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깨달음과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사후세계
깨달음은 마음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이다.
마음의 비밀을 밝혀내면 깨달음은 저절로 다가와 안부를 물을 것이다.
깨달음은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높은 곳에 매달아놓을 만큼 위대한 것은 아니다.
삶을 한번 생각해보아라!
살아가는 방식은 다들 비슷비슷할 뿐이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또 빈부의 격차를 벗어나서 삶 그 자체는 인간적인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미라는 것은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듯이 일상적이며 평이한 삶의 모습을 시인의 손에 의해 시적아름다움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해서 세상이 그와 같이 변하지는 않는 것처럼 본질적인 형태는 그 누구의 손에 의해서도 변질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달라지는 일이 없듯이 우주 자체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주면서 함께 손을 맞잡고 변화의 대열에 놓여있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관점에서 필요에 의해 기준을 세우다보니 그렇게 불리워지고 있는 것 뿐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동의 존재인가?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우주 본연의 모습 말이다.
참으로 대단하고 위대하지 않은가?
숱한 성자들이 뒤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우주를 보면 삶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삶은 흔들리면서 사는 것 같지만 그 어떠한 흔들림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부동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다.
가만히 숨죽이며 함부로 밝혀서는 안 될 우주의 원초적 비밀을 감춰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젖 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젖 한 모금이라도 더 물리는 것처럼 그렇게 흔들어대는 인간에게 이 우주는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들은 끈질긴 데가 있는 것 같다.
무엇이 그토록 보고 싶은지는 몰라도 시대를 달리하여 태어나는 사람마다 우주의 비밀을 열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우주의 품에 안겨본 사람만이 느껴볼 수 있는 그 황홀한 맛을 그 누가 알겠는가?
과거의 성자들이 입을 꼭 다문 채 이러한 비밀스러운 경험을 말하지 말았어야했는데 자제력과 절제력을 잃어버린 채 후계자들에게 비밀스럽게 전수해준 바람에 지금껏 전승되어져 왔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나 성자들이나 좋은 것은 참지 못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좀 방정맞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혼자서만 느끼고 후계자들에게 전수해주지 않고 죽어버렸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 되겠는가?
역시 재채기와 사랑은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좋은 것은 성자들도 감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생각을 해보아라!
그 좋은 것을 감춘다고 감추어지겠는가?
벌건 대낮에 햇볕을 가려본 들 가려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나 성자들은 정에 약한 것 같다.
그놈의 정 때문에 역사는 시작되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무리 깨달음을 얻어도 사람의 정을 뿌리칠 수는 없는 일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정머리 없는 듯한 컴퓨터세대들도 정에는 약한 것이 사람인 것이다.
사람에게 정을 빼놓는다면 그야말로 삭막해서 하루도 살지 못하고 모두다 우주 속으로 빠져죽거나 자살을 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놈의 정 때문에 오늘 내일 죽는다던 사람들도 힘을 내어 또 다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살아가고 있듯이 정은 사람에게 있어 만병통치약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결국 깨달은 사람이나 성자들일지라도 인간적인 행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떠한 행위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바로 본연의 모습이 아닌가?
인간적인 아름다움은 바로 이러한 곳에 있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지 않아도 스스로 높아지는 하느님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춰 논 성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안심하고 이 우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경쾌하고 아름다운 발걸음인가?
자신을 높이지 않고도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하지만 뼈와 살을 깎아낸 듯한 고통의 깊이로 서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고 했던가?
고통의 깊이로 서있는 사람들은 역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신을 낮출 줄 알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진짜로 사후세계가 궁금할 때가 많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사후세계이지만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통해서라도 사후세계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후세계에 대한 혼란만 더 가중되어져 무엇이 진실로 사후세계인지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만다.
세상에서 기준을 내세워 중심을 잡고 있는 것처럼 사후세계도 기준을 잡아 세계지도가 완성되어지듯이 사후세계를 그려 논 우주지도를 완성시켜놓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생각을 해보아라!
죽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이를 먹어야만 해당되는 것인지를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 아니던가?
더구나 이 우주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거나 그 어린 것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아라!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 한 장 없이 떠나보내는 그 애틋한 심정은 말로 다 풀어놓지 못할 것이다.
홀로 외롭게 그 무서운 곳에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 심정은 그 무엇으로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횃불도 없이 따뜻한 전송도 없이 그리고 깜깜한 밤길을 걷듯 빛 한줄기 없는 어둠의 세계를 걷는다고 생각해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설 만큼 등골이 송연해지지 않던가?
물론 가끔씩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순간이동이나 축지법을 쓴 듯한 발 빠른 동작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올라가 안전하게 사후세계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승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남은 자의 몫은 슬픔 그 자체일 것이다.
하기야 요즘에는 과학의 혜택을 입어서인지는 몰라도 미확인비행물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후세계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제는 죽음도 무섭지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사후세계의 화려한 모습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눈부시고 광채가 나고 있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현란스러운 천국의 모습이라든지 악취와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지옥 그리고 불구덩이 속에 갇혀 활활 타오르는 연옥 등 사후세계의 기본적인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과학이 발달된 만큼 사후세계도 많이 변하고는 있지만 사후세계가 통일되지 않고 춘추전국시대처럼 혼란스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취향과 종교에 따라 맞춤형 사후세계까지 탄생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우주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더구나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사후세계의 구조를 보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깨달음과 사후세계는 느껴본 자만의 소유물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깨달음을 얻고 싶으면 느껴보아라!
사후세계가 보고 싶다면 나중에 죽어서 직접 확인해보아라!
그리고 느껴본 자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은 그대로 존중해주자!
마치 신의 영역처럼 말이다.
1. 편 가르는 사후세계
사후세계나 영적인 세계를 접할 때 느끼는 것은 인간적인 조직체계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점이다.
성자들을 비롯하여 영적으로 높은 단계를 획득했다고 하는 일부 깨달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사후세계가 인간적인 위주로 형성되어져있다는 점이다.
사후세계는 사후세계에 맞는 구조적인 모습으로 재조명되어져야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모여 사후세계를 형성한 곳이라서 그런지 인간적인 모습으로 재배치되어 인간적인 모습을 사후세계에서도 똑같이 재현해내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항은 종교나 종파가 달라도 하나같이 인간세계에서 악을 행하면 사후세계에 있는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진다는 위협적인 겁주기로 단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는 통일되지 않아도 인간을 겁주는 일에는 마치 단합대회라도 연 것처럼 단합되어져 있다.
우주에는 인간 외에도 우주인들이 존재할 수 있고 우주인들도 죽으면 한곳으로 집결될 텐데도 불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우주인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조그마한 지구위에서 동서양으로 구분된 채 각 종교나 종파를 달리하여 무리를 져서 사후세계가 생겨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기왕에 생겨난 사후세계라면 좀 더 철저하게 통일된 모습을 유지하면서 설득력 있게 호소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지구처럼 지구가 네모난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또는 둥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처럼 제각각 불명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에서처럼 물질문명의 근간인 과학의 힘에 의해 천문학과 세계지도가 완성되어지듯이 사후세계에서도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과학의 힘이 동원되어져야 형평이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해가 바뀔수록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지구처럼 사후세계도 과거에 고정된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과학을 동원하고 정신문명의 발달을 꾀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사후세계를 편 가르기 방식인 남북분단이나 동서양으로 경계를 세워놓을 것이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홍보활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경계(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한 윤회를 통해 번거롭고 복잡한 방식을 택할 것이 아니라)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2. 사후세계의 조직체계
사후세계에서 인간적인 조직체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들이 발견되어지고 있다.
