선한 세상이 더 편안하고 아름답기에 선한 세상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악은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기도하다.
평온하게 잘 살아가는 가정에 시의 적절하게 찾아와 불화나 예기치 않은 선물들을 선사하는 것을 보면 악은 비대해진 선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선도 약한 선이 있는가하면 강한 선도 있다.
선이 강할수록 악이 뚫고 들어올 확률은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교제하다보면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서로가 기싸움에 능한 것 같다.
서로가 상대방을 누르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되어져 자신을 상대방으로부터 안전하게 방어하려는 방어시스템이 남모르게 작동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자신이 상대방보다 못하다거나 여러 가지 점에서 약자로 판단이 들면 팽팽하게 맞서는 일보다는 자신을 풀어놓아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살아나가기 위한 약자들의 처세술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방어시스템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방어시스템이 풀려 자신을 상대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없을 때는 제3자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나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방어시스템을 강화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몫임을 알 수 있다.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공부하여 상대방이 함부로 뚫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방어시스템을 갖추어놓는다면 자신을 지키는 일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방어시스템을 갖추는 일에 있어서도 노력한 만큼 자신의 것이 되어지는 것을 보면 노력하는 모습은 자신을 지키는 일도 되지만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
14. 공존하는 선악은 희생을 필요로 한다
차를 몰고 도로를 운전하다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차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위험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 것이다.
가끔씩 발생하는 일이지만 기분 나쁘게 끼어들었다고 건축현장에서나 쓸법한 큰 해머를 들고 와 차를 툭툭치며 위협을 가하는가하면 귀여운 폭주족 한명이 중앙선을 넘어와 마주 오는 차 앞에서 지그재그 재롱을 피우다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고속도로에서 추월을 했다고 말다툼 끝에 살인까지 벌어지는 일을 보면 얼마만큼 위험적인 요소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라는 말이 있듯이 차량사고가 겁나서 운전하는 일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높은 위험을 감수할수록 투자에 대한 이익이 크듯이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일 때문에 미리 겁부터 먹고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도 상대성에 의해 슬픔도 되었다가 기쁨도 되는 경우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명보험에 전혀 가입하지 않은 사람과 5개 이상 생명보험에 들어 논 사람을 비교해보자.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 남은 가족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로 죽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오히려 빚더미에 올려놓고 죽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재보험을 포함해서 생명보험에 5개 이상 들어 논 사람은 죽음에 대해 초연해질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언제 어느 때 죽더라도 유가족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죽을 때도 자신 있게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유가족이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처럼 마음 편한 일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고도의 정신적 수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보험에만 들어놓았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배짱이 생기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있는 인생인가?
죽음을 초월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 없이는 힘든 일이기에 보험은 삶을 초월해서 죽음까지도 초월하게 만드는 참으로 매력적인 상품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너도나도 보험에 가입해둔 다음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불의의 사고로 죽었을 때를 대비한 비상용으로 사용되어야지 고의적인 사용은 권장하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보험은 잘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많이 들어놓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 잘사는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은 잘 들지 않는 것이 보험의 생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험을 들어놓고 질병으로 입원한 후 크게 혜택을 본 사람들은 보험에 대한 매력을 발견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추가로 더 드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비해 요즘에는 예기치 않게 암이나 불치병 등 각종 질병으로부터 노출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질병이 발생했을 때를 대비한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가난한 사람일수록 보험의 혜택을 더 많이 받아야함을 알 수 있다.
있는 사람이야 저축해놓은 돈으로 치료비를 감당하면 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저축해놓은 돈이 없다보니 암이나 불치병에 걸리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앞날이 막막해짐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장래를 대비해서 보험 한두 개는 들어놓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마음 든든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차량을 운전하는 경우를 선이라 하고 안전거리를 지키지 못하였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추돌이나 충돌을 일으켜 사상자가 발생한 경우를 악이라 치자.
그렇다면 공존하는 선악은 어느 쪽에 속하는지 구분이 잘 안 갈 것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의 공존하는 선악은 그야말로 어느 쪽으로 편입해 들어가야 하는가하는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공간이 선이라면 시간은 악이라고 말했듯이 제3의 작용체인 지식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차량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브레이크인 것이다.
