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결론 : 마음
공존하는 선악은 먼저 마음이라는 본질적 접근방법을 통해 이해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깊은 학문이다.
마음은 깨달음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마음은 문 없는 문을 드나드는 존재이자 신도 함부로 가둬두거나 누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신의 권능을 벗어나있는 것이 마음이다.
아마도 인간을 다스리는데 있어 하느님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때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느 때는 반항하기도 하는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때문에 지금껏 하느님이 힘들어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인간의 마음 때문에 고민 아닌 고민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마음을 달래거나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은 신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을 수도 없는 그 행방이 묘연한 존재이다.
잡았다싶으면 이미 달아나버리고 달아났다싶으면 다시 다가와 안부를 묻는 신묘한 존재이다.
이러한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난해하기 그지없다.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을 이해하는 것이 되고 깨달음을 이해하는 것이 되기에 마음의 깊이는 그 근원을 측정할 수 없는 우주와도 같은 존재이다.
만약에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거나 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마음은 곧 도(道)이기 때문이다.
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마음은 그 모든 것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 깊이가 넓고 광범위한 존재이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와도 통한다.
하나를 안다는 것은 곧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마음의 깊이를 찾다보면 그 끝이 어디인지를 생각해본다면 마음은 곧 도(道)요 하나임을 알게 된다.
마음은 공간과 시간을 헤집고 다니면서 제3의 작용체까지 흔들며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은 곧 느낌이다.
살면서 느낌 하나면 충분하듯이 마음의 생명은 느낌인 것이다.
느낌이라는 그물에 걸리면 바람과 빛조차도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느낌의 위력은 대단하다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느낌의 세계는 마음이 쳐 논 그물이기에 마음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주의 끝인들 못가겠는가?
우주의 안인들 못가겠는가?
마음이 가고 싶다고 하면 어디든 달려가는 것이 마음의 세계가 아니던가?
마음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거나 허물어버릴 수 있는 하느님 같은 존재가 아닌가?
선한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악하다고 말하면 악한 것이 되지 않았던가?
악한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선하다고 말하면 선한 것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지금껏 달려오지 않았던가?
이 얼마나 편리하고 손쉬운 해석인가?
분명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는 서로가 잘못된 것이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렇게 되어 지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무서운 마음이지만 마음은 양심이라는 측정기준을 지니고 있기에 아무렇게나 생활하도록 놓아두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도 되었다가 악도 되었다가 종잡을 수 없는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지고 있지만 양심이라는 측정기준에 의해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마음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면을 지닌 것이 마음이다.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삶을 이해하는 것이 되고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되고 종교와 과학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은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그 깊이에 있어 천변만화의 능력을 소유한 불세출의 존재이다.
마음은 전생을 비롯하여 억겁의 세계를 드나들기도 하고 내생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에서 그렇게 내세우고자하는 천국과 지옥도 개개인마다 다 다른 맞춤형 사후세계까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편리하고 아름다운 방법인가?
정신일도하사불성처럼 한곳을 향해 집중하다보면 없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듯이 신의 존재를 만나고 싶으면 오직 하나의 신이나 화상에 그려져 있는 존재를 붙들고 늘어지면 그러한 신이 나타나지 않던가?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그 무엇으로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신묘한 존재인 마음이 아니라면 그 누가 그러한 재주를 부릴 수가 있단 말인가?
마음이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 우주를 통째로 없애버릴 수도 있고 이 우주를 호화찬란하게 보석으로 치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비록 실제상황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상의 세계에서라도 만들어내지 않는가?
마음을 붙잡고 그 깊이를 추적하다보면 그 끝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심오하기가 이를 데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은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신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마음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이상의 학문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은 경험까지 소화해내지는 못한다.
등에 진 바람이 가벼워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 없듯이 육체가 해야 할 일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마음의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경험이다.
경험은 반드시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져있기에 일심동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무엇이든지 한두 가지 단점은 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은 둥글둥글 그렇게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자란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채워지며 살아가고 있듯이 그렇게 세상은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묘한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큼이나 폐부에 와 닿는 것이 또 있겠는가?
