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17장 결론 : 우주사상

청아당 2007. 7. 23. 11:23
 

17장 결론 : 우주사상


1장에서 16장까지 기독교가 반성하며 나아갈 길에서부터 시작하여 깨달음과 공존하는 선악에 대해 많은 문제를 다뤄왔지만 결국 그 이론은 한 가지 사상으로 녹아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마음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지고 그 마음은 바로 도의 세계인 깨달음과 연결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은 우주사상을 대변하는 것이요 그 모든 곳에 스며있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일상생활에서부터 우주까지 통틀어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다.

깨달음은 우리와 별개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함께 숨 쉬며 호흡하는 가운데 놓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달라지는 일이 없듯이 깨달음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보여주고 함께 숨 쉬도록 유도하는 자연의 원리임을 깨닫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아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대에 따라 자연을 달리 보았던 인간의 생각으로 기록해놓은 글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자연 상태의 모습을 볼 줄 아는 깨달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억겁의 세월을 한순간에 주무를 수 있는 우주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은 그동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거대한 우주를 생각해왔지만 이제부터라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려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조차도 인간의 편에 서서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어왔던 우리들은 가끔씩 신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인간의 목소리에 경청조차 하지 않은 신들의 태도에 언제까지고 매달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정말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든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리고 싶을 때는 신을 찾아도 되지만 그 외에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해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신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일 것이다.

신들도 자신들의 힘이 분산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국가의 통치 권력이 거대해지면 지방분권화 되어 지듯이 신들도 이러한 인간적인 시스템에 찬성을 해줄지도 모른다.

하기야 신들도 사소한 일까지 소원을 비는 인간들이 얄밉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싫다는 소리도 못한 채 가슴에만 꼭꼭 쌓아둔 채 응어리지도록 방치해놓은 그동안의 경력으로 미루어보아 오히려 반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가끔씩 불교의 대승경전의 핵심 사상인 공(空)의 사상에 친숙해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동양권에서는 그러한 점들이 친근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로 간주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공사상은 유교의 태극사상과 일치하는 면이 있고 이기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의 원이다.

원불교처럼 원을 이룬 동그라미로 표현할 수 있다.

동그라미는 시작도 끝도 없다.

들어가는 입구가 시작이요 만나는 지점이 끝인 것이다.

특히 경계가 없다는 것이 원의 특이한 점이다.

어느 방향으로 뛰어들든 시작점이 끝점이요 끝점이 시작점일 수 있기에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는 곳이 바로 원인 것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를 아우르는 생성소멸의 근원지이다.

있는 듯 하면서 없고 없는 듯 하면서 있는 그야말로 도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 공이다.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고 지식까지 아우르는 공사상은 하나의 세계이자 바로 우주사상이다.

걸림이 없는 우주사상은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다.

우주사상은 모든 분야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내는 육법전서인 대법전의 내용이 될 수도 있고 심오한 사상이 함축되어져있는 사서오경의 내용이 될 수도 있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말과 같다.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공사상은 우주 사상이자 태극의 논리로 자리 잡고 있기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깊이를 하나로 표현한 가장 간단한 단어가 될 수 있다.


우주사상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지 작은 데서 출발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그 출발은 지구라는 조그마한 곳에서 시작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한줌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행성체가 된다.

그곳에서는 지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과학적 도구인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활발한 사상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종교부터 시작하여 사후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감춰진 우주의 비밀들을 하나하나씩 들춰내려는 운동이 세계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의 미래》에서 강조하는 지식이라는 잣대가 발달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과거의 어둡고 칙칙한 곳에 갇혀 신화적인 일에 정신을 팔며 지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에서는 과학과 지식을 싫어하지만 과학적 지식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종교가 추구하는 가상의 세계에서 춤을 추며 장단에 맞추는 일에 전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분명 우리에게 큰 혜택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인류의 부흥에 있어 커다란 힘을 발휘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적 자유인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검증되지 않은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위협적인 겁주기를 해온 종교지도자들의 처벌을 요구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울 정도의 사후세계의 난무를 이제는 정리해보자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종교가 통일을 부르짖지만 왜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지는 종교지도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필사자들의 오류나 오기의 글로 인쇄된 신화적인 성서나 경전을 통일하는 일보다도 실제적으로 우주 속에 숨겨져 있는 사후세계의 통일이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생각하는 데로 존재하는 사후세계를 파악하는 일은 그 규모나 지역을 가늠하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살아서 다녀온 사후세계의 배경이 종교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같은 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배경으로 다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과연 사후세계는 남북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한반도처럼 사후세계도 혹시라도 분단되어있지는 않은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우주가 넓다보니 코드를 잘못 찾아들어가거나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사후세계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나타나는 맞춤형 사후세계가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지 매우 궁금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사후세계를 완벽하게 확인하려면 직접 죽어봐야 하는 일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직접 사후세계를 경험해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사후세계의 배경은 비록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만 이미 성서나 경전에서 입이 닿도록 경고하고 있듯이 거기에는 죄를 짓는 사람일수록 빨리 들어갈 곳이 못됨을 항상 명심해야한다.

이 우주에는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마법 같은 세계가 존재하다보니 우리들의 생각은 우주를 향해 끝없이 달려야만 하는 노고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우주사상이라고하면 우주에 관련된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 우주사상인가하여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우주사상은 그야말로 작은 데서 출발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주사상은 우리가 생활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너와 나 그리고 모두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삶을 통틀어서 말하고 있음을 주지해야한다.

마음이 우리들 가슴속에서 숨 쉬고 있듯이 마음이 있는 곳에 우주가 있고 세상이 있는 것이다.

마음은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경험들로 인해 깨닫게 되고 자신이 밟고 서있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마음이 가는 곳에 그 모든 현상들이 줄지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흥분되기도 하고 마음 든든한 일이지만 또 한편으론 세상이 무상하고 덧없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앞에서 공존하는 선악에 대해 다루어보아 잘 알겠지만 마음은 악보다는 선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활 속에서 각종 악의 행위로 인해 방해를 받거나 장애를 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넉넉하고도 포용력 있는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넘어가는 모습을 보면 천성이 악보다는 선을 더 선호함을 알 수 있다.

선악의 중심비율인 7:3의 형식을 보더라도 악보다는 선의 양이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크게 보면 같은 양이지만 악보다는 선의 행위를 더 많이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은 공허한 우주를 상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너와 나의 숨소리를 나눠가며 정을 붙이고 싸워가며 오순도순 지내는 가운데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우주사상은 마음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지며 일상생활 속에서 깨닫는 가운데 완성되어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용의 위치에 서서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을 익히듯이 우주사상은 사람과의 만남과 끝없는 배움 속에서 완성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통합된 삶

대선 때만 되면 정치권에서 대통합을 기치로 내걸며 구태의연한 분위기를 쇄신하기위한 준비 작업으로 당을 해체하여 탈당과 합당을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생존의 또 다른 방식이 대통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통합이란 단어는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데 충격적이며 매력적인 단어이기도하다.