브레이크를 밟아봐서 잘 알겠지만 안전거리를 유지하거나 위험신호에 대비한 제3의 작용체인 눈에 보이지 않는 큰손처럼 선악의 양면성에 대해 균형을 잡아주려는 지시자 역할을 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의 본능적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이 브레이크이다.
위험신호를 파악한 순간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이 브레이크인 것이다.
그만큼 차량에 있어 브레이크는 생명줄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지금껏 공존하는 선악에 대해 설명해 왔지만 공존하는 선악의 어중간한 입장 때문에 선과 악의 중간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는 공존하는 선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능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안전거리를 유지할 때는 선의 행위이지만 목숨 줄과도 같은 안전장치인 브레이크를 놓아두고 적절한 브레이크 사용을 하지 않아 추돌이나 충돌을 발생시켰다면 악을 행하기 위한 어떤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선과 악은 홀로 있을 때 발생하지 않고 둘 이상의 관계에서 발전함을 알 수 있다.
선은 충돌 없이 발생한데 비해 악은 둘 이상의 관계에서 충돌을 통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특이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선은 충돌 없이 포용과 넉넉한 배려 속에서 이루어진데 비해 악은 독선과 이기심 속에서 충돌을 통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선은 부드럽고 조용한데 비해 악은 공포스럽거나 시끄러운 면이 많다.
홀로 있다 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그 누구와 충돌할 기회가 없다보니 악보다는 선을 더 많이 행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물론 홀로 있어도 자신의 의지를 억누르지 못한 채 주변의 기물을 마구 부수는 등 악의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악의 행위는 둘 이상의 관계에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선은 충돌 없이 조용한데 비하여 악은 충돌을 즐기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충돌은 사고로 이어지고 사상자까지 낼 수 있는 위험한 상황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추돌이나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다양한 안전규칙을 준수하며 쾌적한 운행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사고위험이 높은 차량이지만 적절하게 컨트롤하면서 전국을 누빌 수 있는 여유 있는 드라이브는 모든 사람들의 꿈인 것처럼 안전규칙을 잘 지키며 방어시스템인 브레이크를 잘 다룬다면 차량을 운전하는 일에 있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선과 악의 기능을 적절하게 조절해주는 기능은 없는지 있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3의 작용체인 브레이크 기능을 대변하는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그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인위적인 조절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순리에 따라 자연이 그렇게 흘러오고 있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그렇게 흘러온 것처럼 공존하는 선악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선악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며 남모르는 고민을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선이 너무 넘치다싶으면 악의 행위를 예고 없이 출현하게 하여 주변을 긴장과 공포 속으로 몰아가 비대해진 선의 행위를 끌어안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듦을 알 수 있다.
안전거리를 무시하거나 긴박한 위험신호가 발생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게 되는 것처럼 공존하는 선악은 선악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선을 위해 악의 행위를 아예 차단하려는 무책임한 포기와 나태 속으로 쉽게 빠져들어 가는 선의 단점을 공존하는 선악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선만을 위한 삶을 살다보면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무기력증과 우울증 등 그 부작용이 심각한 수준에 이름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하지마라’ 라는 덫에 걸리면 이것저것 다 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능력을 보유하고도 가난과 무능력 속에서 할 만한 게 없어지는 것이 선만을 위한 삶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이 무상하고 덧없어 보이는 것이다.
삶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선만을 위한 삶을 살기위해 태어났다면 삶 자체에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깨달음은 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악까지 다 포용하면서 하나로 융화시켜나가듯이 선만을 위한 삶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의 단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공존하는 선악이기에 자연이 폭풍우와 눈보라를 일으키듯이 긴급히 악을 투입시켜 선의 행위 속으로 뛰어들게 함으로써 비대해진 선을 다이어트를 시켜서라도 선악의 중심비율인 7:3의 형식으로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악이 활동할 때는 <16장 공간․시간․지식>에 나타나있는 범죄자의 예에서처럼 어떤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견뎌온 고목처럼 공존하는 선악도 이러한 희생아래 존재함을 볼 때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그 비중이 큼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선이든 악이든 어떤 희생을 요구하기에 희생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존하는 선악은 희생을 통해서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한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악의 행위를 제거해야하는 위험이 있고 악한 모습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든 선의 행위를 제거해야하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
선과 악은 이렇게 희생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움 뒤에는 고통의 깊이로 서있는 경우가 많듯이 편리하게 갖추어진 기반시설이나 문화적인 휴식공간을 위한 공공녹지 등 경제적인 희생이나 철거를 위해 철거민들의 남모르는 고통이 뒤따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공 뒤에는 반드시 희생하는 사람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듯이 희생 없는 성공은 없는 것이다.