그래서 음양이 존재하고 남녀가 있고 암수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우주는 그렇게 음양의 이치에 맞게 서로서로 도와가며 살다오라는 철칙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에 약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어느 한쪽이 강하면 어느 한쪽은 반드시 약하기에 서로서로 도와가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홀로서기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육체라는 존재가 없으면 홀로설 수 없는 것처럼 상생과 상극의 이치에 맞게 그렇게 살다 가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치로 이루어져있는가?
조물주의 힘이 그 어느 곳인들 미치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심지어 마음속까지 깊이 파고들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참으로 조물주의 힘은 그 어느 곳인들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우주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쉬고 싶을 때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기도 하고 넓은 세상을 달리고 싶을 때는 바다 속을 뚫고 우주를 유영하기도 하고 우주의 끝을 다녀오고 싶으면 순간이동이나 축지법을 써서 순식간에 다녀오기도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신묘한가?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세상 우리는 참으로 신묘한 존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당당하게 이 우주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로 살아가자!
발아래 펼쳐질 신세계를 생각하며 마음을 붙잡고 우주의 끝을 달려보자!
육체는 만날 수 없어도 마음은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육체는 갈 수 없어도 마음은 갈 수 있지 않은가?
1.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비물질로서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온갖 형태를 다 나타내기도 한다. 빛이 되어라하면 빛이 되고 어둠이 되어라하면 어둠이 되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마음은 선이라 부르기도 하고 악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음은 음이라 부르기도 하고 양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음은 단 한시도 제자리에 오래 있으려고 하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잡아 가두기보다는 놓아둠으로써 오히려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은 형체가 없다보니 바람으로 구멍을 내어도 구멍이 생기지 않고 물속에 빠뜨려도 숨 막히지 않고 불속에 집어넣어도 타지 않는 불사신으로 존재한다.
형체를 짓기도 하고 형체를 없애기도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기도 하고 잡았다싶으면 달아나고 놓았다싶으면 달려오는 그 향방을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다.
바람에도 걸리지 않고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마음은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신묘한 존재이다.
마음이 가는 곳엔 형체가 나타나고 마음이 멈춘 곳엔 형체가 사라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마음을 잡아가둘 묘안도 없다보니 수행이라는 고도의 정신세계를 추구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려보자는 해법이 나타났듯이 수행은 마음을 잡아가두기에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여겨진다.
수행도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어져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수련법부터 시작하여 바른 마음과 바른 행동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이한 방법까지 동원되어져있지만 과연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는 수행자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수련법이든 평이한 방법을 내세운 수련법이든 자신에게 효과가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듯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함으로써 얻은 효과가 가장 낫다고 주장하거나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한 수련법이 가장 낫다고 주장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대부분 극한의 인내심을 극복한 사람들임을 감안한다면 하늘은 아무에게나 큰 깨달음을 함부로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다.
비록 큰 깨달음을 얻은 후 자신처럼 극한의 인내심을 극복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고 겸손하게 말해도 결국은 손쉬운 방법으로는 마음에 대한 위안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답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극한적인 인내심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2. 일심동체
그렇다면 일상에서 마음 때문에 고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유자재한 마음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번민하면서 괴로워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몸과 마음은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몸은 없고 마음만 지니고 있다면 육체 때문에 고통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다. 마음은 어느 곳에 얽매이지 않다보니 마음이 한가하게 쉬고 싶으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쉴 수도 있고 빛보다 더 빠르게 우주의 건너편을 다녀올 수도 있다.
마음이 갈 수 없는 곳은 없으며 생각이 닿는 곳에 마음이 가있기 때문에 유무형의 존재를 초월하여 형체이전의 세계인 고요의 극점을 비롯하여 우주의 끝이라도 닿지 않은 곳이 없다. 그것이 신이든 하느님이든 가상의 공간이든 생각이 미치는 곳에는 모두 갈 수 있는 것이 마음이다.
언뜻 보기에는 마음이 자유분방하여 어디든 못갈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태생이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보니 반드시 몸을 의지해야만 자신의 의지를 펼칠 수 있게 되어져 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마음도 홀로서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마음 스스로는 그 어느 곳에도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숙명적 운명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말이듯이 심신은 일심동체로 살아가야만 그 빛을 제대로 발휘하겠끔 되어져 있다.
