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8장 종교도 부의 경제를 바탕으로

청아당 2007. 7. 23. 11:44
 

8장 종교도 부의 경제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세속적인 종교의 행태가 날이 갈수록 심각하다며 종교가 세속화되어가는 일에 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종교의 이러한 일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크게 나무란다고 그러한 행위를 그만두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그러한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자신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종교라면 적어도 세속적인 면과 다른 점을 지녀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신성하고 정결한 장소로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종교가 되었던 과학이 되었던 학문이 되었던 그 모든 것은 다 인간의 손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손때가 묻기 시작하면서 역사는 새롭게 변천해나가듯이 종교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신성한 척 깨끗한 척 하고 있을 뿐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적인 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정보에 어두워 진짜로 신성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장소로 여겨왔지만 요즘에는 워낙 세상이 오픈되어지다보니 그러한 구질구질한 내용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뿐이다.

그 역사가 오늘에야 불거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부터 그렇게 해왔던 것이다.

다만 정보에 어두워 과거에는 그러한 눈이 트이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며 넘어가는 자세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어차피 사람 사는 일은 종교라고 예외일 수 없으니 마음 넓은 신자들이 이해해주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가끔씩 착각을 즐기거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쉽게 생각해보자!

사업체를 하나 만들면 적어도 직원이 1명 이상이 될 것이다.

만약에 사업이 잘되어 직원이 1명에서 2명으로 2명에서 5명으로 늘어난다면 사업체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지역적인 규모가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로 확장되어진다면 직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한다면 그 직원의 수는 아마도 더 많은 인력으로 보충해야할 것이다.

조직이나 단체의 생리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종교를 떠나서 하나의 사업체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사업체가 확장되어질수록 그에 따른 이익이 동반하듯이 조직이나 단체가 늘어날수록 그 이익은 천문학적인 숫자로 늘어나게 된다.

그러면 남아도는 돈은 어디에 쓸 것인가?

만약에 당신이라면 그러한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쓰고도 쓰고도 남는 돈이 있다면 아마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곳에 쓸 확률이 더 많아질 것이다.

소박하고 검소한 종교단체라면 그렇게 쓸 돈이 없어 안심을 할 수 있겠지만 화려하고 궁궐 같은 성전을 보유하고 있는 종교단체라면 당연히 남아도는 돈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단체가 커지면 하나의 거대한 기업과 똑같은 생리를 지닌다고 보아야한다.

이것은 종교이기이전에 하나의 생리적인 현상이다.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기업과 내부에서 바라보는 기업의 이미지가 서로 다름을 잘 알 것이다.

그만큼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지닌 채 대기업을 운영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의 원리에 의해 그렇게 운영되어지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그렇다면 종교의 그러한 행태를 지탄이나 비난만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생리를 이해하듯 한편으론 그러한 부분도 이해해주면서 좀 더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준다면 그 누구보다도 양심에 민감한 종교단체이기에 어쩌면 당신의 말에 귀 기울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종교단체는 세속에서 벌어들인 피 같은 돈으로 신자들이 먹여 살리는 곳이다.

신자들도 기도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기위해 헌금을 내듯이 종교단체도 신에게 바치고 난 나머지 돈은 사회에 환원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인다면 지탄이나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지탄이나 비난을 받아도 좋다는 식으로 맞선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양심에 민감한 종교지도자만이라도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대부분 다수의 종교지도자가 지탄받는 일보다는 소수의 종교지도자가 지탄받음을 잘 알 것이다.

어느 곳이든 꼭 물을 흐리게 하며 다니는 미꾸라지는 있게 마련이다.

소수의 잘못 때문에 다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되듯이 검소하고 진실 되게 종교단체를 이끌어가는 종교지도자의 숨은 노력에 박수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은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많이 낼수록 그보다 더 큰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분명 십일조나 각종 헌금을 많이 내게 되면 생활에 곤궁한 빛이 역력해야하는데 오히려 더 큰 빛으로 빛남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신이 있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가끔씩 세계적인 대형사고가 날 때마다 딴청을 피우거나 낮잠을 청하는 신들이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보상은 충분하게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바로 이 맛에 날마다 종교에 매달리며 기복신앙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기복신앙보다 더 큰 마음의 평안이야말로 하느님의 존재를 알리는 가장 큰 위력일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같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종교의 힘은 바로 이곳에서 분출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은 바로 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신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이외에는 귀에 들어올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쾌한 것이다.