맹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어머니가 있어야했듯이 성공 뒤에는 그 주변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희생아래 세워진 선악이 선천적이자 자연발생적인 것과 같이 공존하는 선악도 자연발생적으로 스스로 작동되어져 선악의 균형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함정에 빠져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져나오려고 머리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 행위가 선을 위한 것이든 악을 위한 것이든 일단 그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부동산에 투자한 투자자들은 이중삼중으로 묶어두려는 정부의 부동산정책으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탈출을 시도할 것이고 법률적지식이 해박한 변호사들은 자신의 역량이 미치는 데까지 노력하여 의뢰자의 변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들 것이다.
이 와중에 혜택을 입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선의의 피해자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노력한 만큼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듯이 자신의 능력만큼 탈출구가 준비되어져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 얼마나 균형 잡힌 배려인가?
모두다 악의 근원을 향해 달리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준비해놓고 선악의 중심을 잡아나가는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한 존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다는 절묘한 논리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처럼 꿰어 맞추기에 명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지만 공존하는 선악이 존재함으로써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균형을 잡으며 우주만물을 생성소멸 해나가듯이 선악의 중간에 서서 중심을 잡아나가려는 생각은 참으로 기특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힘든 가운데서도 살만한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우주적인 안전장치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자마자 모두 다 죽음부터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숨통을 틀 수 있는 틈새가 있기에 그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서도 꿋꿋하게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악의 근원인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15. 인과응보(因果應報)
뿌리를 흔들면 우주로 연결되기에 함부로 흔들 수는 없지만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했는가 아니면 악을 행했느냐에 따라 죄 값을 받게 된다는 설이다.
우리는 그동안 자유를 향해 마음 놓고 살아왔지만 결국 우주적인 큰 틀에 갇혀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과응보는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죽어서 사후세계에서까지 받아야할 죄 값이기에 그 비중이 만만치 않음을 알 것이다.
순간순간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며 또 악을 저지르며 생활해오고 있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악의 소굴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분명 선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악의 행위로 규정되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론 억울한 면도 있지만 선악의 기준에 맞춰 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악의 결과에 따라 인과응보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현실에서뿐만 아니라 사후세계에서까지 받아야할 운명이 인과응보인 것이다.
그래서 성자들이 그토록 선만을 부르짖으며 착한 일만 하라고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현실에서는 착한 일만 하고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모순된 주장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맞는 말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적인 결과를 받아본 적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아라!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마음의 양심이라는 영적에너지로 측정되어지는 뼈아픈 채찍질이 자신의 가슴을 내리 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차를 부주의하게 몰아 상대편으로 하여금 접촉사고나 사망사고를 일으키게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가슴 아픈 상처를 남긴다든지 아니면 축구시합 도중에 주심이 안보는 사이 상대편 코를 부러뜨린다든지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양심에 꺼릴만한 일들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고의적으로 발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인과응보를 받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못 받으면 그 자식 대에서 받거나 사후세계에 가서 받게 된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난 후 사형선고까지 받고 풀려난 사람이라든지 대기업의 총수가 그 자식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후 그 죄 값을 받는 일이라든지 크고 작은 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인과응보의 죄 값을 반드시 받고나서야 안심을 하는 구조적인 인과응보의 시스템이 작동되어지고 있는 이상 우리는 선을 위해 노력해야함을 알 수 있다.
비록 공존하는 선악에 의해 7:3의 비율에 맞춰 생활하고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선을 많이 행하여 인과응보의 시스템에 노출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그 자신이나 자식을 위해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용과 반작용처럼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세상이 시끄럽거나 조용해지는 것을 보면 세상은 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16. 강자와 약자
인류의 역사를 보면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유지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한 자만이 역사를 써나갈 수 있는 그런 구조적인 모순으로 되어져있는 것이다.
