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7장 혁명적인 변화

청아당 2007. 7. 23. 11:45
 

7장 혁명적인 변화


신비를 신비라 말하지 않는 사람이 더 신비롭게 느껴지듯이 혁명이란 말은 기존의 관습을 뒤흔드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변화는 혁명에 비하면 작은 개념에 속하지만 혁명은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혁명은 사회적 구조가 모순에 빠져들거나 악의 비중이 극도로 커질 때 발생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나가는 일을 잊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숱한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전쟁을 단순히 국가 간의 영토전쟁이나 주권다툼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임을 알아야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잡아나가기 위한 큰 뜻이 더 큼을 알 수 있다.

인구의 증가로 발생하는 식량난과 의식주 등 각종 다양한 문화를 접해야하는 한 국가이지만 이를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는 국가가 과거에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처럼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가 아닌 과거의 국가에서는 각종 재해와 식량난에 허덕이며 힘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시대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나 동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인구를 강제로 줄일 수도 없고 결국 전쟁으로 사망한 인구가 위험수위를 조절해주는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비참하고 처참한 일이지만 스스로 자생하며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려면 그 어떠한 방법이든 시도해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구조조정인 것이다.

지금도 틈만 나면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가 있지만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동안은 전쟁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좀 냉정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해결할 방법은 위험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전쟁이 또 다시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전쟁은 힘과 힘의 충돌이 강하게 부딪힐 때 발생하고 있음을 볼 때 전쟁에 대한 위험은 항상 노출되어져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은 과학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전쟁의 위협이 조금 누그러들고 있을 뿐 과학이 충분하게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그때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혁명적인 변화는 기존의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 수 없을 때 발생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좋아함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만들어 논 불후의 명작이나 작품을 놓아두고도 또 다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집념은 인간의 본능이자 도전적 집념이기도 하다.

신제품을 기다리는 소비자들을 위해 기업에서 석학들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연구하며 경쟁하듯 신제품을 내놓고 있듯이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욕심은 인간의 눈높이를 더욱 높은 곳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싫증을 빨리 느끼는 종족 같다.

아이들이 호기심이 많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듯 각종 신제품에 대한 싫증 또한 빨리 느끼며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화점의 물건을 다 사고도 모자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주부들의 마음인 것처럼 인간의 욕심은 그 끝을 가늠하기가 매우 어렵다.

격조 높은 생활과 편리성을 강조하는 인간의 욕심이 그 끝을 알 수 있도록 예약되어져있지 않은 게 흠이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인간의 지적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사나 목사 그리고 스님들의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지 알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픈된 지식의 광장에서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폐쇄적이며 전통적인 학습방법에만 매달릴 수 없음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인류를 대표하는 성서나 경전일지라도 과거에 감동을 준 것처럼 지금도 그와 똑같은 감동이 일어난다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PC와 인터넷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신세대들의 사고방식을 따라잡기에는 힘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음을 알 때 지도자들의 눈높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야함을 알 것이다.

세상은 변해 가는데 과거에만 안주하며 정통성을 부르짖고 있을 때 새들은 색다른 먹이를 찾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들>-청아당 엄상호 詩


가르침은 배움이다.

배워야 가르칠 수 있듯이

선생이란 호칭은

다만 먼저 배웠다는 것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가 겸손해야한다.

잘 모르거나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이라고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한다면

느낌이 잘 발달된 학생들은

받은 만큼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두는 것이 좋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는

지식도 나이도 필요하지가 않다.

찰나에 움직이는

정성된 마음과 열정이 얼마만큼 전달되는가를 느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심리학을 별도로 전공하지 않더라도 이미 심리학 박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눈짓과 몸짓 하나만 보아도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


학생들은 더 영특하다.

어쩌면 선생보다 심리학을 더 빨리 전공했는지도 모른다.

선생이 바뀔 때마다

학생들은 선생들의 행동을 먼저 체크한다.

선생에 따라 학생들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한마디로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선생의 실력을 검증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잘 돌아가는 랜 선을 뽑아놓고

인터넷이 안 된다고 손을 드는 학생

키보드의 자판을 고의적으로 눌러 고정시켜놓고 컴퓨터가 이상하다고 손을 드는 학생

바탕화면에 깔려있는 아이콘들을 전부 숨겨놓고 손을 드는 학생

암호를 걸어놓고 그냥 가버리는 학생

손을 든 순간 곧바로 해결할 수 있는 선생이라야 능력을 인정받는다.