그저 단순하게 흩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힘을 한곳으로 집결하여 대통합을 이룬다면 상대방을 견제하기에 이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대통합을 외치며 서로의 힘을 합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대통합을 이루고 나면 마음 든든한 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안정된 조직인가?

비록 나중에는 흩어질망정 당장에는 대통합을 이루었다는 데에 자신감을 갖고 가슴을 한껏 펴며 당당하게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로 통합된 삶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하고 편안한 삶만을 원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 단순함과 편안함 때문에 모든 인류는 질식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떻게 하면 편리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스릴과 모험 그리고 복잡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통합된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일보다는 다양한 일을 소화해냄으로써 얻게 되는 희열과 보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듯이 인생 자체는 《부의 미래》가 추구하는 멀티플레이를 즐기는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진국일수록 복잡하게 얽혀져있는 체제를 단순화시키며 정교한 나라를 세워나가고 있듯이 통합된 삶은 모든 것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요구하며 정교성을 그 첫 번째로 꼽는지도 모른다.

마상서커스단이 고난이도의 마술을 부리면서도 다가올 위험에 대비하며 연습을 하듯이 통합된 삶은 앞으로 발생되어질지도 모를 새로운 위험에 대한 예비적 경고이자 필연적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꿈은 처음부터 통합된 삶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통합된 삶이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경의 역사를 참조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만약에 구약성서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기독교의 대변자인 예수의 존재를 믿을 필요 없이 구약성서의 내용만 지키면 되지만 신약성서시대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구약성서를 비롯하여 신약성서의 내용까지 압축하여 믿음생활을 해야만 하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늦게 태어난 죄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전에 누려보지 못하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해보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다면 큰 불만은 없을 것이다.

성서가 완성되기까지 1600여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각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시대에 맞는 신앙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같은 구약성서시대라도 시대적인 차이에 따라 믿음의 차이가 나듯이 날이 갈수록 믿음의 크기는 증폭되어지고 진실한 신앙인의 숫자는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양적인 팽창에서 오는 버블현상으로 진실한 믿음을 바탕으로 전도되기보다는 세속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역사가 그렇고 성서가 그렇듯이 현대인은 지나온 세월이 얼마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그 모든 세월을 압축해서 살아야하는 통합된 삶이 요구되어진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지식의 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또 압축의 미를 배울 수밖에 없다.

통합된 삶은 한마디로 극도로 정제된 세월을 압축해놓은 탄력적 삶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에서 모든 것이 파생되어져 여러 개가 되었지만 여러 개를 다시 하나로 합치고자 노력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듯이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더라도 삶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함의 극치를 달리는 통합된 삶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할수록 통합된 삶은 더 요구되어지고 궁극에는 하나로 통합된 삶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통합된 삶은 미래가 꿈꾸는 삶이자 효율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나만으로 모든 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처럼 편리한 것도 없을 것이다.

통합된 삶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현재, 미래를 드나들 수 있는 것처럼 현실과 사후세계를 경계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그런 세계가 바로 통합된 삶의 미래인 것이다.


2.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접근은 차치하더라도 먼저 호흡 수련법을 익혀야할지도 모른다.

기와 이의 작용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존재부터 인식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는 이미 간접적으로나마 풍문으로 들어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지만 이는 세상의 이치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야말로 형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는 느낌이라도 접해볼 수 있지만 이는 영적감각이 발달되지 않고서는 쉽게 접할 수 없다보니 이는 기보다 존재감을 느끼기가 더 어려운 존재다.


우선 기(氣)의 존재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기라고 하면 봄기운부터 시작하여 기(氣)자만 들어가면 모두 다 기의 작용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기(氣)자가 붙은 단어에는 기의 작용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는 생명이요 빛이요 기운이다 보니 기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으며 발길 닿은 곳이 온통 기밭이다.

우리는 평소에도 이렇게 기밭에서 무한한 우주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반드시 호흡 수련법을 해야만 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호흡을 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주에너지인 기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채소밭에 돋아난 생기가 넘치는 상추나 배추, 부추 등이 다 우주에너지인 기를 먹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만 기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우주전체를 관통하다보니 에너지의 풍요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기라고하면 단순히 기의 존재만 알기에 급급했지만 기를 엄밀하게 구분하면 전기성과 자기성의 두 가지 성질로 구별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두 가지 성질을 하나로 합쳐 논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평소에는 자장력이 많이 느껴지기 때문에 기는 부력감을 띤 자기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기성도 함께 포함되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수련의 정도가 낮고 기의 존재를 미미하게 느껴본 수련자라면 기는 자기성이 강한 걸로 착각할 수 있지만 수련의 정도가 깊고 고차원의 수련을 경험해본 수련자라면 뒤로 갈수록 강력한 폭발력과 함께 전기성이 강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마도 자기라는 말도 부력감을 강하게 느낀 데서 출발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에는 전자석이 발달하여 기라고하면 자기성과 전기성이 함께 떠오르지만 과거에는 자기성이 더 강하게 인식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기는 자기성과 전기성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한 몸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강도가 낮은 데서는 자기성으로 강도가 높은 데서는 전기성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기에 대한 정의를 자세하게 알고 싶으면 생명에너지의 배경(http://www.injeon.or.kr/before_exercise_3.php)을 살펴보기 바란다.


이번에는 이(理)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련의 정도가 점점 깊어지고 기의 강도가 강해지면서 하나의 세계인 무극과 태허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면 기를 움직이는 작용체가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을 가칭 제7의 힘이라는 말로 정의해놓았지만 기를 움직이는 또 다른 힘은 바로 이가 주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물론 제7의 힘은 이의 작용을 넘어서 제3의 작용체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는 <5절 신인합일>에서 좀 더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이도 분명 기처럼 형체를 지녔을 텐데 기보다 더 요원한 것이 이의 작용이다.

기는 느낌이라도 붙잡고 느낄 수 있지만 이는 기보다 더 비밀스러운 존재라 기의 너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신묘한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반드시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영적으로 발달된 느낌이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며 우주사상을 들먹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느낌은 신출귀묘한 이마저 잡아내는 거미줄 같은 존재이기에 이 느낌을 뛰어넘을만한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 중에서 영적으로 발달된 인간의 느낌이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암울하고 어두운 곳에 자리하며 꼭꼭 숨어있는 이 우주의 비밀들이 자율적으로 비밀을 토해내며 하나씩 껍질을 열고 밝은 세상으로 나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느낌은 쓸 만한 데가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암흑 속에 감춰진 우주의 비밀까지 들춰내는 것을 보면 이 느낌이야말로 인간의 지적산물인 컴퓨터보다 더 뛰어난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기론은 학문적인 접근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수련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느낄 수 없는 지난한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학문적 접근도 실제로 느껴본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보니 학문의 우월성 또한 높은 위치에 서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기론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시공을 초월하거나 현실에 안주할 때는 어김없이 기와 이의 작용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와 이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아우르는 지식이라는 삼총사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 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간은 변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비좁은 공간을 통과하며 폭발성과 도전성 그리고 변화라는 충격적인 시한폭탄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간은 시간과 함께하는 영원한 동반자이자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물질적 그릇역할과 더불어 시간이라는 벗이 없었다면 공간은 고독해서 삶의 의미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시공을 아우르는 것이 지식이라는 이방인이다.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이라는 말로 불리 울 뿐 더 이상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식이라는 이방인이 출현함으로써 자연은 각종 이름을 부여받고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게하고 정치․경제․문화․역사 등 각종 다양한 지식이 파생되어지면서 이 우주를 통째로 뒤흔들게 된다.

