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5장 사랑과 봉사

청아당 2007. 7. 23. 11:47
 

5장 사랑과 봉사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서 이미 친근한 이웃과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사랑을 글이나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경험적인 사랑일 것이다.

실제로 봉사활동 및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힘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랑이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누가 그 어렵고 힘든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나눔의 사랑은 봉사와 전도로 이어지고 희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게 되어있다.

고통이 클수록 삶의 깊이가 깊어지듯 희생이 클수록 삶의 넓이가 넓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희생을 요구하기에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쉽게 베풀 수 없는 것이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느끼는 일이지만 사랑의 크기는 깊이와 높이를 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랑의 크기는 측량할 수 없는 크기로 존재하며 아름다운 일로 직결되기도 한다.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따라붙는 것이 바로 치유효과일 것이다.

종교는 기복신앙과 치유효과가 밑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수긍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어져 종교의 지위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치유효과는 종교를 신뢰하도록 유도하고 믿음생활을 다지는데 전초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치유효과에 치중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유효과에 매달리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현대의학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심령치료를 통해 치유효과가 나타나지도 않는데 계속해서 심령치료에 매달리는 일보다는 현대의학의 힘을 빌려 치료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해외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똑바로 걷지 못하는 어린애의 다리를 고쳐놓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두통환자가 자신도 치료받기를 원하는지라 곧바로 두통환자를 치료해 주었지만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온 다른 선교사가 두통환자를 치료하자 곧바로 말끔하게 두통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어떤 환자는 치료가 가능한데 다른 환자는 전혀 효과가 없음을 볼 때 개인적으로는 교만에서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환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각인되기도 한다.

모든 일에 있어 만능이라는 것은 없다보니 반드시 한두 가지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럴 때는 미리 선택의 폭을 넓혀두는 것이 좋다.

대부분 남을 치유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자신의 병은 거뜬하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속에서 지내지만 가끔씩은 자신의 질병을 고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남을 치유해주는 일은 자신의 원기가 손상되는 일이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기가 자신의 몸으로 엄습해 들어오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만약에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성령에만 의지하며 방치해놓는다면 계속해서 사기가 누적되어 심각한 질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일까지도 벌어지게 된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나눔의 사랑

종교의 힘은 남을 배려하는 나눔의 사랑에 있다.

신이나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살피기전에 종교의 힘은 남을 배려하는 나눔의 사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가 무너지지 않고 수천 년 동안 지탱해온 그 근간에는 신학자들의 손을 거쳐 정련된 경전의 성스러움이나 뼈에 약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전에 먼저 남을 배려하는 희생정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전에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우선시하고 남을 위해 기도해 줄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종교의 버팀목으로 자리하며 수천 년을 지탱해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남을 배려하는 나눔의 사랑이 기본적으로 실천되지 않는다면 종교의 힘은 배가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말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실천하지 않거나 자신과 관계없는 말이라고 생각되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와 같이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전에 남을 먼저 생각해 줄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큰 힘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2. 사랑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는 말만 들어보아도 사랑의 중요성이 얼마만큼 큰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크고 작은 뜻을 함축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우주적인 감각이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크나큰 관심과 배려가 스며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선 사랑에 관련된 성서말씀 고린도전서 13장을 살펴보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위의 성서내용 중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본래의 모습을 대변한 참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구약성서에서도 분노의 신 저주의 신이 아닌 하느님 본래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게 하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따뜻하게 하는 말인가?

하느님 본래의 모습을 나타나게 하는데 이만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우주적인 생각으로 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넉넉함은 있어야 우주 신으로써 자긍심을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그래야 누구나 응석을 부리며 어렵고 힘들 때 손을 내밀 수 있지 않겠는가?

까다로운 격식과 주종관계로만 하느님을 대한다면 그 거리감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벽이란 것은 허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기복신앙을 빌미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는 듯한 어지러움을 나타내는 하느님이 아닌 무엇이든지 넉넉함과 용서로 받아들이는 화평한 하느님으로 거리감을 좁혀나가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봉사활동

봉사라고하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를 예쁘게 가꾸기 위한 꺾꽂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가대, 안내인사, 식사를 제공하는 식당 도우미 일 등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부심이 생겨나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지게 된다.

