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수행과 생활
산 향기를 맡으며 산길을 걷는 기분은 그 어떠한 삶보다도 경쾌하고 밝은 모습일 것이다.
때 되면 산새가 날아들고 꽃이 피며 온갖 생명들이 줄지어 다니는 산길. 그곳에 호젓한 옹달샘이나 생명수와도 같은 약수가 준비되어져있다면 거기에다 폭포수가 흐르는 곳이라면 이태백의 산중문답을 굳이 읊지 않더라도 도화 꽃이 만발한 이곳은 별천지요 인간세상이 아닐 것이다.
속세를 벗어나서 신선 같은 생활을 한다면 참으로 때 묻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소음은 산새소리로 대신하고 거문고와 가야금은 폭포수로 대신하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끌어다 집을 지으면 그보다 더 멋진 선경은 없을 것이다.
무거운 짐을 덜어내고 홀가분하게 살아간다는 것 역시 모두의 꿈일 것이다.
수행을 하는 이유는 속세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속세 속에서 신선과도 같은 생활을 즐기기 위한 작은 여유이다.
수행과 생활을 병행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지만 목표가 있는 곳에 꿈과 희망이 있듯이 우리들은 작은 여유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걸음이 가볍다는 것은 마음이 가볍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수행은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가볍게 한다.
발걸음이 가볍고 마음이 가벼우면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가볍고 경쾌하여 한없이 달리고 싶어 할 것이다.
수행은 바로 이러한 맛에 하는 것이다.
등에 진 짐을 덜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진 짐이 가벼워지도록 수행을 하는 것이다.
발걸음이 가볍다면 세상은 살만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가볍다면 이 우주가 다 자기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살만하고 우주가 다 자기 것인데 무겁게 손에 들고 다니겠는가?
홀가분하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 손에 잡고 있으면서도 손을 놓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수행은 고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고행이 필요한 것뿐이다.
수행은 마음을 깨우치는 일이다.
마음만 깨우치면 더 이상 구할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이다.
마음 한번 뒤집으면 모든 게 다 자기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 서로 떨어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1.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인다
눈에 보이는 데로 아는 만큼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일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면에서 탁월한 면을 보일 것이라는 환상은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삶은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고 깨달음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이 흔들리는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쯤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지만 사람에게는 깨달음보다 더 소중한 것이 경험적인 삶이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벽을 허물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꿈같은 일이지만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땅을 밟고 서있는 현실이다.
깨달음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가 있다
하나가 선적인 깨달음이고 또 하나가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다.
선적인 깨달음은 어느 한순간 대오 각성하는 돈오를 말하는 것이고 호흡을 통한 깨달음은 기를 빛으로 빛을 단으로 느껴가는 과정에서 빛의 폭풍 속에 갇혀 우주적인 현상을 느끼며 깨닫는 고요의 극점(진아 포함)을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개념이지만 결국 마음을 통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에 어떤 방법으로 하든 궁극적인 깨달음만 얻으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깨달음은 마음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면에 잠들어 있는 마음만 흔들어 깨울 수 있다면 깨달음의 길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데에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손쉬운 방법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상에서 전문가로 들어서는 길도 쉽지 않듯이 전문가의 과정보다 더 어려운 깨달음의 길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늘은 아무에게나 깨달음의 세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반드시 하늘이 정해 논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한테만 보여주고 있음을 볼 때 수행자로서의 자세와 정성이 없이는 깨달음의 세계에 근접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선적인 깨달음과 호흡을 통한 깨달음은 서로 그 위치가 바뀔 때가 있다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호흡을 통한 깨달음을 경험할 수도 있고 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선적인 깨달음을 경험할 수도 있다.