심신이 한곳을 향해 함께 움직이려면 서로 건강하게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으며 서로를 보살펴주어야만 한다.
몸이 마음을 떠나거나 마음이 몸을 떠나면 서로가 힘들듯이 매일 건강하게 지내야만 아무 탈 없이 지내게 된다.
심신이 한 몸으로 이루어져있는 사람이다 보니 몸이 아프거나 슬프면 슬픈 마음이 일어나고 몸이 건강하거나 기쁘면 기쁜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져 있다.
마음을 담은 그릇인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슬픈 마음이 되기도 하고 기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날씨가 흐리거나 스트레스(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 포함)를 받으면 마음도 함께 그러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고 날씨가 밝거나 즐거운 상태(예기치 않은 좋은 일 포함)가 되면 마음도 함께 그러한 상태에 처해지게 된다.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마음의 향방이 달라지듯이 몸이 건강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게 되면 마음이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가 되고 몸이 아프거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살게 되면 불안함과 불편한 심기로 짜증을 내는 경우로 살아가는 경우와 같다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몸이 고달프면 마음도 고달프다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어떻게 하면 심신을 건강하게 하여 심신양면으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를 노력한 끝에 수행이라는 덕목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일단 심신이 건강하면 아픔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에서는 벗어날 수가 있고 밝고 즐거우면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에 심신양면으로 좋은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경제적인 것만 뒷받침된다면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충분히 누리고도 남기에 옛 성현들께서 절약과 검소함을 덕목으로 내세우며 수행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마음이 몸에 담겨져 있지 않고 허공에 떠있었더라면 육체의 상태에 따라 좌지우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힘들거나 고민에 빠져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번뇌나 희로애락애오욕에 빠져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다보니 마음이 힘들고 몸이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하다보니 마음도 함께 괴롭듯이 몸이 건강하고 즐겁거나 행복한 일만 일어났을 때는 마음도 즐겁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듯이 마음이 몸에 갇혀 산 후 자신의 뜻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은 항상 우주를 향해 우주적인 행보를 거닐기를 좋아하지만 몸을 떠날 수 없는 천형을 받고 태어난 죄로 몸이 아프다고 하면 함께 아파하고 몸이 즐겁다고 하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 몸이 싫다하여 빠져나올 수도 없고 몸이 마음이 싫다하여 내팽개칠 수도 없는 실정이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서로를 위해주며 누가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나 경쟁이라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는 것이 그나마 큰 위안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3. 직업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마음
나이와 경험 그리고 직업과 환경에 따라 환경 친화적으로 응집력을 갖고 마음이 성숙되어져간다.
마음은 신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신체의 상황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다보니 공포에 시달리면 공포스러운 마음이 들고 흥분해 있을 때는 흥분하는 마음이 들게 된다.
신체와 마음은 일심동체이자 바로미터역할을 하기 때문에 역으로 마음이 변하면 신체도 마음이 하자는 데로 따라하게 되어져있다.
몸이 아파 꼼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어도 정신력으로 몸을 일으키면 몸이 마음에 따라 움직여주듯이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상황에 처해있을 땐 분명 신체적으로는 무리인데도 불구하고 극복해내는 것을 보면 심신이 한 몸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유아기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나이와 경험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각자 다름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일 경우 행동 자체가 어린애로 나타나고 노인일 경우 보폭이 느린 노인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듯이 연령에 따라 마음도 그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마음도 그에 따라 응집력을 지니고 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농부일 경우 농부의 마음으로 어부일 경우 어부의 마음으로 나타나듯이 예술적인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예술적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사고와 행동 자체도 그쪽으로 전문화되어져가는 경향을 엿볼 수가 있다. 그리고 법조계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법조계의 분위기인 엄숙하면서도 위압적인 자세로 굳어져가는 것을 보면 직업에 따라 마음도 환경친화적인 응집력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정치계나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스포츠나 무술계통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직업과 관련된 마음이 자라고 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똑같은 마음이지만 연령과 경험 그리고 직업과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지식에 따라 마음가짐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살펴볼 때 일단 지식이 많을 때는 안목이 높아지면서 약간의 여유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지식이나 정보를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하고 정보의 부재 속에서 일을 처리할 때의 행동이 달라지듯이 어느 정도 전문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행동할 때 여유를 가져다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렇게 나이와 경험 그리고 직업과 환경에 따라 마음이 환경 친화적으로 응집력을 갖고 성숙되어져가는 것을 보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마음에 대한 깊이가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가 있다.
