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은
그 하나를 전달하기 위한
표현인 것을…”
1987년에 써놓은 글이다.
공(空), 중도(中道), 깨달음, 무극(無極), 고요의 극점, 공존하는 선악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주의 속살인 투명한 한 줄기 빛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들이다.
많고도 많은 철학적인 깊이들은
결국은 그 하나를 표현하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전달하고 싶은
각자(覺者)들의 개성이 담긴 소중한 정수(精髓)이다.
문자나 방편은 아무리 뛰어나도
언어 이전의 세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우주에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형태나 만질 수 없는 것들을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 보거나
영감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은 할 수 있다.
소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은 직접 소가 마셔야 하는 이치와 같다.
이론이나 학문적인 것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일지라도
언어 이전의 세계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둘 다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문자나 방편도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기에 그렇고
언어 이전의 세계 또한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기에 그렇다.
2022년 7월 27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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