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16장 공간․시간․지식

청아당 2007. 7. 23. 11:25
 

16장 공간․시간․지식


공간과 시간 그리고 지식의 삼분법적인 이론은 고대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시 이기론으로 구분한다면 공간은 기(氣)에 해당되고 시간은 이(理)에 그리고 지식(知識)은 제3의 작용체에 해당된다.

또한 삼분법적인 이론은 공존하는 선악과 통한다.

선이 공간이라면 악은 시간 그리고 공존하는 선악은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인 것이다.

선이 공간이고 악이 시간이라고 말한다면 반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듯이 구분을 짓자면 공간은 선에 가깝고 시간은 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간은 자연 상태 그대로 담아두는 역할을 하고 있고 시간은 이러한 자연 상태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변화를 주며 가공 처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지식 또한 그러한 작용을 하도록 뒤에서 지시하거나 조정하기도 한다.

쉽게 설명하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료나 재료가 필요할 것이다. 원료나 재료에 해당되는 것이 공간이고 숙련자의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적절한 배합과정을 거친 후 기계를 거쳐 완성되는 제품이 시간이다. 그리고 제품을 만들도록 지시한 상급자나 경영자가 바로 지식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공존하는 선악은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 간섭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모습으로 천변만화의 적응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듯이 홀로 움직이는 것보다 둘이 움직이는 것이 낫고 둘이 움직이는 것보다 셋이 움직이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삼족오(三足烏)와 삼족정(三足鼎)이 아닌가?

삼족오에 대한 뜻풀이를 살펴보기 전에 ‘오(烏)’자가 뜻하는 내용부터 살펴보자.

‘烏’는 옥편을 찾아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까마귀’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검다’라는 의미이다.

국어사전이나 일부 학자들조차 ‘까마귀 오’로 쓰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서는 ‘까마귀 오’라는 말보다는 본래의 상징성을 의미하는 ‘검을 오’로 대신한다.

부득이하게 아래의 문장을 ‘까마귀’대신 ‘검은 새’로 수정함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삼족오를 풀이하면 ‘세발(三足) 달린 검은 새(烏)’이다.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태양의 후손이라는 뜻에서 태양 안에 삼족오를 그려 넣어 자신들의 문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민족이 바로 고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다.

천부경과 삼일신고 사상에서 중히 여기는 우리 고유의 삼사상(三思想)에서 유래함을 알 수 있다.

바로 삼신을 일컫는 것으로 완성의 숫자로 삼(三)을 숭상한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만물의 완성체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인식하여, 삼신사상이 유래 되었는데, 단군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삼사상에 입각하여, 국가의 기틀을 삼조선으로 삼아 일명 진한, 마한, 번한으로 칭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足)이 세 개인 것은 이 삼족오 말고도, ‘삼족정(三足鼎)’이라는 것이 있는데 단군 조선의 유물로 나타나고 있다. ‘세발 달린 솥’은 단군왕검시대의 제기(祭器)로 국가를 다스리는 이념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 치도(治道)의 이념을 상징한 것이 ‘세발 달린 솥’이라면, 군왕 즉 단군왕검을 상징한 왕가의 문양이 바로 ‘세발 달린 검은 새’인 것이다.

덧붙여 ‘세발 달린 검은 새’는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완성체적인 ‘신의 전령’이 된 것이다.

‘삼족오’는 태양에 살면서 태양의 불을 먹고 사는 태양의 전령으로 전설에 나타나는데, 태양은 바로 하늘 혹은 밝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더 올라가면, 환(桓)이 되는 것이고, 배달(밝달)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족(天孫族)임을 자처하던 고대의 조상들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이 ‘삼족오’를 숭상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었던 것이다. 하늘의 뜻을 이어 지상의 왕 노릇을 하는 단군의 상징물로 이만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삼의 사상은 고대부터 중요시되어져왔음을 위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삼의 사상을 중요시여기는 것은 바로 공존하는 선악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천지인사상과 공간․시간․지식은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천은 공간이요 지는 시간이요 인은 지식에 해당되는 것이다.

천은 우주를 통틀어 관장하고 있지만 지구나 행성들은 시간에 구애받으며 변화를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라는 원초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지적능력을 총동원하여 과학을 발전시켜가며 연구해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천지인사상과 공간․시간․지식이라는 삼분법적인 이론은 안정감과 더불어 우주의 비밀을 밝혀주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고대인들의 사상 또한 참으로 심오하고 깊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이러한 생각들을 정리해놓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다시 한 번 깊게 깨닫게 된다.