물론 직업과 환경에 대한 초월적 마음을 지닌 안목이 높은 사람일 경우는 어느 분야에 종사하든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직업과 환경에 대한 영향이 미치는 것만은 확실하다.
4. 목표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마음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마음은 기본적으로 바람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완벽하게 조절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목표를 세웠을 때는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마음을 살펴보면 수시로 나태해지기를 원하거나 편하고 쉬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힘들고 계산하기 복잡한 수학공식 같은 것을 싫어하며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논리적인 생각보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을 좋아하듯이 마음은 어느 곳에 갇혀 지내기보다는 자연에 방사해놓은 소나 양처럼 지내기를 바란다.
이러한 자연적인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이듯이 소몰이나 양치기인 목동이나 되면 몰라도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힘든 일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
목표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일은 목표를 세우는 일로 시작되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똑같이 목표를 세워놓고도 어떤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목표에 도달한 사람이고 마음을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이 둘의 관계가 언제나 평행선을 긋고 달리는 상황은 아니다.
비록 같은 목표를 세워놓고 달리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상황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시간을 두고 지켜보게 되면 나중에라도 목표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목표라는 것은 그 어떤 장애물이나 험난한 길일지라도 극복하게 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한곳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표를 세워놓고 반드시 이루고자할 때는 마음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목표는 많은데 어느 하나도 완성시킬 수 없는 경우라면 마음을 조절하는데 실패하거나 힘이 분산되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목표를 세울 때는 실현가능한 계획으로 시작하여야하며 단계적으로 극복해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야한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계획을 세우면 대부분 실패하지만 낮은 단계부터 극복한 후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일단 정상에 오르게 되면 높은 수준에서 쉽게 내려올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자격증의 급수인 1급을 취득한 사람이 다른 자격증인 1급에 도전하여 취득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듯이 일단 높은 레벨에 오르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수준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컴퓨터자격증인 정보처리기사를 비롯하여 10개가 넘는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일지라도 목표의식이 불확실하거나 성실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다른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실패하는 것처럼 목표의식이라는 것은 항상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과 반드시 이루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뒷받침되어져야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국가고시나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는 일에 있어 1차(객관식)와 2차(주관식)를 보았다면 대부분 1차보다는 2차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1차는 어렵지 않게 통과해도 2차는 운이 따라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공부한 곳에서 나오면 좋지만 난이도가 높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시험이 출제된다면 손도 대지 못하거나 어렵게 풀고 나와야하듯이 2차 같은 경우는 계획을 잘 세워서 처음과 끝을 철저하게 분석하며 공부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렵다고 피해가거나 소홀하게 다룬다면 그 부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라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만 2차 시험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시험이 그렇듯이 기출문제보다는 응용력을 테스트하는 문제가 많이 출제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마음을 조절하는 일은 확고한 목표를 세웠으면 끝까지 한눈팔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하여 어떠한 난관이라도 뚫고나갈 의지력을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마음을 조절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마음을 조절할 수는 없어도 자신이 세워 논 계획이나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마음을 조절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5. 원격 조정장치
가까이 다가가서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기보다는 일정한 간격을 띄워놓고 마음을 리모컨으로 원격 조정하듯이 움직이는 것이 그나마 마음을 조절하기가 편한 것은 잡으면 사라지고 놓으면 다가오는 속성 때문이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아도 채워지지 않는 남녀 간의 사랑처럼 사랑 그 자체는 만질 수도 보여 질 수도 없는 허공과 같은 존재이기에 개방되어져있는 듯이 보여도 실제로는 잡을 수 없는 거와 같다.
허공과 같은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몸만 부질없이 부려먹고 지치게 만드는 것처럼 모든 일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좋지만 잡을 때 잡고 놓을 때 놓을 줄 아는 마음을 지니는 것을 말한다.
목동이 소나 양을 몰 때 길을 터놓고 몰듯이 한꺼번에 많은 것을 다스리기보다는 한두 개로 중심을 잡고 움직이는 법을 먼저 익혀두는 것이 좋다.