선적인 깨달음이 되었던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 되었던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주적인 현상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선적인 깨달음과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 위치가 바뀐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호흡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련자가 깨달음에 이르는 열량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기치 않은 어느 순간 선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서로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도 내면에 잠들어 있는 마음만 흔들어 깨울 수 있다면 대오 각성하여 고요의 극점에 드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충분한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성공할 수 있듯이 어떠한 난관이라도 반드시 극복하려는 불굴의 정신인 수행자의 자세와 하늘을 감동시킬만한 정성만 갖추어진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꿈과 이상을 갖고 환상을 꿈꾸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수행자에게는 수행자에게 맞는 삶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생활에 맞는 삶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자들이 홀가분하게 걸어왔던 삶을 똑같이 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분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다르듯이 따라 하기 방식으로 그렇게 똑같이 살기를 바란다면 인간 상품밖에 더 되겠는가.
홀가분하게 거칠 것 없는 홀로된 몸과 가족이 딸려있는 사람들을 비교해본다면 그 차이는 확연하게 나타날 것이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주어진 곳에서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홀로서기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히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신이 편안하다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데로 홀가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살아가라고 말을 한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자신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하게 일하고 배우고 명상하면서 삶의 구조방식이 다른 사람들한테 자신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형평에 어긋나는 처사라고 본다.
성자들처럼 똑같이 살지 못하거나 성자들이 정해 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놓은 선각자들도 문제지만 그대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성자들의 깨닫기 전의 행동이나 깨달은 이후의 삶을 살펴보아 일상에서 텍스트로 받아들일만한 것들인가를 냉정하게 살펴볼 기회를 따로 가져보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성자들의 일부의 행동과 말에서 규범적인 부분들을 발견할 수는 있어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있기 마련이다.
진아를 발견하고 고요의 극점에 들다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뼛속깊이 느끼게 된다.
너와 나를 구분할만한 근거도 없고 자연이 말없이 서있는 거와 다를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자들이 정해 논 잣대에 맞지 않으면 원죄로 몰아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신들부터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구에게 원죄를 묻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준이라는 것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워놓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우주적인 차원에서 포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 부족한 현실에서 원죄를 들먹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솔직히 현실에서 성자들처럼 살아간다고 해도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냥 자연스러운 일들을 가지고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수선을 떠는 모습들은 옆에서 보기에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것만은 사실이다.
밖에서 배회할 때는 그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달이 날 수도 있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생활하다보면 이미 하나로 동화되어져 뭐가 좋은지 따로 구분이 안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사람 사는 일은 성자가 되었던 범부가 되었던 다 평범한 일이다.
열심히 살아온 범부의 일생이나 성자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범부가 중년이나 노년에 가서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승들이 나이 들어 그동안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자책하는 일이나 성자들이 날마다 후회하는 일보다 오히려 더 나은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것은 자신을 세우면서 자신을 지탱해준 삶의 기둥이기에 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한 아름다운 삶을 성자들이 걸어온 길과 다르다고 해서 자책하고 자신을 내던지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따라 하기 방식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으면 조용히 혼자 즐거워하면 그만인 것이다
결코 사회생활을 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없는 상대적인 평가 아래에서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 정해 논 법도에 의해 몸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채 말로만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한량가적인 기질보다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현실적인 삶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열정이 있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가 보이지 않는 족쇄에 갇혀 살면서 서로 자신의 삶이 더 낫다고 해보아야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된다.
사람에게 자극이 없다면 죽은 송장과 다름이 없다
자극을 통해 반응이 일어나듯이 탄력성이 클수록 자극이 클 수밖에 없다.
이는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자극 없는 삶은 생각해볼 수 없는 거와 같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공존하는 선악으로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그 속에서 보다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말로만 떠드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현실은 냉정하고 치열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자신을 세우는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은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기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도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명상에 드는 것은 자신을 갈고 닦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기 위해서이다.
처음부터 알고 가는 길일지라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 없듯이 경험적인 삶은 현실이자 뼈를 깎는 고통의 길이다.
현실을 무시한 삶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현실과 이상이 서로 다른 상태에서 서로에게 좋은 것만 요구한다면 갈등 아닌 갈등으로 고민에 빠져들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실은 성자들이 존재했던 시대나 지금이나 어떤 한사람의 말에 의해 좌지우지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성자가 부활하면 새로운 세상이 올 것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자 한사람 때문에 좋은 세상이 온다면 성자가 존재했던 때에 그렇게 되었어야했다.
