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강화도를 회상하며 / 청아당 엄상호 詩
흙먼지 날리던
비포장 강화길!
그 시절에 자전거를 타고
강화도를 향해
달리던 추억이 떠오른다.
가다가 목이 마르면
밭에 들어가 무 하나를 뽑아먹고
또다시 흙먼지 날리며 폐달을 밟았다.
그때는
누가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는 그 시절이 좋았다.
추억이 있고
기억의 흔적이 있고
폐달을 밟을 수 있는
비포장도로가 있어서 더 좋았다.
벌써 40여 년 가까이 되어간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다.
지금은
1970년에 개통하여
1998년 폐쇄된 강화교(江華橋) 대신에
1998년 2번째로 개통된 강화대교(江華大橋) 그리고
신강화대교(新江華大橋)가 2001년 8월에 3번째로 개통되었고
강화초지대교(江華草芝大橋)는 2002년 8월에 개통되었고
강화교동대교(喬桐大橋)는 2014년 7월에 개통되었고
석모대교(席毛大橋)는 2017년 6월 28일 0시에 개통된다.
통행료는 무료라고 한다.
석모대교 개통일은
6월 28일이지만
6월 25일(일요일)에
석모대교 개통 기념 걷기대회 및
제17회 강화해변 마라톤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에서
오전 08:00시에 집결하여
오전 09:30분에 출발하였다고 한다.
총사업비 854억 원
다리 폭 12m
길이 1.54km
왕복 2차로이다.
2013년 3월에 착공하여
4년 만에 완공되었다.
석모도(席毛島)는
우리나라에서 22번째로 큰 섬이다.
관광객이
연간 100만 명이 찾을 정도로
관광 명소이다.
석모도(席毛島)에는
민머리 해수욕장외에도
장구너머포구가 있고
장구너머포구보다 훨씬 큰
어류정항이 있다.
그밖에도
석모도 자연휴양림이 있고
석모도 캠핑장이 있고
석모도 퍼니랜드가 있고
석모도 수목원까지 갖추어놓고 있다.
세월은 잡아두면 안 된다.
그냥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것이 좋다.
잡는다고 잡혀질 세월이 아니다보니
놓는다고 달아날 세월이 아니다보니
그냥 흘러가는 데로 놓아두는 것이
그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얼마나 달려왔던가?
뒤돌아보면
벌써 40여 년 전이다.
강화 마니산(469.4m)이 유명하여 올라간 적이 있었고
강화 정족산(222.5m) 삼랑성(일명 정족산성) 내 전등사가 좋아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전등사내 다로경권 찻집을 향해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계곡이 있는 함허동천이 좋아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정수사가 궁금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철종 외가길이 있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보문사가 좋아서 배를 타고 건너간 적이 있었고
강화 백련사가 궁금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고려산(436.3m)이 좋아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고려산 아래엔 강화홍릉이 있고
강화 시내 궁궐터가 궁금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민물장어가 맛있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인삼이 좋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홍삼이 좋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마가 좋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새로 생긴 인삼센터 내
밴댕이 회덮밥이 맛있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고
강화 외포리에 전어가 맛있다고 해서 달려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교동도는 추억이 많이 있는 곳이자
개그맨 이수근의 처가댁이기도 하다.
교동도는
교동대교를 건너가면
수초가 우거진 고구저수지가 나오고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교동읍성, 남산포구,
교동향교, 화개사, 망향대, 난정저수지, 교동선착장 등이 있다.
그리고 강화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가 손을 흔들며 유혹하기도 한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정족산(222.5m) 삼랑성(三郞城)은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다.
다로경권(茶爐經卷)은
차를 끊이면서 경전을 읽는다는 뜻과 함께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실제로 전등사에서
대중들이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다른 곳보다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근접거리에 있기에
수시로 달려가 마음을 달래곤 했다.
강화도에 있는 저수지를 살펴보면
대산저수지가 있고
국화저수지가 있고
선행저수지가 있고
돌성저수지가 있고
인산저수지가 있고
박공재저수지가 있고
길정저수지가 있고
망실지가 있고
장흥제1저수지가 있고
장흥제2저수지가 있고
분오리저수지가 있고
장화저수지가 있고
황청저수지가 있고
고려저수지가 있고
신선저수지가 있고
교산저수지가 있다.
교동도엔
고구저수지가 있고
난정저수지가 있다.
석모도엔
하리저수지가 있고
삼산저수지가 있고
매음1저수지가 있고
매음2저수지가 있다.
대학교를 살펴보면
인천가톨릭대학교가 있고
안양대강화캠퍼스가 있고
가천대학교강화캠퍼스가 있다.
이번에는 강화에 있는 진과 돈대를 살펴보자.
갑곶돈대에서
해안동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더러미포구가 나오고
용진진삼거리가 나오고
용진진, 용당돈대, 화도돈대,
강화전성, 오두돈대(廣城堡─烏頭墩臺),
강화광성보가 눈길을 끌며 유혹한다.
광성보 내에는
쌍충비각이 있고
손돌목돈대가 있고
광성돈대가 있고
용두돈대가 있다.
광성보를 지나 달리다보면
덕진진입구사거리가 나오고
덕진진이 나타난다.
덕진진 건너편 대명항 쪽으론
덕포진이 있고
덕포진돈대터가 있다.
덕진교를 지나면
초지진입구교차로가 나오고
초지진선착장이 있고
우회전하면 전등사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강화초지진을 만나게 된다.
계속해서
황산선착장이 있고
후애돈대가 있고
선두4리선착장이 있고
택지돈대가 있고
분오리돈대가 있고
동막해변이 있고
미루지돈대가 있고
북일곶돈대가 있고
장곶돈대가 있고
선수선착장이 있고
선수돈대가 있고
선수포구가 있고
굴암돈대가 있고
건평나루가 있고
건평돈대가 있고
외포리선착장이 있고
외포항이 있고
연안여객터미널이 있고
망양돈대가 있고
삼암돈대가 있고
석모대교가 있고
황청리선착장이 있고
창후리선착장이 있고
무태돈대가 있다.
강화(江華)는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을 뜻한다.
강화는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305.75㎢이고 해안선 길이는 106.5㎞이다.
경기만 북쪽의 한강 하구에 있으며, 동쪽의 염하(鹽河)를 사이에 두고
경기도 김포시와 접해 있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등장하였다.
강화는 남다른 데가 많다.
물론 유적지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고려 무신정권 때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오판으로 인해
오랜 세월에 갇혀 살았던
치욕과 오욕의 시절이 있어
뼈아픈 곳이지만
강화는 그래도 좋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며
30년 전쟁으로 치르게 될 수많은 인명 피해에 비교한다면
훨씬 적은 손실로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갑곳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진이란 진은 다 쳐놓은 채
강화도 전체를 감싸고 있어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었고
실제로 오랜 세월 버팀목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호국을 목적으로
고려대장경이 탄생한 곳도 강화도이다.
누가 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
누가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저 발걸음이 움직이고
눈과 귀가 보고 싶다고 달려가자는데
별다른 수가 있겠는가?
오라하면 가고
가라하면 오는
그런 행위를 반복하며 살아온
곳이
강화도이다.
남다른 추억이 쌓이고 또 쌓이다보니
김포조각공원에도 가보고
문수산성에도 가보고
가다가 힘이 들면
초지진에 들러
초지대교를 배경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건너오곤 하였다.
이제는
초지대교에서
곧바로 전등사로 통하는 큰 도로가 나있어
굳이
강화대교를 건너 돌아갈 필요까지는 없다.
그렇지만
강화대교에서 초지대교를 향해
흘러내려가는 강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드라이브코스인 해안도로가 있어 그만이다.
명상을 할 수 있어 좋고
중간에 쉼터가 있어 좋고
강물 흐르는 소리가 있어 더욱 좋다.
마음만 먹는다면
외포리는
단숨에 달려갈 수도 있고
내가면에 있는 내가저수지 또한
단숨에 달려갈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강화도엔 펜션이 많다.
안면도만큼이나 많은 곳이
석모도이다.
특히 석모도엔
펜션이 석모도를 둘러싸고 있는지
석모도가 펜션을 둘러싸고 있는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펜션 문화가 정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가족단위로 놀러와 민머루 해수욕장에서
여름을 즐길 수도 있고
갯벌체험학습도 할 수 있어
그만이다.