빈부의 격차와 사회적인 명성 그리고 계급과 직위에 의해 차별화되어지는 현상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사후세계에서는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나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수행이 깊은 사람들 위주로 재배치되는 현상을 보면 인간세계나 사후세계나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연결되어져 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세계에서는 능력과 물질위주로 배치되어진다면 사후세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물질계를 떠났다고 생각되어서인지는 몰라도 물질보다는 정신계에 해당되는 영적인 능력과 종교적인 믿음 그리고 수행의 깊이에 따라 재배치된다는 점이 색다르다.
인간세계나 사후세계나 개성이 강한 사람과 튀는 사람만이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지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문이 남는다.
신도 약한 자의 편보다는 강한자의 편에 서서 도와주듯이 인간세계나 사후세계나 항상 강한자만이 높은 지위를 획득하고 부가가치를 누리는 것을 보면 일단은 자신을 세우는 일부터 우선시하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자기위주로 모든 일이 생겨나고 사라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자신부터 높이 세워놓고 그 다음 자리를 내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거나 세우지 않으면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하게 인식시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닫기 위해 숱한 노력을 쏟아 부은 대가를 보상심리를 통해 되받으려는 심리가 작용되어지는 것처럼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자리부터 세우는 일에 급급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중생들이나 신도들은 가장 낮은 단계로 깎아내리거나 악의 소굴로 정의한 후 한 단계라도 자신의 위치를 높여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노력한 결과에 대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높은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게 나타나고 있다.
성자들을 비롯하여 일부 깨달은 사람들의 욕심을 들여다보면 인간세계에서도 최고의 높은 대우를 받으려하고 죽어서조차 최고의 대우를 받으려는 발상이 너무 지나칠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항상 강자의 자리가 우선적으로 예약되어지거나 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성자들을 비롯하여 말하는 당사자부터 선착순으로 고위직을 차지하려는 것은 인간적인 행복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영적인 높은 단계를 말하면서 깨달은 사람의 기준도 갖가지 자신의 잣대로 기준을 세워놓고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수행의 근기를 저울질하면서 남을 비하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사실 영적인 높은 단계라는 것은 심안을 통해 영적인 사후세계를 투시하는 것을 일컫는 말인데 투시라는 것도 주관적인 데가 많다보니 누가 옳고 그른지는 정확하게 판별하기가 힘들다.
가끔씩 일부 깨달은 사람들이 미래를 예언하지만 맞는 것보다는 틀린 것이 더 많듯이 남북통일이 1988년 이전에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19년이 넘도록 통일이 되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정보가 풍부하지 못한 귀중한 시절에는 천안통과 천이통을 내세우며 별세계인 것처럼 신통력을 과시해 왔지만 지금에야 천안통과 천이통 그리고 신통력이 대부분 이루어지다보니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적어진 것이 사실이다.
천안통은 영상매체와 디지털 컴퓨터를 통해서 아날로그 방식인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사후세계를 비롯하여 각종 예언적 투시를 훨씬 뛰어넘었고 천이통은 인공위성을 통한 유무선 방식을 도입한 화상전화의 발달로 과거의 천이통을 훨씬 뛰어넘었고 축지법과 순간이동은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우주선의 개발로 과거의 기준들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사후세계와 대화를 하거나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를 그리는 일인데 이것도 머지않아 밝혀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본다.
물론 위의 예처럼 영적능력과 투시를 통해서 보는 천안통이나 천이통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그 느낌이나 사실적 접근방식에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영적인 세계나 사후세계를 말하는 자신들은 대부분 객관적인 관점에서 말하지 않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말하다보니 말하는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그림으로 나라마다 색깔과 배경이 다른 사후세계를 놓고 서로 경쟁하듯이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같은 종교인조차도 보는 사람에 따라 명확하게 그려진 사후세계인 우주지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배경과 유사한 형태만 남발되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더라도 근본적으로 사후세계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더구나 동서양의 종교를 비교하거나 타 은하계의 우주인까지 끌어들여 확대해석해서 살펴보게 되면 그 의문의 증폭은 더욱 배가 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들은 마치 꿈을 꾸는 현상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됨을 알 수 있다.
꿈은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에 잔존해있는 형상들 위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동양인들이 꾸는 꿈은 서양인보다는 동양인 위주로 꿈에 나타나고 그리고 한국인일 경우는 주로 한국인 위주로 나타나는 것이 상례이다. 물론 외국여행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동서양인이 혼합되어서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경험반경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꿈과 사후세계가 마치 의형제를 맺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3. 맞춤형 사후세계
우리는 그동안 사후세계에 대해 많은 의문점을 제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같은 내용의 사후세계를 놓고 서로 다른 배경과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가하는 의아심이 들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사후세계가 다르고 그리고 종교마다 다 다른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개개인의 취향이나 종교에 따라 마치 맞춤형 사후세계처럼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마법 같은 현상인가?
어떻게 똑같은 사후세계를 놓고 이렇게 서로 다른 사후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이러한 현상은 우리 인간들이 신을 빙자하여 제멋대로 사후세계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진정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렇게 묻고 싶다.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와 더불어 세계풍속에 따라 의상이 천차만별이듯이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러한 풍속으로 의상을 입고 있는지 그리고 천국보다는 지옥이 더 큰지 아니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인류사적 연대기로 인구조사가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묻고 싶다.
이미 <4장 구원에 대한 유혹>에 나와 있는 우주신에서 살펴보았지만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한 성자들이나 신흥종교 교주들에 의해 탄생된 무분별한 사후세계 때문에 맞춤형 사후세계가 탄생되어진 것이다.
앞으로도 신흥종교가 계속해서 탄생된다면 맞춤형 사후세계의 수효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혹시라도 의심이 간다면 임사체험자들이 말한 사후세계를 정확하게 분석해보아라!
서로 다른 배경으로 개개인의 취향과 종교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그려내고 있는 사후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공통점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세계를 거침없이 설명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퍼즐 맞추기처럼 사후세계의 지도를 그려보아라!
이정표도 없는 사후세계에 대해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물론 코드를 잘못 찾아들어가거나 관제탑의 통제도 없이 길 없는 길을 가다보면 행로를 놓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다른 배경으로 그려진 사후세계라는 점이다.
아무리 우주가 크고 넓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이 관장하는 우주인데 나침반 하나 없이 사후세계로 불러들이겠는가?
위성항법장치를 작동시켜 사후세계를 손쉽게 찾아들어갈 수 있도록 사후세계의 지도를 만들어낸다면 몰라도 아직까지는 개별적으로 사후세계를 찾아들어가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을 하루빨리 더 발전시켜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정표도 없이 사후세계를 찾아들어가야 할 사람들을 위해 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더 분발하거나 노력해야할 것이다.
4.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절대자가 진정으로 인류를 구원해줄 뜻이 있었다면 각 종교나 종파를 통해 윤회를 거치게 만들거나 복잡한 절차를 내세워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어야했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태어나다보니 갖가지 무성한 소문만 남발되고 사후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우주지도를 그릴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지구의 과학이 더 발달되면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가 완성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소문으로 전해 들으며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절대자가 인류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적어도 통합된 종교관이나 동서양을 하나로 묶는 일관된 사후세계라도 만들어 놓았어야했다. 그랬더라면 사후세계에 대한 소문을 미리부터 잠재우며 사전에 혼란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의 뜻에 반하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절대자를 영접하려는 뜻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목적을 합리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을 따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차별화정책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교리만이 가장 우수하다는 점을 내세운 것은 절대자에 대한 겸손이 아니라 교만과 오만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절대자를 들먹이며 자신의 말을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보장된다는 유혹으로 몰아가 인류를 구원하기는커녕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리는 우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성자들 말이라면 과거에는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정신계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성자들 말이 인간적인 면에서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후세계나 정신계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은 검증받아야한다는 목소리가 강도 높게 높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동안 철저하게 검증받지 않은 채 수천 년을 유지해오는 동안 신비스러운 존재로 가려지고 우상화되어져버린 성자들의 인간적인 본모습을 재조명해 보아야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시점에 와있다.
