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9장 결론 : 믿음과 기적

청아당 2007. 7. 23. 11:43
 

9장 결론 : 믿음과 기적


믿음은 종교를 떠나서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믿음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평안하고 심성이 아름다워짐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비판적인 관점에서 기독교가 반성하며 나아갈 길을 지적해왔지만 결론은 참으로 간단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자들은 목사나 성서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현명하고 폐부를 찌르는 말인가?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 진위를 놓고 다툴 때 신자들은 이미 그 너머에 있는 진실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점이다.

행동하는 가운데 은혜가 있고 진실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그 무엇으로도 대변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

현학적인 학문이 현실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의 공론으로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멀어지는 학문은 현학적인 학문일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화적이며 현학적인 교리에 얽매어 있기를 싫어하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맞지 않는 말씀들은 다 등 뒤로 넘겨버리고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말씀만 가슴에 담아두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이야말로 참으로 현명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여성들이 어떤 면에서는 도인보다도 더 도인다운 면모를 많이 소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도인이나 성현들이 이상적인 꿈을 좋아한다면 여성들은 참으로 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폐부를 찌르는 말로 선문답적인 언어가 날카롭게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하듯이 삶은 주부처럼 꿈은 성현이나 도인처럼 사는 것이 좋다고 본다.

손에 들고 다녀본 사람만이 무거움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등에 진 바람이 가벼워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 없듯이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현학적이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고 의심 없이 믿는 것 이것 하나면 충분한 것이다.

믿음 속에서 기적을 맛보며 나아갈 때 믿음에 대한 열정은 더욱 크게 일어나고 믿음의 크기 또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믿음은 단지 구원이나 기복신앙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살아생전 마음의 평안도 함께 얻음을 알 수 있다.



1. 5퍼센트의 기쁨

믿음에 대한 결과에 대해 누구에게나 확실하게 100퍼센트 보장을 해주는 곳은 없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을 알면서도 막연하게 기대하며 믿음을 키워나가듯이 모든 것은 꿈과 이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경험한 것은 남이 경험한 것보다 오히려 담담하고 진지해질 수 있듯이 믿음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더욱 높은 단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불어넣어줌과 동시에 깊이 있는 체험으로 승화시켜주기도 한다.

믿음을 통해 길 없는 길을 따라 한 방향으로 가다보면 순탄하게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95퍼센트를 넘듯이 5퍼센트의 기쁨을 위해 95퍼센트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믿든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아온 10년에서 20년 이상 된 집사들이나 목사들도 늘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듯이 기복신앙으로만 하느님을 믿는다면 기독교의 지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느님이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덜어주지 않듯이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감내하며 즐겨야할 숙명적인 고통이 주어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도 피해갈 수 없으며 큰 인물일수록 고통의 크기는 더욱 깊고 클 수밖에 없다.


2. 믿음을 통해 하나가 되는 일

믿음은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이다.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이듯이 믿음 또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이다.

모든 일은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어야만 정을 나눌 수 있고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듯이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는 일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회개하는 일도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근원의 뿌리로 회귀하고자하는 염원이 깊을수록 하나에 대한 열망이 더욱 깊게 와 닿기도 한다.

수련과 종교가 한 뿌리에서 출발한 것처럼 그 근본은 하나에서 파생되어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우주와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간다면 자신을 비우면서도 넉넉한 시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3. 긍정적인 에너지의 발생

우주와 하나 되는 일은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이다.

수련이나 기도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련이나 기도를 하는 중에 나타나는 반응 때문이다.

수련이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을 현상들이 자신의 몸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또 자신의 내부에 잠들어있던 능력을 일깨워주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에너지의 발생 때문이다.

이 에너지는 궁하면 통하게 해주는 유쾌하면서도 통쾌한 에너지로 변하기도 한다.

물론 수련이나 기도를 한다하여 항상 좋은 일만 행복한 일만 일어난다고는 볼 수 없다.

5퍼센트의 기쁨을 위해 95퍼센트의 고통을 느껴야하는 것처럼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갖고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수련이나 기도를 하는 사람이 훨씬 더 견디기 쉽다는 점이다.

서로 주고받는 일은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주와 하나 되는데서 출발하고 있는 것처럼 하늘의 뜻이 전해지는 방법은 다양하게 있을 수 있지만 수련이나 기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련이나 기도는 하늘의 뜻을 연결시켜주는 강력한 매체이자 전령사 역할을 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너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언 16:3).”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결국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하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뜻이 함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몸을 우주에 맡기듯이 하늘의 뜻에 따라 맡기다보면 목표가 확고할수록 그렇게 이루어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자신의 할일을 다해 나가는 것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만큼은 놓지 말아야할 것이다.