1. 공간

공간과 시간 그리고 지식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공간에 대해 알아보자.

<17장 우주사상>에서 살펴보겠지만 공간과 시간 그리고 지식은 이기론의 바탕이 됨을 먼저 이해해야할 것이다.

공간은 기(氣)에 해당되어지고 시간은 이(理)에 그리고 지식(知識)은 제3의 작용체에 해당됨을 이해하고 출발하기 바란다.

기라고 하면 에너지의 작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는 곧 힘으로 대변되어지고 어디든 달려야만 안심을 하는 충돌과 회전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공간은 에너지의 힘이다.

충돌과 회전에 의해 생성소멸의 법칙을 이루어내는 곳이 바로 공간이다.

공간은 그만큼 물적 증거능력이 탁월한 곳이다.

공간속에서 시간과 지식이 어우러져 합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어머니 품 같고 시간은 도전적이며 활동성이 강한 아버지 같은 부성애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지식은 침묵 속에서 가르침을 유도하는 조부모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한없이 들판을 누비고 있는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준마나 천리마를 생각해보아라!

준마나 천리마를 타고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렇게 달리고 싶을 것이다.

얼마나 멋지고 경쾌한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들에 나가면 말을 타고 달리고 싶고 고속도로로 나가면 아우토반처럼 무한 속도로 질주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어디든 달려야만 안심을 하는 공간이 있는 한 사람들은 달릴 것이다.

바다든 하늘이든 아니면 우주공간이든 달릴 수 있는데 까지는 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되돌려놓거나 시간을 앞질러 달릴 것이다.

공간이라고 하면 물건을 담아두는 그릇정도로 이해한다면 공간의 범위는 그만큼 축소되어질 것이다.

공간을 눈으로 확인해보아 잘 알겠지만 공간은 우주를 대표하는 물질적 크기이다.

그 모든 것을 넉넉하게 떠받치고도 남는 여유를 지닌 것이 공간이다.

한마디로 공간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고도 남는 여백의 미(美)인 것이다.

여백의 미하면 산수화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붓끝을 꽉 채우지 않고도 산과 강 그리고 폭포가 있는 숲속을 그려내며 명상의 쉼터로서 손색이 없는 산수화를 그려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백과 함께 절정에 다다른 붓끝을 따라 움직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 막히도록 손에 땀을 쥐기도 한다.

붓끝이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이는 심장박동소리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신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은 포만감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중견작가나 대가의 붓놀림솜씨는 신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한 폭의 화선지속에 펼쳐진 풍경화는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작가의 혼이 담긴 열정과 한 호흡 한 호흡 끊어 논 절정의 숨소리인 것이다.

공간은 여백을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물질적 풍요가 가득하게 넘쳐날 때 감동이 일어나고 신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공간을 채우는 재미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간을 채울 때마다 울컥 쏟아져 나오는 신명이 있기에 그 재미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삶에 있어 살아가는 재미가 없다면 무기력증과 더불어 삶의 회의를 느끼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삶에 있어 재미는 삶의 활력소요 삶을 지탱하게해주는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꿈은 소박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모두가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여유만 된다면 모두 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다음은 어렵고 힘든 하루의 노동시간을 끝마치고 여유롭게 문화적인 휴식을 즐기는 생활을 엿보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해보자.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500여 평 규모의 넉넉한 공간을 가진 주택과 신선한 아침공기와 더불어 달빛을 밟고 산책을 즐길 수 있는 3000여 평의 넓은 정원이 갖추어져있는 곳. 거기에다 집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명품과 생활용품 그리고 최고급 승용차와 레저용 차량 등 휴가를 즐기기 위한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휴양지까지 갖추어놓고 지낸다면 지상낙원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공간의 아름다움은 문화적인 시설부터 시작하여 인간이 필요로 하는 각종 편의시설을 갖춤으로써 완성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부동산학에서도 입지론과 기반시설 및 환경적 요인을 중요시 여기듯이 입지조건이 탁월할수록 고부가가치의 평가를 받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꿈은 모두가 아름다운 곳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자하는 욕망이 강하다.