강화도엔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손으로 잡을 것도 많고
손으로 놓을 것도 많은 곳이다.
그리고 언제든
발걸음이 움직이는 데로 달려갈 수 있는 곳이
강화도이다.
폐달 대신
가속기를 밟을 수 있는 곳도
강화도이다.
2017년 6월 27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형성 및 변천
강화도의 중심인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 강화현에 속하였고,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왕실이 개경에서 천도한 뒤에는 강도(江都)의 소재지로 기능하였다. 1377년(우왕 3)강화현이 강화부로 승격된 이후에는 부치(府治)가 자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강화군으로 소속된 이래 1994년까지 경기도 강화군에 속하였다. 1995년에 강화군이 인천광역시에 속함에 따라 인천광역시 강화군 소속이 되었다.
12-2. 바닷물을 다 퍼내지 못하듯이 – 강화도(수정) / 청아당 엄상호 詩
네발달린 자동차에 탄 사람은
세 사람
같은 생각
같은 목적으로
같은 장소에 도착하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물권을 살핀 결과
길목에 소방도로가 나있지 않은 맹지이다.
3,000평으로 이루어진 밭과 임야가 산비탈에 서있는 것이다.
똑같은 땅도
어느 곳에 서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이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고 있다.
비록 산비탈을 끼고 서있지만
활기를 띄고 있는 내가면 외포리 부근에 위치해 있어
호가가 평당 50~60만 원 정도 간다.
용도는 전원주택이나 펜션으로 딱 좋은 자리이다.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바닷가나 강 그리고 저수지를 끼고 전원주택이나 펜션이
줄을 서서 서있는 것을 보면
물이 있는 곳에
강이 있고
바다가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횟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현장답사도 할 겸
석모도를 향해 오후 3시에 배를 탔다.
갈매기는 배를 향해 모여들고
먹잇감을 달라고 손에 닿을 위치까지 날아와
끼룩거린다.
바람이 차다.
아니 오늘따라 정신이 맑을 정도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온다.
이미 중무장한 몸이라
가슴은 따뜻하다.
석모도 석포항에 도착하여 전득이 고개를 넘어 해명초등학교를 지나
매음리[煤音里, Maeeum-ri] 방면을 향해 달리다보면
2006년부터 생산을 중단하여 지금은 염전 터만 남아있는
삼량염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외롭게 서있는
“매음 보건진료소” 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내뿜으며
칼바람에 서있다.
자연학습장으로도 이용되어지고 있는 민머루 해수욕장에 도착하여
발끝으로 모래사장을 밟았다.
“백사장은 폭이 50m, 길이가 약 1km이며, 바닷물이 빠지면 수십만 평의 갯벌이 나타나
학생들의 갯벌 체험장으로 많이 이용되고, 대학생들의 MT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갯벌과 모래에는 미네랄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어 각종 부인병과 신경통,
여성들의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동해안 해수욕장처럼 깔끔하게 잘 갖추어진
해수욕장이라 말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조그마한 섬 안에 모래사장이 있고
언덕위에 세워진
“별천지, 언덕위에 하얀집, 춘하추동, 시월애, 토담마을, 바닷가에서” 등
카페와 아름다운 펜션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만으로도
해수욕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이미 석포항에서 내린 사람들이 먼저 달려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과 낭만을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석모도는 햇빛을 기준으로 남향과 그 반대편에 서있는
펜션이
차가운 겨울날씨를 녹여주고 있다.
개발할 여지가 많은 곳이지만
아직까지는 가슴에 꽉 찰 정도로 따뜻한 느낌은 없다.
섬 중앙부인 석모도에 낙가산(洛伽山) 기슭에 자리 잡은
보문사(普門寺)가 없었다면
허전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차를 돌려 외포리에 도착하여
고려저수지까지 달려와 보니
고려저수지(또는 내가저수지) 주변으로 아름다운 펜션들이 줄지어 서있다.
전에는 분명 이름 없는 뒷산으로 저수지를 안고 서있었는데
지금은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신혼부부가 낚시를 하다가 남편이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주고받고
고려산 정상에 서있는 레이더기지를 올려다보며
강화읍에 도착하였다.
“고려산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 명칭은 오련산(五蓮山)이다.
416년(고구려 장수왕 4)에 중국 동진의 천축조사가 이 산에 올라
다섯 색상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를 발견하였는데,
이 연꽃들을 하늘에 날려 이들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적석사)와 백련사·청련사·황련사·흑련사를 각각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 산에서 인근 낙조봉(343m)으로 가는 능선에는 억새밭이 넓게 펼쳐져 있기도 하다.“
강화읍은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강화인삼센터가 있고 고려궁지(高麗宮址:사적 133)가 있고
마니산(469.4m) 전등사와 외포리를 향해 달릴 수 있는 길목이 있다.
“마니산(469.4m)은 마리산(摩利山)·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69.4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전국체육대회의 성화(聖火)가 채화된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남서쪽 기슭에는 정수사 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전등사를 끼고 돌면 함허동천과 정수사가 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는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썼다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인
'함허동천(涵虛洞天)' 네 글자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함허동천은 기화가 마니산(摩尼山:469.4m) 정수사(精修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 함허동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강화대교를 건너기 전
문수산(376.1m)이 버티고 서있고
성동검문소삼거리를 지나면
성동마을입구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김포문수산성이 나오고
문수산장숯불장어구이집이 나온다.
그리고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갑곶돈대(甲串墩:사적 306)가 나타난다.
강화에서 유일하게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곳은
갑곶돈대에서 강화초지대교를 향해 나있는 해안도로이다.
해안도로는
강화도를 한 바퀴 선회하는 방식으로 되어있으며
동서남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동로, 해안서로, 해안남로, 해안북로로 이루어져 있다.
가속페달을 조절하며
천천히 달려야 바람이 차창에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갑곶돈대에서
해안동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더러미포구가 나오고
용진진삼거리가 나오고
용진진, 수연정, 용당돈대,
화도돈대, 강화전성, 오두돈대(廣城堡─烏頭墩臺),
강화광성보가 눈길을 끌며 유혹한다.
광성보 내에는
쌍충비각이 있고
손돌목돈대가 있고
광성돈대가 있고
용두돈대가 있다.
광성보를 지나 달리다보면
덕진진입구사거리가 나오고
덕진진이 나타난다.
덕진진 건너편 대명항 쪽으론
덕포진이 있고
덕포진돈대터가 있다.
덕진교를 지나면
초지진입구교차로가 나오고
우회전하면 전등사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초지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숯불장어구이집인
초가를 얹어 멋을 부린 통나무로 만들어진
“수연정”에 들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강화해안가에 떠다니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세월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인천에서 강화에 올 때는
먼저 강화대교를 건너고
내려갈 때는 반대로
갑곶돈대에서 출발하여
초지진에 들려 휴식을 취한 후
강화초지대교를 건너가는 것이
멋과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운치 있는 코스이다.
강화주변에는
김포문수산성으로 진입하여
곡선의 길을 따라 그 끝에 이르면
“전망대”라는 숯불장어구이집이 유명세를 타고 있고
김포조각공원 그리고 고인돌 등이 줄지어 서있다.
발길 닿는 곳이 유적지이다 보니
눈빛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영감이 떠올라야만 가능하지만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강화는
그 자체가
글이자 詩인 것이다.
자연이 자신을 자연이라 부르지 않듯이
강화는
자연이자
역사이자
기록인 것이다.
더 이상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현장이요
역사의 현장이기에
손으로
가슴으로도 쓸 수 없는
마법 같은 매력이 깔려있는 곳이다.
필요하다면 저수지는
해마다 또는 2~3년에 한 번씩 물을 퍼내
바닥을 샅샅이 살필 수가 있지만
바다는 필요하다고해서
바닷물을 다 퍼낼 수는 없다.
궁금하면
손끝에 닿는 느낌만큼만 살아가라 한다.
이 얼마나 현명한 생각인가?
재개발이나 재건축을 살펴보자!
