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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그릇은 커야 한다

믿음의 그릇은 커야 한다 소박할수록 좋은 것도 있지만 믿음의 그릇은 클수록 좋다. 그릇이 작으면 큰 것을 담을 수가 없지만 그릇이 크면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란다는 것은 간절해야 하고 처절해야 하고 애절해야 하고 절절해야만 한다. 절실함이 묻어나지 않거나 순수함이 묻어나지 않는다면 믿음 그 자체는 힘을 쓰지 못한다. 믿음은 순응에서 비롯되어지고 믿음은 고해 속에서 시작되어지고 믿음은 준비된 그릇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2월 7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여백에 채울 수 있는 것은 많다

여백에 채울 수 있는 것은 많다 잔설이 녹지 않은 채 하얗게 덮인 청량산 숲속바위쉼터! 병풍바위로 바람은 막아도 눈은 막지 못하여 생겨난 일이다. 여백은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단어다. 채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아서이다. 여백은 말 그대로 여백 속에서도 빛이 나야 하기에 여백의 미를 남겨두어야 하는 큰 과제가 남아있다. 여백은 품을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하며 여백은 배려해야 할 것이 많아야 하며 여백은 하늘과 땅을 가른 후 하나로 합해야 하며 여백은 치유의 뜻으로도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백은 무한한 공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좋아하며 여백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여백은 순백의 미를 좋아하기도 한다. 한 호흡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은 수없이 많다. 눈 한 번 감았다 떠보면 일 년이 지나가 있거나..

삼일신고(三一神誥)

삼일신고(三一神誥) 天無形質 無端倪 無上下四方 虛虛空空 無不在 無不容 하늘은 형체도 내용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아래도 네 방향도 없고 텅 비고 공허하며, 있지 않은 곳이 없고 품지 않는 것이 없다. [출처] 삼일신고(三一神誥) 원문과 풀이|작성자 씨올 유래 1906년 1월 24일 오후 11시, 당시 헌신적으로 구국운동을 하던 나철이 서대문역에서 세종로 방향으로 걸어갈 때 한 노인이 다가와 "그대가 나철인가?"라고 묻고는 "내 이름은 백전으로 나이는 90일세. 나는 백두산에 계신 백봉선사의 제자인데 백봉선사가 그대에게 이것을 전하라고 해서 왔노라."고 하며 백지에 싼 무엇인가를 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나철이 나중에 풀어보니 『삼일신고』와 『신사기』가 한 권씩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삼일신고는 6..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은 무시의 일에 관한 것으로 언어 이전, 사유 이전이며 무언의 가르침이므로 이 글은 해석할 수 없다.” 가고자 하나 갈 수 없는 곳이 있으며 잡고자 하나 잡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언어 이전의 세계 사유 이전의 세계이자 무언의 가르침은 해석하기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분명 있다고 말하는데 잡으려고 하면 없으니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분명 없다고 말하는데 놓으려고 하면 나타나니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있고 없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지인을 하나로 묶어 본체로 삼고 그 본을 바탕으로 줄기와 가지로 뻗어나가니 비로소 생명이 싹트고 호흡을 얻는다. 호흡은 무에서 시작되어 유에서 완성된다. 호흡은 유에서 시작되어 무에서 완성된다. 이 둘의 관계에서 생로병사가 생겨나며 윤회의 끝자..

무(無)