그냥 의심 없이 믿는 것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믿음이 따로 있겠는가?



1. 헌금

헌금문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활과 수련 그리고 믿음을 하나로 조화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모두 다 아는 일일 것이다.

치열한 생존을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져야만 한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수련과 믿음생활을 병행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믿음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헌금문제는 신앙생활을 가장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헌금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해야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것을 보면 헌금은 신앙인에게 있어 가장 부담되는 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나 구역예배를 볼 때 또는 각종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서 헌금을 내야하는 일이 종종 발생되어진다.

거기에다 성전을 좀 더 크고 보기 좋게 짓다보면 헌금의 크기는 점점 더 커져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일까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2억이 들어가는 성전을 짓는데 흔쾌히 1억을 쾌척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어떤 신자는 건축헌금을 내기위해 아르바이트나 발품을 팔아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떤 교회는 3개월에서 1년씩 임대료가 밀려있는 가난한 교회가 있는 반면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부자 교회도 있다.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겠지만 가난한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은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부자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은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신자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큰 교회를 짓고 싶다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신도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목사의 능력에 따라 솔로몬 신전처럼 거대한 성전이 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크고 넓고 화려한 성전일수록 더 많은 신자들이 모이기도 하지만 종교도 경제를 바탕으로 형성되어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구로구 궁동 연세중앙교회, 은혜와 진리교회, 망우리 금란교회, 주안장로교회, 서초동 사랑의 교회, 양재동 온누리교회, 분당 할렐루야교회, 명일동 명성교회, 강남지역 최대 규모의 광림감리교회, 충현교회처럼 크고 화려할수록 신자들이 더 많이 모이는 것도 있지만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다보면 부득이하게 크고 화려해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목사의 열정과 의지 그리고 능력에 따라 교회도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듯이 경제적인 문제는 종교를 떠받치게 하는 가장 큰 효자노릇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는 인류가 탄생되는 그 순간부터 영원히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숙제로 남겨져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결되지 않은 경제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다보면 수련과 신앙생활을 병행할 수 없어 좀 더 풍부하게 누려야할 새로운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으로 누려야할 풍요로운 세계를 멀리하면서 오로지 물질적인 경제력에만 매달리다보면 삶은 피폐해지고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삶의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경제력보다는 정신적인 안정감이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도 다 따지고 보면 정신적인 안정감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그 맥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오는 선도나 종교를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역사와 함께 묻히거나 사라져가듯이 정신적인 풍요를 위한 탐구는 수련이든 신앙이든 가리지 않고 발전 계승되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십일조

십일조는 하느님을 볼모로 보상 문제를 놓고 교회와 거래하는 일이다.

이제는 하느님을 이용하여 거래를 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워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거래에서만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영적교류를 나누는 데에서도 발생되어지고 있다.

기도의 힘을 기르기 위해 교회를 찾아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교회에서는 새로 들어올 신자(불신자)나 새로 들어온 신자(새신자)들을 위해 지극한 정성을 들인다.

교회에 들어서면 찬송가와 목사님의 설교 그리고 중간 중간에 끈끈한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악수를 하며 서로에게 좋은 말씀으로 서로의 행복을 기원해주도록 한다. 또한 교리를 배우고 인간적인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어 각종 모임을 통해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기도 한다.

홀로 외롭게 지내는 것보다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다보면 교회에 헌신하거나 봉사하는 일은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헌금이나 십일조와 같은 유료과정을 통해 기도의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

집에서 혼자 할 때보다는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고 기도를 하면 기도의 힘은 배가되어 헌금이나 십일조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오게 된다.

십일조의 신비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비밀이지만 십일조의 금액이 클수록 보상에 대한 대가는 더욱 크게 나타난다.

조건 없이 남에게 베푸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혜택을 하늘이 내려주는지도 모른다.

비록 본질적인 믿음인 신본주의적 물질관으로 내기보다는 세속적인 믿음인 인본주의적 물질관으로 십일조를 내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헌금이나 십일조의 위력을 직접 경험하고 있기에 의심 없이 헌금이나 십일조를 내는 일을 즐거워하고 있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평소보다 십일조의 금액을 적게 내거나 의심을 하게 되면 이상하게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다음부터는 더욱 정성스럽게 내게 되는 것이 십일조이기도 하다.