5.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니라(잠언 16:9).”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 같아도 뒤돌아보면 운명처럼 하늘의 뜻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보아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손오공처럼 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이는 하늘의 뜻을 배척하고 자신만의 자유를 향해 살아가는 것 같아도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들이 우주의 순환법칙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놓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무거운 짐을 덜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피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능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삶을 살면서 그 결과에 대해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와 같다할 것이다.

교만은 하늘도 싫어하듯이 겸손을 통한 삶을 살다보면 하늘도 그에 맞는 축복과 아름다운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성서의 핵심사상

우주를 통섭하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마음 편하게 사는 일이다.

수천 년 동안 행해져온 구약성서(히브리어 성서)의 기적으로도 모자라 신약성서가 탄생되어졌듯이 성서를 통해 표현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분노와 저주를 일삼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기보다는 성서는 하나의 보조적인 지침서로 하느님과의 연결매체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성서나 경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나 석가 그리고 성직자일지라도 공존하는 선악에 노출되어져 양면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는 하느님조차도 솔선수범하며 공존하는 선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채 노출되어져 있듯이 그 누구도 악을 행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공존하는 선악은 생명이전의 세계에서부터 우주의 법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의 핵심사상을 살펴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이 분노의 신 또는 저주의 신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근저에는 흑암(어둠, 악의 힘, 사탄, 사망, 고통, 저주)과 빛(밝음,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 생명, 행복, 축복)으로 대조시키며 이 둘을 아우르는 무한한 사랑으로 승화시켜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악의 소굴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구원해주려는 크고 넓은 뜻도 함께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성서의 핵심사상은 하느님 자신을 믿고 믿음생활을 충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저것 믿는 것보다는 하나를 붙잡고 진실하게 믿는 것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것이 있겠는가?

오로지 한 곳을 향해 믿음생활을 하는 것 이것보다 더 효율적인 믿음생활은 없을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의심한 만큼 기적은 분산되어질 것이다.


7. 순수한 믿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스스로 교회에서 봉사하거나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없나 살피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께서는 예배의 성공을 가장 강조하신다고 한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배의 성공은 신앙의 성공이자 삶의 성공이듯이 믿음을 통해 나타나는 혜택은 믿음의 크기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말씀이고 생명이고 복음이듯이 믿음 없는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의심 없이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이 원하는 기도를 하늘의 뜻에 따라 성심을 다해 기원하는 일이다.

일반신도들의 대부분은 복잡한 교리를 이해하는 일이나 이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등 같은 기독교내에서 서로 이단이라 부르는데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자신이 선택한 교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기도나 소망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판적 사고의 힘을 동원하여 잘못된 교리를 지적하거나 각종 비리 및 사회적 문제로 논란이 되어온 일부 부도덕한 목사의 사생활을 지적하기보다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며 돈독한 신앙심을 키워나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믿음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믿고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야말로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기에 순수한 믿음은 하느님과 가장 잘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8. 지극한 간절함

신앙은 논리를 벗어난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어지고 과학과 상식으로 납득되어지지 않는 현상들이 존재할 수 있다.

만약에 하느님의 존재를 제대로 밝히자면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를 다 써야만 하는 대역사의 작업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일어난 모든 일과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소멸되어져가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능력을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솔직히 기도를 할 때 종교에서 행하는 의식절차를 밟을 수는 있지만 성서나 경전의 내용을 읊으며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기도할 때만큼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이 지금 어떤 종교를 선택해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보통이며 성서나 경전의 내용을 읊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신상에 대해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상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새벽기도나 작정기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기도는 간절함이 그 생명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도나 수련에 있어 지극한 간절함이 없다면 하늘은 그의 뜻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성공하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어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지극한 간절함은 절박한 상황에서 더욱 깊은 신앙심으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반드시 이루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나타날 수 있듯이 기도와 수련의 차이를 살펴보면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절차에 따라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되지만 수련은 다양한 수련방법의 절차에 따라 좀 더 까다롭게 자신을 비워가며 하늘의 뜻에 따라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9. 100일 기도

크고 작은 소원을 기도할 때는 적어도 100일 기도를 통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100일 기도는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최적의 에너지집중화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기간이자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을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기적의 시간이기에 100일 기도는 예부터 가장 선호하는 기간이기도하다.