하기야 신도 약한 자 보다는 강한 자 편에 서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약자는 강자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인상까지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게으르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약자보다는 부지런하고 도전적인 정신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강자들이야말로 생기가 돌기 때문이다.
생기가 있는 곳에 활력이 있고 부지런한 동작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듯이 신도 나약하고 게으른 사람들보다는 강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부자들이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출세도 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공존하는 선악의 원칙에 비교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부자들이나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악의 행위만 골라서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특히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괴롭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강대해지는 경우를 보면 악의 행위가 결코 악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못살게 군만큼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에 대항하기위해 더욱더 분발하여 선진국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약소국들이 즉 후진국이나 중진국들이 선진국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는지를 안다면 결코 강대국들을 나쁘게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작용과 반작용은 그래서 좋은 것 같다.
한쪽을 누르면 반대편에서 튀어나오는 이치는 참으로 절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약자들이여!
결코 기죽을 필요가 없음을 알 것이다.
강자들한테 대항하기위해 더욱더 자신을 분발한다면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노력하는 자나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현실을 나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서보도록 노력한다면 남을 탓하는 인생은 살지 않을 것이다.
꼭 못나고 자신 없는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남을 탓하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다들 자신이 노력한 만큼 열심히 사는 그런 세상에서 왜 남을 탓하려고만 하는가?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자라도 더 공부하여 자신의 입지를 세워나가는데 정열을 쏟아라!
그것만이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17. 도스 인생과 윈도우즈 인생
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PC의 운영체제로 DOS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95년 Windows 95가 발표됨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DOS에서 Windows 운영체제로 바뀌었다.
도스를 사용해본 사용자는 잘 아는 일이지만 도스는 명령어가 생명이다.
명령어를 알지 못하면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마치 캄캄한 밤길을 걷는 것처럼 어둠속을 헤매다 포기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도스시절이다.
직장인이나 주부들이 컴퓨터를 배워보려고 선뜻 나서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도스에서 요구하고 있는 명령어를 익히지 못하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컴퓨터의 기본인 한메타자를 연습하기 위해선 우선 명령어를 입력해야한다.
그러나 막상 정성껏 전원 스위치를 눌러 부팅을 시켜놓으면 그야말로 절벽을 만난 듯 앞이 캄캄할 수밖에 없다.
부팅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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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콜론 역슬래시와 출력표시인 부등호 그리고 명령어 입력대기 표시인 프롬프트만 깜박 깜박거리기 때문이다.
무언가 명령어를 입력해야하는데 도무지 앞으로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판기를 아무렇게나 누르면 기계의 오작동을 알리는 외부인터럽트가 발생하여 더 이상 컴퓨터를 가지고 놀 수가 없게 된다.
명령어를 이미 익힌 사람들은 한메타자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능숙한 자판솜씨로 C:\>CD HTT
C:\HTT>HTT
위의 명령어를 입력하여 경쾌하면서도 발 빠른 동작으로 1분에 700타 이상을 치며 주변사람들의 넋을 사로잡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먹통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에야 부팅이 되자마자 윈도우즈 XP나 윈도우 비스타(Vista)가 떠서 한컴타자연습이라는 아이콘을 찾아 더블클릭하는 것만으로 쉽게 타자연습을 할 수 있지만 도스시절에는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것 같다.
우리들은 아직도 도스시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 되물림되는 구조 속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다보면 사회를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져 자신의 장래를 내다보기가 그만큼 어려워짐을 알 수 있다.
주변에 훌륭한 조언을 해줄만한 스승하나 변변히 갖추고 있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구조상 그 누가 조언을 해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그날그날 생활에만 전념하며 미래를 가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도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져있지만 가난도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자로 살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도 나쁘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도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 역시 나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각국에서 구호물자를 수송하여 아프리카에 식량을 구호해줘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극복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반시설이나 문화적인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넉넉한 구호물자가 조달 안 되는 것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 나라의 민족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독일처럼 전후로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는 나라도 있듯이 극복하고자하는 의지가 없으면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본다.