투자자나 투기꾼들이 성행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꿈들을 이루기 위한 전초전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투자자나 투기꾼이라 할지라도 항상 높은 수익만 얻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은 잘못된 정보에 노출되어지거나 예기치 않은 부동산정책에 걸려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고수익에는 그만큼 높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사람은 고수익을 얻을 수가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투자를 포기하거나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투기도 위험성을 감수한 투자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장기전에 대비하지 못하고 단기에 끝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난이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전에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지름길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이다. 부동산은 정보가 생명인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은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더구나 농지에서 대로 바꾸는 용도변경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수배에서 수십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분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송도신도시처럼 입지조건이 좋은 아파트단지라면 투자나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만큼 투자나 투기는 성장가능성을 미리 예측하고 덤벼들기에 투자자나 투기꾼이 몰리는 곳에 거품도 많지만 또한 예측가능한 성장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집을 사려면 집값을 다 주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투자자나 투기꾼들은 그러한 과정을 생략해도 살 수 있다는 점부터 먼저 익힌다.

자신의 돈은 집값의 30~40% 정도만 준비되어져 있으면 나머지는 대출을 받고 모자란 것은 전세나 월세를 놓아 융통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대출을 통해 발생하는 이자를 충당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만 된다면 입지조건이 좋은 아파트를 사놓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돈이 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자를 충당하고도 집값이 훨씬 높게 올라간다면 투자나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나 투기꾼들은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계산에 능숙하다할 수 있다.

한마디로 경제논리에 밝은 것이다.

일반인들도 이러한 기본적인 논리에 밝아지면 집을 사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출을 통해 발생되는 이자를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되어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합부동산세 등 각종 세제상의 위험을 충분하게 검토한 후 시도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원금+이자와 예기치 않은 세금에 짓눌려 빚더미에 올라앉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류상의 하자만 판독할 것이 아니라 발로 뛰며 현장을 확인하는 습관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류상으로만 확인하는 경우 분명 서류상으로는 전혀 하자가 발생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현장에 가보면 속임을 당하는 경우를 가끔씩 보게 된다.

예를 들면 5세대가 사는 다가구주택일 경우 서류상으로는 전세나 월세가 등기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보면 서류상으로는 아주 깨끗한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다할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 가보면 전세에다가 월세가 있을 수 있다. 만약에 전세가 4세대라면 대출금을 포함해서 집값을 뛰어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사는 경우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어야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 할 것이다.

또한 전세를 들어갈 때도 위의 방법들을 빠짐없이 확인하여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써야할 부분이다.

적어도 집을 살 때는 전문가와 상의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사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발로 뛰며 확인하는 정보는 그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다 중요하지만 부동산에 있어 특히 중요하다할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은 예금이나 주식에 비해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환금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잘 감안하여 장기전에 대비해야할 것이다.


효율적으로 공간을 배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할 것이다.

공간은 우리들에게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공간에 들어있는 물질적 느낌과 접촉을 시도할 수는 있다.

공간의 물리적 범위는 우주 속에 담겨져 있는 지구를 비롯하여 타은하계까지 광범위하다. 그리고 공간의 논리적 범위를 포함한다면 그 범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광범위한 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단지 물리적 공간만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지적능력밖에 있음을 견주어볼 때 논리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의 수백 배 아니 수천 배 이상의 크기로 존재할 것이다.

공간은 우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크기보다 훨씬 크고 넓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지구라는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행성 속에 살면서 너무 큰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가 어떻고 과학이 어떻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인간적인 사고방식아래 인간의 잣대로 이 우주를 가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방향만 조금 틀어보아도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이 우주 안에서 오직 인간적인 잣대로 이 우주를 가늠하려고하는 것 자체가 모순과 오류투성이의 생각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주가 크고 넓은 만큼 우리들의 생각 또한 모두 다 포용하며 넉넉하게 받아들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만약에 우주가 변덕스러운 하느님처럼 까탈이라도 부린다면 공간의 크기가 갑자기 줄어들거나 늘려져버려 우리들은 그 틈새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줄였다 늘렸다할 수 있는 것처럼 공간도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공간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공간은 물리적 공간만큼은 단단하게 고정시켜놓고 다만 필요에 의해 탄력성을 줄 수 있는 논리적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들 이렇게 틈새로 빠져나가는 법을 미리 익혀두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처세술인가?