누구든지 100일 동안 기간을 정해놓고 한 가지 소원을 말해보아라.

대부분의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는 하늘이 내린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가장 정결한 시간이자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장 확실하게 극복해낼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10. 기적 - 느낌으로 깨닫는 신앙생활

먼저 탤런트이자 목사이신 임동진(45년생. 63세)께서 간증하는 내용의 일부를 요약해서 살펴보자.

올해는 67년 TBC 공채 8기로 데뷔한 그가 연기 인생 40년을 맞는 해이다.

지난 2003년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지난해 5월 목사고시를 통과하고 준목이 됐다. 준목이 된 뒤 1년째인 2007년 5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하느님의 은혜는 병고에 시달려본 사람들만이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탤런트, 성우, 영화배우, 연극배우를 두루 거치다 2000년 갑상선암을 선고받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암울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담당의사께서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성대를 보호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안가 이번에는 2002년 8월 19일 급성 뇌경색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죽음에 임박했으니 장례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기적을 보였다고한다.

그리고 담당의사가 다시 하는 말 정상적으로 활동하기가 힘들어 휠체어에 의지해야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병실의 환자와 의사들의 갈채를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 나올 수 있는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것은 믿음생활의 기적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명의 탤런트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 계기도 부인께서 지극정성으로 기도한 덕분이라고 덧붙여 강조한다.

임동진 목사께서 강조하신 말씀 중에 특히 두 마디가 가슴에 와 닿는다.

생활하는 가운데 호흡하는 일이 곧 기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느낌으로 깨닫는 신앙생활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인가?

산 경험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도 진실 되고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황수관 박사께서도 믿음생활을 통해 각종 어려운 일들을 극복해낸 말씀들을 해주셨지만 임동진 목사께서도 역시 그 험난했던 어려운 일들을 슬기롭게 기도생활로 극복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임동진 목사께서 목소리의 톤이 전보다 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술을 하고 난 후 성대를 조심스럽게 쓰는 듯 남성다우면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조금 수그러든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좋은 목소리를 보유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 고구려 장군 양만춘 역을 훌륭하게 수행해낸 것을 보면 그 확인이 가능하리라.

믿음생활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믿음을 통해 성공하게 된 계기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간증을 통해 들어볼 수가 있다.

혹시라도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은 믿음생활을 해보아라!

아니 적극적으로 권장해주고 싶다.

믿음생활은 과거의 게으른 생활에서 해방시켜주며 갑자기 부지런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지런한 삶은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커다란 힘이 도와줄 것이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자신을 도와주는 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한 일일 것이다.

서로 빼앗고 서로 배반하려는 현실에서 신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무소유를 강조하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정면으로 배척될 수도 있지만 행운 그 자체일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겠는가?

기도는 신과의 교류이자 영적통로이다.

신과의 대화는 기도로 시작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적은 기도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교과서처럼 성서에 나와 있는 교리에 얽매어 믿는 것보다 진실한 믿음 하나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진실 되게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그리고 실천하는 일이다.

지식이나 형식적인 믿음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하늘의 뜻과 하나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만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하는 옥쇄가 준비되어져있지만 그동안 자유를 향해 달려온 자신을 내던지고 한번쯤은 틀에 맞는 삶을 유지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교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답답하고 가슴을 옥죄는 듯한 율법을 통과하여 봉사와 헌신으로 넓고 큰 우주와 같은 세상을 만나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단순히 기복신앙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천국을 위해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봉사와 헌신을 통해 자신을 시험하며 능력을 키워나가는 일로 시작하다보면 억압 속에서도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믿음을 실천할 때 그 믿음은 하늘까지 닿아 감동을 줄 것이다.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성공과 축복은 예약되어져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하루하루 성심을 다해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 기독교와 선도(仙道)