결국 지식은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로 귀일하는 도의 세계로 입문하는 지름길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임무를 끝마치게 된다.

작용과 행위만 있어서는 정리가 안 되듯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여주려는 노력이 바로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전기성)과 공간(자기성)이 이기의 작용이라면 지식은 제3의 작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은 변화와 충돌을 즐기며 충격적이다 보니 활동성이 강한 아버지처럼 전기성이 강하고 공간은 모든 것을 포용하며 감싸야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따뜻한 어머니 품처럼 자기성이 강하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리하고 이름을 붙여주는 지식은 제3의 작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기론은 공존하는 선악처럼 한 몸으로 작용하는 일심동체이기도 하다.

이 둘의 관계를 떼어낸 순간 이산가족의 슬픔처럼 복받쳐 오를지도 모른다.

관계는 하나 이상의 대상에서 오듯이 서로의 관계를 떼어놓고 보기보다는 삼위일체가 하나로 합해진 한 몸으로 이해한다면 이기론의 이해는 쉽게 와 닿을 것이다.


3.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홀로서는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천지가 있고 남녀가 있듯이 이 세상은 둘의 관계로 짝지어진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차피 존재감에 대한 정의는 내려야하기에 이기이원론적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고 본다.

엄연히 기가 존재하고 기를 작용시키는 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공존하는 선악처럼 선과 악의 존재를 정의하는 일과 같다.

성선설에서는 선에 비중을 두는 반면 성악설에서는 악에 비중을 두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몸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선악의 관계는 공존하며 서로의 장단점을 이끌어주는 동반자관계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기이원론은 본래는 하나로 존재하지만 편의상 둘로 나눈 것이다.

바람이 기라면 바람을 이끄는 것이 이(理)이듯이 바람과 바람을 이끄는 이를 따로 떼어낼 수 없듯이 한 몸으로 존재하면서도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기론에서 살펴보아 알겠지만 이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관점과 견해에 따라 하나로 합치기도 하고 둘로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점과 견해에 따라 둘로 나뉜 것이 이기이원론이요 하나로 합친 것이 이기일원론인 것이다.


조지훈 시인의 《신채근담》에 나와 있는 고움과 추함을 대비시킨 대구를 통해 이기이원론에 대해 이해해보자.

“고움이 있으면 반드시 추함이 있어 서로 대(對)가 되나니, 내가 고움을 자랑하지 않으면 누가 능히 나를 추하다 하랴. 깨끗함이 있으면 반드시 더러움이 있어 서로 대(對)가 되나니, 내가 깨끗함을 좋아하지 않으면 누가 능히 나를 더럽다하랴.”


계속해서 조지훈 시인의 뜻풀이를 살펴보자.

“고움이 있으면 반드시 미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으면 반드시 더러움이 있으니 세상의 사물은 모두 다 상대적이다. 그것이 짝이 되고 원수가 된다. 선악이 그렇고 장단과 고하가 모두 그렇다. 사람이 만일 이 상대적인 것을 초월하여 스스로 고움을 자랑하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람을 추하다고 하랴. 스스로 깨끗하려 하지 않으면 누가 그 사람을 더럽게 하랴. 선악과 장단과 고하가 모두 이와 같으니 스스로 분별하고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자기가 뜻하는 반대의 경우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기이원론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만물의 존재가 이(理)와 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론. 정이(程)가 주창하였고 주희(朱熹)가 완성하였다. 성리학의 발생 시기는 불교의 폐해가 노출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야기 시켰던 당나라 말기였다. 한유(韓愈)는 오륜(五倫) 등을 강조하는 유교의 사회 철학적 입장에서 사회성이 결여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배척하였으며, 이고(李)는 불교의 장점인 해탈의 논리를 유교의 이론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불교의 필요성을 부정하였다. 이고가 재구성한 유교적 해탈의 논리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초월적이고 불변적인 요소인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성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존재하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인식하기 어렵다. 이고를 계승한 송나라의 주돈이(周敦)는, 바깥의 사물에 존재하는 불변자와 자신의 성이 일치한다는 전제 하에, 자신의 성을 인식하기 위하여 바깥 사물에 내재하는 불변자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주돈이는 음양오행으로 구성된 만물의 내면에는 무극(無極)과 태극이라고 하는 불변자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뒤를 이은 장재(張載)는 기(氣)가 잠시 모여서 형성된 형태가 만물의 현상태이고 기가 흩어진 상태인 태허(太虛)가 만물의 본질태라 파악함으로써 만물의 불변적인 본질을 확인하였다. 그 뒤 정이는 만물의 현상태인 음양오행 등을 기로 수렴하고 무극, 태극, 태허 등의 불변하는 만물의 본질을 이(理)로 수렴함으로써 이기론을 완성하였는데 이 이기론은 주희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성리학의 중심적인 이론이 되었다. 정이와 주희에 의하여 완성된 이기론은 원래 인간의 불변적 본질인 성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개된 것이므로 만물의 변하는 요소인 현상태를 대변하는 기와 불변하는 요소인 본질태를 대변하는 이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원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만물의 물질적 존재와 삶의 작용, 인간의 감정 등 인식가능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모든 요소는 기이다. 기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로 귀일되는 요소는 이이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 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의 입장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유교철학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이기이원론을 수용하지만, 퇴계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회복하여야 하는 입장 때문에 이를 중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철학에서는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입장 때문에 존재의 현실적 요소인 기를 강조하였다.”


4.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공존하는 선악처럼 선과 악의 존재를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 작용은 한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이 둘은 서로 뒤섞이지도 않고 또한 서로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기일원론이다.

어떻게 보면 기가 막히는 이론이지만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음과 같은 도(道)의 세계와 어쩌면 흡사한 면이 있는 것 같다.

(道)는 생물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해당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고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기일원론은 심오한 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낱 말장난에 치우칠 수 있음을 주의해야한다.

무극이나 태허처럼 존재 자체를 비울 수 있는 능력이 없고서는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심오한 이론이다.

이기이원론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놓고 따지다면 이기일원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을 놓고 따지는 것과 같다.

분명 이 둘의 관계는 한 몸으로 이루며 작용하고 있지만 작용과 기능 그리고 활동 면에서 앞에 나서서 활동하는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큰손처럼 뒤에서 조정하느냐하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가 가는 곳에 이가 그림자처럼 따라붙고 있기에 기와 이는 둘이 아닐 수밖에 없다.