법도 원칙과 예외를 두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법률적 지식이 해박한 사람들을 위해 별도의 탈출구를 마련해놓고 있듯이 공간도 인간의 처세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공간은 선한 면이 많아 선으로 구분지어 놓았지만 선하다고 모두 다 선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범죄예방을 위한 각종 사회적인 안전장치를 그물처럼 쳐놓았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범죄에 대한 처벌기준을 보면 훈방부터 시작하여 최고형인 무기형이나 사형까지 있지만 범죄자들에게는 한낱 허울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사전적 지식을 답습하는 차원에서 육법전서인 대법전에 통달할 수 없는 일도 있지만 전과자처럼 자신의 범죄에 대한 처벌기준을 안다고 해도 범죄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선한 행동을 하도록 각종 사회적 안전장치를 총동원시켜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범죄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순자가 주장하고 있는 성악설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행동으로만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져있고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악한 면이 바로 범죄를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천성이 착한 줄만 알았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처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동을 하여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한 것 같으면서도 악한 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면 선의의 목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고자 수술을 하는 과정 속에서 실수로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의학적 사고이지만 선을 위한 과정 속에서 발생한 악인 것이다.

이번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악이지만 그렇다고 선이라고 딱히 주장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앞의 예에서와 같이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경관일지라도 비바람이 몰아치고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칠 때면 그렇게 아름답던 자연도 악의 소굴 속에 갇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선의 성향으로 평생을 아무탈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자연도 이와 같은 지경에 놓이는 것을 보면 성자들이 목숨 걸고 강조하고 있는 선한 행동들은 인간에게 분명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태어나는 인간이기에 자연보다 더 심각한 수준에서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진 채 선한 척하며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한 척 살아간다고 해서 악의 행위가 용서받지 못하는 것처럼 선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무슨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선하나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이기에 각종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과학의 힘을 빌린다면 선만을 위해 살도록 제작된 로봇과도 같은 인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악이라면 진저리를 내며 악의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그런 안전장치로 무장한 로봇인간을 만들어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이라는 굴레 속에서 뒹굴다보면 그 어떤 안전한 존재라도 선악의 양면성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조차도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져 우리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듯이 구원이라는 명목아래 각종 구속적 요건을 내걸며 자신만을 따르기를 종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하느님으로서는 당연한 보상적 조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에게 부담스러운 것만은 사실이다.

하기야 조건 없는 계약이 없듯이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일찍이 깨우쳐주고 있음을 볼 때 한편으론 하느님께 고마움을 표해야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도 하느님 마음대로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우주는 불완전한 형태의 천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왕성한 기운을 지닌 채 천지를 창조할 때 당시처럼 하느님만이라도 전지전능한 능력을 온전하게 갖추었더라면 이 우주가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굴러가지 않았을 텐데 오랜 세월에 쇠약해진 반지반능한 하느님의 능력의 감소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의 고통이 더욱 커졌는지도 모른다.

본능적으로 신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의 소박한 소원조차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고 있는 하느님이 때로는 원망스럽지만 다 인간을 홀로 세우기 위한 역사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까지 서운하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살아가는 것은 홀로 서기를 해야만 가능하기에 신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삶을 포기하거나 의지하려고만 든다면 삶 자체에 의미가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시간

앞에서 공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시간에 대해 살펴보자.

앞에서 공간을 기라고 설명했듯이 시간은 이에 해당된다.

이는 기의 작용을 일으키게 만드는 장본인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바람이 기라면 바람을 실어다주는 작용이 이인 것이다.

시간은 분명 바람처럼 존재하지만 바람 자체는 아니다.

바람은 손으로 만지거나 느낄 수는 있지만 시간은 쉽게 손에 잡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움직이고 있기에 시간은 언제든 우리들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시간이라는 타임머신을 타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자신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만큼 시간이라는 존재는 공간의 존재를 무력화시키거나 한순간에 없애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라고 말하면 공간처럼 물리적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허공에 떠있는 비물질과도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마술사라면 시간을 잡아서 자유자재로 늘렸다 줄였다할 수 있겠지만 보통사람으로써는 시간을 잡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과 함께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시간은 그림자처럼 공간을 따라다니며 끊임없이 변화를 자극하고 또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도전을 하도록 부추기는 일을 전담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은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주기도 하고 격려와 찬사를 아낌없이 쏟아내기도 한다.