기독교에서 내세우는 예수의 기적들을 선도와 비교해보면 그렇게까지 수선스럽게 떠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물위를 걷는 예수의 모습이나 오병이어 그리고 죽은 시체를 살리는 일등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은 선도에 비하면 그리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선도에서는 선도를 깊이 수련한 사람들이 죽고 난 후 무덤을 뚫고 스스로 살아나 종적을 감추는 일이나 생각만으로 궁전 같은 집들을 지어내거나 기사회생시키는 모습들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기독교에서 내세우고 있는 기적들은 오히려 빈약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살아있는 체로 육체가 기화되어 승천하는 일이 선도에서는 공공연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물위를 걷는 정도가 아니라 이산에서 저산으로 공중부양한 채 날아다니거나 절벽을 수직으로 오르는 등 순간이동이 가능한 것이 선도의 세계이다. 그리고 구름위에서 소요유(逍遙遊)를 즐기거나 커다란 바위를 깨뜨리며 천지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신화적인 일로 따지자면 선도가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그 어떤 종교보다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면 하느님조차 따라 올 수 없는 각종 기이한 현상들을 경험하는 것을 보면 선도의 세계를 뛰어넘을만한 종교가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내면의 세계에서 심안(心眼)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투시하는 일이나 천안통과 천이통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각종 현란한 현상들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우주적인 생각을 뛰어넘을만한 현상들이 있을 수 있는가를 사유의 폭이 깊고 넓을수록 형체이전의 세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세계까지 두루 껴안으며 경계 없이 지내는 선도야말로 우주적인 행보이자 우주적인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 끝이 정해지거나 예약되어져있지 않은 이상 안팎으로 무한한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선도의 세계야말로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종교는 신화로 시작되어지고 있고 검증되어지거나 확인할 수 없는 일들로 출발하고 있기에 신화적인 요소는 그 어느 곳이든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초월적인 인간을 내세우는 일에는 반드시 신화가 감초처럼 뒤따라온다는 점에서 신화는 종교의 밑그림이자 기둥역할을 톡톡하게 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필요이상으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믿는 경향이 강하지만 큰 틀에서 살펴본다면 동양적인 깊은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하여 셰익스피어나 단테, 괴테의 작품 등 서양의 문학작품을 읽어보아서 잘 알겠지만 동양적인 문학작품에 비해 현란하고 수선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종교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바탕으로 형성된 종교관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12. 종교적인 기적과 기의 기적

우리는 그동안 신을 부정해오면서도 종교에 대한 혜택을 많이 받고 살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종교적인 기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기적은 종교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종교적인 기적은 기의 기적과 함께 발전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기의 존재를 느끼든 느끼지 못하고 있든 기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토록 큰 힘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기의 작용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종교와 기의 작용은 얼핏 보면 서로 남남처럼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기가 있는 곳에 종교가 있고 종교가 있는 곳에 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련을 해보지 못한 종교인은 이게 무슨 말이냐고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잠시 놀랄 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종교적인 기적은 기의 작용아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적인 목회자를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보자.

기도나 심령치료를 위한 목회자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수련이라는 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손바닥으로 우주로부터 기를 내려 받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의식을 하든 안하든 본능적으로 우주로부터 기를 내려 받고자 손바닥을 편 채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단순한 것 같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의 응집력은 기도의 힘을 배가시키고 심령치료를 가능하게 해주는 일대 큰 획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신단의 자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신단은 생각만으로도 기를 불러들이는 기제조기이다.

그리고 신단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손바닥을 펴는 일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단순한 자세인가?

하지만 바로 이러한 자세 속에 신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기를 불러들이는 신단이 있기에 종교는 그 명맥을 유지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폐쇄되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다행히도 신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신기하게도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준 종교가 있었기에 종교는 거대한 집단체제로 발전해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효과가 없다면 그 영특한 신도들이 믿겠는가?

종교를 믿든 우주초염력을 믿든 자신에게 돌아오는 효과가 있었기에 남들은 이단이다 광신도다 또는 사이비다 하는데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역사는 이루어지게 되어져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원하는 곳에 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 내걸고 있는 신이나 과학 등 철학이 기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곳에 기가 존재하고 종교나 과학 그리고 철학까지 기와 함께 존재한다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기는 그 어느 곳에든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발품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기라고 하면 간단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기는 다시 기의 축적정도를 측정하는 물리적인 기와 영적에너지로 승화되어지는 논리적인 기로 분리됨을 알아야한다.

그리고 물리적인 기가 영적에너지로 승화되어질 때 나타나는 기의 작용은 가히 신비적인 요소가 많음을 알게 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종교는 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가 존재하기위해서는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일들이 신도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심령치료와 같은 각종 치료효과이다.

만약에 종교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해내지 못했더라면 신도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신의 지위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회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전락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종교는 우주적인 힘인 기한테 고마움을 따로 표해야한다.

지금껏 입 꼭 다물고 오로지 종교적인 기적으로만 돌려놓고 얌체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기의 고마움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종교와 기와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연인사이로 발전하고 있지만 종교에서는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연인들이 아무리 좋아도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듯이 종교도 기의 고마움을 알면서도 겉으로 드러내놓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13. 믿음과 기의 작용

우리는 가끔씩 불가사의한 일들을 경험할 때가 많다.