부부가 일심동체로 살아가듯이 기와 이도 한 몸을 이루며 모든 작용과 기능 그리고 활동 면에서 함께하며 지내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이기일원론은 바람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은 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결처럼 바람과 함께 떠다니는 무형의 작용이 이기일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기일원론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 이기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와 기의 관계를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이지 않으며(理氣不相雜),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理氣不相離)’는 말로 정리한다. 존재의 본질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수양철학에서는 이를 중시해야 하므로 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고, 현실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천철학에서는 기를 중시해야 하므로 후자의 입장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하고 후자에만 치중하면 이기일원론으로 발전한다. 이기일원론적 입장에서는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며 이가 기를 낳는다고 하는 이기이원론적 주장을 거부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은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강화하였고, 청나라 때의 학자 대진(戴震)은 ‘이는 기의 조리에 불과한 것’이라고 명언함으로써 이의 초월성과 불변성을 부정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에서는 이기일원론의 입장이 일부 수용되었다. 서경덕(徐敬德)은 ‘기 밖에 이가 없으며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기일원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이(李珥)는 기본적으로는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면서도 ‘이와 기는 혼연하여 사이가 없고 서로 떨어지지 않으므로 다른 물건이라 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이기일원론적 입장에 비중을 두었다.”


5. 신인합일(神人合一)

앞에서 이기론과 이기이원론 그리고 이기일원론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기이원론이나 이기일원론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제3의 작용체가 빠져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3의 작용체는 과연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우선 호흡 수련법을 통해 우주의 세계를 이해해보자!

기를 효율적으로 축적시킬 수 있는 것이 단전호흡이다.

단전호흡을 통해 소우주인 인체를 여행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다양한 현상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빛을 통해 발현되어지고 있는 우주적인 여행은 치열한 삶의 세계를 탈출했다는 안도감보다는 암흑 속에서 깨어난 내면의 세계를 통해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깊고 넓은 세계가 존재하며 우주의 안팎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특권을 통해 수많은 현상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춰라하면 멈추고 나아가라하면 나아가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행보를 통해 우주적인 감각을 키워나가며 무극과 태허의 세계에서 온갖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단어는 일체유심조와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리고 온갖 화려하고 현학적인 학문을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란다는 사실이다.

있는듯하면서도 없고 없는듯하면서도 있고 그 형체를 구분하기가 묘연하여 도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세계이기도 하다.

신이 있어라하면 신이 나타나고 천국과 지옥이 줄을 서서 개개인의 취향에 맞춰 맞춤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없는 신도 만들면 신기하게 만들어져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종교에서 각종 신들을 내세우는 바람에 신들의 존재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혼란을 일으키고 있듯이 이 세계에서는 신뿐만 아니라 그 모든 가능성을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얼마나 마법 같은 일인가?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공을 초월한 공간인 제3의 작용체는 그 무엇이든지 제조해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바 대로 기는 공간을 뜻하고 이는 시간을 뜻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제3의 작용체인 지식에 대해서는 6장에서 잠깐 언급했을 뿐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살펴보지 않았다.

여기서는 제3의 작용체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

어떻게 신인합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깨달음이라고 말하면 우선 특권층의 권력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솔직히 깨달음의 세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깨달음이 되었던 현실이 되었던 그것을 손에 잡는 사람은 어차피 사람이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었던가?

다만 특권층의 권력으로 치부해버리거나 내버려둔다면 영원히 자신의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혹독한 수련과 깊은 고뇌를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모두가 이루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는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룰 수 있듯이 깨달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할 수 없으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이보다 더 간단하고 명쾌한 일이 있을 수 없다.

결국 얻는 것은 간단하다는 사실이다.

얻는 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수준과 비슷할 것이다.

신인합일의 세계는 곧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어떻게 신인합일이 깨달음의 세계인지 따져 물은 다면 할 말은 없지만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신인합일의 경지가 결코 과장되어지거나 허무맹랑한 일이 아님을 깨우치게 된다.

신인합일의 경지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의 합작품이다.

공간과 시간을 어우러지게 만드는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이 있었기에 그 모든 역사가 시작되어졌듯이 깨달음의 세계나 신인합일의 경지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쾌한 일인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제3의 작용체인 지식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그 어렵다던 깨달음의 세계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명쾌한 설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지 결론은 간단하고 명쾌하게 끝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신인합일의 경지든 깨달음의 세계이든 그 결론은 간단하고 명쾌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인합일의 경지는 반드시 신의 형상을 하고 있는 신의 존재와 인간이 하나로 엮어진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인합일의 경지는 한마디로 깨달음의 세계이자 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우주적인 관점과 우주적인 이해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신인합일의 경지는 우주의 끝이자 시작인 것이다.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 아니 원초적 우주 상태로 환원하는 일이자 우주의 끝을 여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솔직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신의 존재는 중요하고 또 초월적 존재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생각한다면 신의 존재는 우주의 구성요소 부분 중에서 극히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종교에서 신을 하늘처럼 떠받치려고 노력한다하더라도 신 자체가 이 우주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신의 영역이 따로 있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듯이 우주 자체가 신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들은 깨달음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 신의 세계를 뛰어넘고 우주의 안팎을 여행하며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상의 자유만큼 이 우주를 이해하는데 더 효율적인 도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 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적인 단어인가?

깨달음이란 말 자체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한마디로 그 모든 초월적 느낌을 얻게 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도 저절로 말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신의 형상조차 극미한 가루로 만들어 형체이전의 세계로 돌려놓고 생각하고 있듯이 깨달음의 세계는 우주이전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끝까지 걸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우주적인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깨달음의 세계는 우주를 대표하는 하느님의 존재조차도 뛰어넘는 초월적 느낌 속에서 깨닫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세계라 할지라도 분명 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모든 것을 함께 나누어가질 수 있는 포용적인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결국 신인합일의 경지는 깨달음의 세계이자 지고한 우주적 차원에서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지순한 초월적 의미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제3의 작용체

앞에서 신인합일에 관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3의 작용체는 신의 존재를 인정케 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로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3의 작용체는 분명 존재하지만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확인할 수 없는 무형의 지적 존재이다.

우리는 이것을 하늘의 뜻으로 또는 신의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그동안 신에 대한 고민에 빠져 그 존재성을 의심해온 데에 한 가닥 의문을 푸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아직까지도 분명하게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신의 존재가 어느 틈바구니에서 작용하고 있는가하는 의문은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의 작용체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함께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그림자처럼 끈질 지게 따라붙어 다니면서 간섭 아닌 간섭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제3의 작용체이기에 우리에게는 이미 친숙하게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을 해보아라!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져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론 끔찍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고맙기 그지없는 존재로 인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험난한 과정이나 신의 힘이 아니면 해결될 것 같지 않은 각종 어려운 일들을 당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신의 존재를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하거나 또는 원망을 해보는 것이 사람마음일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놓은 역사이지만 그 저변에는 신의 힘이나 영감을 통해 숱한 기적을 이루며 눈부신 과학발전을 이룩해온 것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인간은 신의 가호 속에서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가?