가난에 찌든 달동네나
손만 대면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단지를 허물고
초호화판 고급빌라나 주택
그리고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초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 같은 사람들 같지만
다시 세월이 흐르고
눈높이가 높아지면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삶의 질을 바꾸려하는 것이 사람의 속성인 것이다.
그리고 보너스로
보석으로 치장된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인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이 손에 쥐어야만
얼마나 더 많이 생각해야만
끝이 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저수지는 쉽게 퍼낼 수 있지만
바다는 퍼내고 싶어도 퍼낼 수가 없다.
바닥을 다 드러내면
그것처럼 몰골 사나운 것도 없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물은
측량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바람이 되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바람은 불 것이고
내일도 바람은 불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다만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심이 필요할 뿐이다.
2009년 1월 10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12-3. 전등사와 함허동천(수정) / 청아당 엄상호 詩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들어서면
53개소의 돈대가 국방의 의무처럼 서있는 곳이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위(金錫胃)의 건의에 따라
강화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 輿地圖書〉에 그 명칭과 위치가 그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오두산 통일전망대(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위치한 관광지)에서 바라보면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한 후
바다로 통하는 강화대교 옆에 자리하고 있는
갑곶돈대를 비롯하여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초지진
그리고 덕진진, 광성보, 고려궁지, 강화고인돌, 강화산성이 유명하다.
‘강화산성은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세우면서 13년 동안 쌓은 외성, 내성, 중성 중 강화도 전체 해안가를 요새로 쌓은 성이 외성이고 지금의 강화읍을 감싸고 있는 내성(약 7122m)이 바로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숙종 3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또한 하늘과 연결된
영험한 마니산과 연개소문이 태어나
무술을 익혔던
고려저수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고려산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지금도 연모하고 있다.
강화도의 3대 명산중 하나인 고려산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유명하고
백련사와 청련사가 산기운을 받고 있다.
특히 초지대교를 건너
초지진을 지나면서부터 강화대교까지 연결되어진
해안도로는
참숯불 갯벌 장어와 민물장어구이가 유명하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추천할만한 곳이다.
조금 여유가 된다면
외포리에서 출항하는 배를 타고
석모도에 있는 ‘눈썹바위’와 ‘마애관음좌상’이 있는
‘낙가산 보문사’까지 답사를 행하면
그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날 수도 있다.
‘마애관음좌상’은
‘눈썹바위’라 부르는 커다란 바위 밑에 좌정하고 있어
우산이 없어도 사계절을 버틸 수 있는
석모도의 유명한 기도사찰 ‘낙가산 보문사’로
기도의 효험을 느끼는 신도들과 여행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남해의 금산 보리암과 함께 ‘3대 관음성지’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경우에 따라서 여수의 향일암을 넣어 ‘4대 관음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서기 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사찰 전등사는
1600여년의 세월을 지켜낸 한국의 대표적인 천년고찰이다.
또한 해발 468m의 높이로 세워놓은
마니산을 배경으로
정족산에 자리 잡은 천혜의 사찰로써
일주문 대신 삼랑성을 통과해야하는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삼랑성에 발을 들여 논 후
바람과 함께 걷거나
바위로 눌러 놓은 침묵의 길을 걷거나
삶의 뒤안길에 서있는 고된 길을 지나야만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나만의 길을 만날 수 있다.
더구나 짙은 안개에 쌓인 운무를 안고
전등사에 오르다보면
신선의 경지가 무엇인지
고요와 적막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는 세계에 들게 한다.
그만큼
천년시찰의 매력이 느껴지는 곳이자
말하지 않아도
깨달음을 주는 곳이기에
이보다 더 성스러운 곳이 있겠는가?
사뿐히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솟아나고
고목을 만날 때마다 느껴지는 향기는
땅을 박차며 뛰쳐나가고 싶은 경지에 이르게 한다.
참으로
넓고
깊고
높은 곳이
천년사찰 전등사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보다
더 넓고
이보다
더 깊고
이보다
더 높은 곳이 또 있겠는가?
마니산 정상에 오르기 전
절벽과도 같은 바위에 새겨진 함허동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함허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摩尼山 : 해발 468m) 정수사(淨水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기화가 썼다는 「함허동천(涵虛洞天)」네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함허동천의 색다른 풍속을 하나 소개하자면
야영을 하기 위해 찾아온 피서객들의 행렬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허동천이 새겨진 너럭바위를
상류로 하여
중류와 하류계곡에
텐트를 쳐놓고
가족들이 즐겁게 노는 곳이지만
그보다 먼저 잔뜩 쌓아온 짐들을 챙겨
야영장을 향해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만 한다.
과학이 발달하고
최첨단의 기술들이 발달하고 있지만
여기서만큼은
리어카를 사용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아버지가 리어카를 앞에서 끌면
뒤에선 엄마와 딸이
젖 멎던 힘까지 써가며 밀어야만
계곡에 도착하여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에
색다른 진풍경을 자아내기도 한다.
과거에는
회사에서 단체로
야유회를 즐기는 야영장이었지만
그 용도가 바뀌어
피서객들의 발을 시원하게 해주는
탁족이나
전신목욕을 즐기는 곳으로 바뀌었다.
세월은 한곳에
오래 서있는 것 같으면서도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바뀌어가는
묘용의 극치로 발전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함허동천에 오르기 전
입구에는
100년을 넘긴
아담하게 잘 가꾸어진
정원과 예배당을 갖춘
강남교회(1905년에 지어짐)가
마을을 지키고 서있어
함허동천 옆에 위치한
정수사와 쌍벽을 이뤄가며
종교 간의 마찰을 피하고 있다.
자연 앞에 서면
모두가 하나이자
서로 다툴 일이 없어지는 건
전등사와 정수사 사이에 위치한
작은 교회이지만
포용력으로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의 지혜가
밤낮으로 지키고 서있기 때문이다.
경봉스님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즐겨 썼던 선서
‘다로경권(茶爐經卷)’이 편액으로 서있고
솟대를 지나 ‘죽림다원’이 자리한 곳에는
진한 대추차를 시작으로
향긋한 모과차,
약차 쌍화차,
그윽한 국화차,
아름다운 오미자,
푸른 솔바람이 명상 속에 누워있는 ‘죽림다원’을 깨우고 있다.
그리고
유배지인
제주도에 있어야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세월도 쉬어간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 옆에 자리한
통나무 탁자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진한 대추차 한잔에
더위와 시름을 잊고
나무와 나무사이를 피해
달려온 바람이
고찰의 분위기를
격조 높은 품위로 유지시켜가며
여행객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달린다고 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춰도 달릴 수 있는 곳이
망중한 중에 누릴 수 있는 여유이자 자연이 내려준 혜택이다.
전등사 윤장대에 다다르면
허리를 굽혀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는 윤장대(輪藏臺)’를
혼신의 힘을 다해 돌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한번은 여고생들이 단체로 놀러와
윤장대 앞에 서있는데
빨간 셔츠를 입은 여고생이 유난히 인상 깊게 남는다.
사람에게 공덕이 없다면
살아가야할 가치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 공덕이다.
쌓는다는 것은
허공을 향해 그림자가 없는
무영탑을 쌓는 것과 같다할 수 있다.
성을 쌓고
명예를 쌓고
부를 쌓아도
공덕을 이루기 힘든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태어난 순간
수많은 죄가 등에 업혀있어
살아가는 만큼
죄가 무거워지는
억겁의 죄를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살아가야하듯이
태산처럼 쌓여가는
무거운 죄에 비례해서
그만큼 발걸음 또한 무거울 수밖에 없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주와 자연과 하나가 되어
허공에 묻히거나
그 어떠한 자극에도 분노를 느끼지 않거나
존재감 자체를 없애버린 후
허허로움으로
우주생성의 근본으로 회귀하거나
티끌조차 범접할 수 없는 무한의 끝에 서서
진공상태로 서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우주로 나아가는 길이자
자연으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함부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 것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한걸음이라도 제대로 걷지 못할까 두려워서 이다.