우리들은 가끔씩 잘 사는 부자들이나 강자들을 욕할 때가 많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 사람들도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위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나듯 피와 땀을 쏟은 결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남들이 놀 때 자신은 부지런하게 공부하거나 2~3시간씩 잠을 자며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데로 삶을 일구어온 결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한 삶의 밑바탕을 이해한다면 부자나 강자들을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본다.
혹시라도 부자나 강자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그러한 사람들처럼 열심히 살아왔는지를 먼저 반성해보는 시간을 가져야할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가난하다거나 출세를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한다.
똑같은 사물을 놓고 보더라도 전문가마다 다 다른 시각으로 분석하듯이 육체적인 고통으로만 극복해보려고 노력했는지 아니면 지적능력을 발휘하여 맥을 짚으며 삶을 운영해왔는지를 비교해본다면 단순히 몸으로만 열심히 산다고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육체적인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지만 정신적인 것은 그 끝이 예약되어져있지 않은 것처럼 무한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신계이기 때문이다.
지적능력을 발휘한다면 얼마든지 멋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으로만 해결하려고든다면 그 삶은 고달프고 힘들 수밖에 없다.
우주는 조화를 그 첫 번째로 들고 있듯이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갇혀 지내다보면 자신이 어리석은지를 구분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넓혀도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평면적인 도스 인생을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입체적인 윈도우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결코 꿈으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사고의 유연성을 보다 폭넓게 갖추어 주어진 명령어에만 국한하지 말고 마우스로 클릭하거나 화면을 터치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내어 탄력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나가야 할 것이다.
시야를 넓힌다는 일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특히 우주적인 시야는 모두가 꿈꾸는 일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시원하고 경쾌한 일인가?
세상은 그래서 살만한 것이다.
18. 결론 : 우주적인 관점과 인간적인 관점
서양철학에서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면 동양철학인 유가에서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물론 동양철학인 노장사상에서 보다 근본적인 우주사상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모두 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하는데 할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점은 어떠한 목적으로 사물을 보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 또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점에서 크게 평가해야할 부분이라고 본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향기로운 선에 관심을 일으키면 성선설이 되고 마음이 악취를 풍기는 악에 관심을 일으키면 성악설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은 항상 향기롭다거나 악은 항상 악취를 풍긴다고 볼 수는 없다.
선은 향기롭기도 하지만 부드러워 나약해지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악은 악취가 나기도 하지만 강하여 도전적이며 진취적이어서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도 한다.
마음은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가에 따라 성선설이 되었다가 성악설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느냐에 따라 성선설이 되어 지기도 하고 성악설이 되어 지기도 하는 것이다.
좁은 골목길에서 마주 오는 차와 만나면 먼저 도착한 차량에서 양심본심에 의해 양보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맹자가 말하는 성선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입장에서 두 대의 차량이 양보심 없이 서로 먼저 가려고 교착상태에 빠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연이어 수 십대의 차량이 뒤엉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순자가 말하는 성악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양보를 하여 순탄하게 차량의 흐름을 유도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양보를 하지 않아 교착상태에 빠뜨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을 놓고 평가해본다면 양보심이 많은 사람은 당연히 맹자의 성선설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양보심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순자의 성악설에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면 둘 다 옳은 이론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이러한 현상들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항상 이러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양보심이 많았던 사람도 자신의 갈 길이 바쁘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면 양보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양보심이 없었던 사람도 어떤 때는 양보심이 많았던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똑같이 양보를 할 수도 있다.
이론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만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드러나는 법이다.