한 분야에 깊이 있게 공부하다보면 다른 분야도 통하듯이 핵심을 먼저 익히고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불필요하게 집착하거나 잡고만 있다면 몸과 마음이 지쳐 함께 쓰러지듯이 적정한 선에서 물러설 줄 아는 지혜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법대를 나와 50이 다 되도록 사법고시 2차에서 매번 낙방한다면 오래전에 자신의 길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게 좋았다고 본다. 이미 나이로 보아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 처하게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공부한 것이 아까워 조금만 더 하다가 세월을 놓치게 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결실 없는 분야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노후에 대한 대처방안도 없이 삶을 설계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서 후회하게 되듯이 젊었을 때 나이와 능력에 맞춰 노후생활을 설계하는 일은 현실에서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우리가 살면서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젊음을 허송세월하거나 때를 기다린다고 세월을 무작정 기다리는 경우가 있는데 항상 현실에 최선을 다하려는 삶을 살고난 후 생각해도 늦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다 보니 과연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가를 알 수 없어 허송세월을 보내거나 때를 놓치는 경우가 있지만 자신의 능력은 자신이 대부분 잘 알게 되어져있다고 본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자신이 해야 하고 판단과 그에 따른 결과도 함께 짊어지고 가야하는 자신이기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야한다.
6.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어진다.
마음이 없었다면 세상은 쥐죽은듯이 조용하고 침묵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온갖 형태가 나타나고 존재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 것은 바로 마음 때문이다.
마음을 없애보아라!
침묵 속에 잠긴 우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지지 않는가?
그동안 마음 때문에 온갖 것들이 나타나 고민과 번민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마음 때문에 숨죽이고 있는 우주를 보아라!
기침한번 제대로 크게 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다른 곳에 맡겨둔 식물인간을 보아라!
비밀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마음이다.
마음만 없다면 세상은 본래부터 조용한 것이다.
동물들이 생물들이 아무소리 없이 행동으로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행위 되어 지면 되는 것이다.
혹시라도 고민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형체이전의 세계에 마음을 던져놓아 보아라!
파문도 시끄러움도 없는 고요의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얻을 것이다.
마음한번 뒤집으면 이렇게 간단한 것이다.
이제라도 침묵으로 일관해보자!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일체유심조는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우주는 일체유심조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일체유심조가 이 우주 속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 때문에 이 우주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흔들 수 없는 것이 우주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일체유심조는 이 우주의 현상을 말한 것뿐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든 모두 다 이 우주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침묵을 지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우주적인 침묵은 그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7. 채워지지 않는 마음
깨달음을 주고 보너스로 보석으로 치장된 이 우주를 다 주어도 채울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화공간이나 획기적인 신제품등을 만나는 순간 잠시의 감동은 있을 수 있지만 또 다시 새로운 문화공간이나 좀 더 획기적인 신제품등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렇게 다 채웠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돌아서면 늘 빈손으로 남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들어 세상이 덧없음을 일깨우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뒤돌아보면 끝에 다다르면 또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빨리 터득한다는 것이다.
하루는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힘이 넘쳐 이 우주를 들었다놓았다할 사람의 기세도 하루가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나싶게 기죽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어제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 이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절망감에 빠져 죽을 것만 같던 사람이 아침이 되자 힘이 불끈 솟아 새로운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자 강한 의지를 불태우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참으로 영특한 것 같다.
자신의 존재를 너무 빨리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원리는 이렇게 간단한지도 모른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일은 하나의 순리이자 삶의 목표이기에 사람들은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 토호들의 비호아래 벽돌공으로 끌려가 현대판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매스컴을 통해 만나보면 일 년 내내 목욕은 고사하고 하루에 빵 한 조각으로 생명을 유지한 채 그 힘든 노동생활을 버텨내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데 참으로 민감하게 발달되어져있는 것 같다.
노숙자나 걸인들을 보더라도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삶의 방식은 다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의해 유지되어지고 있음을 살펴볼 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자로 살면 그것으로 모든 만족감이 충족되어지거나 가난하게 살면 그것으로 모든 만족감이 충족되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있든지 간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은 끝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자나 깨달은 사람들은 그들대로 새로운 고민이 있을 수 있고 산속에 편안하게 지내는 듯한 도인이나 신선들조차 새로운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지적능력이 발달된 생명체일수록 상향적인 욕심이 더 커지는 것 같다.