지금도 성자들에 버금가는 많은 각자(覺者)들이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성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꾸만 헛소리를 하여 오히려 갈등 아닌 갈등을 더 부채질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태어난 데로 자신의 능력대로 살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자신을 세우고 깨달음을 얻어도 크게 달라질 것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내세워 깨달음을 높여보아야 한낱 공염불밖에 되지 않는다.
현실은 현실적일 때 가장 아름답듯이 명상을 통해 홀가분하게 건져 올린 한량가적인 성자들의 말에 크게 움직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깨달음도 현실이고 삶도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어떤 것이 더 낫다는 식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살아가는 일은 현실적이고 반드시 이상적인 삶이 현실과 맞아떨어져야만 한다는 이유도 없다.
삶과 깨달음이 현실 속에서 서로 융화할 때 자연스러운 것처럼 깨달음만으로는 현실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성자나 성직자들도 직업이 수행과 관련이 깊어 장인정신에 의해 쏟아져 나오는 말들을 정리해놓은 것처럼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성자나 성직자들처럼 똑같이 살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자연이 제자리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해나가듯이 서로의 위치에서 서로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그런 자리가 된다면 그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속세를 악의 소굴로 몰아가는 일이나 범죄의 온상지로 몰아붙이는 일은 자신만 가장 고결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취급하게 하는 몰상식한 처사에 불과하다고 본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자체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무리 고결하게 살아가는 성자나 성직자들일지라도 먹는 음식에서부터 시작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은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한테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면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유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성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물에 짜여진 데로 그렇게까지 숨 막히게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현실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명료하며 예상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은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없다.
똑같이 걸어가는 길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홀로 걸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을 스스로 세워나가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홀로서기를 준비해나가야 성공할 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이 아름다우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진리이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보는 것마다 다 아름답게 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시켜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아름답게 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비교의식을 갖고 덤비면 서로가 추해보이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서로를 아름답게 보아주는 정신이야말로 현실적인 삶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2. 깨달음을 얻어도 흔들리는 마음
깨달음을 얻으면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유지한 채 모든 것을 초월하며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삶과 깨달음을 놓고 본다면 분명 깨달음이 상위개념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위치에서 항상 상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삶보다 깨달음이 위에 있기를 강조하지만 삶에서 지쳐있을 때를 위한 이상향으로 그려놓은 경우가 많다.
마음은 깨달음보다 위에 존재한다.
깨달음을 얻고도 마음을 잡기위해 고승들이 집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깨달음을 놓지 않으려고 깨달음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마음은 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삶은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마음은 더욱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살다보면 아는 일이지만 결국 깨달음도 현실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한 나이를 먹을수록 깨달음과 현실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현실이야말로 깨달음의 보고이자 실천의 장이다.
깨달음은 모든 것을 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꿈과 이상에 젖어 바람처럼 사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 충실하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느끼는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 경제를 빼놓는다면 살아가야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반드시 부를 얻기 위한 경제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삶을 지탱해나가려면 경제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오죽하면 원죄의 뿌리인 세속을 멀리하는 종교마저도 경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도시가 싫은 사람들은 시골이나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 하고 시골이나 산속이 싫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와 살고 싶어 한다.
산속에 산다고 해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야할 자유가 주어져있다 보니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야할 의지가 있다.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던지 자족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이다.
삶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적인 삶이라면 깨달음은 허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삶이다
삶은 피와 땀을 요구하며 실천력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게 한다면 깨달음은 허구적인 안락과 평안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허무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사람들은 환상과 이상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이 다 자신의 것 같고 또 바람처럼 홀가분하게 사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살펴본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삶은 모두가 소중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장난에 함께 덩달아 춤을 출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토록 깨달음에 대해 집착을 하는지는 몰라도 다 벗어놓고 보면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힘들게 깨달았으니까 차별화를 두기위해 가장 높고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올려놓고 바라만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지는 몰라도 사실 손에 넣고 보면 그렇게까지 높이 올려놓아야하는지 의문이 간다.