맹자가 스스로 생각하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양심본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양심에 채찍질을 가한다고 항상 그러한 선만을 행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양심본심을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어린애가 우물에 빠지면 서로 구하려는 측은지심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마음으로만 측은지심을 일으켰다고 해서 성선설을 주장한다면 모순된 이론으로 비화됨을 알 수 있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이해하지 않는 한 마음이 그러한 느낌을 발한다고해서 성선설이나 성악설을 주장한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이론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물에 걸린 바람 꼴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되려면 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공존하는 선악으로 해결해야할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처해진 상황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렇게밖에 행위 되어 질 수 없는 마음이 존재하기에 인간적인 마음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좀 더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4장에서 마음에 대해 살펴보아 잘 알겠지만 그 어떠한 힘으로도 누를 수 없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한 마음을 인간적인 관점인 성선설이나 성악설로만 잡아가둔다면 마음은 숨 막혀 살 수 없을 뿐더러 인간의 육체를 떠나 머나먼 우주를 향해 영원히 떠나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은 곧 깨달음과 통한다고 말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비물질인 마음을 인간의 기준에만 맞추려다보면 마음은 그 갈 길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우주적인 활동을 요구하는 마음을 성선설이나 성악설에만 가둬둔다면 우주를 향한 마음은 답답해서 호흡곤란 증을 일으키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 어떤 기준을 다 갖다 대어도 충분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고 또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우주적인 관점에 서있는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그 어떤 기준에도 잘 맞아 떨어지는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공존하는 선악은 깨달음과도 통하고 도(道)하고도 통한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 그리고 지식을 통틀어 한곳에 모아 주무를 수 있는 우주적인 포용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종교를 포함해서 과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그 모든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분법적인 이론이나 이원론적인 이론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삼분법적인 이론인 공존하는 선악으로 풀이될 수 있음을 살펴볼 때 공존하는 선악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야는 넓을수록 좋고 마음은 클수록 좋은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기준에 얽매이다보면 시야도 좁아지고 마음도 함께 좁아짐을 느낄 수 있다.
절대적인 진리처럼 생각되어져온 것도 시대를 달리하여 분석해보면 그동안 성자들이 정해 논 기준에 얽매어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성자들이라고해서 항상 절대적인 진리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그 경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치열한 삶의 현장을 경험하며 깨달음을 추구하고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맹점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지식이라는 잣대로만 판단하지 말고 그 내면에 숨겨진 우주적인 침묵으로 이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이해가 되어 진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상황을 고요의 극점인 형태이전의 세계로 환원시켜놓고 살펴보아라!
그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가능성은 무한하게 펼쳐질 것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한순간에 무너짐을 경험할 것이다.
이 우주는 우리가 생각한데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이든 사후세계이든 말이다.
그러한 가변적인 세계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자신 있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를 수도 있고 그르다고 생각한 순간 옳을 수도 있는 또는 이 두 가지 의문에 해답이 주어지기도 하는 그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는 것이 우주적인 침묵 속에 다 포함되어져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참으로 깊고 넓은 현학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수시로 우주적인 침묵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들에 의해 이 우주의 내면세계까지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지만 무서우리만치 소름이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보아 공존하는 선악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상화되어버린 성자들> - 청아당 엄상호 詩
숨 막힐 정도로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완벽하면 얼마나 완벽하겠는가?
무리하면 병이 생기고
배고프면 식사를 하지 않는가?
성자들이 말하는 것이 모두 옳다고 치자.
그 말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허구적인 허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으로서 이슬만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공존하는 선악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것도
자연의 이치를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선을 그어놓고
오로지 좋은 쪽으로만
선한 쪽으로만 요구한다면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어찌 그 기준에 맞추며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성자들이 말하는 데로 제대로 실천을 해오면서
살아왔는가를
오히려 종교에 몸담고 있는 성직자마저
더 많은 부작용만 일으켜 오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보아라!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형편이 좀 낫다 해도 뼈마디가 닿도록 일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는가?
그 와중에 깨달음은 꿈이나 꿀 수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꿈이요
먼 이상세계가 아니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자신도 이루지 못했던 세계를
전가시키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 아니던가?
도인이나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시행착오를 겪고 또 죄를 짓고 사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보아라, 자신의 일신을 위해
가족을 힘들게 하고 못할 짓은 또 얼마나 하던가?
깨달음을 얻고 난후
홀가분한 상태에서 그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수천 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으면
이제 그만 멈추어도 좋지 않겠는가?
지금도 많은 종교인들이 성직자들이
성인들을 철저하게 우상화시키고 있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관적인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얼마나 많은 중생들을 신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가?
믿고 싶으면
차라리 자신을 믿어라!
오히려 그것이 더 편안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던가?
아니면 자연의 뜻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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