분명 자신의 힘으로 다 이룰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그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상품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욕심도 그만한 욕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지적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생명체들이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며 자신의 능력만큼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이야말로 성자나 깨달은 사람들보다 훨씬 월등한 존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지적능력을 빼버리면 욕심도 마음도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우주의 최고층에 있는 신이나 인간의 최고층에 있는 이성도 지적능력을 빼버리면 그 의미가 상실되듯이 말이다.
이 우주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채 큰 틀을 유지하며 순환하고 있듯이 어쩌면 이 우주는 지적능력을 초월해서 무심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신의 할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리 없이 침묵을 지키며 이 우주를 하나로 관통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한 일인가?
8. 집착
집착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집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수행에만 매달리며 살아갈 수 없는 이상 배우거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집착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일하고 배우고 명상하며 지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오로지 명상만 하겠다고 한다면 말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하고 배워야하듯이 일하고 배우지 않고 명상만 해가지고는 제대로 된 명상을 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명상을 많이 하는 사람은 명상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지식이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일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서로의 입장에서 보면 서로가 옳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져있고 가장 효율적으로 시간을 쪼개서 효용적가치가 높은 시간으로 활용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미비한 점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출발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경험과 자신의 지적능력에 따라 판단하게 되어져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데로 아는 만큼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명상을 주장하든 지식을 주장하든 일을 주장하든 큰 관점에서 보면 집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가 옳게 생각되어지고 정당화되어지다보니 마치 자신만이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은 서로가 집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은 집착하면서 남들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말하면 모순이듯이 성자가 되었던 깨달은 사람이 되었던 형체이전의 세계로 환원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설법을 하던 교화를 하던 집착에서 단 한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깨달은 사람이나 일반인들이나 똑같이 집착하면서 살아간다면 무엇 때문에 깨달아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집착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일반인들이 집착을 하면 놓을 줄 몰라 한다면 깨달은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집착에서 놓을 줄 아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분명 집착하면서도 집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깨달은 사람들은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겉만 보지 않고 그 안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크게 흔들리거나 웬만해서는 중심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중심이 서있다는 것은 여유로 이어지고 급박한 순간에도 잠시의 여유를 틈타 침착하게 대응해나가려는 무의식이 작동되어져 옆에서 보면 감탄을 할 정도로 비쳐질 수도 있다.
똑같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있을 수 있다는 말은 큰 틀을 유지한 채 모든 사물을 대하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 지식 그리고 모든 사물을 바라보면서 담담할 수 있는 마음이 드는 것은 모든 감각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빛의 폭풍 속을 지나 가장 안쪽인 고요의 극점에서 모든 사물을 세워놓고 보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라는 것은 그 어떤 단단한 금강석일지라도 빛의 소립자로 환원되어져 단단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기체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본원적 모습으로 화해졌음을 뜻한다.
하나 속에는 이념과 사상 그리고 모든 물질이 우주적인 용광로에 모두 녹아 원형으로 화해지기 때문에 고체도 유체도 기체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속에서는 너와 나의 구분, 물질과 비물질의 구분, 현실과 사후세계마저 모두 녹아 들어가기 때문에 형체를 들어 따로 내세울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
집착은 누구나 다 갖고 있지만 이렇게 어떤 모습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집착도 되어 질 수 있고 집착을 벗어날 수도 있게 된다.
9. 마음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다면 우주는 분명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존재하면서 구분을 짓고 온갖 것을 다 나타내듯이 문제는 마음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혼동이 오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식물인간처럼 마음만 없앨 수 있다면 이 우주는 처음 모습처럼 조용하고 아무 일 없는 일처럼 생명이 꿈틀거리듯이 그렇게 꿈틀거리며 살아가는 일로 일생을 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이 구분하지 않고 말없이 행위로서 존재하듯이 사람에게 마음만 없었다면 이 세상에서 선악을 구분하고 죄를 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나에 대한 구분과 옳고 그름을 구분 짓게 하여 성자들이 정해 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업으로 몰아가는 일도 처음부터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와 자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혜성의 충돌 및 초신성 폭발 그리고 뇌성벽력을 포함한 자연재해인 태풍과 지진 등 선악의 상반된 현상들을 무시한 채 유독 인간에게만 선악이라는 굴레를 짊어지게 하여 원죄로 몰아가는 일은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고 본다.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만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자신의 모든 행위가 선으로 비쳐지도록 유도할게 아니라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보아야한다고 본다.
