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본연의 모습이 친구다

청아당 2025. 5. 5. 11:40

본연의 모습이 친구다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지금 이 자리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유 있는 말이다.

 

본연의 모습은 태초부터 있었다.

 

본연의 모습은 태초부터 깨달아온 녀석이다.

 

본연의 모습은 자연과 우주를 통틀어

영적 세계까지도 다 포함하는 의미이다.

 

있는 그대로 보았다고

본연의 모습이 흔쾌히 받아주지 않는다.

 

태초부터 깨달아온 본연의 모습이기에

본래부터 있었던 모습이기에

별다른 흥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뒤늦게 깨달았다고 호들갑을 떨어봐야

야단법석처럼 시끄럽기만 하다.

 

본연의 모습은 모두의 친구이자 가장 친근한 동반자이기에

자연을 풀어놓고

시간을 풀어놓고

공간을 풀어놓아 우주를 가슴에 안고 있듯이

너와 나를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깨달음의 원초적인 어머니인 본연의 모습에 안겨

살아가고 있다.

 

칠정과 더불어 지식, 기술, 태도를 바탕으로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실과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실과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묶어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이 모두를 대변해주고 있다.

 

과거의 나이던

현재의 나이던

미래의 나이던

지금, 이 순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은 삼세의 경계이자 통로이기도 하다.

 

홀연히 바람이 일어나 움직이면 인연이 되고 악연이 되기도 한다.

 

인연과 악연은 바람이 만들어주고 있다.

 

바람은 기후와 같아서 단 한시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다만 오가는 길에 또다시 인연을 만들고 악연을 만들 뿐이다.

 

인연을 악연이라 생각하면 악연이 되고

악연을 인연이라 생각하면 선연이 되는 것이다.

 

오가는 길목은 늘 열려있다.

 

본연의 모습이 자연과 우주를 통째로 껴안고 있듯이

오가는 길목은 폐쇄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할 뿐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본연의 모습이기에

앞으로도 인고의 세월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월이

줄지어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연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성이 강하다.

 

본연의 모습이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것은

변화라는 것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는 수시로 자연과 우주를 뒤흔들고 있지만

본연의 모습은 그 모든 것을 주시하며 껴안고 있기에

투명한 우주의 공간에서 변화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간섭하지 않아도 간섭되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기에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자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외롭고 힘들 때 찾게 되는 것이 친구이자 본연의 모습이다.

 

손만 내밀면 언제든지 달려오기에

본연의 모습은 친구 그 자체이자 우주의 어머니로서

충실하게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보고 싶다고 하면 달려오고

외롭다고 하면 달려오고

죽고 싶다고 하면 달려오고

살고 싶다고 하면 달려오는 본연의 모습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태초부터 허공을 꽉 채우고 있는 본연의 모습을 앞에 두고

깨달았다고 야단법석을 떨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어린애 같은 몸짓이다.

 

우리는 어른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

 

본연의 모습이 묵묵히 앞만 보며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변화라는 바람을 타고 그저 흘러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과 친구가 되는 지름길이다.

 

202555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