무(無) 無는 모든 것을 품을 줄 알아야 하고 無는 모든 것을 비울 줄 알아야 하고 無는 모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無는 모든 것을 가질 줄 알아야 하고 無는 모든 것을 처음과 끝으로 되돌릴 줄 알아야 한다. 無는 형체 없는 有요 有는 형체 있는 無다. 오고 감에 있어 有無의 다리를 건너지 않은 이가 없으며 파격의 미를 깨닫지 않은 이가 없다. 無는 찾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보는 것이며 잡는 것이며 버리는 것이다. 보고 잡고 느끼고 버려도 손끝에서 사라지지 않으며 눈앞에서 멈추지 않는다. 잡으면 사라지고 놓으면 다가오는 형체 없는 마음과 같으니 無를 형체로 잡으려거나 형체 없음으로 잡으려면 영원히 잡을 수가 없다. 無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며 有를 벗 삼아 바람으로 맞이하거나 자연과 우주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천지인이 원래 하나이니 하나가 만물이요, 만물이 하나이다. 색즉시공이며 공즉시색이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원래 하나이다. 하늘을 날거나 땅속을 달리거나 행위 자체는 하늘과 땅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조용히 숨죽이며 기도를 하거나 침묵하며 호흡에 들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하늘과 땅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닿지 않은 것이 없으며 과거, 현재, 미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는 거와 같다. 그 끝을 찾아가면 보이지가 않고 그 시작을 찾아가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거와 같다.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요 본래부터 있던 것은 영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중요한 것은 본래의 모습이다. 태풍이 ..

명상을 통해 나타난 현상들

명상을 통해 나타난 현상들 어떤 때는 도끼로 깎아지른 바위를 찍어 내리는듯한 부벽준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점점이 찍혀있는 산수화의 점묘법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긴장과 이완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편의 극적인 요소가 가미되어지고 있다. 명상 속에서 빛의 소용돌이 속을 여행하거나 공허 속에서 사라진 나를 찾는 장면은 상당한 경지에 이름을 뜻하기도 한다. 상대방의 환부를 자신의 몸으로 온전히 느낀다던가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투사 받아 느낀다던가 기의 흐름에 따라 미묘한 차이까지도 놓치지 않고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명상의 세계가 점점 깊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휴대폰을 잡는 순간 송수신이 단절된다든가 TV 전원 스위치를 켜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듯한 찌릿찌릿한 현상을 느낀다든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수련자세나..

우주는 넓고도 아름답다

우주는 넓고도 아름답다 노크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허공을 향해 두드릴 수도 있고 땅을 향해 두드릴 수도 있고 산과 바다를 향해 두드릴 수도 있다. 노크에 대답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수련자가 간절함 없이 행한다면 단지 행위예술에 불과하다. 하늘은 먼저 수련자의 정성과 지극함에 이르고자 하는 간절함을 본다. 우주는 넓고도 아름답다. 오죽하면 가없는 끝이라고 했으며 그 끝에 이르면 또다시 원을 향해 돌으라고 했겠는가? 처음과 끝은 늘 시작이다. 시작이 없으면 끝도 없듯이 무언가 움직임이 있어야 에너지를 만들던지 형체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수련은 명상의 깊이를 원한다. 깊이 더 깊이 그 끝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게 요구한다. 가 닿을만하면 더 가라고 한다. 다 왔나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

천년재회

천년재회 허공을 떠돌다 만난 부부의 연이 있다.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사랑이라기보다는 영혼을 녹이는 사랑이다. 운명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 인연도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 천년이 아니라 만년이 지나도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되어있다. 운명과 인연은 무엇으로 연결되어져 있을까? 가장 궁금하고 어쩌면 우주의 원리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간절함과 처절함이 낳은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늘도 감동하고 땅도 감동하고 모두가 감동하는 그런 사랑이다. 천 년 동안 만나지 못한 꿈을 만난다는 것은 지독한 운명이나 지독한 인연이 아니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중하고 귀중한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어둡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사랑이라면 가히 천년재회라 말할 ..

바람의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바람의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세를 잡는 법도 호흡을 하는 법도 손 모양이나 합장하는 법도 다 다르다. 초급자가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다. 법에는 원칙이 있고 예외가 있다. 원칙을 우선하되 예외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예외이다. 원칙은 정하기 나름이다. 예외도 정하기 나름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정법을 전수받으려면 그에 따라야 한다. 정법은 단체마다 다 다르다. 수련자가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 단체이다. 우선 자신의 몸에 잘 맞는지가 선결문제이다. 그리고 가능성이 있는가가 그 다음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면 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 바람의 길은 정해져 있는 것 같지만 정해져 있지가 않다. 원칙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예외는 응용력이라고 보면 좋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