기준이라는 것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처럼 현실에 맞지 않는 기준은 언젠가는 수정되어지듯이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무시한 선만을 내세우는 것은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고 본다.
선악보다는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원리로 풀어나가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10. 잡을 수 없는 마음
마음을 마음대로 조절하기란 형태이전의 세계인 고요의 극점에 들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로 마음이 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을 완벽하게 조절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절대의 고요 속에서조차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람 마음이듯이 깨닫고 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 같은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얽매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만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어떠한 형태로든 마음 가는 데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공존하는 선악에 노출되어져 선을 좋아하는 사람은 선을 좋아하면서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을 좋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간섭할 대상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간섭하고 제재를 가해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마음이 존재하는 한 간섭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뜻대로 살게 되어져있는 것이 원죄를 들먹이며 업으로 해석하기이전에 현실적인 문제이자 이치라고 본다.
물론 불안한 악보다는 편안한 선을 선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리인 것처럼 강함과 전쟁을 연상케 하는 악보다는 부드러움과 평화를 연상케 하는 선을 선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선을 행한 사람은 선하게 살아가고 악을 행한 사람은 악하게 살아가듯이 그렇다고 별도로 제재를 가하거나 근본적으로 싹을 잘라낼 수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마음대로 완벽하게 마음을 조절해나가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이 성자가 되었던 깨달은 사람이 되었던 힘든 것이 사실이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에 의해 변화되어지기 때문에 자극이 처음부터 없다면 몰라도 실생활에서 자극을 받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움직이게 되어져있다.
성자들이나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극과 반응을 나타내며 지내게 되어져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예 처음부터 자극 없는 세상에 살면 몰라도 자극을 받고 살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이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극과 반응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져있다.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끊임없는 자극 속에서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상대성의 원리에 의해 자극을 받고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듯이 마음에서 자극을 빼놓는다면 당장에 무료해지거나 이미 죽은 거나 다름이 없게 된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수행이라는 길을 걷지만 깨달음을 얻은 이후일지라도 여전히 마음으로부터 해방되어질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깨달음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깨달음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보니 앞에서 막으면 뒤로 빠져나가는 것이 마음이다. 그만큼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감정 없는 나무나 목석이 된다면 몰라도 마음을 잡기위해 수선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마음은 처음부터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데로 움직이다보니 바람 가는 데로 쫓아가거나 길을 터줌으로써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방법이라고 본다.
마음은 형체이전의 세계로 환원해 들어가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존재하며 깨달음을 붙잡고 눈을 뜨나 감으나 마음 따라 흔들리게 되어져있다.
아무리 일상에서 명상에서 잠자리에서까지 깨달음만 붙잡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없듯이 마음을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에 마음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집착을 잡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11. 중용의 정신
마음은 정신계를 좋아하고 물질계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둘의 조화가 만족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자극을 받기를 원하고 반응하기를 원하고 있다.
물질로 태어난 사람의 몸이기에 정신적인 행복만으로는 살 수 없듯이 반드시 최소한의 물질적인 충족감이 있어야만 삶을 지탱해나갈 수 있게 된다.
사람에게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게 된다면 당연히 불만을 표시하게 되어져있다.
산처럼 쌓인 좋은 말로 정신계가 좋다고 설득을 해도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듯이 최소한의 물질적인 충족감도 없이 어느 한쪽만을 내세우게 되면 오히려 경제적인 어려움과 불행을 초래하게 되는 거와 같다.
우주의 원초적 점인 고요의 극점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환상과 이상향에 젖어들어 우주의 끝을 탐구하려는 정신계는 부피나 양을 측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온갖 화려함과 편리함을 내세워 귀족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욕심과 욕망이 존재하는 한 물질계는 포기라는 것을 모르며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가 멸망한다 해도 그칠 줄 모르는 열정을 나타내게 된다.