사람 사는 일은 평범한 일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게 되면 삶을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는 단점이 노출되어져 남보다 더 많은 삶의 회의를 달고 사는지도 모른다.
순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나약해지거나 순수한 직업을 찾게 되어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지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무시한 삶은 살아가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현실을 무시하는 듯한 언어에 갇혀 바람처럼 살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후회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보호하기위한 안전장치를 말장난으로 해놓았지만 깊이 있게 따져보면 하나도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이 많다.
다 던져놓고 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면 텅 빈 공허 속에서 건질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느끼게 된다.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무시하면 남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자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삶에서 자연스러움을 빼놓는다면 살아있는 송장과 다름이 없다
시대에 맞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항상 과거만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것도 모든 것을 놓게 만드는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게 하는 선도사상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지나온 시대를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치열한 현실을 무시하고 유유자적하게 한량처럼 살기를 바래서는 안 된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으로부터 다 놓고 살기를 요구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는 삶은 재수정되어져야한다고 본다.
현실은 조직사회이고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중심축과 맞물려 있는 톱니가 빠져나간다면 함께 무너지게 되어져있다.
함께 가야할 길에서 빠져나간다면 응집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그마한 힘들이 모여 큰 힘을 이루듯이 현실을 회피하기보다는 서있는 자리에서 모든 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피를 나눈 가족애로 사회를 구성해 나가듯이 한솥밥을 먹으며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서로를 위해주는 일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록 서있는 자리가 힘이 들어도 다함께 가는 길이기에 서로를 위로하며 힘있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 바람을 가르는 삶도 뒤돌아보면 후회가 남는 법이다
사람 사는 일에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현실에서 달릴 수 있는 삶이 실상인 것처럼 현실에 서있으면서 허공에 떠있는 삶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눈뜨면 다가오는 현실을 현실 속에서 달리지 않고 꿈속에서 달리려고 한다면 결국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은 회의를 감수하면서 살아가야하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경험적인 삶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깨달음보다도 경험적인 삶이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 삶을 초월할 수는 있어도 경험적인 삶까지 초월하지는 못한다.
삶을 초월했다고 경험적인 삶까지 초월하지 못하는 것은 깨달음을 말장난으로 가지고 놀지 못하도록 하늘이 쳐놓은 그물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삶과 깨달음이 현실 속에서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현실적인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3. 고목처럼 되기 위해서는
무심하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초월 뒤에는 자유스러움이 다가오지만 그만큼 삶에 대한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움직이지 않아도 다 알기 때문에 게을러지고 자유스러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사람을 비롯하여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동적인 삶이 없다면 무료해서 살아가야할 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것은 바로 동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성자들이 입이 닿도록 바른 삶만을 강조해왔지만 홀가분하게 건져 올린 한량 같은 성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무쇠돌이처럼 앞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정이 있다
그리고 역사가 있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서로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사람이 살아가야할 이유는 바로 이 맛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 정을 빼놓는다면 이미 죽은 나무나 다름이 없다.
인터넷과 정보화가 발달된 사회이지만 아직도 사람의 정이 통하지 않으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상과 공상에서 만날 수 있는 환상이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원동력은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꿈이 잘못된 꿈일지언정 그 꿈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에 알면서도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깨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만 막상 깨달음을 얻어도 별다른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무심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고상하게 산다던 신선 같은 노래도 사실 알고 나면 한낱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이야깃거리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숱한 고행을 통과해야 하지만 초월 뒤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 깨달음에 대한 진상이다.
사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듯이 어쩌면 깨달음은 처음부터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깨달음을 얻어도 또 다시 동적인 삶을 살아가야할 사람들임을 잘 알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일상을 피해 허송세월하는 수행자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들이야말로 깨달은 사람들보다 더 앞서가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따로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미 깨달음 속에서 동적인 삶에 더 열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깨달음보다는 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평범한 삶이 더 자유스럽고 편안하기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만큼 아는 만큼만 살아가야할 이유는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무료한 삶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서있는 나무들일지라도 바람 없이는 하루도 무료해서 견뎌내기 어렵듯이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깨달음이 전부인 걸로 착각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난 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은 마음을 다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깨달음보다 훨씬 높은 데에 있다 보니 깨달음으로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가끔씩 마음을 잡았다는 깨달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집착을 잡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장난을 좋아한다. 특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꾸미기를 좋아한다.