단순히 기도만 했는데 암이나 불치병들이 낫는 경우가 있다.

특히 기도원이나 이단 그리고 사이비로 지칭되는 장소에서 기적 아닌 기적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소문대로 어떤 사람은 효과가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전혀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목회자에 의해 치유가 이루어진다면 공통적으로 똑같은 혜택을 입어야함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바로 믿음의 차이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자신이 치유를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일으킨 그 당사자가 고쳤다고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예수께서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믿음의 크기에 따른 기적인 것이다.

믿음은 기의 작용을 일으켜 불가사의한 힘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련자가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겨있을 때 그 스승이 옆을 스치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감을 강하게 전달받는 경우가 있다.

마치 태풍이 부는 것처럼 방안을 회오리치며 기감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이미 기의 축적이 고도화되어져 영적에너지를 느끼는 수준이지만 대체적으로 믿음의 크기만큼 기의 작용도 그에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한번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수련과정을 거쳐보아라!

수련자 자신도 놀라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정리를 해보면 믿음은 기도와 연결되어지고 기도는 기의 작용을 일으켜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를 떠나서 믿음 그 하나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솔직히 신의 존재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기의 작용은 늘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기도를 통한 믿음은 흩어져 지내는 기를 한곳으로 응집시켜 기적 아닌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반드시 수련을 거쳐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신단이라는 기제조기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위력적인 수련법인가?

단순히 두 손을 모으고 믿음의 크기만 키워나갔는데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경이롭기도 하지만 그 원리를 들여다보면 너무나 간단하여 실망을 금치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리가 복잡하다하여 고도의 높은 효과를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원리가 간단하고 명쾌할수록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남듯이 원리는 간단할수록 그리고 명쾌할수록 좋은 것이다.

종교의 가장 큰 핵심이 바로 믿음이라는 단 두 글자가 아니던가?

그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것이 없듯이 간단하고 명쾌할수록 폐부를 찌르는 법이다.


14. 풀리지 않는 의문

갑자기 종교적인 기적을 기의 기적으로 돌려버리면 종교인들은 혼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이 역시 풀리지 않는 의문이 발견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기의 작용은 누가 일으키는가하는 문제이다.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17장 우주사상>에서 다루고 있는 이기론과 제3의 작용체를 살펴보아야할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간단하게나마 기를 움직이는 작용체가 누구인가부터 살펴보자.

이기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기(氣)를 움직이는 것은 이(理)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가 기를 몰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태풍을 일으키는 근원은 북태평양의 남서해상이나 적도부근의 바다라고 치자.

태풍을 끌고 다니는 것이 바로 이이고 그 근원인 바다는 제3의 작용체라는 것이다.

제3의 작용체는 바로 신의 존재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기론을 발생시키는 그 근저에는 제3의 작용체가 보이지 않는 손길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제3의 작용체가 등장함으로써 종교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3의 작용체가 등장한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여전히 미확인 비행물체처럼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신의 존재는 의문에 휩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기의 작용은 신의 존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발생되어진다는 점에서 커다란 힘으로 존재하지만 기의 작용이 반드시 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느냐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잠깐 기의 종류를 언급하면 용기(勇氣)부터 시작하여 탁기(濁氣)나 사기(邪氣)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기의 종류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기(氣)도 <15장 공존하는 선악>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공존하는 선악의 구조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3의 작용체가 우리들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손을 내밀어주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처럼 여전히 우리들을 감싸주며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따뜻한 안전장치가 있겠는가?

이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신의 존재를 밝혀서 신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일보다 차라리 의문으로 남겨둠으로써 제3의 작용체인 신의 보호를 받는 일이 더 안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5. 완벽하지 못한 종교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제3의 작용체인 신의 존재는 신화와 더불어 인류에게 커다란 공헌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감이 안 올 때가 많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제3의 작용체는 우리들과 함께 호흡하며 수많은 기적을 행해오고 있다.

그 이면에는 종교가 풀지 못하는 우주적인 힘인 기의 작용이 있었기에 종교라는 거대한 탑을 쌓을 수 있었지만 종교 속에 숨겨진 기의 작용은 묵살되어지거나 침묵으로 일관되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신화적인 요소가 많은 종교의 은밀한 부분을 들춰서는 안 될 인간적인 개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도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종교가 버티고 있는 것은 순전히 신의 힘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목회자들의 능력에 따라 교회가 번창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기보다는 원초적인 인간의 정을 자극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목회자들의 뛰어난 경영능력에 의해 화려한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눈앞에 자신 있게 내보이고 있지 못하는 신들의 운명을 목회자나 종교지도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목회자나 종교지도자들의 힘에 의해 운영되어질 수 있겠느냐하는 의문이다.