시간과 공간은 남녀 간의 관계로 시작되어져 부부처럼 일심동체로 한 몸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월이라는 시간과 함께 지내야만 그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해낼 수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공간을 분리해내지 못하는 시간은 공간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공간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간섭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한발로 오래 서있는 것보다 두발로 서있는 것이 안정감을 주듯이 시간과 공간의 합동작전은 아주 유효한 지적 산물인 것이다.

훌륭한 내조가 있어야 남편이 성공하듯이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창피한 일이 아니라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남편이 성공하는 일은 곧 부인이 성공하는 일과 일맥상통함을 볼 때 서로의 도움은 이렇게 보상차원에서 동등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공간의 아름다움은 결국 시간이 좌우함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발견하게 된다.

자연의 온갖 아름다운 꽃들도 계절 앞에서는 한 떨기 낙엽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온갖 화려한 궁전이나 고층건물도 전쟁이나 기타 재해로 인해 한순간 잿더미로 변해버리거나 역사적 유물로 남는 것을 보면 시간의 위력은 참으로 무섭고 위협적임을 알 수 있다.

교통사고나 재해로 인해 질병을 얻게 되는 경우 또는 불운 때문에 회사가 망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때 등 시간을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하는 한탄 아닌 한탄을 할 때가 우리들에게는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인가?

한순간의 실수나 잘못으로 그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린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에 빠져들 것인가?

시간만 되돌려놓을 수 있다면 하는 위로 아닌 위로의 마음을 달랠 것이다.

시간은 그만큼 공간보다 더 위력적인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어 방심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다.

하지만 방심한 만큼 허점을 찌르기 좋아하는 시간 앞에서 무너질 때가 많음을 볼 때 항상 경계하며 시간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될 것이다.

시간은 공간이라는 벗이 있어야만 발 디딤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반려자이다.

공간이 없었더라면 시간의 변화를 측정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시간은 이 우주에서 고아나 미아로 떠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시간이 정착할 수 있도록 공간이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기에 시간은 공간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착실하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에 우주에서 고아나 미아로 떠돌아다닌다면 그 누가 그러한 고아나 미아를 받아줄 존재가 있겠는가?

이렇게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시간과 공간이다. 사람만 본능적으로 신에게 의지하는 줄 알았는데 시간과 공간도 사람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기야 모든 것은 음양의 관계처럼 표리관계에 있기에 그 무엇인들 서로의 짝이나 벗을 찾지 않겠는가?

홀로 외롭게 지내는 것보다는 둘이 다정하게 지내는 것이 정감이 더 가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도 그렇게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이 선이라면 시간은 악이다.

이미 <15장 공존하는 선악>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은 동전의 표리관계와 같다할 수 있다.

공간이 시간보다 선한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이라고해서 항상 선한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속에서 악의 행위가 동시적으로 나오기에 선도 악도 점수가 같기는 마찬가지이다.

악이라고 해서 악의 행위가 나쁘게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도전적이며 역동성이 강한 악이기에 오히려 이런 점에서는 선보다 더 큰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악의 비중이 조금 높고 그 대신 선처럼 양적인 측면에서 많지 않기 때문에 7:3의 비율에만 맞는다면 선과 악의 비중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범죄자가 있기에 판검사와 변호사 등 법무부와 검찰청이 별도로 편성되어지듯이 범죄자로 인해 권위와 부를 누리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범죄자로 인해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사람들을 열거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찰청 산하에 있는 경찰서를 비롯하여 현장에서 뛰고 있는 경찰과 형사 그리고 교도소를 관리하는 교도관 등 기타 범죄자에 관련된 업무를 통틀어본다면 그 범위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즉 악을 대표하는 범죄자를 통해 파급된 효과가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 결코 악의 기능이 악의 존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통해 선의의 좋은 일도 얼마든지 유발해내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렇게 선악의 이중성내지 양면성은 동전의 표리관계처럼 선도 되었다 악도 되었다하기에 이 둘을 따로 떼어내 측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선악이 동시적으로 움직일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러한 갈등 속에서 생활하며 갈등 아닌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매우 고마운 일이지만 필요이상으로 민감해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7:3의 비율에 맞춰 도전적이며 역동성을 갖고 움직일 때는 움직여야한다.

그렇게 해야 만이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수가 있고 또 인간으로서 갖춰야할 다양한 재능들을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3. 결론 : 지식

앞에서 공간과 시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지식에 대해 살펴보자.