얼마나 많은 죄가
발걸음의 무게에 실려 있는지
그 누구도 속 시원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발 한발 옮겨놓을 때마다
그 죗값을 치르기가 겁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려야 그 죗값이 멈출지
얼마나 멈춰야 그 죗값이 사라질지
침묵조차 죗값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잡아도 죄를 짓는 일이요
놓아도 죄를 짓는 일이요
오고감이 없는
경계에서조차
죄를 짓는 일이기에
그 크고 엄격한 죗값의 크기는
우주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사람에게는
우주적인 죗값을
티끌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차 한 잔에
그 모든 고통과 시련
그리고 명상마저도 없애버릴 수 있기에
바람을 굴려
나그네처럼 우주를 여행하거나
자연의 품에 안겨
끝없는 길을 걷기도 한다.
손에 닿지만 않는다면
발에 닿지만 않는다면
산도
바다도
모두가 하나로 묶일 수밖에 없기에
명상으로 달려오는 바람과
참 나로 달려오는 발걸음으로
하나가 되어
침묵보다 더한
고요의 극점으로 회귀하여 버린다면
그 보다 더 경쾌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만하다는 것은
그 모든 죗값을
훌훌 털어버리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소맷자락을 날리며
백우선을 날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이다.
이 얼마나 가벼운 발걸음인가?
이 얼마나 가벼운 가슴인가?
마음한번 먹으면
우주가 나고 내가 우주이니
어느 곳에서 나를 찾을 것인가?
처음부터 찾을 것이 없는 허공인 것이다.
2011년 8월 11일 목요일
전등사 ‘죽림다원’에서 명상과 함께 대추차를 마시며……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1.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전등사(傳燈寺).
2.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은 벌거벗은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3.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郞城) 또는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 한다.”
<연개소문淵蓋蘇文 (?~665) 유적비>에 의하면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 개국의 성역이자 선사시대의 유적지인 이곳 강화는 천하통일의 큰 뜻을 품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의 연고지이다. 향토사 강도지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위엄어린 얼굴에 당당한 풍채는 뭇 사람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 터와 자취가 남아있다.
조선 상고사에 의하면 당을 정벌하고 한 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다.그때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집권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군(軍)과 민(民)이 하나가 되어 요수(遼水)와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싸워 당(唐)의 함선 4백여 척과 3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 특히 안시성 싸움에서 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당나라 내륙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가 화북(華北)지방을 정벌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다로경권(茶爐經卷) -
‘부석사의 향기를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의 해설에 의하면 찻물을 끓이는 화로(茶爐)와 경전이 있는, 차와 더불어 향까지 함께하는 곳이라는 격조 높은 이름이다.’
마니산 정상에 오르기 전
절벽과도 같은 바위에 새겨진 함허동천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니산의 계곡에 자리한 또 다른 멋인 함허동천(涵 잠길, 젖을 함 虛 빌 허 洞 비다 동, 골, 골짜기 동 天 하늘 천) 계곡이 있어 한때 고려의 도읍지였던 강화도에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함허동천이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조선 전기의 승려 기화(己和)가 마니산(摩尼山 : 해발 468m) 정수사(淨水寺)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했다고해서 그의 당호(堂號)인 함허를 따서「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계곡의 너럭바위에도 기화가 썼다는 「함허동천(涵虛洞天)」네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함허동천은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으로 함허대사가 이곳을 찾아 「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한다.
인근에 회정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정수사가 있으며 마니산 정상에는 국조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쌓은 참성단(塹城壇)이 자리 잡고 있다.”
12-4. 석모대교 / 청아당 엄상호 詩
밴댕이 회덮밥을 먹기 위해 갔으나
‘일오삼 무한리필’ 집을 발견한 이후로
마음이 바뀌었다.
‘일오삼 무한리필’ 집에서
1. 간장게장+양념게장+꽃게탕(1회 제공)
2. 간장게장+양념게장+매운 갈비찜(1회 제공)
3. 간장게장+양념게장+전어(1회 제공) 중
3종류로 분류되어져 있어
이중에서 1세트를 시켜 먹는 방식이다.
정식은 14,900원이고
무한리필은 19,900원이다.
처음엔
무한리필이 14,900원이었으나
물가상승률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정식을 시켜 점심식사를 했다.
충남서산 꽃게집이 유명하지만
가격이 비싸
저렴한 가격으로 대신했다.
생각보다
싱싱하면서 연하다.
일이 끝난 후
식사를 하다 보니
늦은 시간에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식사는 안 해도 될 만큼
밥 한 그릇을 더 시켜 반반씩 나눠 먹었다.
특히 간장게장보다 양념게장이 더 맛있다며
양념게장에 손이 더 간다.
워낙 양념게장을 좋아하는 편이라
나는 주로
간장게장과 꽃게탕으로 배를 채웠고
양념게장은 조금 남은 양만
깨끗하게 비우는 방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끝낸 다음
밖으로 나오면
아담한 정자가 석모도를 향해 서있고
그네와 통나무탁자가 준비되어져 있어
커피를 마셔가며 잠시 휴식을 취할 수가 있다.
2017년 6월 28일 0시를 기해
석모대교 개통식도 지났고
말일도 끝나가는 날이다 보니
머리도 식힐 겸
석모도를 향해 가속기를 밟았다.
총사업비 854억 원을 들여
4년 만에 완공된 석모대교다.
생각보다 많은 차량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외포리 선착장을 지나 외곽으로 연결된
석모대교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왕복 2차로이지만
인도가 양쪽으로 마련되어져 있었고
단단하면서도 튼튼하게 지어져 있어
개발이 한창인 석모도를 향해
대형 화물차가 거침없이 석모대교를 달리고 있다.
썰물이
빠져나가서인지
강화도와 석모도, 교동 사이엔
갯벌이 드러난 채
거대한 요새 같은 생각이 든다.
고려 무신정권 때
천연요새로 작용했던 계기가
어디에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큰길이 생기면
새로운 길들이 생겨나거나
새롭게 단장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각변동이 생기면서
판구조론처럼
다양한 변화가 석모도를 덮고 있다.
비좁던 왕복 2차로가 새롭게 단장되어지거나
버스정류소에 휴게소가 생겨나고
섬처럼 솟아오른 바위에
등대가 뱃길을 인도하고 있었으며
젊은 청년들은 자전거로 석모도를 일주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한 부부는 도보로 석모도를 걷고 있다.
외포리 선착장으로 가기 전
짓다가 만 호텔이 흉물처럼 서있고
좌측엔
석모대교로 유턴하도록
길이 새롭게 마련되어져 있다.
보문사 입구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보문사 입구에서 유턴하여 보문사를 지난 후 달리다가
리안온천을 발견하고
하나라도 뜻 깊은 곳을 남겨두자고 들어가 보았다.
별장형 한옥온천이
리안온천에 마련되어져 있었고
한창 분양 중에 있다.
족욕은 무료체험으로 제공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자리를 잡은 채 족욕에 전념을 하고 있다.
국내최초, 세계최초, 일본온천보다
리안온천의 성분이 더 낫다고
리안온천 측은 홍보하고 있다.
세계 유일 리안온천 성분별 효능을 강조하며
“세계적인 고농도 천연온천 - 리안온천”
“국내최초 온천을 내 집안으로”
다양한 홍보물을 내걸며 리안온천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다.
별장형 한옥온천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연면적 20평형
2층 규모로 되어있었고
침실로 들어가기 전
온천이
앞쪽에 배치되어져 있었으며
2층엔
테라스가 마련되어져 있어
조망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60평 대지가
별도로 마련되어져 있어
주차장 시설 및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가격대가 문제인데
투자가격치고는 좀 세다.
4억 6천만원대라고 한다.
잠시 들러본 후
석모도 선착장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시골바람이 들어온다.
막아도 막을 수가 없다.
어찌나 시원한지
저절로 시원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깨끗한 바람이
차안으로 몰려든다.
창문을 다 내린 후
달렸다.
석모도(席毛島)에는
민머리 해수욕장이 준비되어져 있고
장구너머포구가 준비되어져 있었으며
어류정항까지 준비되어져 있었으며
반갑다며 어서 오라고 손짓까지 한다.
잠시 눈길을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속기를 밟았다.
그밖에도
자연휴양림이 유혹하기도 하고
퍼니랜드가 유혹하기도 하고
수목원까지 유혹하며
푹 쉬었다 가라고 한다.