정신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변한다면 물질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계로 형성되어져있어 한마디로 어느 것이 더 높고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세계인 지구와 우주를 보더라도 그 크기가 만만하지 않을뿐더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월하다는 논리는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행위로 나타날 수도 있다.
과거에 정신계만 믿고 환상과 이상향에 젖어 살던 때를 생각해본다면 과학이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천안통과 천이통 그리고 축지법 등이 특정인을 대상으로 과거에 펼쳐졌다면 과학은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특별한 수련을 통하지 않고서도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과학의 힘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과학이 우주를 측정하거나 정신계를 다 밝혀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필요이상으로 낮게 평가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신이 직접 과학을 연구하거나 개발하지 않았다고 필요이상으로 과소평가한다면 과학자도 정신계에 빠져서 정신계만 가장 우월하다고 내세우는 사람에게 똑같이 과소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음을 알아야한다.
실제로 과학을 연구하거나 개발해본 사람들은 아는 일이지만 과학을 개발하는 일도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서로 어느 한쪽만을 내세우게 되면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 시키는 계기가 되듯이 서로의 장단점을 존중해 줄줄 아는 관용의 마음이 필요하다.
중용의 정신은 그래서 중요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상태에 이르러 살기를 바라는 것이 중용의 정신이기도 하다.
12. 인위적인 간섭을 싫어하는 성자들
마음은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듯이 마음도 마음 가는 데로 움직이도록 해주는 것이 좋다.
선악을 구분해서 선만을 행하라고해도 악을 행하듯이 어느 한쪽만을 내세워 강조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살면서 느끼게 된다.
성자가 되었던 깨달은 사람이 되었던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하고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주어도 자신이 싫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듯이 마음은 자신의 뜻대로 해야만 성장하는 묘한 존재이다.
실패를 통해서 성공하듯이 마음은 모든 것을 경험해본 후에야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는 묘한 존재이다.
마음이 목표점을 정하거나 현재 진행 중일 때는 옆에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 많다.
자신의 의지가 그러하고 마음이 그리로 향해있을 때는 그 결과가 어떤 곤란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지금 현재는 마음이 가는 곳에 진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음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는 수밖에 없다.
나중에라도 스스로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몰라도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성자나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교화하거나 설득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성자나 깨달은 사람도 사람이고 자연의 순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자연이 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는 일밖에는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태풍이 불고 뇌성벽력이 치며 지진이 일어난다할지라도 그렇게 되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연은 모든 일에 인위적인 간섭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자연을 보고 스스로 동화되어져 젖어 들어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지내는 것을 보더라도 자연은 인위적인 간섭을 가장 싫어함을 느낄 수가 있다.
모든 일에는 간섭을 해서 통하는 경우가 있고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인위적인 간섭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것이고 성자나 깨달은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일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왜 마음대로 살도록 놓아두어야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 뒤에 걷는 사람들> - 청아당 엄상호 詩
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이야말로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다.
손에 들고 다녀본 사람들만이
무거움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며
한없이 겸손해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언제든 교만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
생김새도 같고
능력도 별반 다르지 않고
똑같이 하루를 걷는 사람들
너무나 평범하여 무엇이 다른지 구분이 서지 않는다.
보통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면
완성 뒤에 걷는 사람들은
막힘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이것만 빼놓고 다른 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신비도 자주 보면
평범해지는 것처럼
신비를 보기위한 수련보다는
경계 없는 곳에서 지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종교에 거처하는 사람은 종교적인 모습으로
세속에 거처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모습으로
산속에 거처하는 사람은 탈속적인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원한다.
요술처럼 도술을 부리거나 각종 현란한 이적을 행해주기를
병든 사람을 고쳐주거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그리고 신선이 되어 불로불사하거나
해탈하여 끝없는 윤회가 반복되지 않기를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듯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때로는 실수도 하고
넘어지면서 다시 일어서는 일을 반복하는 것
목석처럼 감정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 따라 움직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똑같은 모습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극과 극을 달리듯이
사람들의 눈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만나면 실망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는 평범한 사람
경계가 없는 곳에서
말장난보다는
침묵을 더 좋아하며
편안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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