깨달음만 얻으면 그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마음을 잡아가두어 무심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음식도 먹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도록 최첨단 보안장치를 설치해놓기를 좋아한다.
깨달음 뒤에도 배워야할 것이 많다
깨달음만 얻으면 그 모든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만 가지고는 배가 고파 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공부를 별도로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깨달음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허풍 적이고도 소설적인 이야기들은 다 걷어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좋다.
깨달음은 현실을 떠나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이기도 하다.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지 깨달음을 높이고 손댈 수 없는 곳에 매달아두려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그 모든 혜택을 따로 베풀지는 않는다.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똑같이 수고를 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성자들이 처음 말했을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은 사람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숨 막힐 정도로 꿰뚫어보고 있는 성자들이 허튼 소리를 했을 리는 만무하다.
먹기에 불편한 보기 좋은 떡만을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을 그어놓고 벽을 높이 쌓아놓게 된 것은 추종자들이 스승에 대한 예의를 너무 높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고목은 저절로 고목이 되어 지지는 않는다.
그만큼 세월이 모여야 하고 갖은 풍파에 시달려보아야만 고목이 되어 질 수 있다.
그것이 정적인 삶이든 동적인 삶이든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고목이 되어 진다.
4. 결론 :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눈으로 똑같은 걸음걸이로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겉으로 단단하게 입혀진 껍질을 벗겨보면 안에서 남모르게 움직이는 우주적인 힘을 발견할 수가 있다.
자신을 당당하게 세워나가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만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안이하게 지식 속에 묻히거나 활동 없는 삶은 쓸모없는 쓰레기로 통하는 거와 같다.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은 머릿속에 담아둔 지식은 서고나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거와 다름이 없듯이 적극적인 활용가치가 없는 저장장치에 담아둔 지식들은 그대로 사장되어질 수밖에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소멸되어져가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무능력한 활동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너무 드러내놓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너무 안이하게 살아가는 것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살아가게 되어있다.
게으르면 게으른 만큼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야하고 부지런하면 부지런한 만큼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어져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부지런하게 움직여 발품이라도 팔아야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남보다 낫게 살아가려면 서있는 자리에서 변화를 향해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변화는 경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쟁은 곧 경제적인 밑바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누가 더 많은 경제적인 부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경제를 바탕으로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항상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경제야말로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인류역사의 뿌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씩 행복의 조건을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풍요를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경우가 있지만 국가를 이루며 생활하는 인간에게 수시로 목을 조여 오는 외적압력과 내적압력의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향에 파묻혀 안이하게 정신적인 풍요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본다.
후진국에서는 생각해볼 수 없는 복지시설을 선진국이 될수록 복지시설이 눈에 띄게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더라도 경제적인 풍요는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데 있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많은 후진국들이 따뜻한 인간미가 실종되는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체계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더라도 경제는 자신을 당당하게 세울 수 있는 밑바탕이 됨과 동시에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를 윤택하게 해주고 나아가 자신을 세워나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변화는 남보다 앞선 올바른 정보를 통해서 발전 계승되어져 가듯이 예나 지금이나 발 빠른 정보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위해 세계 각국에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남모르게 활동하는 첩보원(정보원)들을 살펴보더라도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본다.
정보라고하면 단순히 첩보활동을 통한 정보만을 뜻할 수도 있지만 멀티미디어와 지식을 통한 각종 생활정보는 이미 정보전이 일상화되어 대중화에 들어섰음을 알 수가 있다.
정보는 개인의 지식을 확대해 나가는 지적능력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지적능력을 측정함과 동시에 자신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상대방의 숨겨진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도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상대를 누를 수 있는 힘으로 통하는 장점도 있지만 시야가 넓어짐과 동시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거대한 힘으로 통하기에 발 빠른 정보는 그만큼 여유를 줌과 동시에 강력한 힘으로 작용되기도 한다.