펜션은 강화도를 비롯하여
석모도엔
펜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먹을거리도 다양하게 준비되어져 있고
볼거리 또한 다양하게 준비되어져 있다.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또 다른 약속이 있어
인천을 향해 가속기를 밟기 시작했다.
강화도에서
인천으로 되돌아올 때
이상하게
초지대교를 건너기 전
초지진을 들르게 된다.
어떤 인연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초지진에 들러 휴식을 취한 후
커피한잔을 마신 후
초지대교를 건너
인천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2017년 6월 30일 금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12-5. 교동도 – 교동대교 / 청아당 엄상호 詩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인천–김포)를 달리기위해
인천항사거리에서 인천북항터널을 향해 진입한 후
2~3분 만에 통과하였다.
남청라 IC를 지나
청라국제도시지하터널을 통과한 후
검단·양촌 IC, 대곶 IC,
수안산터널를 지나자
서김포·통진 TG가 나온다.
요금소에서
요금을 내려는데
인천항사거리에서 오셨냐고 묻는다.
예!라고 대답했다.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강화방면으로
가다보면
통진중고사거리가 나오고
그 밑으로
마송지하차도를 통과하게 되어있다.
김포외국어고등학교를 지나
김포조각공원으로 갈라지는
갈산사거리를 지나게 되면
강화대교가 나오고
좌측으로 갑곶돈대가 자리하고 있다.
강화대교교차로를 지나면
인화-강화간도로(2017년 예정)가 공사 중에 있다.
이곳이 완공되면
강화시내를 피해 외곽으로 돌아서
교동대교까지 곧바로 통하는 길이 된다.
강화대교를 건너 달리다보면
알미골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강화인삼센터가 있고 강화풍물시장이 있다.
강화풍물시장 2층에
밴댕이회덮밥을 맛있게 하는 곳이 있다.
수협사거리를 지난 후
강화고려궁지가 자리하고 있고
강화외규장각이 있고
강화향교가 있고
강화산성북문이 있고
강화산성서문이 있고
연무당옛터가 있고
강화공설운동장이 있고
강화군국민체육센터가 있고
강화경기장이 있고
강화고인돌체육관이 있고
BMX경기장이 있고
강화아시아드 BMX보조경기장이 있다.
송해삼거리를 지나면
강화역사박물관이 나오고
강화고인돌유적(세계문화유산)이 있고
강화부근리지석묘가 있고
하점면사무소를 통과하여
신봉1리마을회관을 지나게 되고
이강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골길을 따라
달리던 기억이 생생한데
오늘은 날씨까지 받쳐주니
그 기분은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자
바람과 구름이 한꺼번에 달려오는 기분이다.
시골길은 언제 달려도 운치가 있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재주가 있다.
시골향기가 코를 자극하고
산천에서 불어오는 자연바람이
차창을 통해
손과 얼굴로 달려들 때는
무한한 기쁨을 받기도 한다.
이 얼마나 기쁜 날인가?
이 얼마나 뿌듯한 여행인가?
손에 잡힐 듯한 청람빛 하늘이
숨을 쉬며 다가와
귓가를 간지럽히는
모습은
가히 천상의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시정거리 또한 그 뒤를 받쳐주니
보는 곳마다 아름다움이 넘쳐나고
시야 또한 청명하기 이를 데가 없다.
마치 천릿길이 아니라
만 리길이라도 뚫고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본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잡을 수 있는 거리에서
손을 뻗는 것은
잡기 위함이 아니요
놓기 위한
하나의 잡음인 것이다.
어쨌든 간에
시골집 같은 길을 달리며
배우는 것은
소박함과 절제된 검소함 그리고
근면함과 성실함이다.
이강삼거리를 지나
인화삼거리에 도착하게 되면
해병대 검문소가 나오게 된다.
인적사항과 더불어
밤12시까지 통행이 가능한 표를 받은 후
통과하게 되어있다.
강화 교동대교(喬桐大橋)는
총연장 3.44㎞로 총 904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어
2014년 7월 1일 정식 개통되었다.
교동대교는 왕복2차로이자 연륙교로써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 짓는 다리이다.
우측으론
황해도 이북 땅이 보이고
좌측으론
교동도선착장이 보인다.
우측으론
황해도 이북 땅이 보이고
좌측으론
교동도선착장이 보인다.
이북 쪽으론
철조망이 경계선으로 쳐있고
오늘 새벽 북한에서 동해안 쪽으로
단거리탄도미사일 3발을 발사하고
그것도 모자라
연평도와 백령도를 향해
김정은이 대동한 자리에서
북특전사와 함께 포사격연습을 하고 있다.
8월 21일 ~ 8월 31일
한미 연합 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UFG)에 대한
무력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툭하면
연평도와 백령도 그리고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며 겁박을 하거나
괌과 미본토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며
직간접적으로 미국과 일본을 상대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미·일을 상대로 겁박하거나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휴전선인 이곳은
여전히 조용하다 못해
침묵에 가까운 정적만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민통선인데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거나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가며
일상적인 생활을 조용하게 보내고 있다.
이 얼마나 긴장감이 감도는 생활인가?
이 얼마나 평화로운 모습인가?
지금 그 생활이
휴전이후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교동대교를 지나면
고구저수지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12-6. 교동도 – 연산군유배지 / 청아당 엄상호 詩
하늘이 이렇게 맑고 깨끗해도 되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곳
연산군유배지인 위리안치소이기 때문이다.
청람빛 하늘이 카메라 렌즈에 맺혀
맑고 깊은 투명함이 맺혀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도 되는가?
이토록 눈이 시리도록 투명해도 되는가?
마치 죽음 앞에서
마지막 회한을 불사르며 자신의 죄를 털고 가는 것처럼
숭고한 죽음처럼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지금 그 순간이 바로 이 시점이기 때문이다.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
고구저수지를 통과하면 연산군유배지이다.
주차장이 마련되어져 있고
언덕길을 오르니
늦여름에도 굴하지 않고 숲속에선
매미울음소리가 크게 나고
‘연산군유배지(위리안치소)’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이미 관광객들이 조용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고
연산군 위리안치소를 둘러보거나
‘연산군의 유배행로’ 안내문을 읽고 있다.
연산군의 유배행로 안내문을 살펴보면
중종반정(1506년 9월 2일)으로 폐위된 연산군은 경복궁을 나와 남녀인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 돈의문을 나와 연희궁(衍禧宮)에 유숙하고
금포(김포) 유숙 >> 통진(김포시 통진면) 유숙 >> 강화 유숙 >> 교동고읍(당시 교동현) >> 고구리 안치소에 안치하였음.
이때 수행된 인원은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 1명에 당상관 1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였음.
본 조형물은 그때의 호송함거와 연산군의 복색 등은 사료를 근거하여 설치함.
연산군유배지[(燕山君流配址)-(圍籬安置)]는
기록된 자료가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교동읍성 옆에
‘연산군 유허지’라는 표지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유배지에는
‘연산군유배지문화관’이
‘연산군 위리안치소’보다 크게 지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극과 극을 이루도록 대칭시켜 놓았고
지금은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처음엔
‘연산군유배지문화관’을
‘연산군 위리안치소’라며
모 방송사에서 소개했었고
그 이후로
역사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한 칸짜리 초가집을 다시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토와 초가지붕으로 새로 지은
‘연산군유배지문화관’이
한 폭의 그림처럼
청람빛 하늘의 기운을 받아가며
詩로 서있거나
글로 서있거나
그림으로 서있거나
유적지로 서있거나
역사로 서있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모습인가?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한 후
중종반정으로 인해
강화도 교동도로 위리 안치된
연산군유배지가
슬픔보다는
하나의 예술적인 가치로
새로 거듭 태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위리안치소엔
콧구멍만한 방 하나에
밥을 지을 수 있는 부엌하나만 딸려있다.
비좁은 방안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식사를 하거나
취침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아마도 화병이 나서
두 달 만에
운명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드라마 '7일의 왕비'를 보아서일까?
새로운 각도에서 재조명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연산군의 사랑이 지극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번 드라마에서
여인네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성공해서일까?