《돈》의 저자 보도 섀펴의 십일조에 의하면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기부의 풍습이다. 농사를 지을 때도 땅의 힘을 너무 많이 빼앗지 않기 위해 수확의 10분의 1은 그대로 땅 속에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10년에 한 번씩 일 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쉬게 했다.

이런 풍습은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소득의 10퍼센트를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부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사업에서는 매우 혹독한 파트너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씨’를 보인다.

물론 돈이 매우 이기적인 동기로 기부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광고효과를 노리고 돈을 공개적으로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닌가?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더 큰 만족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런 논의 자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들이 돈을 받을 때 반드시 ‘고귀한 동기에서 기부된 돈’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놀랍게 소득의 10퍼센트를 기부하는 사람들은 전혀 돈 문제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돈과 더불어 행복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더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조화인지 나는 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주 질문한다.”


남에게 베푼 만큼 더 부지런해지고 삶의 목표가 확실해져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도 그만큼 크게 돌아오는 것이 인과응보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정해지듯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발생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3. 잘사는 기독교와  못사는 불교

교회에 20년 이상 다닌 집사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기독교를 택한 나라들은 선진국 반열에 오른데 반해 불교를 택한 나라들은 후진국이나 가난함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솔직히 기독교를 택한 나라들은 부유한 반면 불교를 택한 나라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하거나 후진적인 경제상황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금욕주의에 있다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만 확실하게 믿어준다면 그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해결해주겠다는 부유함이 보장된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그러한 경제적인 보장이 되어있지 않은 것이 하나의 흠이라면 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욕은 모든 것으로부터 절제와 검소함을 하나의 큰 덕목으로 삼는다.

쉽게 말해 최소한의 의식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정도의 식량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절제와 검소함이 한 인간을 신성시하거나 높은 인격을 완성시키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반대로 모두 다 절제와 검소함으로 일관한다면 경제상황은 비관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인구가 많지 않은 관계로 농업국가로서 유지해나갈 수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인구의 의식주를 해결하려면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인구에 비례하여 과학이 발달하는 것도 있지만 과거의 방식에 익숙한 절제와 검소함으로 덕목을 삼는다면 경제상황은 낙후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는 동적인 종교답게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마음껏 발휘하는데 반해 불교는 정적인 종교답게 조용하고 수선스럽지 않은 행동으로 수행에만 전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출발선에서 경제적인 변수가 발생되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형성되어져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부유하고 불교가 가난하다하여 항상 기독교가 불교를 능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기독교가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크지만 반대로 기독교가 추구하는 부유함 때문에 환경파괴와 더불어 악의 행위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불교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독교보다는 절제와 검소함을 덕목으로 삼고 있기에 환경파괴를 최소화하면서 음지에서 인류와 자연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점은 종교의 선택도 있지만 인식의 차이라고 본다.

삶에 지쳐 의미 없는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바쁜 와중에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똑같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조차 버겁게 느끼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시간을 아껴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선진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긍정적이며 활동적인 면이 많음을 관찰할 수 있다.

생각하기 전에 몸으로 먼저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후진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부정적이며 활동량이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다.

몸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며 정적인 삶을 즐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우선 객관적으로 살펴보더라도 후진국의 나라는 동적인 선진국의 나라보다 활동량이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다.

생각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지혜는 선진국의 긍정적인 생활방식임을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들은 가끔씩 커다란 벽을 만날 때가 많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할 정도의 큰 벽이라면 쉽게 좌절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도전성이 강하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벽을 넘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에 자신의 경험 안에서만 벽을 넘으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학문적인 이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벽을 넘으려고 한다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식을 통해 과학이 발달하다보면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고 또 그로인해 파생되어지는 악의 행위가 날로 급증되어져갈 수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후진국보다는 선진국을 선택하려고 한다.

물론 선진국이 될수록 악의 행위를 더 많이 하고 후진국일수록 선의 행위를 더 많이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존하는 선악의 잣대를 갖다대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악의 행위 속에서 선의 행위를 찾아낼 수 있고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선의 행위 속에서 악의 행위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선진국이 악의 행위를 더 많이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활동을 가장 먼저 꼽아야할 것이다. 경제활동의 폭이 크고 넓을수록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반해 불교는 소극적으로 참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으로 출발하고 있는 것은 기준과 관점에 대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준과 관점은 자신들이 세워 논 규칙이기에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기도 하다.