자연치유력이 강한 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고치고 이적을 일으키며 투시나 영적인 능력을 동원하여 마치 신비주의처럼 환상을 심어 논 성자들의 기적 뒤에는 인간적인 면에서 재검증해보아야 한다.
성자들 말이라면 상전 모시듯이 지금도 여전히 미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일부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입혀진 우상을 벗겨내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은 일이다.
최고의 연마술사를 동원하여 가장 화려하게 입혀진 변질된 원형을 다치지 않고 복구하려면 고고학자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하게 변질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신비에 쌓인 신비로운 존재를 벗겨내는 일이 어찌 하루 이틀에 벗겨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추진하다보면 어느 순간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올 것이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성자들이 우상화되어진 과정들을 군사정권시대에 비쳐보면 우매한 국민들을 선동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다루는 헌법이나 대권을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바꾼 독재자들의 행태와 유사한 점이 많음을 볼 수 있다.
수행이 깊고 영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성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까지 위대하게 우상화되어져야한다는 점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본래의 모습을 보았다고 자연이 그 한사람을 위해 따로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 없다보니 그 당시에 너무 수선스럽게 떠들고 다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겸손해야하는 입장에서 깨닫자마자 자신의 생각을 숙성할 충분한 시간도 없이 전국을 순회하며 법회를 여는 것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깨달음이 무엇인가?
마치 난이도 높은 자격과정을 취득하거나 박사과정을 거치는 일과 같지 않은가? 공인된 국가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박사과정을 통과한 후 실무적인 작업에 들어가려면 또다시 실무에 적응하기위해 공부해야하듯이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것처럼 현실적인 실무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깨달음부터 전한 것은 일반인들이 보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숙성되지 않은 생각을 전파하는 일이 얼마나 교만하고 오만한지를 알게 된다.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듯이 평생을 배우며 인간적인 삶을 병행해야만 완성의 길에 이를 수 있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는다. 그것이 성자가 되었던 깨달은 사람이 되었던 우선적으로 현실에 적응하는 법부터 깨우쳐주고 있기 때문에 예외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깨달음으로 들뜬 사람들을 현실과 자연을 무시하도록 함부로 놓아두지 않을뿐더러 현실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사람들을 현실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깨우쳐주며 현실에 적응하도록 만들어놓고 나서야 안심을 하듯이 현실은 깨달은 사람도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차별이나 구분을 두지 말고 현실적으로 살아가라고 끊임없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야한다.
가끔씩 깨달은 사람을 별종으로 취급하거나 자기 자신을 별종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지양해야하는 부분이다.
5. 필요이상으로 내세우는 영적인 부분들
일부 깨달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면 영적인 부분들을 필요이상으로 내세우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과거의 성자들을 기준으로 따라 하기식 답습과정을 밟은 것처럼 너도나도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마치 깨닫지 못한 것처럼 생각하며 누가 더 높은 영적인 세계를 말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서로 다른 그림으로 나라마다 색깔과 배경이 다른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영적인 세계를 경쟁하듯이 나열해놓는다.
깨달은 사람이 영적인 세계를 보는 것이 무슨 특권인양 한없이 자신을 높여놓고 1급 비밀문서 다루듯이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이다.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수선스럽게 서로 경쟁하듯이 나열해놓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신비라는 것은 처음 한번 볼 때가 신비스러운 것이지 매일 똑같은 현상을 대하게되면 나중에는 평범으로 묻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처녀가 순결을 잃게 되는 경우와 같다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대하는 영상매체나 컴퓨터세계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가장 높게 평가되어지고 있는 영적인 세계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를 대한다고해서 그 사람의 지위가 높아지거나 고차원적으로 변하지 않듯이 아무리 높은 영적인 세계를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적으로 높아진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그러한 영적인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가 높아진다면 매일 영상매체와 멀티미디어를 자유롭게 다루는 네티즌과 컴퓨터 전문가들은 이미 단계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야 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될 수 있다.
물론 공부하다보면 기초과정을 지나 중급과정과 고급과정이 있을 수 있지만 고급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대단한 상태라도 되는 것 같지만 막상 통과하고 나면 더 이상 남는 것이 없듯이 공부하는 과정이야 깊이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것이지 다 알고 나면 손에 쥘만한 것들이 없는 거와 같다. 모를 때야 알기 위해서 안달을 부리지만 솔직히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들을 뒤돌아보면 부와 명예, 지식 그리고 깨달음을 통과할지라도 진정으로 남는 것이 없는 거와 같다. 더구나 그것이 깨달음을 목적으로 공부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이러한 현상은 깊게 남을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기준은 도토리 키 재기 방식인 높은 영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투시를 비롯하여 각종 영적인 현상(진아=참 자아 포함)들을 체험하고 기의 퇴적층에 따른 풍부한 우주적인 기를 통해 모든 현상을 초월한 형태이전의 세계인 고요의 극점에 이르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는 기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누가 더 높은 영적인 세계를 경험했느냐 또는 누가 더 높은 선계에 오르느냐의 기준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된다.
깨달음은 어떤 현상들을 가지고 구분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느낌을 획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볼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한다.
가끔씩 현상적인 것들을 내세우며 깨달음에 대한 기준을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방식은 주관적인 개입으로 서로 자신의 것이 더 낫다는 비교의식을 나타내기 때문에 지양해야하는 부분이다.
깨달음은 원초적 느낌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듯이 높은 영적인 세계를 앞세우며 깨달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승부수를 띄울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인 사후세계로 승부수를 띄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깨닫고 나면 적어도 3년에서 10년 이상 현실에 적응하면서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며 생각을 숙성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한다고 본다.
가끔씩 깨달은 사람들은 예상외의 행동이나 오만방자한 행동을 해야만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여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비쳐진 적도 있지만 성격이상에서 오는 행동이 아니라면 성실하게 살아나가는 것이 나중에라도 지탄을 피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어 진다.
물론 깨닫고 나면 모든 것이 마치 제 것인 양 들뜬 흥분을 지닐 수도 있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냉정해지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그만큼 실수를 많이 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너무 앞장서지 말아야한다.
깨달음은 교만으로 이어지기 쉽고 모든 것을 아는 것 같은 행동을 하기 쉽기 때문에 자신을 누르는 일에 평생 동안 투자해야하는 또 다른 짐을 짊어지고 산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을 누르는 일은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항상 필요한 것처럼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깨닫고 나면 자칫하면 현실과 괴리된 현상으로 인해 환상적인 부분에 젖어 살 수도 있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한다. 그렇지 않고 섣부르게 깨달음에 대해 말하거나 마치 정신적인 세계만이 가장 우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게 되면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지고 실제로 그 정도가 심해지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게 되어 진다.
인간적인 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면이 가장 대우를 받듯이 인간적인 면을 떠나게 되면 자신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현실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현실을 떠나서는 한 발짝도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현실에 있는데 정신적으로 다른 세계만을 추구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받게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부 깨달은 사람 중에 깨닫고 나면 조금이라도 더러운 물이 섞이지 않은 1급수 청정지역에서 놀아야만 진정으로 깨닫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이상 깨달음에 대한 환상은 지워지기 힘들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필요이상의 결벽증환자처럼 깨달음에 대한 갈망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지극함에 이르면 별다른 기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맞을 뿐이며 본연임을 알 뿐인데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높이 세우고 티끌하나 묻지 않도록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호하려는 발상은 보기에도 민망할 뿐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산속이 아니라 침묵 그 이상속에서도 흔들리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는 현실을 1급수 청정지역에서만 놀기를 바란다면 감정 없는 나무토막이나 목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에는 나무와 새, 바람과 구름, 계곡과 물을 보면 흔들리는 것이 사람 마음이듯이 잠시 눈을 감고 호흡에 드는 동안 흔들리지 않은 마음을 유지했다고 마치 모든 것에 초월했고 어떠한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면 도대체 그것이 사람인지 나무인지 한번쯤 냉정하게 살펴보는 기회를 가져야한다고 본다.