제3의 작용체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각종 험난한 일들을 이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일 것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3의 작용체는 말도 없고 소리도 없다. 그렇다고 형체를 드러내는 법 또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싫든 좋든 상관하지 않은 채 조용한 침묵 속에서 어깨를 두드려주며 오늘도 힘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전진 하라고 격려를 해주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7. 잡은 손을 잊어버리는 지혜

인간적인 지식이나 신학적인 지식이 인간에게 매우 유용하게 적용되어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어 질 수도 있다.

우주에서 인간의 시야로 바라보면 모두가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는 것 같지만 우주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한낱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과 지적능력을 겸비한 한 생물체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나노(nano)에서 욕토(yocto) 이상의 극미한 세상을 통해 우주를 바라보면 미래에 탄생할 각종 예언적 작품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인간의 지식을 새롭게 대체할 새로운 이름으로 정의해야하는 일들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또한 더 큰 베일로 감춰져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우주는 신기하게도 인간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현실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상의 신이라도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 신이 만들어지고 공상과학에나 있을법한 일들이 속도감을 탄 시간 속에 노출되어지면 현실적으로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수준에서 손에 잡힌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그 끝을 알 수 없는 묘연한 일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문제가 있다.

승자의 위치에 서있는 인간이 무엇이든지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위험한 발상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지만 침묵 속에 감춰진 우주까지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지금으로써는 인간의 지적능력을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삶은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다양한 방식의 삶을 요구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다.

종교적인 장소에서는 종교가 최고일 수 있지만 세상에는 종교 말고도 누려야할 다양한 사건들이 줄지어 서있다 보니 종교만을 내세우는 일은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본다.

항상 우주적인 큰 사상으로 우주적인 행보를 통해 보다 크고 넓은 가슴을 소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경품을 내걸고 고객을 유치하려는 상술처럼 구원과 기복신앙 및 치유효과를 내걸며 각종 다양한 압력으로 강요를 하더라도 우리들의 생각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얼마나 간단하고 명쾌한 일인가?

하지만 받아들이면 그것 또한 간단하고 명쾌한 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선택 속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하는 고민인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둘 중 하나는 선택하며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선택한 것에 대한 문제는 순전히 개인이 부담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공존하는 선악 속에서 이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드시 하나는 선택하거나 아니면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지닌 이기일원론이나 공존하는 선악처럼 이미 이 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분별을 일으키는 정신인데 그것조차도 놓고 살아갈 수 있다면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손에 잡고 살되 잡은 손을 잊어버리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때라고 본다.


8. 결론 : 우주적인 행보 속에서 깨닫는

성자들이 꿈꾸는 지상낙원은 일부에게는 이루어질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루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성자들이 꿈꾸는 지상낙원은 순진한 아이들의 생각만큼이나 단순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심신이 편안하다고 모두에게 똑같은 행위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모습으로 출발한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두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일들은 마치 인간 상품화시키려는 위험한 생각이 내재되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옳은 생각과 옳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극함에 이르면 별다른 기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알맞을 뿐이다."라는 채근담의 격언을 들추지 않더라도 절정에 다다르고 나면 경계를 구분할 이유가 없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홀가분한 상태에서 건져 올린 성자들이 말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에서 치열한 삶을 어떻게 하면 극복해나갈 수 있는가에 귀결되는 것처럼 성자들의 좋은 점들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전적으로 모든 것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성자라고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삶을 살다 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이상적인 점들을 발견하다보니 다음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나온 말을 가지고 현실에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자책을 한다거나 고민에 빠져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성자들이 말하는 지상낙원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에 불과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적어도 40대만 되어도 느끼는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성자들이 말하는 데로 이상적인 삶을 살다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물론 영적으로 발달된 사람이라면 굳이 40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20~30대에서 이미 성자들의 깊이를 꿰뚫고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언어와 인종이 다르고 연령과 배움 그리고 신체적인 조건과 주어진 현실이 다르다보니 하나같이 한곳을 향해 집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참으로 현명한 것 같다.

자신과 맞지 않을 때는 과부하상태에서 빠져나가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론 참으로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의 이치를 공부하다보면 선악은 공존하는 것 같다.

이는 우주탄생이전부터 시작되어져온 일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은 선악은 공존하며 경계를 넘나들며 손을 맞잡고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본다.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선악을 이분법적인 잣대로 바라보기보다는 음양의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변화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선만을 행할 수도 없고 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악만을 행할 수도 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악을 행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한다.

자신은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승자와 패자사이에서 오가는 힘의 균형이나 경쟁심등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남을 이기는 일은 자신에게는 이로운 것 같지만 상대에게는 쓰라린 좌절감이나 패배감을 안겨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물리적인 힘을 동원한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이렇게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선악을 동시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선악을 확대해석하다보면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출발하여 행동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선악을 동시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우리는 선악을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큰 힘으로 이해하다보니 선악을 구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선악의 경계에서 오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라고해서 악만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행동을 할 때가 많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악을 멀리하고 선을 선호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선악을 적절하게 구분해서 사용한다면 성자들의 말에 따라 필요 없이 자책하거나 고민에 빠져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 누구도 선악의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성자를 비롯하여 범인에 이르기까지 선악에 대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버리지 않는 한 선악의 공존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있다고 본다.

물론 정신적인 지주 면에서는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성자들은 무능력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공상가적인 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홀로서기에 실패한 채 절대자나 최고신을 등에 업고 나타난 성자들은 신에게 의지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종교적인 장점이자 최대의 결점을 낳기도 했다.

남에게 의지하는 일처럼 비참하고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에게 무조건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을 세워 나아가는 일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수련을 강조하는 일은 우주적인 행보를 통해 좀 더 세상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무조건 성자나 높은 사람 말 한마디에 놀아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일 수 있는 그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할 때이다.

편견을 싫어하는 뇌의 구조도 구조이지만 생각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주는 생각보다 크고 넓다.

그것이 현실이든 사후세계이든 우리들의 생각만큼이나 크고 넓은 것이 우주이다.

편중된 생각보다는 우주적인 행보 속에서 깨닫는 그런 생각으로 움직인다면 크게 걱정할 일이 없다고 본다.

수련은 세상의 온갖 기준에 맞춰 살기보다는 제일처음 중심 잡는 법부터 배우게 되어 우주적인 행보를 걷는데 일조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크게 깨우쳐야 시야가 넓어지고 가슴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주는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보다 항상 더 크고 넓게 존재해야한다. 그래야만 이 우주가 우리들의 상상력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넉넉함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우주가 비좁다거나 우리들의 상상력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또 다른 세계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우리들의 모든 상상력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우주이다.

이 우주 속에는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여백으로 존재하며 그림처럼 펼쳐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 이 우주의 여백을 하나하나씩 채워나가는 일에 재미를 느껴가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주가 존재하고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둘의 관계만 있으면 우주의 역사를 써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자, 모두들 힘을 내어 크고 넓은 우주를 향해 기지개를 켜며 마음껏 달려보자!