물론 교회를 위한 일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지만 자신이 교회에 대해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봉사활동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복잡한 사고력과 활동력을 요구하는 스트레스의 대명사인 보험회사를 다니면서 어려서부터 40세가 넘도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김○○ 집사가 있다.

직책은 여전도회장에다 구역장보다 높은 인도자 그리고 성가대를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순번에 맞춰 농수산물도매상에 직접 가 식품을 구해 와서 식당 도우미까지 거뜬하게 해내고 있다.

더구나 정상적인 몸도 아닌 당뇨에 고지혈증 등 몇 가지 더 합병증까지 지니고 다니면서도 아침부터 퇴근 후 밤늦게까지 직장생활을 겸하며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감동적인 면을 많이 느끼게 된다.

요즘에는 건강을 위해선지 아니면 회사에서 실적을 많이 한 사람한테 보내주는 백두산 등반을 위한 사전 근력운동을 하려는 것인지는 잘 몰라도 퇴근 후 등산을 날마다 즐기기도 한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삶은 언뜻 보기에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뒤돌아보면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눔의 사랑은 큰데 있지 않고 작은 봉사활동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큰일은 항상 작은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치유효과

1시간 가까이 분위기를 잡기위해 복음성가를 따라 부른다.

미국 시애틀에서 온 안수 목사님과 함께 대동한 안수 선교사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치유사역을 위해 주관한 목사님과 더불어 안수 목사님 그리고 함께 대동한 안수 선교사 다섯 분 정도가 합세하여 100여명 가까이 모인 신도들을 위해 치유를 해준다.

미국에서 초대된 안수 목사님은 치유를 잘하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다리를 못 쓰는 어린아이를 정상적으로 걷게 하거나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등 기적 같은 일들을 많이 해왔다고 한다.

열린 목회자의 자세로 치유를 하는 내내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침착하게 치유활동과정을 끝냄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한명씩 돌아가면서 앞줄부터 차례로 치유를 해준다.

갑자기 큰소리를 내며 통곡하듯 울음을 터트리는 여고생부터 시작하여 몸을 들썩이며 진동현상과 함께 1시간 이상 몸을 좌우로 움직이는 아줌마 그리고 기절한 듯 남편한테 몸을 기댄 채 쓰러져 있거나 목을 뒤로 젖힌 채 의식을 놓은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상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경락을 주로 다루는 여성 안수 선교사는 목과 머리, 가슴, 등 그리고 배를 겨냥하며 무협지에서 혈을 누르듯 빠른 동작으로 상대방의 경혈을 터치한다.

평소에 혈을 풀어준 사람은 가볍게 지나가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한 신도들은 경직된 경혈부위를 누를 때마다 큰소리로 악을 쓰거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한꺼번에 한사람씩 여러 명이 안수를 해주는 경우는 특이한 경우라 한다.

안수가 끝난 후 지친 표정을 보인다.

아무리 성령을 받아 하는 안수이지만 개인적으로 에너지소모가 큰 것 같다.

경락을 다루는 안수 선교사가 힘들어서 긴 의자에 기대어있는데 눈치 없는 아기 엄마가 등을 툭툭 치며 자신과 아기를 위해 안수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싫다는 기색도 하지 못한 채 잠시 심호흡을 고른 후 먼저 아기를 위해 안수를 해준다. 다시금 아기 엄마를 해주는데 목과 등을 탁탁 세게 치며 빠른 손놀림으로 경혈을 터치한다. 옆에서 보조하던 분이 너무 세게 치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까 이 정도는 쳐야 좋아진다고 말하며 괜찮다고 한다.

대부분 안수를 하기 전에 준비동작으로 신단에서 행하는 동작과 유사한 두 손바닥을 편 채 하늘을 향해 에너지를 받는 표정을 보인다.

신단이라는 동작을 배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기위해서는 두 손바닥을 편 채 하늘을 향해 에너지를 받고자하는 것 같다.