아무리 눈을 감고 호흡에 들었다고는 하지만 침묵 속에서조차 흔들리면서 사는 것이 사람 마음이듯이 남보다 조금 덜 흔들리는 것을 가지고 차별을 두려는 발상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중의 하나라고밖에 할 수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남과 비교하면서 차별을 두라고 한 적이 있는지를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부와 명예, 지식뿐 아니라 깨달음일지라도 자연 앞에 세워놓고 보면 자랑할 것이 없듯이 자연 앞에 서면 모두가 평등할 수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워 차별을 하려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지워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깨달으면 우선적으로 높은 영적인 세계를 들먹이며 다른 수행자들과 비교부터 하려고하는 발상은 누구한테 배웠는지는 몰라도 깨닫기 전에 남들과 비교하는 법부터 제거하는 연습을 해두어야 할 것 같다.
6. 부동심(不動心)에 대한 오해
깨닫고 나면 모든 일에 초월은 할 수 있지만 일부 깨달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 없는 나무토막처럼 미동도 않는 행동으로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알고 가는 길일지라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는 없듯이 삶은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다. 오히려 사람이면서 나무인 것처럼 나무이면서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는 일이 보기에도 민망하듯이 깨달은 사람이 흔들리면서 산다하여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다가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오히려 남들과 똑같이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인간적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고상한 척 살아가는 것이 더 지탄받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일반인들이 속세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듯이 일부 깨달은 사람도 자신의 취향에 맞춰 산속이나 고상하고 편안한 곳에서 부대낌 없이 살아가야할 자유의지는 가질 수 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일은 누가 간섭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해주는 것이 당연하다할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이 도시와 맞지 않은 사람은 농어촌에서 또는 화전민으로 살아가듯이 산에서 살던 종교적인 거처에서 살던 간섭할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의 뜻이 그러하면 그렇게 살아가듯이 자유의지는 분명하게 보장되어져야한다고 본다.
하지만 깨달음을 보전하거나 유지하기위해 의도적으로 악의 소굴을 피해 고상하고 편안한 명당자리만 찾아다니며 수행에만 전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지탄받아 마땅하다할 것이다.
깨달음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려고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말로는 초월했다고 해놓고서 오히려 더 집착하는 꼴밖에 안되기 때문에 남 보기에는 고상하게 보이고 마치 진짜로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그 내면을 파고들어가 보면 깨달음에 대한 정의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깨달음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마음은 상향적인 욕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든 번뇌와 잡념 그리고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앞으로 마음에 대해서 더 깨우쳐야만 한다.
마음은 눈을 감으나 뜨나 한시라도 그 자리에서 오래 있으려고 하지를 않는다.
틈만 나면 밖으로 나다니려고 안달을 부리거나 무슨 자극을 줄만한 재미있는 현상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잠시도 몸을 가만두지 않는 것이 마음이다.
이러한 현상은 절대의 고요 속에서 숨도 쉬지 않고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예외가 없다.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으면 무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달래주려면 절대의 고요 속에서조차 현상을 쫓거나 마음을 달래줄만한 자극적인 현상들을 찾아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다만 질적인 측면에서 조금 다르다고 자신은 절대의 고요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면 혼자만의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전형적인 정신병자에 속한다할 수 있다.
마음의 속성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기본 패키지로 깨달음을 주고 보너스로 천국과 찬란한 보석으로 치장된 우주를 다 준다하여도 가슴이 허전해하는 것처럼 마음을 잡겠다고 수행에만 전념한다면 평생을 매달려도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냥 산이 좋고 종교적인 장소가 좋아서 안주한다면 인간적인 면에서 이해는 하지만 깨달음을 의도적으로 간직하려는 태도는 보기에도 민망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구분할 필요는 없는데 이상하게 구분하고 높이 치켜세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깨달았다고 현실세계에서 특별하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대우만 높이 받으려고 위장전술을 펴는 일부의 깨달은 사람들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왜곡현상이 일어났지만 깨달았다고 특별하게 대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깨닫기 위해 노력한 보상심리를 받아내기 위해 현실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주관적인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일반인들을 속이기 위한 연막작전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들끼리 부딪히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며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깨달음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힘들게 깨달았으니까 자신을 대우해달라고 조르지 않은 이상 모두가 평등한 것처럼 서로의 구분을 없애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인 것이다.
7. 원초적 감각과 중심 잡힌 삶
깨달았다고 절대자의 대변인이 되었다고 해서 인류에게 진정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것을 다해줄 수 있는 것처럼 수선을 떠는 것은 모양새가 좋다고 볼 수 없다.
현실에서는 현실에 맞는 삶이 존재하고 사후세계에서는 사후세계에 맞는 삶이 존재하듯이 서로의 경계를 존중해줄 아는 배려가 있어야한다고 본다.
현실은 인간적인 힘이 아니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성자들보다 일반인들이 더 빨리 깨달은 것을 보면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는 성자들보다 일반인들이 더 현명한지도 모른다.
나중에 이루어질 꿈만 꾸다가는 꿈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모두 죽을 수 있기에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반인들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성자들이 인류를 구원해준다고 약속해도 결국에는 자신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원초적 감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아니면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성자들이 보면 질겁을 할지도 모르지만 산처럼 쌓인 좋은 말 중의 일부만 남기고 모두 쓰레기로 사라지는 것은 자신과 부합되지 않거나 과부하상태에 걸렸다고 판단이 들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성자들이나 깨달은 사람만 놓을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일반인들도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것들은 성자들이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주고 자신의 말이 좋다고 설득을 해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지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잡는 법만 알고 있는 걸로 착각한 사람들이 많지만 위급한 상황에 처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면 놓음으로써 과부하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일반인들이야말로 현실적인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은 자신이 움직여야 이루어지듯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하나도 없다. 항상 자신의 손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이상 평생 남에게 의지하며 자율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타율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처럼 중심은 자신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해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자들이 인류에게 무엇을 해주려고 그 야단법석을 떠는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늘 빈손이듯이 인간시스템 상 공존하는 선악을 바탕으로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윤회를 들먹이고 사후세계로 겁을 주는 일은 지금이라도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본다.
툭하면 전생과 윤회를 들먹이며 숱한 생을 순환하게 만드는데 이 또한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전생이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 영적으로 통하는 여러 사람들이 과거의 유명인사인 한사람(최치원 또는 이순신 등)을 놓고 서로 자신의 전생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시대의 수많은 현생인들이 서로 자신의 전생이라고 주장한다면 인간복제나 분신술을 쓰지 않는 한 과연 진실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영적진화는 사후세계에서는 안되고 왜 인간으로 태어나야만 가능한지에 대한 검증도 없이 과거의 성자가 주장했기 때문에 수레바퀴 돌아가듯이 돌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인간으로 태어날 때 영적진화를 위해 수행을 깊이 있게 하라는 말 때문에 너도나도 생활은 내팽개치고 수행에만 전념하려고 하듯이 실제로 깊은 수행을 끝마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쯤 냉정하게 생각해보아야한다.