남보다 앞선 정보획득을 위한 노력은 삶에 대한 방향을 가늠함과 동시에 부정부패의 온상지로 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정보획득을 위한 노력은 먹이사슬에 걸린 원시시대를 기점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무슨 일이든지 고통과 희생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변화도 끊임없는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태초부터 변화가 시작된 이래로 잠깐이라도 변화를 멈추게 되면 그것으로 도태된다는 속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경험과 연륜 그리고 연장자를 가릴 것 없이 자나 깨나 변화를 꿈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경험과 연륜이 있고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연장자를 따로 대우 해줄 것이라고 행복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꿈에서 깨어나는 법부터 배워야할 것이다.
변화는 나이를 불문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그 즉시 날선 칼날 음을 휘두른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변화는 그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게으른 행동을 보일 적에는 가차 없이 도태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변화는 계획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혹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고 변화가 멈춘다는 순박한 생각은 처음부터 내려놓는 것이 좋다.
변화는 태초에 시작된 이래 지금껏 멈추어본 적이 없는 가장 활동력이 왕성한 우주적인 힘으로 존재한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보다나은 유토피아적인 고품격의 환경과 마음대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편리한 생활을 위해 변화는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적절한 속도조절을 통해 변화는 힘을 얻어 달릴 수밖에 없다.
시대가 변할수록 변화의 속도도 빨라지고 충돌과 격변의 과정도 비례해서 나타나게 되어져있다.
차면 넘치고 모자라면 채워 줘야하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이듯이 힘이 쏠릴 때는 힘이 쏠리는 데로 움직이게 되어져있다.
변화의 물결이 가속도를 받을 때는 그에 맞게 속도를 높여 주어야한다.
적절한 속도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때를 놓치게 되면 그대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촉수를 세워 카멜레온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는 변화의 몸통에서 한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변화라고 하면 어렵게 느낄 수도 있지만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자신을 불살라 예술혼을 불어넣은 창작품이나 신소재를 통한 신기술을 연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변화라고하면 예술혼을 통한 창작품이나 신기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는 자신을 새로운 방향모색에 올려놓고 행동이나 지식을 바탕으로 상향적인 모습으로 탈바꿈되어져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변화는 기존의 틀을 바꾼다는 의미도 있지만 기존의 틀을 유지한 채 미래를 주도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려는 속성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기존의 틀에 갇혀있기보다는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어 하는 변화를 통해 무기력한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줌과 동시에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는 촉진제로서 원초적 감각을 불러일으켜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변화라고 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무소의 뿔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생명주기가 짧은 게 단점이다.
생명주기가 짧다는 것은 생명력이 잡초처럼 강인하지 못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생명력은 언제 어디에서 쓰러질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충분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보살펴주지 않으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변화의 물결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거나 안심을 한 순간 변화는 떠나가기 때문에 그때 가서 잡으려고 하면 이미 늦는 경우가 많다.
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예측이 가능한 규칙적인 변화와 예측이 불가능한 불규칙적인 변화로 구분되어진다.
규칙적인 변화는 씨앗을 심은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정한 성장의 폭을 유지한 채 예측이 가능한 형태로 자라나는 것을 말하고 불규칙적인 변화는 예측할 수 없는 성장의 크기로 성장거리가 단축되어지거나 길어져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변화를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써 불규칙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변화를 향해 움직이지 않으면 혹독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리고 특별한 준비 없이 계속해서 잘 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 속에 묻혀 다가오는 변화를 읽지 못한다면 도태되거나 뒤처지게 된다.
대기업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구에 몰두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다가오는 변화에 대처하고자하는 강력한 의지의 발로라고 말할 수가 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거나 행보를 늦추게 되면 그대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지기 때문에 미래를 향해 철저하게 준비하며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세월이 흐를 때 그냥 흘러가는 법은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전에는 없던 새로운 것들이 돌출해서 나타나고 귀중한 가치를 지니지 않은 물건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게 되어져있다.