안수와 신단에서 행하는 동작을 구분해보면 안수는 직접 개개인에게 다가가 개별적으로 안수를 해주는 반면 신단은 강단에서 단체로 치유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데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그 결과는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긴장을 풀게 하면서 개개인에게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적극적인 동작을 취하게 하는 신단이 조금 더 효율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치유를 하지 않아도 강단에서 신단을 단체로 행할 때 지시에 의해 치유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데에 더 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강단에 서있는 지도자는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심하게 소모하지 않고도 안수를 하는 경우와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어 에너지 소모가 적다는 측면에서 더 큰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개별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있어 개별적으로 행할 때는 안수와 똑같은 에너지 소모가 심하게 나타난다.


5. 결론 : 전도 - 그것 아주 좋은 겁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시애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수 목사님이 1년에 한두 번씩 한국에서 사역하기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습관적으로 옆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며 눈짓을 보냈는데 옆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창밖만 내다본다. 한편으론 민망하기도하여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한 후 공중에 높이 떠오르자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이 닦았습니까?”라고 묻는다. 갑자기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워 자신의 입에서 입 냄새가 나나하는 생각과 함께 잠시 생각한 후 자세히 살펴보니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판단하고 “이 닦았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했다고한다.

옆 사람이 하는 말 “이 닦으면 좋은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또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한참을 가다가 또 다시 옆구리를 툭툭 치며 “당근 좋아합니까?”라고 묻는다.

이번에는 자신 있게 “당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옆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하는 말 “당근 그것 좋은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또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한참 후 또 다시 옆구리를 툭툭 치길래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는데 갑자기 “예수님 사랑합니까?”라고 묻는다. 순간 그래도 자신이 목사인데 자신한테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순간 당황하면서도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바로 침착하게 “예, 예수님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옆 사람이 하는 말 “예수님 사랑하면 그것 아주 좋은 겁니다.”라고 말한 뒤 역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 속에서 지내다 가는데 이번에도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넨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면서 눈빛을 마주치는데 옆 사람한테 “이 닦았습니까?”라고 물어봐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옆 사람이 자신한테 옆구리를 툭툭 치듯 목사님도 옆 사람 옆구리를 툭툭 치며 옆 사람한테 저, 창밖에 앉아있는 분이 그러는데요. “이 닦았습니까?”라고 물어봐달라고 하는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고 한다.

그런데 옆 사람도 엉겁결에 “이 닦았습니다.”라고 전해달라고 한다.

또 다시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이 닦으면 좋은 겁니다.”라고 전해달라고 한다.

목사님도 옆 사람 옆구리를 툭툭 치며 “이 닦으면 좋은 겁니다.”라는 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한참을 가다가 또 다시 옆구리를 툭툭 치며 옆 사람한테 “당근 좋아합니까?”라고 옆 사람한테 물어봐달라고 한다.

부탁하는 것이라 거절할 수도 없어 또 다시 옆 사람한테 옆구리를 툭툭 치며 옆 사람이 그러는데요. “당근 좋아합니까?”라고 물어봐달라는데요.

이제는 목사님도 그 다음 멘트가 무엇으로 나올지 자동적으로 넘겨받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낯선 사람한테 “예수님 사랑합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멘트로 접근한다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친해지면서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부터 전도를 하려면 옆 사람한테 “이 닦았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가장 빠른 전도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닦았습니까?” 이 얼마나 간단하고 폐부를 찌르는 말인가?

앞으로는 옆 사람한테 “이 닦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전도하는 일이 쉬워질지도 모른다.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 청아당 엄상호 詩 


숲에서 모여 사는 나무들이 한마디씩 한다.

서있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없다고

새들은 노래를 불러야하고

나무들은 그늘을 만들어야하고

바람은 알맞은 속도로 숲속을 드나들어야한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형체가 사라진다 해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한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아름다움과 편리함을 찾아 노래해야한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추하게 보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어떻게 하면 향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며

숲속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한다고 한다.

혼자 생각해내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여럿이 머리를 맞대면 묘한 생각들이 나온다고 한다.

물론 좋은 결과만 나오지 않고 부작용도 생겨난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각오한 일이라고 한다.

나무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개성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한마음으로 모이지 못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고 역사라고 한다.

혈관 속으로 흐르는 피를 없애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도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다가도

다시 웃을 수가 있다고 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한다고 한다.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앞을 보고 뛰어야한다고 한다.

끝에 가면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맥없이 서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