그리고 인간세계에서 생활하다 죽으면 사후세계에서도 그와 같은 똑같은 수준에서 지낸다는 것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기초과정을 밟든 고급과정을 밟든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듯이 무엇을 위한 노력이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가끔씩 기초과정과 고급과정에 대한 차이를 들먹이며 기초과정에 있는 사람이 고급과정에 있는 수준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말로 핀잔을 주면서 아직은 영적으로 진화가 안 되어서 위대한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일이다.
기초과정에 있던 고급과정을 마쳤던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서는 안 된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나이어린 사람보다 세상물정을 더 잘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느낌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예민하듯이 서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고 따지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원초적 감각이라는 것은 깨달음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느낌을 한순간에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듯이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나가는 것이 더 현명하다할 것이다.
사후세계에서 편안하게 지내려고 영적진화를 높이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 공로로 사후세계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삶은 현실이고 치열한 삶의 경쟁을 극복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깨달았다고 하늘이 그 사람을 위해 모든 불행과 고난을 면제해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많은 시련과 삶을 놓을 때까지 일반인들과 똑같이 부지런하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 하늘의 뜻이듯이 더욱더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야할 의무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깨달았다고 하늘이 그 사람을 위해 특별하게 해주는 것도 없는데 왜 자꾸들 엉뚱한 소리들을 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신을 놓거나 겸손함으로써 자신을 높일 수는 있어도 집착하거나 교만을 앞세워 자신을 높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듯이 자신을 높이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욱 초라해지거나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8.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
말처럼 행동처럼 인류를 구원해줄 수도 없으면서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차라리 침묵하는 것보다 못하다.
인류를 구원해주겠다던 성자들 말만 믿다가는 모두가 굶어죽을 수도 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개척해나가려는 인간의지로 물질적인 것(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해주지 않은 채)을 멀리하라는 성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과학을 발달시킨 인간의 힘이야말로 성자들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말로만 떠드는 무능력한 성자들보다 훨씬 빠른 판단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일부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물질이나 물질문명을 가까이하는 것을 벌레 보듯 하는 경우가 있는데 참으로 몰상식한 경우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기가 대신 65억이 넘는 인구의 의식주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의 심신이 홀가분하다고 물질을 벌레 보듯 하는 경우는 도대체 어느 세계에 살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정신적으로 풍부하게 살면 물질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꿈은 아름답고 현실은 냉혹하듯이 자신부터 물질계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물질적인 혜택은 어디에 두고 물질을 벌레 보듯 취급하는지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물질이라는 것도 반드시 과학문명의 혜택을 입은 것만이 물질은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산에서 기거하니까 물질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산 자체도 물질로 이루어져있고 사람 자신도 물질로 이루어져있는 것을 보더라도 물질을 떠나서는 단 한시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인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추구하려면 마음의 작용부터 정지시키는 일이 현명한 일이다.
사람마다 물욕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보니 어느 정도를 소유해야 만족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조금만 소유해도 감사함과 고마움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부를 통해 아무리 많은 것을 축적해도 계속해서 새로운 욕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 보니 진정으로 물욕에 대한 기준을 설정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모두가 적정하게 생각하는 물욕에 대한 기준은 설정할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서로 다르다보니 기계나 인간상품이 아닌 이상 그에 따른 불만족은 반대급부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인 영적인 세계도 마음이 작용하는 한 어느 정도가 적정선인지 기준을 세우기가 힘들다.
신의 손을 떠난 사람의 마음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물질과 정신적인 만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난다.
사람에게는 상향적인 욕심이 존재하고 무언가를 추구하지 않으면 무료해서 견디기 힘든 마음이 존재하는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가 멸망한다 해도 멈출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성자들이 이상향으로 선만을 강조하면서 이벤트 상품으로 천국과 극락세계를 내걸며 유혹하지만 과감하게 뿌리치며 그 보다 더 좋은 세계를 꿈꾸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다 같이 느끼는 것이고 상향적인 욕심 자체를 없애려면 아예 태어날 때부터 시험관아기처럼 일부의 마음만 작용시키거나 개별적 특성을 강화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온전한 마음을 내어주는 한 물질세계가 되었던 정신세계가 되었던 만족할 줄 모르는 상태로 끝없이 이상향만을 향해 달려갈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9. 잡으면서도 놓는 방법
깨달음은 분명 잡고 있으면서도 놓을 줄 아는 마음이다.
사람에게 목표의식이 없으면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듯이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집착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절대의 고요 속에서조차 집착은 일어나며 형태이전의 세계로 환원하기이전까지는 항상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깨달은 사람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하거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낫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잠깐의 경우이고 눈을 뜨나 감으나 현실적으로 완전하게 초월하거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물질을 떠나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땅을 밟지 않고 살아가는 새들일지라도 지상의 물질을 필요로 하듯이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자신도 모르게 물질문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깨달음은 물질문명에 있든 정신세계에 있든 개방된 상태에서 잡으면서도 놓을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분명 손에 꼭 쥐고 있으면서도 놓을 줄 아는 마음 때문에 집착으로부터 벗어낫다고 말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물질문명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집착을 하면서 놓는 법을 몰라 심신을 힘들게 하지만 깨달은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편안하게 놓을 줄 아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 서로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똑같은 행위이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물질문명을 대하느냐에 따라 집착이 되기도 하고 놓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잡으면서도 놓을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편안하느냐 불편 하느냐의 차이점이다. 일반인들도 부정적인 부의 축재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만한 물질을 접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면 깨달은 사람들처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도 다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깨달아본 사람들은 느끼는 일이지만 정신적으로 깨달았다고 해서 물질계에서도 마음대로 천지를 개벽하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수선스럽게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주는 일은 겸손하지 못한 태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숱한 환상적인 사건들에 의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왔지만 과연 그 사람들이 주장한데로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단 한건도 없는 것처럼 산 사람이 통째로 하늘을 승천하는 일이라든가 천지가 개벽하여 온 세계가 각종 금은보화로 치장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정신계에서야 마음먹은 데로 천지를 변화시킬 수가 있고 우주의 건너편을 순식간에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물질계에서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정신적으로 우주를 뒤흔들기에는 우주가 너무 큰 탓도 있겠지만 지구에서조차 이루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심안을 통하면 우주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광활하고 환상적인 부분들이 많지만 우리가 꿈만 꾸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화려하고 멋있는 세계라고는 하지만 현실에서는 현실에 맞는 생활방식으로 적응해 나가야하듯이 정신계에 나타나는 현상만으로는 당장 배가고파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심안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라면 먼 미래로 되돌리고 현실적으로 미래에 다가올 보다 구체적인 설계를 그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현실은 현실적인 설계가 아니면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계획을 세워나간다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10.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
수많은 성직자를 동원하고 깨달은 사람들을 동원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시스템을 변혁하지 않는 이상 매번 반복되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마음의 속성을 제거하지 않는 한 사람들의 꿈은 영원히 똑같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마음은 기본 패키지로 깨달음을 준 후 보너스로 천국이나 극락 그리고 이상향을 꿈꾸는 세계뿐 아니라 찬란한 보석으로 치장된 우주를 다 준다 해도 여전히 가슴이 허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듯이 인간의 꿈을 진정으로 이룰 수 있도록 해주려면 우선 마음부터 진정시키거나 마음에 대한 작용을 축소시키는 일부터 해결하는 일이 중요하다.
마음을 축소시키는 일은 과학을 동원하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성자들이 꿈꾸어온 선한 사람만을 제조하는 방식으로 진행시켜 오로지 선만을 행하는 인간복제로 태어나게 하여 인간상품화 시킨다면 성자들의 근심걱정을 한꺼번에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우주를 다 돌고도 모자라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꿈은 영원히 지속되어지기에 정신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한곳을 향해 집중할 수 있는 축소지향적인 마음을 담은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선결되지 않고는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고 본다.