왠지 연산군의 인간적인 면모가 새롭게 다가온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산군 묘
문화재 지정 : 사적 제362호
건립시기 : 1506년
면 적 : 지정면적 1만 4301㎡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사적 제362호.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은 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연산군지묘)’, 후면에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 부인 신씨의 묘비 전면에 ‘居昌愼氏之墓(거창신씨지묘)’, 후면에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六月二十六日葬(유월이십육일장)’이라 새겨져 있다.
12-7. 교동도 – 대룡시장 / 청아당 엄상호 詩
연산군유배지에서 언덕길을 넘으면
대룡시장이다.
대풍식당에서 냉면을 시켜먹은 후
궁전다방에서 쌍화차를 시켜먹었다.
냉면 맛이 담백하면서도 특이하다.
마치 집에서 먹는 냉면 맛이다.
고기 육수에다 오이를 썰어넣은 냉면이다.
가끔씩 집에서
오이냉국에 냉면을 말아 먹은 적은 있지만
영업집에서 오이를 사용하는 곳은 이곳이 처음이다.
궁전다방
주인마담하고 대화를 나눴다.
대룡시장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몰려오느냐고 묻자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촌스러운 시골시장이라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1박 2일' 프로그램에서 왔다간 것이
더욱더 유명세를 탄 것 같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면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고 한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된 이후
많은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직접 실로 짠 행주를 주며 가져가라고 한다.
잠시 후
밭에다 심은 옥수수를
삶은 것이라며 쟁반위에 올려놓는다.
냉면 먹은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니까
알아서 싸주겠다고 한다.
그리고서 하는 말이
쌍화차는 한 끼 대용으로 먹어도 될 만큼
영양분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시골이라 그런지
인심이 후하다.
볼만한 곳은 어디냐고 묻자
교동대교를 넘어오면
고구저수지,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교동읍성, 남산포구, 교동향교, 화개사,
망향대, 난정저수지, 교동선착장, 강화평화전망대라고 말한다.
강화평화전망대는
교동도에 있지 않고 강화도에 있다.
아기자기한 맛은 있으나
규모도 작고
말 그대로
촌스러움이 배어나오는 작은 시장이지만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다 없는 곳이
바로 대룡시장이기 때문이다.
대룡시장에서 교동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관광코스는
붉은노을 호프치킨, 삼성판매, Lee 헤어스토리, 방앗간,
대성양복점, 임득남 미용실, 교동다방, 대와 민속공방,
야생교동흑염소, 은행나무집, 폐가, 풍년식당,
교동초등학교가 나오고
가정집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다시 되돌아오면
엔젤식당, 교동이발관, 꽃신이 있는 중앙신발집이 있고
시원한 교동팥빙수를 파는 수지큐-우가 나온다.
수지큐-우 메뉴를 살펴보면
교동팥빙수, 무지개빙수, 얼음식혜, 미숫가루,
아메리카노, 아이스티, 라떼, 믹스 옛날커피 등이 있다.
제일다방, 찹쌀꽈배기, 창후정육점, 교동농산물, 핫도그,
궁전다방, 교동철물, 연지곤지식품, 해성식당, 대풍식당 등이 있다.
관광객들 중
찹쌀꽈배기와 핫도그를 입에 물며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한전이 있고
극장이 있고
디스코클럽이 있으며
다양한 벽화가 60~7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12-8. 교동도 - 교동읍성 / 청아당 엄상호 詩
대룡시장에서 출발하여
마을로 들어가니
교동읍성(喬桐邑城)이 보이지 않는다.
새로 축성하기 위해
상판을 들어낸 후
홍예문 가운데를 메꾸어 놓았다.
분명
사진 상으로는 볼만해서 와봤는데
사람을 놀라게 해도
적당하게 해야 하는데
깜짝 놀랐다.
이렇게 작고 허름한 곳이라면
홍보나 하지말지
실망이 크다.
하지만
새롭게 축성하고 나면
그 모습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시간여행에서 조금 빠르게 왔을 뿐
후회는 없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둘레 약 430m. 높이 약 6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 이 성곽은 강화도 서편의 교동도에 축조된 고을성으로 1629년(인조 7)에 쌓은 것이라 한다.
성을 쌓은 목적은 예로부터 서해안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는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여 왔다. 원래 이 성에는 세 곳에 문루를 갖춘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에는 통삼루(統三樓), 북문에는 공북루(拱北樓), 남문에는 유량루(庾亮樓)란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1753년(영조 29)에는 당시의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女墻)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에는 통어사 이교복이 남문을 중건하고 또한 문루와 성벽을 수리하였는데 공사를 끝내지 못하였다.
그 뒤 1890년(고종 27)에도 동문과 북문을 고쳐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무너졌다고 한다. 특히 남문의 유량루는 1921년의 폭풍으로 무너졌으나 홍예(虹霓) 부분만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에는 도서와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에서 외적의 방어를 위해 고을성을 많이 축조하여 왔는데 교동읍성 이외에도 인근의 강화읍성, 충청남도의 해미읍성과 안흥성, 전라북도의 고창읍성, 전남 진도의 남도석성 등을 들 수 있다.
12-9. 교동도 – 교동향교 / 청아당 엄상호 詩
교동향교는
화개산(259.5m)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로 전해지고 있으며
황해도 연안을 바라볼 수 있는
조망권까지 갖추고 있어
공부하면서
명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써
심신을 고요하게하면서도
성현들을 기리며
맑고 밝은 면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충렬왕 12년(1286)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그의 제자 10인의 초상을 가져와
전국 최초로 모셨다하여 교동향교를 향교 중의 으뜸인 수묘(首廟)라 칭한다.
유학자 안향[1243(고종 30)∼1306년(충렬왕 32)]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대룡시장에서
냉면과 쌍화차 그리고 찹쌀도너츠를 먹고 나와
교동읍성에 들른 후 교동향교에 도착하였다.
홍살문을 지나
교동향교를 향해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주황색 코스모스가 눈에 띈다.
해바라기도 반갑다며
옆에서 살짝 웃고 있다.
교동향교 외삼문을 거쳐 명륜당에 도착하니
공부하는 서당에는
우리집 가훈·서예를 쓰기위해 준비된
먹과 벼루만 있고 선생님은 안 계신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인천향교보다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되어져 있다 생각하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아침에 연산군유배지에서 만났던 관광객이
뒤쪽으로 돌아가면 행사가 있다고 한다.
10월까지 공사 중이라
대성전이 눈에 띄지 않자 막힌 줄 알고
내려가려는데 안내를 해준 것이다.
그런데
“머리조심”이라는 글자를 보고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 보니
대성전 하단에 위치한
강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동무(東廡)에서
가족과 학생이 두 분의 여선생님과 함께
책을 만드는 모습이 한창이다.
젊은 여선생님이 나와 반갑게 맞이하며
‘선비체험 유생복 입어보기’ 촬영을 하고 가라고 한다.
그리고
가로와 세로로 찍은 후 2장을
즉석에서 출력까지 해준다고 한다.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손수 옷 크기와 두건을 골라 준 후
선비체험 유생복을 입자 직접 옷고름까지 매어준다.
그런데
먼저 와서 ‘선비체험 유생복 입어보기’ 체험을 한
60대 중반의 중년 남성이
자신은 40대 정도 모습으로 사진이 나올 줄 알았는데
60대 초반으로 나왔다며 한마디 한다.
여선생님은
대답대신 미소로 대신하였고
나는
눈치 없는 강산이 너무 빨리 변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옷고름을 매어주는 와중에
조선에서 오긴 왔는데
옷고름 매는법은 잊어버렸다며
양팔을 벌렸다.
여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옷고름을 매어준다.
이색적인 행사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다른 향교에서는
이런 행사가 없는 줄로 알고 있는데
혹시 후원을 받고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한다.
후원은 (재)한울문화재연구원을 비롯하여
교동향교 | 문화재청 | 인천광역시에서 해준다고 한다.
문화재청에서 제공하는
103쪽에 걸친 작은 책자를 무료로 받았다.
그리고
교동향교 안내책자도 받았다.
안내책자에는
교동향교 배치도가 나와 있고
전통 행사와 전통 교육이 나와 있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우리집 가훈·서예쓰기와 선비체험 유생복 입어보기이다.
날씨가 어찌나 맑은지
시정거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대성전 위로
청람빛 하늘이 몇 가닥 구름위에 떠있다.