시대를 주도해나가는 연구를 통해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거나 돌출되는 현상은 현실이 현실 속에 안주하지 않고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도 미래를 향해 이양되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어차피 현실은 미래를 향해 달릴 수밖에 없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고단한 삶을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남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에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을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다.
변화는 창조를 통한 생명력이자 무료한 현실을 자극하는 촉진제이다.
변화는 창조적인 세계를 여는 기틀로 작용하면서 무료한 현실을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활력소로 자리한다.
아무리 현대과학으로 완벽한 현실적인 만족감에 처해 있더라도 싫증을 빨리 느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지 않으면 숨이 막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옥죄임을 탈출하기위해 변화라는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변화는 미래를 향해 달리는 것도 있지만 욕망을 불러들여 고독과 무료함에서 탈출하기위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욕망이라고 하면 언뜻 부정적인 측면을 연상하게 하지만 욕망이 주는 긍정적인 측면은 경제의 바탕이자 삶의 활력소로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욕망은 가슴에 품은 불덩어리를 태우기 위해 존재한다.
목표만 주어진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결과를 향해 달리려고 하는 것이 욕망이다. 또한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향해 달리는 것도 있지만 일회성 충족감을 가장 으뜸으로 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욕망은 하루를 위해 존재하는 하루살이처럼 충족된 욕망을 뒤로한 채 채워지지 않는 또 다른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도 자주 보면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자고나면 신제품과 신기술 그리고 창작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은 변화를 자극하고 변화는 욕망이 요구하는 일회성 충족감을 채워줌으로써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하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욕망과 변화의 만남은 필연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변화가 욕망이 하자는 데로 무조건적으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
변화도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가 있는 이상 욕망에 좌우되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변화는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함부로 욕망에 내어주지 않을뿐더러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비록 욕망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는 있지만 욕망에선 찾아볼 수 없는 고품격의 향기가 깊이 스며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변화의 모습 속엔 계절로 따지면 모든 것을 벗어던진 겨울 속에서 봄을 맞이하는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겨울은 모든 생명이 정지해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만 정적인 상태에서 동적인 활동으로 변화를 꿈꾸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동적인 침묵 속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되어지고 소멸되어져 가고 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변화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고독과 무료함에서 탈출하기위해 끝없는 경쟁을 시사하고 있음을 살펴볼 때 변화가 없는 곳엔 숨조차 함부로 쉴 수 없는 죽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보다도 변화하지 않으면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벗어버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변화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변화를 통해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지탱하기 위해 미래가 필요한 것처럼 무엇을 위한 목적보다는 달리지 않으면 숨 막히는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미래의 끝을 살피기보다는 변화를 등에 업고 미래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변화 없는 세상은 생각해볼 수 없는 것처럼 변화를 통해 삶의 의욕을 느끼고자하는 것은 완벽한 현실보다는 창조적이면서도 파괴성이 강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파괴습성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힘을 동원한 수행이든 종교적인 기도를 통한 수행이든지 생활과 수행이라는 한 울타리 속에서 행위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행과 생활> - 청아당 엄상호 詩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삶이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도
구분을 지어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고목이 아닌 이상
흔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데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기쁨도 슬픔도 밖으로 내비쳐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부동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왜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을
감정도 없는 목석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한없이 겸손해지려고 할 때 놓아두지 못하고
교만해지도록 부추기는가?
다 알고 나면 배울 것이 없듯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을 뒤돌아보면
손에 쥘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
자연 앞에 서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처럼
깨달았다고
높은 영적인 힘을 얻었다고
자연이 그 사람만을 위해 따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있던가를
자연 앞에 서면
모두가 평등한 것처럼
깨달음을 얻었던 깨달음을 얻지 못했던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깨달았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교만과 아집으로 틀을 세우고
정숙한 요조숙녀처럼 홀가분하게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아니면
간섭과 부대낌이 적은 깊은 산속에
홀로 우뚝 선 황금소나무처럼 살아야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태어난 데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윤회를 들먹이며
영적 능력을 높이려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이루기 힘들기에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라는 소리밖에 더 들리겠는가?