성자 자신도 온갖 고행을 견뎌낸 이후 사후세계까지 보면서도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남에게 현실적으로 특별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고 본다.
자신의 심신이 홀가분하다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질을 멀리하게 하면서까지 사후세계에 대한 환상에 젖어 윤회와 전생을 들먹이며 겁을 주는 일은 잘못된 가르침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것도 통일되지 않은 사후세계로 모든 것을 초월해야할 종교에서 서로 자기네 종교가 더 좋다는 주장으로 교리를 펴는 것은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말이야 지식인이라면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일이고 살다보면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것쯤이야 다 아는 사실이다.
굳이 선을 강조하지 않아도 악보다는 선을 선호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인간적인 구조 자체가 공존하는 선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선만을 강조하면서 동물적인 근성과 영적진화가 안되어서 그런다고 하면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 난리들을 치는지 알다가다 모를 일이다.
검증되지 않은 사후세계로 성역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겁주며 헌금을 걷어 호화찬란하게 종교적인 건물을 짓고 종교를 떠받들게 할 것이 아니라 종교를 추종하는 자신들부터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일이 순서일 것이다.
물질을 멀리하라는 종교인조차도 신성한 종교를 빌미로 온갖 금품을 챙기면서 가장 좋은 곳에 짓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종교를 전파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건물을 짓는 일은 이해하지만 헌금으로 인한 자금 동원력이 클수록 화려하게 명성이 높아지는 종교건물을 보면 말로만 물질을 멀리했지 실제로는 물질과 밀착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리 절제된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 해도 물질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없으며 물질계를 멀리해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종교계이듯이 신성을 부르짖는 사람조차도 화려한 처소와 경치 좋은 명당자리만 차지해서 지내고 있는 현실을 보면 입으로는 인류의 구원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악의 소굴을 내세운 곳에서 온갖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종교 그 자체가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종교에 대한 역기능과 순기능은 동시적으로 존재하기에 그 명맥을 꾸준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어느 한쪽만을 내세우면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종교적인 입장으로 보면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일단은 의식주를 해결해야하는 것은 일반인이나 종교인이나 다 마찬가지일이다보니 일반인들이 직업에 종사하며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나 종교인들이 자신의 좋은 교리를 전파하려면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보니 기복신앙과 정신적인 위로를 해주는 대가로 금품을 받는 일은 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보니 어떻게 보면 성자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탁월했다는 점이 돋보이기도 한다.
종교보다 더 안전하고 좋은 직종은 없으며 잘하면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보니 너도나도 종교를 따르며 계속해서 자신들의 교리가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같은 종교인이라도 검소한 생활로 물질을 될 수 있으면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누추하고 사람들이 잘 안다니는 후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해놓고 그야말로 최소한의 물질로 연명해나가는 사람도 있다.
직종이라는 것이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듯이 종교도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종교 자체를 해체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종교적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만한 대가를 주고 충분한 위로를 받으면 그뿐이라고 본다. 또 실제로 종교에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가장 매력적인 것은 종교에 몸담고 있는 분들의 대부분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남을 위해 일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일반인들이 본받아할 부분이라고 본다.
11. 검증되지 않은 사후세계
아무리 좋은 말 좋은 표본이 있다 해도 가장 이상적인 이상향만으로 현실을 견뎌내기 힘들고 말만 가지고는 배고파서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현실에 맞지 않는 말만 한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성자들이 주장해온 뒤 수천 년이 흘렀어도 공존하는 선악으로 그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정신적으로 풍부한 꿈을 꾸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성자들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공상가적인 면이 많다고밖에 할 수 없다.
왜 자신들이 천대받고 핍박을 받는지에 대한 자성도 없이 진리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불명확한 사후세계에 대해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아야 한다고 본다.
성자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같이 좋은 말이고 실천만 한다면 더없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오히려 이성이 발달된 지성인들이 앞장서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비현실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어져 있는 것 같다.
일부 이성이 덜 발달된 사람들이야 성자들이 한 말이니까 검증 없이 쉽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만 알만한 사람들은 딸린 식구 없이 홀가분한 상태에서 건져 올린 공상가적인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수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수행을 하지만 수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주문만 외우거나 좋은 일 바른 일만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갈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유혹해도 종교적으로 귀의한 일부 종교인조차도 성실하게 따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말로만 먹고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최소한의 의식주해결도 해주지 않은 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거부반응을 일으키듯이 아무리 좋아도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분명 수행이 깊어지고 영적으로 높아지면 심안을 통해 투시를 비롯하여 혼령과 사후세계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사후세계가 진정으로 믿을만한가에 대해 반성의 시간도 가져보아야 한다고 본다.
인간세계에서 사후세계를 경험했거나 심령학에서 다루는 사후세계를 말하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확실한 검증은 빨간 앵두가 터널을 지날 때 연둣빛으로 변하는 상황인 살아서 사후세계에 가본 사람이 아니라 진짜로 죽어서 인간세계와 단절된 사후세계에 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세계에서는 사후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세계를 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다 건설적으로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가에 심혈을 기우리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물론 사후세계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서로 다른 그림이 남발하고 있지만 수행을 통해 사후세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데로 느끼고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주면서 금품이나 뜯어내고 호화롭게 지내려는 목적이 있다면 몰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후세계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광활하고 환상적인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에 살 때는 현실에 맞는 삶을 살고 사후세계에서는 사후세계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12. 심안에 대한 비밀
같은 종교인조차도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그림으로 나라마다 색깔과 배경이 다르게 나타나는 사후세계를 검증도 없이 주장한다면 인간의 신체적인 구조에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은지 한번쯤 의심을 해보아야할 것이다.
우주의 기와 인간의 신체 그리고 마음이 만나게 되면 어떠한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가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을 해보아야 과학의 힘으로 사후세계와 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서로 다른 그림을 내세우며 주관적인 자신의 사후세계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생겨나는가 한번쯤은 고민해보는 시간도 가져야하고 또 실제로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우리들의 신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도 한번쯤 냉정하게 살펴보는 기회로 삼아야할 것이다.
가끔씩 과거의 인류사가 현재의 과학보다 더 발달되었다고 주장하거나 자신만의 사후세계가 신뢰할 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떠나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넘어가야한다.
문제는 심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심안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기능에 대한 원리가 밝혀지면 사후세계가 그리 어렵지 않게 밝혀지리라고 본다.
만약에 심안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게 되면 그동안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후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고 또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를 그려서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종교인 중에는 종교를 위한 과학은 신앙처럼 높이 받들고 종교를 헐뜯는 과학은 불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과학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일부 깨달은 사람들도 과학을 필요이상으로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일이라고 본다.
과학은 깨달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앞질러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과학기술만 잘 응용해서 사용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과학적으로 추진해나가려면 기본적으로 연구비가 많이 들어가서 문제이지 과학을 잘만 이용한다면 지금 현재도 많은 부분에서 신비적인 요소들을 걷어낼 수가 있다고 본다.
사실 결과라는 것도 알고 나면 별개 아니듯이 괜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수선을 떨며 과장하고 허풍을 떨며 사후세계를 보거나 감정도 없는 나무토막처럼 지내야만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것처럼 홍보하는 사람들 때문에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세계만을 꿈꾸며 절대의 고요 속에 안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신의 손을 떠난 사람들의 생각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13. 사후세계의 난무
혹자들 중에는 성자들을 마치 절대자의 대변인처럼 홍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겉만 보고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만약에 절대자의 대변인라면 모래알보다 더 작은 지구위에서 시대가 바뀌고 문명과 과학이 발달할수록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서로 다른 사후세계가 난무하는지를 먼저 밝혀낼 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그동안 사후세계라고하면 하나인 것처럼 인식하면서 오류에 빠져왔지만 성자들이나 각종 종교단체에서 내세우는 사후세계들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과연 하나로 통합되어져있는지를 먼저 냉정하게 살펴보는 지혜를 가져야한다.
