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10. 극과 극이 모여 있다

공존하는 선악은 극과 극이 모여 있다

청아당 2019. 9. 7. 17:25

공존하는 선악은 극과 극이 모여 있다

 

흡인력이 상생이라면

반발력은 상극이다.

 

언뜻 보기에는 상생이 좋은 듯 하지만

상극이 없으면 상생 또한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생만 좋은 것이 아니라

상극도 좋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좋은 것만

선한 것만 존재하는 세상에는 천국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무료하고 세상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

 

서로 얽히면서 살아야만

사람 사는 맛이 나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극과 극으로 존재해야만

공존하는 맛이 난다.

 

 

고요의 극점은

신의 간섭을 피해있는 공간이기에

초월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곳이기에

가상의 공간이자 모두가 꿈꾸는 꿈의 공간이기도 하다.

 

고요의 극점에 영원히 존재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드나듦이 없는 시공간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영원의 침묵만이 잠든 곳이기에

누가 흔든다고 흔들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존하는 선악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우주를 뒤흔들

아니 근간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원리이기에

이곳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신이 되었든

성자가 되었든

현자가 되었든

범부가 되었든

그 누구도 공존하는 선악을 벗어날 수가 없다.

 

우주 동력의 근간이 나선형 소용돌이라면

공존하는 선악은 우주 속에서 활동하는

교차점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수평을 향해 나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직을 향해 내리 꽂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는 수평과 수직이 하나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거나

팔방으로 퍼져나가거나

원으로 모여 퍼졌다가 모이기도 한다.

 

그 끝을 모르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보니

선과 악은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주 생성소멸 속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고

현실세계에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선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악만을 추구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에서 마주해야할 난제중의 난제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적용되는 것이기에

공존하는 선악은 스스로 작동하는

자율적 상생과 상극의 제조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201923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