<2절 시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악을 대표하는 범죄자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시작하여 범인체포 등 처벌을 위한 심판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참으로 다양하게 펼쳐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각종 다양한 안전장치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악의 세상이 되도록 결코 방치하지 않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한쪽으로 기울면 중심을 잡아나가려는 복원력에 의해 세상은 유지되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용의 위치에 서서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선악이 유지되어져야할 적정한 선을 그어놓고 천칭처럼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만 중심을 잡아나가는 줄 알았는데 인간도 자연 못지않게 지혜를 발휘하여 선악의 적정한 선을 유지해나가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무형의 존재이자 중심을 잡아주는 지시자 역할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끝없이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배움부터 시작하여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 등 그 끝이 예약되어져있지 않은 채 더욱 세분화되어져가는 전문분야까지 익혀야할 차세대들은 참으로 앞길이 암담할 뿐이다.

무언가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는 이상 차세대들의 앞날이 걱정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를지도 모른다.

소프트웨어적인 방법으로 기억장치를 해결하지 않는 이상 날로 방대해져가는 지식을 습득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뇌에 심을 수 있는 지식을 저장하거나 조합할 수 있는 칩을 하루라도 빨리 개발하여 지식축적에 쏟아야할 시간을 단축시키지 않는다면 미래에는 지식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다 2~3시간 잠깐 눈을 붙이다 학교를 가듯이 공부에 쏟아 붓는 시간만 절약해도 삶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는 지적능력을 계발하기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면 지식은 참으로 다양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얼마만큼 더 많은 지식을 아느냐에 따라 능력을 인정받는 일을 보더라도 지식의 양적 팽창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지식에 대한 부담감은 세계인이 겪는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지식을 통해 과학이 발전하고 종교의 비밀스런 부분들까지 끄집어내고 있지만 지식은 제3의 작용체로서 훌륭한 일들을 수행해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지금껏 이룩해놓은 지식으로도 모자라 또 다른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수많은 세계적인 학자나 석학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해서 진행되어지고 있다.

이 우주를 채울 정도의 지식이 늘어날 때까지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지식과 함께 성장해왔음을 볼 때 우주적인 지식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 끝을 향해 돌진해나갈 것이다.


공간이 기라면 이는 시간 그리고 지식은 제3의 작용체라고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어 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발 디딜 공간이 있어야 자신의 한 몸을 지탱해낼 수 있듯이 지식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존재자체에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틈새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시자이다.

자연이 말없이 서있지만 때 되면 계절이 바뀌고 비와 눈보라 그리고 태풍이 불어 닥치듯이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해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도록 행위를 지시하는 지시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3의 작용체라고 명명하고 있다.

제3의 작용체를 하느님이나 신의 존재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우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신이 있어라하면 신이 나타나고 신이 없다고 하면 신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 마법 같은 곳이기에 제3의 작용체를 신의 존재로 인식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의 작용에 의해 발생한 그 결과물이다.

그것도 유형의 모습이 아닌 무형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유형과 무형의 모습을 고루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형의 모습으로 지식을 담고 있는 책과 무형의 모습으로 담겨져 있는 책속의 지식은 분명 두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이든 시간이든 대체적으로 이분법적인 논리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천지가 있고 남녀가 있고 암수가 있듯이 둘의 작용은 음양의 조화처럼 천변만화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은 공간과 시간위에 존재한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작용에 의해 발생한 결과물이 지식이라는 새로운 매체로 탄생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식은 공간과 시간의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제3의 작용체인 것이다.


제3의 작용체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각종 학문적 성과나 과학적 발전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엄청난 발전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과거로부터 연결되어져와 현대에 이르러 눈부신 성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3의 작용체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존재하며 사람의 지적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바로 제3의 작용체이지만 적어도 제3의 작용체의 기능만큼은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그래야만 만물의 영장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우주의 신비를 하나하나씩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3의 작용체인 신의 영역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높이 떠있지만 필요하다면 영적교류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과학이 그렇고 학문이 그렇고 종교가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손이 닿은 곳에서 해결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었던가?

비록 그것이 진실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근처까지는 갈 수 있지 않았던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제3의 작용체이자 신의 영역이지만 영적감각으로 만나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설정해놓고 지금껏 유지해오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그때는 영적교류를 통하지 않고도 누구나 손쉽게 만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영적감각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음을 이해해야한다.