생각의 각도를 바꾸어보면 전혀 쓸모없는 규칙이 되어 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이상 그것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갇힐 수밖에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살피기보다는 그 내면까지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한지도 모른다.

다 저마다 타고난 장점이 있기에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덮고도 남는다면 그 장점을 추구하려드는 것이 우리들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 판단하다보면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그 내면까지 파고들어가다 보면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자연과 인류의 목숨을 비교해본다면 인류의 목숨이 더 소중하고 귀할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인류의 목숨을 보전해나가려고 그렇게들 안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숨을 지탱해나가기 위해서는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고 또 그로인해 파생되어지는 각종 자연재해 및 악의 행위가 돌출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보다는 인류의 생명이 먼저이기에 우선순위에 의해 필요악이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악들은 인류를 위해 정당화되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기만적인가?

하지만 삶을 위해 필요하다면 모순은 감춰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잘사는 기독교든 못사는 불교든 서로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장단점이 주어져있기에 서로의 장단점을 존중해주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한 처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는 어차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고 또 스스로 인간이 종교를 멀리하지 않은 이상 인류와 함께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4. 결론 : 부의 경제

인간의 역동적인 삶을 자극함과 동시에 부에 대한 명쾌한 해설서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에서는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부를 창출해 왔다. 지구상의 모든 가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부를 창출하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재 지구상에 있는 65억 인구를 부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오랜 수명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영양 결핍자보다 과체중자가 많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1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이 주로 키우는 것을 제2물결이 만드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면 제3물결의 부 창출 시스템은 서비스하는 것, 생각하는 것, 아는 것, 경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일부 종교에서는 욕망에 오명을 씌운다. 금욕적인 믿음은 ‘많이 바라지 말라’,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라’라고 설파하며 가난을 인내하고 욕망을 채우려 하기보다 줄임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라고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인도가 바로 그렇게 살아왔다. 지독한 가난과 비참한 일상이 만연한 상태로 말이다.

이에 비하여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오히려 정반대의 메시지를 전파했다. 물질적인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열심히 일할 것’, ‘검약할 것’, ‘정직할 것’이라는 윤리를 설파했다. 그리고 이를 지키면 하나님이 욕망을 채우도록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서양에서는 대부분 이 가치관을 받아들여 부를 키웠다. 또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기 위한 끝없는 욕망의 기계 즉 광고를 발명해 냈다.

요약하면 모든 사회의 지도층은 금욕주의와 이데올로기, 종교, 광고, 기타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 전반의 욕망을 관리해 왔으며 그것이 바로 부 창출의 출발점이었다.

단순하게 욕망을 자극하거나 탐욕을 찬양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꼭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선동하고 부를 추구하는 문화가 필연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난의 미덕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머물 수밖에 없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최소조건인 부의 경제가 먼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지만 삶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역시 부의 경제가 밑바탕이 되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선진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보니 국가와 지정학적 위치 및 문화적인 환경에 따라 결정되어질 부분이라고 본다. 그리고 전쟁이나 내란과 같은 시대적 배경과 국가마다 처해져있는 지리적 환경요인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미래학자가 정해 논 삶의 기준대로 역동적이며 도전적인 삶을 향해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어진 여건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개성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 - 청아당 엄상호 詩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을 주거나

이상적인 세계로 유혹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답게 살다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천국도

이상향도

벗겨보면 인간적인 꿈에서 발현되어진 것

종교에서 내세우는 천국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 그 모습이 다르고

선도에서 내세우는 선계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 그 모습이 다르다.

무엇을 위한 천국이고 선계인가?

우주 속에는 그 모든 현상들이 내재되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 끝에 다다르면 그 이상 무엇을 더 원할 수가 있겠는가?

편안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즐거우면 그것으로 족하듯이

우주탄생이전부터 존재해온 음양의 변화를 무슨 수로 바꾸겠다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가?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하듯이

성자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물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현실에서

무슨 꿈을 그리도 오래 꾸려고 하는가?

인류를 구원해주겠다던 성자들만 믿다가는 모두 굶어죽을 수 있기에

그리고 깨달음으로는 밥은커녕 밑도 닦을 수 없기에

해마다 늘어나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생겨난 것이 물질문명이 아니던가?

물질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으면서

절제된 검소한 생활을 한다하여

물질문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공존하는 선악을 무시하고

이 세상을 악의 소굴로 몰아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를 높이려고 그 야단들인가?