그것이 신이 되었던 과학이 되었던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향해 마음껏 달려보자!

우리들의 앞길에 꿈과 희망이 살아있는 한 우주적인 행보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 청아당 엄상호 詩


숲속에 앉아있는 나무들

뿌리를 흔들면

우주로 연결된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숱한 생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허구로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서있는 자리가

억겁의 세월이다.

몸으로

마음으로 전해져온

은밀한 약속들이 없었다면

생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근원은 하나라고 한다.

뿌리도 하나라고 한다.

고요의 극점을 통과하고 나면

모두가 하나라고 한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혼동이 온다.

숱한 생들이 모여 이루어진 나

홀로 서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를 흔들면

우주로 연결되기에

함부로 흔들 수는 없지만

침묵을 발견한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흔들 수가 있다.

지금 서있는 순간은

모든 것을 극복한 초월된 힘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초라한 자신의 모습일지라도

그 근원은 튼튼한 우주의 뿌리인 것이다.

성자로

대통령으로

정치가로

예술가로

경제인으로

학자로

시인으로

어부로

농부로

광부로

걸인으로

화전민으로

그리고 잡초와 암석으로 살아보았기에

발끝에 닿는 모든 생들이

하나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지금 서있는 자리에서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귀를 닫고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하나인데


후기(後記)


종교를 신뢰할 수 없도록 하느님이나 신들이 저지른 실수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지금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전할 수 있는 녹음기를 개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도 기록 장치를 마련해놓지 못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데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속기사나 지식인이 많지 않았던 시절에 글로 하느님의 말씀이나 신들의 말씀을 빠른 속도로 기록하거나 하드디스크에 덮어쓰기 방식으로 원본을 되살리지 못하도록 원본의 보존은 고사하고 사본의 사본 그리고 사본의 사본의 사본으로 그것도 저자나 필사자들마다 각기 다른 관점과 견해로 오류와 오기 투성이의 문장으로 기록하도록 방치해놓았다는 점이다.

저자나 필사자들에 의해 하느님의 말씀을 변개시킬 수 있는 글이 아닌 녹음기를 개발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를 남기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억 년을 한순간처럼 지내시는 분의 능력으로 단 수천 년의 역사를 내다보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는 하느님을 추종하는 추종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속기사가 없다면 아무리 지적능력이 탁월한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말씀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듯이 더구나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도 아니고 방언이나 타국의 언어로 말한다면 그러한 기록들이 진실성을 가지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저자나 필사자들은 적어도 그러한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 있거나 능숙한 솜씨로 암호를 해독하듯 방언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씌여져야만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전해 듣지 못하거나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어색한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서로는 원어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의 의미는 사실상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보수성이 강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자만이 알 수 있는 기쁨과 행복으로 우리의 공허함을 채우실 것이라든지 예수를 내 마음에 초청하여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한다면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강렬한 영적체험을 해본다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존재는 직접 죽어보지 않고서는 검증되어질 수도 확인되어질 수도 없는 존재이다 보니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아주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종속적이며 의타심이 많은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체험들이 반드시 기독교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타종교나 선도 기타 토테미즘과도 같은 곳에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가? 하고 역으로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접해보지 못한 더욱더 체계적이고 우주적인 강력한 영적체험들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솔직히 부지깽이 하나만 갖다놓고 정성을 다해 열심히 믿어도 기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성령이 충만한 영적체험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보수성이 강한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시키기 위한 성령으로 충만한 영적체험을 내세우는 일은 여러 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큰 경험과 큰 시야를 요구하는 일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지식은 종교 안에서는 최고로 높일 수 있으나 세상에 나와 타학문과 섞인 순간 물과 기름처럼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겉돌아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종교를 위한 과학과 지식은 신앙처럼 떠받치면서도 오류가 많은 종교를 지적하거나 깎아내린 듯한 분석력으로 갖다 대면 신앙처럼 떠받치던 과학과 지식은 한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짐을 느낄 수 있다.

한마디로 입에 달고 먹기 좋은 것만 받아들이겠다는 속셈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그토록 편견과 편식을 요구하게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에 정중하게 대답할 줄 아는 진정한 종교지도자로 거듭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단점이자 교만함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마치 종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종교의 뜻이 지니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가르침 중에서 으뜸으로 높임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종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내린 아전인수격 자화자찬이요 교만에서 비롯되어짐을 알 수 있다.

겸손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어찌 이러한 모순된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모든 위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것과 똑같은 행태이다.

항상 최고의 위치에 높이 올려놓으려는 인간의 상향적인 욕구와 어떻게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코카콜라에서 정식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소비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듯이 종교도 과거의 기록방법에 모순과 오류 그리고 오기 투성이의 성서가 있을 수 있다고 정식으로 인정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러한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설파하는 일이 더욱 현명한 일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시대에 뒤떨어진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내세워 은밀한 방법으로 은폐하려거나 감추려고만 든다면 스스로 모순된 성서를 발견하는 사람들의 공격대상이 되거나 믿음으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종교를 선택하거나 또다시 무신론자의 우월성을 주장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영특하여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성서의 교리를 보고 다닌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에 의해 다니고 있듯이 그러한 포용적이고 잘못을 인정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오히려 더 큰 찬사와 큰 믿음을 심어줄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람들은 교리보다는 믿음으로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믿음에 대한 효과만 확실하다면 교리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는 지침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지만 믿음을 넘어설 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

종교를 향한 발걸음인지 삶을 위한 발걸음인지를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살아있으니까 그저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라!

삶에 있어 종교는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학문의 분야 중 그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조용한 분야이다.

더구나 무신론자에게는 전혀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는 천덕꾸러기 학문인 것이다.

종교는 믿음의 크기이지 학문의 크기가 아니듯이 글자에 얽매어 믿음을 키워나갈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에 따라 종교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이 올바른 종교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우주는 믿은 만큼 그 모든 것을 되돌려주려는 크고 넓은 마음이 있기에 상하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아낌없이 베풀어주려는 측은지심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이러한 혜택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는 종교를 떠나서 그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우주심이 있기 때문이다.


성서나 경전에 대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에 대한 경외심이나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자나 필사자들에 의해 발생된 오류와 오기가 많은 신화적인 종교를 접하거나 필요에 의해 생겨난 종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씌여진 오류투성이의 내용들로 결론을 맺게 되는 것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성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견해를 보이면 “이단”과 “거짓” 그리고 “분노”와 “저주”라는 말로 입을 틀어막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가 그 글자 하나까지도 하느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과 성서는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에서 무오하다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을 믿는 특히 보수적 기독교회에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현장에서 신앙인들을 상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행태는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살고 하느님의 말씀에 죽을 수 있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느님 자체를 업신여기는 이단자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더 심각하게 자신들의 밥줄부터 더 챙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자신의 밥줄인 하느님을 해체해버린다면 이 험난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그 무엇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야할지 암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양심 있는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성서의 모순점들을 들춰내며 성서의 생성과정부터 역추적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심 있는 신학자들의 역추적을 통해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처럼 PC와 인터넷을 통해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시절이 성서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도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자유자재로 글을 읽을 수 있는 수준에서 성서를 해독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지식인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더구나 저자나 필사자들조차 지적능력을 겸비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욱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본의 사본의 사본도 아니고 또 원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도 아닌 각기 다른 필사자들에 의해 베껴져왔다는 사실에 더욱 큰 놀라움을 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은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본문의 내용 중 극히 일부분만 들여다보아도 왜곡된 성경의 역사가 얼마만큼 심각한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책을 복사하는 유일한 방법은 손으로 베껴 쓰는 것이었다. 한 자 한 자 손으로 베껴야 했다. 이 일은 당연히 더디고 힘겨운 작업이었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다.