조금이라도 주춤거리거나 헤매게 되면 학생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능력 있는 후배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이유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기존의 능력을 사장시키고

새로운 그릇에 담겨있는 능력을 요구하거나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하지만

떠나는 때를 알게 해주는 일을 하기도 한다.

뒤돌아보면

실수와 시행착오를 밥 먹듯이 했지만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임자나 후임자의 강의는

나보다 체계적으로 더 잘 가르치고

나만 못 가르치는 것 같은 생각이 자주 든다.

분야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강의를 하는 일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설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세월은 단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거나 교훈을 주고 또 역사를 만들어가면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은

캄캄한 밤길에 어둡지 않도록 횃불을 밝혀주며

기준과 방향설정을 해주는 일인 것 같다.

처음은 어렵고 낯설듯이

낯설지 않도록

배움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고 따뜻한 정을 쏟아

즐거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달릴 수 있도록

앞에서 끌어주는 일인 것 같다.


가르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날마다 무언가를 준비해야하기에

준비되지 않은 가르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교감이

깊어질수록

가르치는 일이

더욱 두려워지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을 위한 경고성 메시지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꿈과 이상을 키워주는 것이 신화라면 암울하고 어둡게 만드는 것이 종말일 것이다.

신화는 그래도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만 종말은 긍정과 부정을 연상하게 하면서 공존하는 선악처럼 상반된 뜻을 내포하면서도 하나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종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앙인들을 보면 그것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종말은 예수시대나 구약시대인 과거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종말을 예견하고 있기에 종말이라는 말이 생겨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더욱 발전되어져 지구 자체를 통째로 없애거나 자연재해로부터 파괴되는 일까지 확대해석하고 있지만 지구의 종말은 지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또 다른 생명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이 지구를 지켜갈 것이기 때문에 종말이라는 말에 유혹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종말이 와서 좋을 게 무엇이겠는가?

무엇 때문에 종말을 그토록 기다린단 말인가?

혹시 과거의 노예생활에서 겪었던 비문명적인 사각지대에서 학대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겪은 노고 때문이 아니라면 종말이라는 말은 이제는 과감하게 던져버릴 때도 된 것 같지 않은가?

결국 공산주의가 생겨난 것도 과거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으며 모두가 이상향을 꿈꾸기 위해 생겨난 것처럼 꿈과 이상은 현실과 분명히 다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할 것이다.

우주의 생성소멸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짧은 역사로 우주의 역사를 대적할 수 없듯이 우주적인 생각으로 지구를 대한다면 인간이 말하는 종말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종말은 그동안 숱하게 있어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바라는 종말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귀결되어지고 있음을 볼 때 시대마다 부르짖는 종말은 도대체 언제쯤 멈출 것인지를 한번쯤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할 것이다.

150억년이라는 우주와 45억년이라는 지구 그리고 길게는 20~30만 년에서 6000년의 역사를 지닌 인간의 역사를 가지고 그것도 종말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겨우 수천 년을 두고 도대체 무슨 종말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예수가 재림하면 모두가 육체를 벗어던지고 영의 몸으로 승천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영적인 세계나 가상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한낱 꿈으로밖에 치부되지 않음을 주의해야한다.

물론 지금의 초보적인 과학수준보다 더욱 발전하여 영적인 세계를 아우르는 과학의 발달이 도래한다면 그때는 가능한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꿈같은 일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한다.

꿈은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만 현실은 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보니 그러한 꿈은 미래의 과학에나 맡겨두고 지금은 현실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일에 더 열중하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근본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보면 한낱 몽상가적인 이상세계를 그려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는 것을 성서나 경전은 폐부를 찌르듯 정확하게 알고 있기에 마지막에 꿈을 그려놓은 것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시대를 달리하여 릴레이 선수가 바톤을 넘겨주듯이 넘겨받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동안 오랜 세월 동안 허송세월을 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이 모자라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허비해야만 하는가도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라고 본다.

성자들이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연이나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처럼 성자들 말 한마디에 놀아날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본다.

이제는 자숙하며 그러한 시대가 설령 오더라도 담담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점잖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상이라고 본다.