마치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는 느낌이다.
공자초상화가 있는 대성전 하단에서
선비체험 유생복을 입고
사진촬영 후
사진을 출력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강의실인 동무 실내 탁자에서
파우치에 난초와 국화 중 하나를 선택하여
스티커로 된 문양을 붙인 후
색칠을 하겠냐고 묻는다.
색칠하는 도중에
부채를 주고
볼펜도 선물로 주었다.
책도 만들어준다며
시간을 내어 달라기에
책은
집에서 직접 만들기로 하고
한문책 같은 빈 책을 받아들고 왔다.
올라오면서
해바라기를 보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주황색 코스모스도
코스모스가 맞냐고 묻자
맞다고 한다.
솔직히 올라올 때는
해바라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마도 해바라기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려가면서 다시 살펴보니
홍살문 입구에서 시작하여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다.
아직은 해바라기 꽃이 활짝 피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관광객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설문지를 들고 와
향교에 대해 설문지를 작성해달라고 한다.
A4용지 3~4장 되는 설문지에
대부분 만족과 매우만족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단점에 대해서도 필기해달라고해서
그렇게 했다.
향교와 문화체험 그리고 역사의식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너무나 곱고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교동대교를 건너와 교동도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단을 내려갈 때
쪽문을 살피며 “머리조심”하라고 한다.
끝까지 배려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젊은 사람들의 문화체험과 역사의식이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더불어
체험행사로까지 이어지게 했다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운 정성이 돋보이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체험행사를 통해
향교에 대해
서원에 대해
문화에 대해
역사에 대해
그리고
우리들의 발걸음에 대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은
코스모스 같은 마음이자
해바라기 같은 마음이 깃들어 있어서이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교동향교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과 홍보물이 보인다.
살아숨쉬는 향교·서원
꿈꾸는 강화 섬마을 학교
2017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 사업
‘우리 전통문화 교동향교에서, 배우고 즐기며 지키자!’
매주 토요일! 방문객과 함께하는 교동향교 체험 프로그램!
체험일 : 매주 토요일
대 상 : 방문객 누구나(무료)
우리집 가훈 쓰기!
명륜당에서 우리집 가훈 쓰기! 부담 없이 들어오세요 ^^
토토교!
(토요일, 토요일은 교동향교!)
1회 : 4.29(토)
2회 : 5.27(토)
3회 : 6.24(토)
4회 : 7.29(토)
5회 : 8.26(토)
6회 : 9.30(토)
7회 : 10.28(토)
교동향교와 함께하는 토요일 무료 체험프로그램
구석구석 향교탐방!
선비의 방, 나도 선비!
꽃차와 공예 체험
선비 놀이터!
향교 관광객에게 역사·문화 공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비체험(교동향교 탐구, 공예체험, 다도, 북카페, 전통 민속놀이 등)
교동향교 곳곳을 활동지로 익히기
매시 정각
명륜당 앞에서 시작합니다!
11시 / 12시 / 1시 / 2시 / 3시
주최 : 강화군
주관 : (재)한울문화재연구원
후원 : 교동향교 | 문화재청 | 인천광역시
문화재청에서 제공하는
103쪽에 걸친 작은 책자를 무료로 받았다.
2017 살아숨쉬는 향교·서원 87선
서울에서______________제주까지
전국 17개 시·도
발행일 : 2017. 4. 21
발행처 : 문화재청
교동향교 안내책자도 받았다.
안내책자에는
교동향교 배치도가 나와 있고
전통 행사와 전통 교육이 나와 있다.
전통 행사는
석전대제(釋奠大祭)
기로연(耆老宴)
분향례(焚香禮)가 기록되어져 있다.
전통 교육은
우리집 가훈·서예쓰기
교육내용 :
▪ 우리집 가훈·서예 쓰기
▪ 논어등 대표 구절 직접 써보기
교동학당 운영
교육내용 :
▪ 선비의 생활법도 및 가치관 교육
▪ 선비체험 유생복 입어보기
▪ 성현 제례 및 의례 순서 체험해보기가 기록되어져 있다.
| 교동향교(喬桐鄕校) |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로 전해지는 강화 교동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실시와 학교제도의 정비과정에서 설치되기 시작한 향교는 조선시대 유교 이념의 보급과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고려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 고구리(향교골)에 지어졌으며 충렬왕 12년(1286)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그의 제자 10인의 초상을 가져와 전국 최초로 모셨다하여 교동향교를 향교 중의 으뜸인 수묘(首廟)라 칭한다.
조선 영조 17년(1741)에 부사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148
도로명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유학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조선 영조 17년(1741)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에 기슭에 있던 것을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 향교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의 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대성전과 좌우에 선현들을 제사지내는 동·서무를 두었고, 유생들의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동·서재,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외삼문이 있다.
12-10. 교동도 - 화개사 / 청아당 엄상호 詩
교동향교를 나와
화개산 정상 등산로 쪽으로 오르다보면
화개사가 나타난다.
화개사(華蓋寺)는
고려 때 창건된 오래된 사찰로써
목은 이색 선생이 머무르던 곳이다.
목은 이색[1328년(충숙왕 15)∼1396(태조 5)]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자 문인이다.
약 200년 된
보호수인 소나무가 위용을 나타내고 있으며
화개사는
'지금 기도 중'이라는
푯말이 선명하게 쓰여 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고
나중에 다시 오라는 소리로 들린다.
쌍둥이 소나무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비꼬며 올라선
높이이기에
그 위용은
가지마다 곡선의 미학으로 대신하고
직선의 미가
조금이라도 치켜 올라서려고 하면
어김없이 곡선으로 눌러 놓는다.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 한국의 소나무가 아니던가?
곡선인 듯하다가
직선으로 솟아오르는 것은
한국의 소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곡선의 미학이라 불러도
가히 부끄럽지 않은
한국의 소나무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라온 것이다.
어떤 때는
비상하는 학처럼
날개를 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곡선과 곡선이 서로 얽혀
서로를 탐하는 모습으로 서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미적 감각으로 서있기도 하고
감수성이 강한 감성으로 서있기도 하고
보는 이에 따라
소나무의 형상이 다 다르게 뜻을 펴고 있다.
그건 그렇고
목은 이색 선생께서 머무르던 화개사라
기대를 하고 갔는데
정녕 실망만 하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하나 얻은 것은
조망권이 좋다는 점이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상심이 클 때
서해를 내려다보며
산책하듯이 걸으며
명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
피톤치드를 가슴으로 들이키며
온몸으로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기 때문이다.
화개사라 해봐야 조그마한 암자 같은 곳이다.
처음부터 기대를 하고 온 것이
잘못이지
화개사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생각을 해보아라!
김칫국부터
마시고 온 사람이
잘못이지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그리고
잘 정제된 절인
화개사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무튼 절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펴본 후
또 다른 장소를 향해 가속기를 밟았다.
대룡시장에서 망향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였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보 호 수
고유번호 : 4-9-73
수 종 : 소나무
수 령 : 약 200년
수 고 : 14m
나무둘레 : 1.6m
지정일자 : 2008. 08. 07
소 재 지 : 교동면 읍내리 489-1
관 리 자 : 교동면장
강화군수
12-11. 교동도 - 망향대 / 청아당 엄상호 詩
황해도 연백평야가 보이는 망향대(望鄕臺)!
망원경이 두 대나 준비되어져 있다.
그것도 맘껏 볼 수 있는 무료이다.
먼저 시야를 통해 살핀 후
망원경을 통해 북한 땅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무료라고해서 혼자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 되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야만 한다.
이것이 서로가 살아가는 일이고
양보의 미덕이다.
더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在以北父祖之壇(재이북부조지단)’이라는 비석이 서있다.
그리고 그 옆으론
망향시(望鄕詩)가 적힌
望鄕臺(망향대)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그 위론 쉼터인 정자도 있지만
편안해보이지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음습하면서도
실향민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발걸음을 함부로 뗄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송충이가 발에 밟힐 정도로
땅바닥에 깔려있다.
머리위로 떨어지기도 하고
옷깃을 타고 목덜미에서 꿈틀대기도 한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벌레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리고
주차시설도 미흡하여
주민들이 거주하는 마당에 주차를 해야만 한다.