그래서 많은 수행인들은 너도나도
생활은 내팽개치고
수행에만 전념하려고 하지 않은가?
도대체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그 야단법석인지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한다.
숲속에 들어가 나무들을 살펴보아라?
깨달은 나무들이 어디 한둘인가를
차라리
방랑끼 많은 마음을 지니고
사람으로 태어나기보다는
나무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더 빨리 깨닫지 않은가?
윤회를 통해 거듭 성장하려는 영적 진화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축지법을 쓰고
공중을 날아다니며
우주를 마음대로 허물고 만들어내는 일은
영적인 세상이기에 가능하지 않은가?
현실은 과학이 아니면
지구 밖을 튕겨나갈 수도
우주를 여행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영적인 진화는
사후세계에서는 성장되지 않고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가능한가?
꿈과 이상 속에서는 자유의지에 의해
하룻밤사이에 궁전을 지었다 허물수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과학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은가?
상상과 투시는 환상을 낳을 수 있지만
과학은 현실이지 않은가?
그리고 사후세계도
현실세계의 연장선이지 않은가?
그것도 통합된 사후세계가 아니라
동서양으로 분열된 인간적인 사후세계로
튀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연결되어있지 않은가?
우주를 향해 열려있는 시야를 묶어두고
왜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사후를 생각하고
현실을 판단하는가?
불교적인 사후세계
기독교적인 사후세계
각종 종교적인 사후세계를
들먹이기 전에
종교부터 통합해야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우주가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잣대로 바라본 사후세계가 너무나 혼란스럽지 않은가?
지구가 멸망한다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구에 새로운 세계가 건설된다하여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깨달은 사람이든
깨닫지 못한 사람이든
삶속에서는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을
지역주의처럼
특혜주의처럼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나
깨달은 사람만이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발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깨달으면 땅을 밟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지를
숨도 쉬지 않고 우주와 통한다고
특별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궁극의 세계를 보고
내면에서 찬란한 광휘로 온몸을 뒤덮는다하여
범인들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는지를
전생을 보고
우주 구석구석 다니면서
여행담을 들려준다하여
크게 달라질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자신 위에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처럼
자기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데로
변하리라고 생각해서는 큰 오해라고 한다.
깨달음은 단지 본래의 모습을 보는 것이요
느끼는 것뿐이라고
우주는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달리는 현실이고
마음으로 모든 것이 변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옛 성자들은 정보의 부재 속에서
주관적인 우주를 생각하며
인간을 위한 우주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추종자들은 말한다.
옛 성자들을 오랜 세월 다듬어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성과 기쁨으로 가득한
완벽한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그리고 발달된 과학의 힘으로 우주를 보면서
옛 향수에 젖어
종교를 위한 과학은 신앙처럼 높이 받들고
종교를 헐뜯는 과학은 불신으로 몰아간다.
꿈과 이상은 가공할 수 있지만
현실은 실제상황인 것처럼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충실해야한다고 한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목표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듯이
현실에 충실하기위해서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해야한다고
일부의 각자들은 과학의 혜택을 받고 살면서
부작용이 많은 과학을 천대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인류의 꿈을 현실로 나타나게 해주는 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과학이듯이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과 영적인 세계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해 보아라?
과거의 막연한 환상과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졌는지를
기적 같은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순수한 힘이 동원된 과학이지 않던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세계와
발을 딛고 선 현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현실 세계에서는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아야하고
영적인 세계에서는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한다.
현실 속에서 사후를 생각하고
사후에서 현실을 생각한다면
혼란 속에서 현실을 살 뿐이다.
혼동은 여기에서 출발한 것처럼
현실에 살 때는 현실적인 감각으로
사후에 살 때는 사후적인 감각으로 살아가야한다.
많은 사람들은 꿈을 꾼다.
우주가 인간이 생각한데로 움직여주기를
우주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우주를 이용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듯이
인간은 우주속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고
우주는 인간을 단지 포용하는 것뿐이라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주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생각해야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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