요즘에는 책이 나오자마자 불과 며칠 만에 전국 주요 서점에 수북하게 쌓인다. 책 이름이 같으면 그 책에 실린 내용은 단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어떤 책을 집어 읽어도 내용은 나머지 다른 책들과 똑같다.

고대 사회의 책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책은 모조리 손으로 직접 베껴야 했고, 한 번에 딱 한 권밖에 제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과정은 참으로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었다. 경우에 따라서 한꺼번에 여러 권이 필사된 일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각의 필사본들이 똑같은 본문을 가질 수는 없었다. 손으로 베끼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본문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겠는가?

어떤 때는 우연히, 또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본문은 변경되었다. 우연한 변개는, 글자를 잘못 베끼는 실수나 부주의로 본문이 변경된 경우를 말한다. 반면에 고의적인 변개란, 필사자가 자신이 베끼는 대본의 본문을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독자가 책을 읽는 중에 이 내용이 과연 저자가 쓴 그대로인지 아닌지 그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사본에 쓰인 단어들이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책의 사본 하나를 손에 쥔 누군가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 책을 나누어주고 싶으면, 그 사람은 또 다시 필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책을 베끼는 일은 필사를 직업으로 하는 필사자들이나 노예들의 몫이었다.

이런 과정은 너무 더디고 매우 부정확해서, 이런 식으로 필사되는 책들은 원본과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대 사회의 저술가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본문을 베끼다보면 으레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 문제는 고대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인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더 기이한 것은, 무엇보다 띄어쓰기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를 띄어 쓰지 않고 모두 붙여 쓴 것이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로,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둘째 치고, 일단 글을 읽는 일도 쉽지 않았다.

헤르마스는 음절을 잘 구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자신이 본문을 유창하게 읽을 수는 없지만, 글자 하나하나는 알아볼 수는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한 글자씩 천천히 베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베끼는 과정에서 실수할 확률은 훨씬 높아지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책의 종교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처음부터 몇몇 특정한 문서들을 권위 있는 책, 즉 성서로 강조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권위 있는 ‘본문’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기독교는 분명히 문서 지향적인 종교지만, 안타깝게도 그 문서의 본문은 계속 변경되어왔다. 원본은 없고 수많은 사본들만 있을 뿐이며, 그 사본들도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심각할 정도로 다르다. 따라서 본문비평학자들의 과제는 수많은 사본들을 토대로 가장 오래된 본문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 과제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약성서는 분명 서구 문명의 훌륭한 문화적 유산이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존중하는 책이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는 종교적인 내용에 대해 과민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종교를 무너뜨리기위한 음해나 모함이 아님을 주지해주기 바란다.

다만 필요에 의해 탄생된 종교라면 고답적이고 전통적 방식인 받아먹기 식 설교나 믿음보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맞춰 그에 부응할 줄 아는 종교지도자의 면모로 탈바꿈하여 모두에게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목회자가 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에 따라 구약성서가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악의 성서”로 비춰졌다면 신약성서는 인자함과 화평을 내세우며 우주를 포용하는 신으로 거듭나려는 “선의 성서”로 선회하고 있는 점을 보더라도 선지자의 메시지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미 선진적이며 열린 마음으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면 아래에 제시된 달갑지 않은 내용들에 대해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인간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소멸되어지거나 경원시되어져 역사와 함께 묻히거나 사라져가듯이 인간에게 약방의 감초처럼 종교가 필요한 이상 삶의 무게를 지탱하게해주는 세월만큼이나 종교의 역사는 긴 생명력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우주에는 지식이나 종교로 풀지 못하는 각종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주를 대표하는 신들의 권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침묵 속에 감춰진 우주의 비밀은 미래의 지식이나 새로운 방식으로 풀 수밖에 없는 수많은 문제들로 존재하고 있듯이 우주에는 신들의 권능을 벗어난 다양한 모습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혹독한 수련을 거친 후 발견하게 되는 우주적인 큰 생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관철하며 우주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깨달음의 세계는 우주를 통섭하고 우주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경계를 짓지 아니하면서도 신들의 권능을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들조차도 인간의 근본적인 의문점을 풀어주지 못하고 있기에 지식이나 종교를 벗어난 느낌의 세계이자 본원적 우주의 빛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들이 기복신앙과 치유효과를 빌미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한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관철할 수 있다는데 큰 매력이 있다.


여러 각도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달갑지 않은 내용들이 목회자나 신실한 신자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도 있지만 입을 틀어막고 수족을 묶어두려는 과거의 억압된 상황이 아닌 모든 정보로부터 열린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느낌 그대로 표현할 자유는 보장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과거처럼 성역화 된 특권층에 의해 세상이 경영되던 시대는 지나갔기에 이제는 언론과 네티즌들의 힘에 의해 특권층의 권력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인지한다면 암울하고 어둡던 과거의 억압적이며 명령조적인 승자의 역사는 청산되어져야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에서 탄생된 각종 종교나 정치․경제․문화적인 역사를 재검증해보려는 노력도 필요할 때라고 본다.

홍시 맛이 나면 홍시라고 말하듯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데 따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사람에게는 지식이나 종교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면서 느낌 하나면 충분하다고 본다.

처음부터 완벽한 종교였더라면 문제의 소지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문제의 발단을 수정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며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감춘다고 문제가 해결될 일이 아니라면 오히려 개방하여 체증처럼 굳어져버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열린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나가는 지혜로운 처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면서 지식이나 종교도 중요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넘어야할 영역들이 많다보니 항상 우주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생각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한다.

이 우주에는 천국과 지옥보다 더 넓은 우주가 존재하다보니 그 속에서 발생되는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 하듯이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생각해야하는 일들이 인간의 지적능력 범위 안에 포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우주를 감시할 인간의 지적능력 범위를 벗어난다면 몰라도 계속해서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우주적인 차원에서 우주적인 생각으로 살아가야할 의무가 모두에게 부과되어져있다고 본다.

종교적인 장소에서는 종교가 최고일 수 있지만 세상에 발을 들여 논 순간부터 세상의 이치대로 살 수밖에 없듯이 우주적인 생각으로 종교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균형 잡힌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치열한 삶의 방식을 무시한 채 몽상가처럼 세속적인 부의 경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종교만이 최고라고 부르짖는다면 그 자신은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한마디로 종교적인 환상 속에서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지식이나 종교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이렇게 우주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모니터링하려면 과거처럼 명령조의 교권주의나 신권주의에 얽매어 모든 것을 신의 뜻대로 행하는 어리석음에서 탈피하여 적어도 신의 구속력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는 우주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야함을 알 수 있다.