절대자인 신들의 힘을 빼놓고 과연 그러한 일들이 가능한지를 해결할 수 없다면 신들은 여전히 우리들 위에서 군림하고자할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해결책이 되어지는 것이 바로 우주적인 힘인 기의 작용이다.

신과 가장 가까워지게 하는 것도 기의 작용이요 종교를 우상처럼 떠받치게 하는 것도 기의 작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종교라고하면 신의 힘으로만 유지되어져온 것으로 착각하며 지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의 힘이 미치기 이전에 기의 작용이 없었다면 신들의 위용은 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기의 작용은 신의 위용을 높여줌과 동시에 마치 신의 힘인 것처럼 통용되어져왔던 것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해결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종교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현상들을 더욱 체계적으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전혀 신의 존재를 부르짖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적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종교에서 이단이나 광신도로 몰아붙이고 있는 신도들의 행위를 추적해보면 예기치 않게 기의 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기적들을 살펴볼 수가 있다.

무엇이든지 원리를 알고 접근하면 기적인지 원리에 의해 나타나는 자연적인 것인지를 분리해내는 혜안을 얻을 수가 있다.

무턱대고 신의 힘으로 돌리기보다는 우주적인 힘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종교를 믿는다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지지 않듯이 인간의 운명은 우주적인 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겸손하게 무엇이든지 신의 힘으로 돌리려는 관습적인 악습이 남아있지만 적어도 이성이 발달된 작금에 와서까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과거에야 지식의 공유가 크지 않다보니 순진하게 절대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었던 우상화되어버린 성자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에야 그러한 일들을 반복하려는 사람들이 확실히 적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아직도 공유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뿌리박힌 전생의 유전적 승계로 인해 악습처럼 굳어져버린 과거의 사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깊게 숨겨져 왔던 우주적인 비밀도 하나하나 껍질을 벗고 광명의 세계로 뛰어나오고 있듯이 종교라고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화는 이미 그 비밀이 밝혀진지 오래되었고 이번에는 종교가 그 대상에 오르고 있음을 알 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종교지도자들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화처럼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면 종교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하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지식을 소유한 학자들에 의해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이 날마다 해부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반신도들은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삶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보이려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종교에 대한 이면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더 매력을 느끼며 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신도들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모순 덩어리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결과론적인 신의 혜택만 입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손에 쥔 것만 이해하려는 사람들한테 어쩌면 그것이 가장 명쾌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해도 좋다.

하지만 신을 향한 믿음 속에서 꽃피우며 나타나고 있는 기적은 그 무엇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굳이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다면 기의 작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들 수 있다.

종교적인 기적과 기의 기적은 일치하는 면이 많고 또 실제로 유사한 치료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이나 신의 존재를 부르짖지 않아도 우주초염력을 사용하여 불치병환자를 치료하는 것처럼 기의 작용은 신의 존재나 우주초염력까지도 모두 수용하며 그러한 원리적인 방법에 근본적인 해답을 던져주고 있다.

기의 또 다른 이름인 생명에너지는 우리가 부정을 하던 긍정을 하던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듯이 우리 몸을 의례적으로 통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조건적인 복종에 익숙한 광신도적인 종교관을 지니고 사람이나 수련이라는 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하더라도 기는 종교를 떠나서 우주적인 힘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종교의 혜택만큼이나 알게 모르게 큰 혜택을 받아온 기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0장 과학의 힘>과 <11장 신단>에서 다루고 있지만 종교가 우리 인류에게 끼친 것만큼 기도 우리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노고가 만만치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와 기의 힘겨루기는 과거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왔지만 종교 속에서의 기의 작용은 은닉되어지거나 은폐되어진 것이 사실이다.

종교에서 기의 작용을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의 위상이 그만큼 반감되어질 것이 우려되어서일 것이다.

종교보다 앞서는 기의 작용을 발견하게 된다면 너도나도 종교는 내팽개치고 기의 작용을 확인하려고 덤벼들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해서 기를 확인하는 일은 막연할 수 있지만 기를 통해서 종교를 확인하는 일은 명쾌하면서도 간단하다.

만약에 종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하고 싶다면 정식으로 수련과정을 거쳐서 확인해보기 바란다.