천국이 되었던

선계가 되었던

가장 좋은 곳에

가장 높은 곳에

영적진화를 들먹이며

남보다 한 단계라도

자신을 더 높이 세우면 위로가 되는가?

마음의 속성을 무시한 채

천국에 들거나 선계에 오르면

진정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이 드는가?

마음은

천국과 선계가 아니라

우주를 다 주어도

가슴을 채우지 못해 허전해하지 않던가?

성자들이 이룰 수 있는 일이었더라면

성자들이 있을 때 이루어졌어야했던 일이 아니던가?

왜 이상향만을 꿈꾸게 만드는가?

생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허구이지 않던가?

생각을 현실로 옮겨놓기 위해서는

과학의 힘이 아니면 힘들지 않은가?

꿈속에서 본 일들을

현실에서도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은

꿈이지 않은가?

성자들이 인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홀가분하게 던져놓은 말 몇 마디로

인류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가?

성직자가 많고

깨달은 사람이 많아도

늘 제자리이지 않은가?

새롭게 태어나면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것처럼

늘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지 않았던가?

본래 있던 모습을 보았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지던가?

그동안 내려온 기운은 어떡하고

우주적인 기운이 도래하니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해야 한다고 혼란스럽게 떠드는가?

모래알보다 더 작은 지구 위에서

말세와 미륵불을 운운하며

동서양의 운세가 바뀌는

기운타령이나 하는 모습이 우습지 않은가?

만약에 우주계를 지배하고 있는 태양이 없어진다면

어찌하려고 기운타령들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니던가?

우리가 강하게 느끼고 있는 우주의 본원적 기운이

바로 강력한 태양의 힘이지 않던가?

호흡을 하는 이유도

선계를 꿈꾸어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심신이 안정되고 마음을 비울 수 있어 하는 것처럼

우주에 있는 태양이 모두 없어진다면

호흡도 빛도 모두 사라지지 않겠는가?

호흡을 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에 왜들 야단법석인가?

눈에 보이는 데로

느끼고 보면 그만인 것을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점잖지 못하게 수선을 떠는가?

평소에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것 같은 초능력자들도

막상 무슨 일이 벌어지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은가?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신의 뜻이거나 하늘의 뜻으로 돌리지 않은가?

불리하면 때를 탓하고

유리하면 기고만장하는가?

생각을 해 보아라?

신의 손을 떠난 사람들의 생각을 누가 통제할 수 있는지를

사람의 손을 거쳐서 태어난 것을 가지고

왜 신의 힘으로 돌리는가?

하느님과 동서양의 모든 신과 날마다 대화하는 사람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동공이 풀리고 넋 나간 사람으로 지내지 않은가?

오로지 신만을 찾고 신을 위해 살아가는 일로

사명을 다했다고 큰소리치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자신이 믿는 신을 나쁘게 말하면

섬뜩하면서도 입에 담기 힘든 더 악랄한 욕으로 맞대응하지 않은가?

현실에서는 현실에 맞는 삶이 중요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자신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면서 남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현실을 악의 소굴로 정의한 후 허구적인 현상에 목을 매는가?

현실이라고 모두 나쁘지는 않지 않은가?

현실이 비록 힘들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보람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지 않은가?

생로병사야 이미 정해진 이치이고

세월을 크게 건너뛰지 않은 이상 생장소멸로 이루어진

음양의 변화는 정상적인 궤도를 순환하게 되어있지 않은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기해하지 않던가?

가공의 세계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컴퓨터가 그렇고

우주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우주 비행물체가 그렇지 않은가?

이미 바뀐 세상은 뒤로하고

세상이 바뀔 것이니까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라고 하면

도대체 무슨 세계이기에 준비만 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내는가?

오랜 세월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만 찾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불만스럽게 보도록 강요했는가?

왜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잊혀질만한 전설을 끊임없이 토해내는가?

그렇다고 생각처럼 세상을 바꾸지도 못하면서

세상 탓은 왜 하는가?

현실을 만들어 가는 것은

영적진화가 높은 초능력자가 아니라

범인이듯이

현실을 무시한

생각만으로 꿈꾸는 공상가적인 꿈을 언제까지 꿀 것인가?

꿈은 꿈속에서 꾸어야하고

현실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듯이

현실 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면

꿈 이야기밖에 더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