어느 한쪽에 구속되어지거나 억압되어져있다 보면 유연성이 부족하여 딱딱하고 고전적인 전통적 방식만 고집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보다 넓은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종교적인 행위를 그만두게 하려거나 멈추게 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밝힌다.

이제 와서 말린다고 종교적인 행위를 포기하거나 종교지도자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도 않겠지만 필요에 의해 생겨난 종교인 이상 모순된 성서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 탄생된 신흥종교이든 뉴에이지(동방의 종교들 즉, 힌두교, 불교 등과 신비주의, 그리고 기독교적 사상이 복잡하게 섞여져 있는 혼합 종교.) 심령집단이든지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계속해서 그 역사를 유지해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성현들이 삶의 길목에서 필요한 삶의 지침서를 자신들의 관점이나 기준에 따라 세워둔 후 자연처럼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놓고 ‘이것이 삶의 텍스트다’라는 식으로 삶의 방향과 기준을 내놓는 것을 보면 어떻게 보면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연’을 가지고 말장난의 극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행위로서 말과 표현을 대신하고 있듯이 지식을 넘어서 침묵을 따를만한 깊이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지식은 표현자의 관점이나 목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지만 시간과 공간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행위를 흔들지 않은 이상 절대적인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연은 굳이 이치를 따로 내세우거나 이러한 행위를 할 것이라는 예언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공존하는 선악에 따라 몸의 균형을 바로 잡아주려는 전정기관과 세반고리기관처럼 수위조절을 적절하게 배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느 한쪽에 크게 치우치지 않고 우주적인 균형을 잡아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앨빈 토플러도 공장에서 생산되는 대량생산과 같은 내용의 지식이 일률적으로 대량교육 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듯이 어쩌면 예수나 석가, 공자 등 성자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층에 의해 대량상품화 되어가듯 인간상품화 되어가는 과정이 싫은지도 모른다.

물론 맞춤형 교육을 위해 치러야할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대량생산과도 같은 대량교육은 지양되어져야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 기준에 의해 표준화되어지고 또 그것이 경제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져야만 역동성을 갖고 움직일 수 있기에 기준이나 표준화과정은 필요에 의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론 성자들이 추구하는 세계처럼 경제논리를 벗어난 듯한 몽상가적인 이상만으로 세상이 움직여지고 있지 않음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체에너지학 이론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생체에너지학의 거장이신 홍태수 교수께서 《진리를 아는 법》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미개한 원시부족에서는 수레를 비롯하여 자동차나 고층건물이 존재할 수 없음을 이유로 들면서 인류는 지적능력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유지 발전시켜나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지식이라는 것은 성자들이 혹독한 수행을 거친 후 발견하게 된 자신들의 사상을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기준에 맞춰 잣대를 세워나가고 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지도록 큰 힘으로 작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에서 한 부분으로 떨어져 나와 인간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생활하며 모든 잣대를 인간적인 기준에 짜 맞추며 생활하고 있지만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만약에 동물적인 입장이나 타은하계의 생물까지 확대해서 살펴보면 인간적인 잣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달을 수 있다.

기준이라는 것은 편의상 정의되어진 것이다 보니 기준을 무시하거나 과녁 없는 화살처럼 기준에 맞출만한 기준이 사라지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어 짐을 알 수 있다.

이 우주에는 현실조차 부정되어질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극미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듯이 인간의 잣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우쳐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분명 성자들의 말씀이 옳고 지고한 목적적 진리에 부합함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은 마치 전기에 과부하가 걸리면 휴즈가 나가듯이 아무리 좋은 말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자신에게 필요치 않으면 모두 다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수 있는 과감한 용기가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깊은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이 싫은 것이다.

물론 성자들이 그러한 말을 할 때까지는 경험과 학문적 배경을 섭렵하며 연구하고 또 혹독한 수행을 통해 건져낸 지혜이지만 몽상가나 한량가처럼 말로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는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삶의 기준과 기회는 엄연히 자신에게 주어져있다.

선진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지 못하거나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폄하하거나 인간적인 평등함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직선적으로 생각하며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면 가난한데로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내재될 수 있고 비록 언제 낙하할지모르는 위험한 위치에 있는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물질적인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듯이 이 세상에는 어느 하나만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보니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향과 기회를 보장해주며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야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과학동아, 하늘에 사는 남자 블로그

http://blog.naver.com/k840000?Redirect=Log&logNo=50011429827

깨달음과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사후세계 :

http://www.injeon.or.kr/flow_diagram_21.php

인체전자석의 원리를 이용한 신단 :

http://www.injeon.or.kr/breathing_shindan.php

http://www.yhedang.com/cgi-bin/technote/read.cgi?board=컴퓨터정보&y_number=27&nnew=2

삼족오 : http://sarim.changwon.ac.kr/~dodemy/m-samjok.htm

삼족오는 뭔가요? :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J&qnum=5228492

Holynet-다국어성경 HolyBible : http://www.holybible.or.kr/

앨빈 토플러 《부의 미래》<청림출판사. 2006.>

앨빈 토플러 《제3물결》<한국경제신문사. 1993.>

보도 섀퍼 《돈》<북플러스. 2005.>

이쿠다 사토시(生田 哲) 《하룻밤에 읽는 성서》<랜덤하우스중앙. 2004.>

윤태익 《나로부터 비롯되는 변화》<21세기북스. 2005.>

황수관  ≪저 보세요, 저 보세요 그래도 웃잖아요!≫ <제내시스21(주). 2007.>

전광  ≪성경이 만든 사람-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생명의말씀사. 2007.>

조은태  ≪성공과 축복을 위한 7가지 지혜≫ <타문화권목회연구원. 2001.>

티모스 프리크/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예수는 신화다≫ <동아일보사. 2002.>

홍태수 《진리를 아는 법》<세명문화사. 1996.>

토머스 불핀치 《그리스․로마신화(원제 : 신화의 시대(The Age Of Fable))》<범우사. 1993.>

정영호 편역 《여씨춘추-십이기(本), 팔람(補), 육론(補)》<자유문고. 1992.>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한국경제신문사. 1994.>

조지훈 《신채근담》<현암사. 단기 4292.>

이형기 《현대시 창작교실》<문학사상사. 1991.>

김광림 《현대시의 이해와 작법》<을파소. 1999.>

빌 게이츠 《생각의 속도》<청림출판. 2000.>

바트 어만 《성경 왜곡의 역사》<청림출판. 2006.>

윤무학 《순자》<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5.>

양쩌보 《맹자의 성선론 연구》<기창. 2005.>

도올 김용옥 《기독교 성서의 이해》<통나무. 2007.>



2007년 7월 5일


청아당(淸雅堂) 엄상호(嚴常顥)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