종교보다 더 체계적인 수련과정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위대하지는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위대하게 생각한 만큼 신의 위상이 높아지고 그렇지 못한 만큼 신의 지위가 추락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길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심히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결코 종교를 향한 발걸음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하다.

종교는 종교적인 장소에서만 최고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물적인 근성이 많다보니 신을 위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실제로 신도 인간이 저지르는 일에 손도 못 대고 방관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신의 힘으로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써나가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11 테러나 2004년 12월 26일 지진해일 쓰나미와도 같은 경천동지할 큰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신들은 낮잠을 청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이 인간을 향해 아무리 째찍질을 가한다고해도 신의 뜻대로만 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신의 뜻보다는 우선 인간의 뜻을 최우선시하며 인간의 뜻이 이루어지고난 다음 여유가 있을 때 신의 뜻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종교를 통해 신이나 우주 속에 잠들어 있는 큰 비밀을 이해하려고하면 실패할 수 있지만 수련을 통하면 신과 우주 속에 잠들어 있는 큰 비밀까지도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이 길러짐을 발견하게 된다.

신을 이해할 때 구속적이며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관으로는 신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친 사람이 넋 놓고 웃는 일에만 매달리듯이 자신이 믿는 신한테 미쳐버린 사람들은 신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신의 뜻대로 사는 일이 전부이다.

사랑에 눈먼 연인들의 눈으로는 상대방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이치와 같이 무조건적이며 습관적으로 복종에 길들여져 온 종교관으로는 신들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

과거에 고정된 신들의 모습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로 출발하는 것이 진정으로 신들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종교를 폐쇄하자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신의 존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나아갈 때 우리가 취해야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가 동적이라면 불교는 정적인 면이 많다.

기독교방송을 보다가 불교방송으로 돌려보면 기독교가 확실히 요란하게 전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필요한 제스처를 써가며 신도들의 넋을 홀리려는 듯 빠른 템포로 설교를 하는데 반해 불교는 차분하면서도 지적이며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타종교와 조화를 거부한 채 국지적이며 절대자와 예수 믿기를 강요하는 듯한 많은 말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려는 기독교와는 달리 모든 것을 포용하며 우주적인 관점에서 짧고 간단한 말로 핵심만 전달하려는 불교가 어떤 면에서는 점잖고 호감이 가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는 의심 없이 신을 믿기를 강요한다면 불교는 신보다는 자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를 연구하다보면 기독교나 불교를 불문하고 깊이 들어갈수록 단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하기야 먼지 털어서 안 나오는 사람이 없듯이 우주신인 하느님조차 단점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은 불완전한체로 굴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완전하다고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매력이 더 많은 것이다.

완벽한 것은 한 번 보는 것으로써 기억에서 지워낼 수 있지만 불완전한 것은 모성애를 자극하듯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끌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종교도 완벽했더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늘 무언가 부족한 상태로 있었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듯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면 완벽한 것보다는 조금 부족하거나 어색한 듯한 모습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은 것처럼 조금 더럽거나 흙탕물일수록 고기가 많이 사는 것을 보면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16. 믿음은 모래성과 같다

그러고 보면 일반 신도들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판단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자신과 관련 없는 말들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만 가슴에 담아두며 종교를 이해하고자하는 것은 종교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신도들이나 목사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종교를 학문적 대상으로 연구하려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연구하려는 순간 종교는 그 믿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무조건적으로 의심 없이 믿어야만 종교에 대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종교를 학문적 대상으로 연구해 들어가는 순간 종교로서의 매력은 상실되어질 수밖에 없다.

종교는 학문이 아니다.

종교는 의심 없이 믿어야만 한다.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에 대한 진위를 따지기 전에 종교를 통해 효과를 보고 싶으면 그냥 의심 없이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의심 없이 믿는 것 이것 하나면 충분하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믿음직스러운가?

의심하는 순간 그 모든 믿음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져버릴지도 모른다.

믿음은 사상누각에 세워진 모래성이다.

의심 없이 믿으면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의심하는 순간은 모래성은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지 않으려면 몰라도 의심 없이 믿어라!

종교에서 이 한마디만 있으면 교리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교리는 그 종교의 특색을 구분해주는 역할을 할 뿐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라고 본다.

종교에서 믿음을 빼놓으면 사상누각과도 같은 허상에 불과하다.

믿음을 통해 종교는 역사(歷史)를 이뤄나가고 있는 것이다.