지구 안에서 190개국이 넘는 나라로 분산된 것도 혼란스러운데 그보다 더 많은 명확하지 않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점들은 사후세계를 경험했거나 심령학과 기타 사후세계를 그려내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서 분석해보면 선계나 사후세계에 대한 배경과 인물들이 하나같이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시대에 따라 문명과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동서양의 영혼들이 혼합된 모습을 보이거나 애매모호하면서도 단편적으로 막연하게 그려져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시대를 달리하여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인물상과 복장, 음식 등 그리고 문명의 혜택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전의 과거사로 통합되어져 나타나거나 인구수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고 또 세계지도처럼 나라마다 세워져있는 이정표가 사후세계에서는 세밀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이 발달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자가용으로 우주선을 타고 다니는 혼령도 있는 것을 보면 사후세계에 대한 그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게 펼쳐져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에 사후세계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위의 과정들을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사후세계가 아닌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사후세계를 방대한 보고서에 담아낼 줄 알아야할 것이다.
그것도 종교마다 다른 사후세계나 단계가 다른 선계가 아닌 통합된 사후세계로 그려낼 줄 알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후세계에 대한 허구적인 내용이라도 좀 더 명확한 사후세계를 그려낼 줄 알아야한다.
과거에는 막연하게 성자들이 주장한 것이니까 모두가 순종하는 미덕을 보여 왔지만 요즘에는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과거의 순진한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실제로 정신계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지해볼 때 사후세계에 대해 새롭게 재조명해보아야 하지 않나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본다.
14. 인간의 심리를 통찰하고 있는 성자들
성직자나 깨달은 사람은 많아도 제각각 목소리가 다르듯이 진정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펴보아야한다.
깨달음은 깨달음 그 자체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부터 먼저 익혀두는 것이 좋다.
아무리 단계가 높은 공부를 끝마쳤다고 해도 뒤돌아보면 손에 쥘만한 것들이 없듯이 깨달았다고 현실에서 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구나 하늘도 깨달은 사람을 위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면제해주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늘아래 사람들은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나 똑같이 먹고 살기위해서는 부지런하게 뛰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은 것을 보면 하늘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하다할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답게 살다가야 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벗어나면 남에게 지탄받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게 되어져있는 것은 반드시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간답게 살다오라는 말과 같다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 조용하게 홀로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남과 더불어 함께 나누어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훌륭하다거나 존경할만한 대상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깨달음은 느끼는 것이지 누구를 추켜세우거나 존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과거의 성자들을 필요이상으로 높이 추켜세우거나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달음을 보전하려는 생각은 지양하는 것이 좋다.
깨달음에 대한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자로 등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깨달음을 핑계로 새로운 세계를 구현해보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기타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깨달음은 생각처럼 모두가 떠받들어야할 정도로 위대한 존재는 아니다.
자연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깨달음은 본래부터 있던 모습을 엿보는 것으로 그 임무를 마치게 되어있다.
깨달음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일부의 깨달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적인 행동이 아니면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는 것이 좋다.
성자들이 그나마 인정을 받는 이유는 불명확한 사후세계를 들먹이는 일보다는 인간의 심리를 숨 막히도록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성자들이 말한 것 중에서 사후세계를 제외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제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덕분에 지금껏 그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었듯이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면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아무리 성자들이지만 정신계를 이용하여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준다하여 쉽게 넘어가겠는가?
성자들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강조하고 호소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던 것처럼 인간적인 면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15. 기복신앙
각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종교가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내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종교라면 더욱더 신뢰감을 가지고 확신에 찬 예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야를 넓혀서 보면 각 종교마다 뿌리가 깊다고는 하지만 모순점들은 나타나게 되어져 있다. 한울타리 안에서는 주관적인 자신의 세계를 최고로 떠받들 수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은 부분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과학이 발달하고 정신계가 넓어질수록 수천 년 동안 철옹성 같은 종교적인 영역이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재조명해보려는 노력은 좋은 평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차원에서 재조명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냉정하게 맹목적인 추종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에서 추구하는 일이기에 거부반응부터 내보일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종교나 선도가 명맥을 이어온 것은 무언가 말할 수 없는 혜택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처럼 지금에 와서 종교나 선도를 해체하라고 해서 해체가 되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미 습관처럼 굳어져버린 일이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허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인식이나 정의만큼은 세워놓고 믿는 것이 그나마 모양새라도 좋아 보일 것이다.
종교를 믿는 이유는 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접신 등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위안을 받기위해 출발한 것도 있지만 기복신앙을 통해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거나 사후세계에 가서 보다 안전하게 지내려는 목적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알 수 없는 혼령이나 접신을 통해 각종 신들을 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을 어떻게 먹고 임하느냐에 따라 두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다.
하느님과 동서양의 모든 신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심령술사를 비롯하여 무당이나 도사를 지칭하며 각종 주문을 통해 혼령이나 신들과 대화하며 기복신앙을 전문으로 맡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이러한 곳에 의탁하는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해보면 사업이 잘 안될 때 또는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병약하여 심신이 극도로 불안한 상태일 때 의뢰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이 잘 안되면 시대에 맞는 방향전환을 모색해보거나 경영학을 공부하여 세계적인 흐름을 읽으면서 지역적인 특성을 분석하여 고객만족에 따른 마케팅 전략을 세워 노사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노력을 하면 될 것이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항상 잘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보니 우선적으로 가슴을 크게 갖고 시야를 넓혀 게으른 모습보다는 부지런한 모습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나가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순서대로 풀리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리고 몸이 아플 때는 우선적으로 병원이나 기타 물리치료를 받으면 될 일이다. 물론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 있다면 자연치유력이 강한 기치료를 받으면 되겠지만 기치료도 만능이 아니다보니 허실을 분명히 알고 접근하는 것이 좋다.
기치유도 기공술사를 통해서 치료를 받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진정으로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스스로 수련을 통해 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다보면 기공술사 자신도 환자들의 좋지 않은 기를 통해 기가 탁해질 수 있기 때문에 순수한 자연적인 우주의 기로 자연치유력을 경험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수련을 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치유방법이 될 것이다.
평소에 수련을 통하거나 강인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감이 밀려와도 쉽게 퇴치하거나 무시해버릴 수 있지만 심신이 나약하고 극도의 피로감에 쌓이게 되면 조그마한 공포감에도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기복신앙을 꿈꾸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사업이 잘 안될 때 또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극도의 피로감에 쌓여 심신이 허약해질 때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신이 허약해지면 그 누구도 바로잡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용기를 갖고 일어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일으켜 세울 수 없음을 잘 안다면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중심을 잡고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 모든 일을 추진해나간다면 그 어떠한 두려움이나 공포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동안 막연하게 천국과 지옥을 구분 짓고 선계를 구분지어 사후세계를 생각해보았지만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사후세계는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 그 모습이나 색깔 그리고 배경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종교마다 색깔과 배경이 다른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선도에서도 단계가 다른 선계가 존재하다보니 어느 것이 진실한 사후세계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같은 종교나 선도에서조차 사후세계가 일관되지 않은 채 나타나다보니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인지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16. 교만과 겸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에 맞게 정확하게 알리는 데에 있다.