신과의 교류나 영적감각을 발달시키고 싶다면 신을 감동시킬만한 기도나 깊은 수련을 통해 해결하기 바란다.

과학이 해결해주지 못한 것은 기도나 수련이 대신 해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간절하게 기도하라! 그리고 수련하라!

당신의 눈앞에서 신들의 모습이 보여 질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보고 싶다면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맞춤형 사후세계까지 다 보여줄 것이다.

신의 영역은 종교에서 그려내고 있는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맞춤형으로 보여 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같은 내용이라도 작가들마다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 글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당신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은 공존하는 선악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지적 산물이다.

공간이 선이라면 시간은 악으로 그리고 지식은 제3의 작용체로 표현되어져왔듯이 공존하는 선악은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마법 같은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에서 선과 악의 내용들을 살펴보았지만 결국 선악은 공존한다는 결론에 도달함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이 행위 되어 지도록 보이지 않게 조정하거나 지시하는 매체가 바로 제3의 작용체임을 확인한 바 있다.

삼의 사상처럼 천지인이 하나로 합쳐야하고 공간과 시간 그리고 지식이 하나로 합쳐야만 완전한 합일체가 되어 지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삼의 사상처럼 하나로 합쳐야만 완전한 표현이 가능해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의 사상은 하나로 합치기도 하고 셋으로 분리되기도 하면서 필요에 따라 기능을 분화시키거나 하나로 합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변신의 귀재인가?

자유자재로 틈새로 빠져나가거나 융화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의 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이 우주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아무리 억측하고 과학을 발전시켜보아도 함부로 우주의 신비를 다 보여주지 않고 인간이 궁금한 부분만 조금씩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도 어지간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리 감출 것이 많다고 인간의 궁금증을 더욱더 자아내게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호기심을 빼놓는다면 살아갈 가치를 못 느끼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간을 위해 이 우주는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꺼번에 우주의 신비를 다 열어보여 주면 그 다음에는 무료해서 인간들이 나태와 게으름 속에서 지낼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임을 이 우주는 미리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들을 위해 이 우주는 지금 인내하기 힘든 자제력과 절제력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정말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부분만 살짝 열어보여 주면서 삶의 재미를 느끼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참으로 배려가 많은 우주임에는 틀림이 없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라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삶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라는 말은 분명 우리들에게 약이 될 것이다.

너무 앞질러가거나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치는 것처럼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딱 그만큼씩만 알면서 나아갈 때 인간의 안전은 우주로부터 안전하게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3의 작용체에 대해 더 이상 묻지 말자!

그냥 신의 영역으로 남겨두자!

신비는 신비할 때 매력이 있는 것처럼 신비를 너무 빨리 평범으로 돌려놓지 말자!

그것처럼 매력 없는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본연의 모습> - 청아당 엄상호 詩


고요 속에서 또 다른 고요를 향해 나아가는 길

정점에 다다르면

시작도 끝도 없는 고요의 가장 안쪽

이를 본연이라 하기도 하고

태동 이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본래 있던 모습들

세상에 나와 잠시 모습이 바뀌었다고

알아 볼 수 없다면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편하게 하여

본래 왔던 곳으로 회귀하면 된다.

되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가야할 길보다도

더 멀다면

시간을 압축하여 억겁의 시간을 단 몇 분으로 줄여주면 된다.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시간

탄력을 주는 일은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힘든 일

지극함을 배우고

알맞음을 배우고

본연임을 배워

현실 속에서 윤회하는 사물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가운데

본래의 모습을 지켜 나간다면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본연의 모습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배우는 일은 한계가 있지만

느끼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 없다.

본래의 모습을 찾는 일은

배움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장인정신을 통해

느낌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한순간 크게 울리는 충격을 잡아야한다.

이는 빛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거대한 기운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밖에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안에서 보이는 세상을 만나야

본연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화려한 현상보다는

조용하고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침묵을 발견하고 그 길을 쫓아 들어가면 된다.

본연이 있는 그곳에는

수선스럽지 않고

현란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따뜻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한의 고통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곳이기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늘이 내린 시련을 통과한 사람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에

먼저 자연의 섭리와 하늘의 뜻을 알아야한다.

끝은 처음을 말하는 것이고

시작은 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