그러고 보니
'주차끝'이라는 푯말이 짜증을 낸다.
더 이상 들어가면 민가에 피해를 준다는
인상이 강하다.
좁은 길로 겨우 들어왔는데
주차난에 빠진 것이다.
나중에 온 들어온 차를 위해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난정저수지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실향민에 대한 취지는 좋은데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까지
존재한다는 것은 조금 의아하다.
군사적인 위협보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먼저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고향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신경을 써서
주변 환경을 재정비하고
주차시설도 갖출 수 있도록
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난정저수지를 향해 달리다가
유턴하여
강화평화전망대를 향해 가속기를 밟았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안내문에 의하면
1988년 8월 15일 망향대를 준공하였다.
망향대에서 건너보면 연안읍의 진산인 비봉산과 남산, 남대지 등 드넓은 연백평야가 눈앞에 전개되어 소리를 지르면 고향 들녘에 울려 퍼질 듯, 손을 벌리면 고향산천이 잡힐 듯 직선거리가 약 3km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함으로써 강화군에서는 8백만 실향민들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고 머지않아 고향산천을 다시 밟아 볼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안보의 중요성을 재삼 일깨워 주자는 취지에서 본 망향대를 관광코스로 지정하였습니다.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민회장
12-12. 강화평화전망대 / 청아당 엄상호 詩
교동도에서 관광을 마치고
교동대교를 건너와 해병대 검문소에서
밤12시까지 통행이 가능한 표를 건네주었다.
교동대교를 건너와 강화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에
교동대교와 강화대교까지 왕복4차선 작업이 한창이다.
이 길이 완공되면
교동도로 가는 길이 편해질 것 같다.
강화평화전망대로 가는 길에
해병대 검문소에서 인적사항을 적은 후
강화평화전망대로 갈 수 있었다.
민통선이라 신분증을 확인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시골향기가 물씬 풍기는
시골길을 따라 달리는데
그 바람이 어찌나 좋은지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가
하나 되어 달리는 것 같다.
한국은 평지보다 산이 많다보니
산의 지형에 따라 곡선으로 달리는 길이 많다.
그런데
그 길이 더 좋은 것은
너무 빨리 달리지 않아서 좋고
달리면서 명상 아닌 명상을 할 수 있어 좋고
시골길이라 정서가 아름다워서 좋다.
유난히 하늘이 맑고 투명한 청람빛 하늘이다.
시정거리 또한 맑고 쾌적하다.
거기에다 바람까지 적당한 온도로 불어오니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렇게 명상과 바람을 즐기다가
강화평화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차는 주차장에 세워놓고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 후
언덕길을 따라 걷다가
넝쿨이 있는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갔다.
늦여름에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따가운 햇볕이 고개를 숙이고 만다.
언덕길이 가파르다보니
무릎이 안 좋거나
허리가 안 좋거나
나이가 든 사람들은
한 번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언덕 중간에 쉼터인 정자를 만들어
두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오르다 힘들면
정자에 들러 쉬었다 가면 된다.
참으로 배려가 깊다.
그런데
70대 노인은 거뜬히
언덕길을 한 번에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관광버스를 타고 온 노인들은
힘이 넘쳐나고 있다.
강화평화전망대에 올라서니
‘우리의 꽃 무궁화’란 주제를 달고
무궁화공원이 나오고 그 뒤로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라고 각인된 글자와 함께
4층 규모의 건물이 나타난다.
강화평화전망대에 올라 황해도 주변을 살펴보니
개성공단이 있는 송악산까지 훤히 내다보인다.
날씨가 맑고 쾌청하다보니
그 끝이 안 보일정도로
쾌적함과 더불어 안정된 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군사시설이 있는 곳이다 보니
제한된 곳은 촬영할 수가 없다.
시간대별로 해설사에 의해
안내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북한 땅은
곳곳에 황토 흙이 보이고
시대에 맞춰 집들도 화려하게 배치해놓고 있다.
그러고 보니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몇 군데 다녀온 것 같다.
처음 가본 곳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이고
그 다음으로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이고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110m) 통일전망대이고
교동도 망향대이고
강화평화전망대이다.
그중에서
경관이 좋은 곳은
금강산과 해금강이 보이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통일전망대이다.
물론 다른 곳도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손에 닿을 듯한 위치에서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가슴으로
눈물로
피맺힌 한으로 남겨둔다는 것은
모두의 아픔이자 슬픔이기에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하지만
2국 체제에서 언제 통일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언젠가는 통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까지만 이라도
이렇게 전망대나 망향대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행복이자 기쁨이 아니겠는가?
어서 빨리 평화통일이 되어야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2017년 8월 2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강화평화전망대에 올라서니
‘우리의 꽃 무궁화’란 주제를 달고
무궁화공원이 나오고 그 뒤로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라고 각인된 글자와 함께
4층 규모의 건물이 나타난다.
1층엔
통일염원소와 기념품 매장, 휴게실 및 식당이 있고
2층엔
전망대 : 고성능 망원경이 설치되어져 있고
강화와 국방 : 영상물을 상영하는 곳이 있고
끝나지 않는 전쟁 : 터치스크린이 설치되어져 있고
통일로 가는 길 : 한민족의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들과 통일 이후의 비전도 제시하고 있다.
3층엔
북한땅 조망실이 준비되어져 있으며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 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관광객에게 북한의 현황을 설명하는 공간이다.
옥외전시
야외망배단,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제적봉비, 탱크 등이 전시되어져 있다.
12-13. 고려궁지(高麗宮址) / 청아당 엄상호 詩
빈터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아니다.
발굴지안내판과 함께
외규장각(外奎章閣)이
400년 세월을 함께한 느티나무와 함께 서 있다.
궁궐은 무너져도 역사는 살아있다.
지워진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가 아직도 숨 쉬고 있다.
역사의 근성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국민이 원하고 있고
국민이 살아있는 한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1232년 고려수도를 강화로 천도하였고
1234년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1627년 강화유수부로 승격하였고
1781~1782년 외규장각(왕립 도서관)을 건립하였고
1866년 병인양요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타고
2003년 외규장각을 복원하였다.
그렇게도 보고 싶은 고려 땅위에
새로운 조선이 들어서고
병인양요 때 왕실주요 행사인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를 약탈당하고
대한민국에서 다시 임대방식으로 되찾아왔고
2003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 외규장각이다.
입장료 900원을 내고
고려궁지 계단으로 올라서면
승평문(昇平門)이 두 팔을 벌리며 반겨주고
고려궁지연혁과 고려시대, 조선시대 안내문이
친절한 설명을 해준다.
강화동종과 이방청, 강화유수부 동헌이
손님이 올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리고
강화유수부 동헌엔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이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을 남겨 놓았고
그 옆으론 약 400년 된 느티나무가
빈터만 남아있는 고려궁지를
주인처럼 반갑게 맞이해준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용흥궁(龍興宮)이 있고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한국정통양식과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서 있다.
세상을 향한 당찬 설욕전
‘전설(湔雪)의 마녀(魔女)’ 촬영지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16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자료출처 :
안내문에 따르면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년(1232)에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고려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는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에 봉선전(奉先殿 : 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년(인조 9)에는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으며, 1638년(인조 16)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년(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숙종 21) 장녕전(長寧殿), 1713년(숙종 39) 만녕전(萬寧殿)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 6)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웠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크게 주목 받게 되고 국왕과 왕실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정조6년(1782)에 건립하였다.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본 성당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물양식은 한국정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강화도령 첫사랑 길
강화도령 첫사랑 길은 원범(元範, 철종 아명 1831~1863)이 강화도에서의 귀양살이 중 강화도 처녀 봉이(鳳伊)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 가는 도보여행길입니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 원범이 5년간 살던 초가집을 그가 왕이 된 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와집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이후 수차례 고쳐지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범이 왕이 되던 그 해(1849년) 봄부터 한줄기 밝은 빛이 원범이 살고 있던 초가집 쪽으로 비추어서 용(龍)이 일어날 조짐이라 하였다. 그 해 6월 원범을 모셔가기 위한 봉영단 일행이 강화도 도착하기 하루 전에야 그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용이 일어난 집’, ‘용흥궁(龍興宮)’이라고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