정신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인생의 최고목표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깨달음을 얻고 나면 깨달음 그 자체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본래부터 있던 모습을 보았다하여 크게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깨달음을 얻으면 마치 모든 세계가 자기 것인 양 들뜬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은 그렇게까지 흥분할 대상은 아니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후세계로 겁을 주거나 윤회를 들먹이면서 전생을 운운하며 선각자적인 자질을 높이 세우려고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리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남에게 훈계하듯이 교만한 자세로 임하면 무지한 일반인들일지라도 그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임을 알아야한다.
자기 것이 소중한 것처럼 남의 것도 소중하다는 마음을 지녀야 그나마 서로 믿고 대화라도 나눌 수 있지 일방적으로 아래 사람 대하듯이 훈계조로 나가거나 자신의 것만 옳다고 주장한다면 현실에서 외면당하게 된다.
어린 학생이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교사가 임하면 눈치 빠른 학생들은 그 교사를 진정으로 존경하려고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항상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서는 안 된다.
나이가 많고 세상물정을 더 많이 알기 때문에 나이어린 사람이 감히 자신의 생각이나 크고 높은 뜻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사람들은 원초적 감각으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뿐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교만보다는 겸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교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겸손은 조금만 알아도 대우를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만이 겸손을 누르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크고 넓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대립하지 않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17. 깨달은 사람에 대한 오해
깨달은 사람들은 물질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해야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일도 잘못된 일이라고 본다.
자신이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도 수행에만 전념하도록 편의를 돌보아는 주는 일은 좋지만 솔직히 깨달음으로는 밥은커녕 밑도 닦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물질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의도적으로 물질계를 부정하거나 멀리하면 과연 그러한 태도가 옳은지도 생각해보아야한다.
깨달은 사람에 대해 가끔씩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깨달았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내비칠 수는 있지만 과연 깨달은 사람이 인류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모든 일은 다 자신의 힘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두고 남에게 의지해서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는 것처럼 스스로 중심을 잡으며 자신이 해결하지 않고 남을 이용해 부를 축적하려고하거나 이상향만을 꿈꾸어가지고는 당장 굶어죽거나 나약하고 게으른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일은 자기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사라지게 되어져있다.
자신이 이 세상을 부정하면 부정된 모습으로 비쳐지고 긍정하면 긍정된 모습으로 비쳐지듯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세상을 대하느냐에 따라 천국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되어질 수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정신계에서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처럼 우주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마저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정신세계를 추구하기위해 수행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본다.
만약에 수행이라는 고도의 정신사유를 계발해내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각박하고 치열한 현실세계로부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질식사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족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슨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거나 만족할만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나마 물질보다는 정신계인 수행체계를 따르는 것이 낫기 때문에 수행을 강조하는 것처럼 정신계가 물질계보다 낫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본래부터 정신계는 물질계를 좋아하고 남녀의 사랑처럼 서로 떨어지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꼭 붙어있어야만 안심을 하는 경우와 같다.
그런 정신계가 물질계를 떠나 따로 지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듯이 정신계는 물질계와 어떻게 하면 보다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 밤낮으로 연구하기도 한다.
정신계가 각종 환상적인 것을 비롯하여 허공이나 형태이전의 세계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가끔씩은 물질계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 몸으로 지낼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정신계가 중요하고 물질계는 중요하지 않다는 개념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일심동체를 이루어야만 안심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산이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가 산을 그리워하듯이 자칫하면 사랑하는 남녀의 관계를 강제로 떼어놓게 하여 상사병에 걸리게 하는 것과 같다할 수 있다.
차라리 사랑을 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듯이 정신계나 물질계나 필요한 사람에게 개방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없애는 것이 한편으론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본다.
간섭이라는 것은 가해자는 깨달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피해자는 한이 남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신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정신계를 좋아하고 물질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질계를 좋아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물론 이 둘의 조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자신의 기준에 맞춰 이것이 좋다 저것이 나쁘다를 강요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은 성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조차 거역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자신이 정신계를 좋아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인간 상품화시키기 위해 정신계만 강요한다면 이 또한 모순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모든 일은 지엽적인 일에 관심을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 근본을 이루는 핵심원리를 먼저 터득해야한다.
지엽에 휘말리다보면 그 근본원리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보다 거시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사물을 바라보려는 시각을 지녀야한다.
인간세계나 사후세계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지만 아직까지는 힘들기에 그동안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아온 시각에서 역으로 우주는 인간을 포용하고 그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우주적인 행보에서 인간을 이해하자는 새로운 개념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관점을 어디에 두고 출발하느냐에 따라 그 인식의 결과가 달라지듯이 좁고 협소한 주관적인 인간관보다는 광대무변한 우주관으로 인간을 재조명해본다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오히려 확연하게 풀리게 되는 기회로 다가설 수도 있을 것이다.
18. 생각한데로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세계
우주에는 그 모든 현상들을 내포하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이 작용되어지고 있다.
생각한데로 나타나고 뜻한 데로 이루어지는 우주 속에는 사후세계가 되었던 현실세계가 되었던 중심력을 갖고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적인 모습으로 우주적으로 생각하면 우주적인 모습으로 신이 존재한다고 하면 신이 존재하고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하느님이 존재하는 뜻한 데로 모두 들어주는 데에 있다.
실제로 보이지 않으면 그러한 현상들을 말할 수 없을 텐데 눈에 보이기 때문에 혼란이 야기되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현실적인 생각아래 정신적인 사유를 즐겨야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정신적인 사유에서 일어났으니까 현실세계에 적응할 절차도 없이 곧바로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정신계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이다보니 먼저 옳고 그른 것부터 따지게 되어져있다. 그리고는 엄격한 품질 검사관의 검증을 거친 정상적인 물건만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정신적인 사유세계만이 현실에서 명맥을 유지해나가게 되어져 있다.
모든 것이 생각한데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화가가 그린 그림이나 글을 쓰는 작가가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듯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기억하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우주적인 현상으로 풀이될 수밖에 없다.
우주는 어머니 같은 품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잉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뜻한 데로 이루어지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그것이 인간세계이든 사후세계이든 아니면 가상의 세계이든 거부감 없이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한 폭의 여백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인간의 상향적인 욕심과 욕망이 존재하는 한 우주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 상태에서 여백을 남겨놓고 기다려야하는 인내심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무한한 생각을 모두 포용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은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여 가상의 공간에서 다루고 있듯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구분하거나 분리해내는 기능이 작동되어지고 있는 이상 인간세계에서는 인간적인 면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실현해나가도록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시각을 조금만 달리해도 현실조차 부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우주이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존중해주면서 현실에서는 눈에 보이는 데로 아는 만큼만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할 수 있다.
<주관적인 사후세계> - 청아당 엄상호 詩
지구 위에서 바라보는 사후세계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석가가 말하는 사후세계
예수가 말하는 사후세계
도인들이 말하는 사후세계
유사종교에서 말하는 사후세계
철인이나 과학자들이 말하는 사후세계
그리고 죽음을 경험해보았다는 경험론자들의 사후세계
신기하지 않은가?
생각한데로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지구에 190(2002년 기준 191개국)여개 국이 넘는 국가가 존재하듯이
사람의 생각만큼이나
수 천 수만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다 같이 한목소리이지 않은가?
영생을 위한 길이라고
마치 최고의 서비스로 최상의 서비스를 약속하는
유흥업소의 호객꾼과 비슷하지 않은가?
믿기만 하면
영생은 예약해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문제는 생각한데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성자마다 사후세계의 배경을 다르게 말하는 데에 있다.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하물며 일반 중생들이나 신도들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냥 좋다고 하니까 시키는 데로 하는 수밖에
설마 성자들이 말하는 것이
거짓은 아닐 테고
혼란스러운가?
그러면 줄만 잘 서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가장 편한 방법이 있지 않은가?
주어진 현실에서
자연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
죽어서도 편히 지낼 수 있는 사후세계에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도
충분히 멋있게 지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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