17. 결론 : 믿고 걸어가는 사람은 뒷모습도 아름답다

기독교나 종교가 내세에 대한 믿음을 지탱하게 해준다면 유교는 삶의 지침을 선도는 모든 것을 비움으로써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준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예수나 석가 기타 리더들의 말솜씨는 상황에 맞도록 논리적이며 기존의 관습을 탈피한 혁명적인 설교로 달변가적인 기질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군중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돋보이기도 하다.

종교를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어떠한 신이 되었든 간에 우선 신의 존재부터 인정하고 연구해 들어가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각종 신들을 내세운 국가적인 신보다는 우주신인 하느님을 대표적으로 내세운다면 모양새가 좀 더 낫지 않을까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져본다.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신의 존재는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자 진정으로 죽어봐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현실 속에서 신들의 존재는 오히려 혼란과 불복종이라는 개념만 심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하느님을 믿든 국가적인 신이나 잡신을 믿든 소원자의 기원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복신앙이기에 자신이 가장 친근하다고 느끼는 신을 선택해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지금껏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있지만 오히려 신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추세는 소원자가 내세운 신들에게 기복신앙과 더불어 신들이 내세운 언약이 인간이 원하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설이나 인과응보 또는 윤회설이 보편타당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 종교의 계율이나 교리 또는 언약들이 추종자들이 생각하는 소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신들에 대해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의심 없이 믿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분석하여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보다는 가상의 신이라도 자신을 보호해주고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의심 없이 믿고자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홀로서기를 할 수 없는 마마보이처럼 사람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의지하고자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우주에 실존하지 않는 신까지 들먹이며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신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거나 신들의 정체가 드러났더라면 신들의 수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신을 간절하게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었다면 신들의 지위나 존재는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확인할 수 없거나 정체를 나타낼 수 없는 신들은 도태되어지거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야만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신들의 잔치로 향연을 베풀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나타나 신의 정체를 보이기보다는 추상적인 신비감으로 존재할 때 신으로써 영원성을 가질 수가 있다.

이러한 일들은 임의로 형상을 만들어 신들을 떠받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행하는 맹신도의 행위를 떠나 신을 믿음으로써 나타나는 기복신앙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을 때 신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놓거나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신들이지만 자신의 하소연이나 위로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비록 가상의 신들이지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바로 이 맛에 신들을 향해 기복신앙을 요구하며 우상숭배를 즐기는지도 모른다.

종교에 대한 혼선이 일어나는 신자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피력해보면 그래도 하위개념인 국가적인 신이나 잡신보다는 상위개념인 우주를 다스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 바람직스럽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코드가 맞지 않는 신자들은 자신이 선택해온 신을 그대로 믿는다하여 간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의 자유의지는 보장되어야한다는 것이 신의 세계이자 신들만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은 후에나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기에 현실 속에서 다녀온 사후세계에 대한 배경은 검증받지 못할 수도 있다.

언뜻 보기에는 천국과 지옥이 같은 개념으로 통일되어있는 것 같지만 정밀하게 분석해보면 종교마다 사후세계의 시대적인 배경과 인종 그리고 의복이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을 사후세계의 표본으로 내세워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의 사후세계 또한 추상적이며 환상적인 면이 많아 보석으로 치장된 사후세계로는 설득력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이렇게 다양한 신들의 존재에 대해 우주적인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곤란한 상황에 빠져들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복신앙을 빌미로 격식과 복종을 강요하는 신보다는 우주자체를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인 무극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세계는 신조차도 넘볼 수 없는 지극한 무의 세계이자 우주의 안팎을 자유로이 통과하며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에 신들의 간섭을 배제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문제 자체를 넘어선 논리이전의 세계이기에 논함도 부족함도 없는 시원적이자 원초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신만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신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가 또 다시 존재한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늘위에 하늘이 있듯이 우주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누구에게나 아낌없이 베풀어주려는 측은지심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찾는 자에게 길이 열려있듯이 확고한 믿음으로 발걸음을 옮겨간다면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깨달음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에는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서말씀처럼 그 첫발이 중요하다고 본다.

믿고 걸어가는 사람은 뒷모습도 아름답다.

믿음은 곧 신뢰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 청아당 엄상호 詩


어떤 때는 연약한 나뭇잎처럼 서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뇌성벽력을 지르는 천둥 번개로 서있기도 한다.


끝에 다다르면

더 나눌 것도

줄 것도 없기에

담담한 마음으로 겉과 안을 걸어 다닌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 바람에 빼앗겨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바람이 좋아

마음을 놓을 뿐이다.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예고 없이 안부를 물어오는 도전을

잠재워야 가능한 일이다.


바위가 되기 위해서는

바위가 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