그리고 과거처럼 지구 밖을 나가본 적 없는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우주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결코 오류와 모순점이 많은 과대망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생각으로 큰 가슴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1. 자발적인 전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입문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신자가 자발적으로 전도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실 신앙심으로 따지자면 베테랑급 집사나 권사들이 있지만 오히려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는 초신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열정적으로 전도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아직 신앙심이 채 자라기도 전에 스스로 전도를 하려고 하는 점에서 기독교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대하면 “교회에 다녀야하는데…”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교회에 다닌다고 모두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가짐이 남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기독교인이 세계화되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기독교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미 기독교화 되어있다 보니 기독교적인 대화가 은연중에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주변에 기독교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2. 혁명적인 설교

교회 규모에 따라 진행하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지만 시간이 없어 주일에만 나가는 신도들을 위해 단 5분간이라도 개인적으로 묵상하며 하느님과 영적교류를 나눌 수 있는 별도의 시간이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참선처럼 침묵의 시간을 길게 주지 않더라도 막간을 이용하여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잠시의 여유도 없이 연단에 선 연설자처럼 청중들의 혼을 빼놓으려는 듯 긴박하게 짜여져 있는 스케줄에 의해 목사님의 설교와 찬양으로 메워져있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있어 긴박하게 움직여야할 때도 있지만 차분하게 여유를 갖고 진행하는 부분도 있어야 강약을 조절하며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수요예배나 금요철야예배 때 개인적으로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거나 집에서 자신만의 묵상시간을 별도로 가질 수도 있지만 신도들의 수가 많은 주일예배 때 기도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단체기도(목사님이 주관하는 큰소리로 말하는 통성기도 말고)로 하느님과 영적교류를 나눈다면 좀 더 강력한 기도로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새신자로 등록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고전적이며 교과서적인 성서내용에 충실하려는 목사님의 설교에 강한 거부감을 비치거나 종교에 대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성서자구에 충실하려는 고답적인 목사님의 설교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어 허를 찌르는 예수님의 설교처럼 혁명적이며 기지가 넘치는 설교로 신도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혁신적이며 감동을 주는 명쾌한 설교도 중요하다고 본다.

솔직히 1시간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 사탄의 역사, 마귀, 흑암의 권세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며 오관(① 오감을 맡는 기관. 곧 눈·코·귀·혀·살갗. ② 오감의 작용. 곧 귀·눈·코·입·마음.)을 닫고 다 이해하듯 성서말씀대로 무조건 믿기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똑같은 단어를 자주 반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너무 남발하게 되면 마치 세뇌교육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이미 동화되어버린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은혜스러운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초신자나 알레르기성 반응을 놓지 못하는 기존의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눈 딱 감고 미친 척 믿지 않고서야 마음을 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거부감이 다가올 때 쯤이면 기존의 신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거부반응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었는지 궁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부분 전체적인 윤곽을 살피며 성서를 연구하는 신도들이 많지 않고 목사님께서 성서위주의 좋은 말씀으로 진행해 나가다보면 약간의 거부감은 느낄 수 있지만 어렵지 않게 동화되어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구나 십일조의 위력이나 기복신앙의 효과가 뼈저리게 나타날 때면 웬만한 단점들은 덮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목사님들도 교회경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겠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게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지도록 운용의 묘를 발휘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변화는 사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필요하듯이 시대적인 감각을 무시한다면 신도들의 관심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에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날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워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3. 직접 하느님을 믿는다면

잘못 기록되어진 성서나 오역의 성서를 신봉하는 성서신봉자가 되기보다는 이웃처럼 친근한 하느님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다.

크고 위대하여 접근할 수 없는 경외로운 하느님을 숭상하기보다는 손자들이 할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며 가까이하듯이 언제든지 응석을 부리며 무릎에 앉거나 기댈 수 있는 친근한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소는 반드시 성전이 아니어도 좋다.

기도할 수 있는 장소만 주어진다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처럼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유의지에 따라 기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교회에 나가서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기도를 할 때 성서나 경전의 내용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러한 내용들은 혼란스럽고 모순이 많아 자칫하면 소박한 신앙심을 어지럽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나 신약성서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존재를 강조하는 것은 한마디로 하느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다.

예수나 성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이 예수를 강조하고 있지만 반드시 예수를 통해야만 하느님께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 이전의 시대는 구원받을 사람이 한명도 없다는 논리로 전락할 수 있다.

성서의 역사는 예수이전의 역사가 더 깊고 길듯이 반드시 예수를 통해야만 하느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는 한마디로 모순된 논리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의 기록에 의해 유지되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뒤늦게 태어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께 구원을 받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적 모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를 내세우는 바람에 이단이라는 불리는 교회에서는 교주 자신도 하느님의 둘째 아들이라고 내세우고 있듯이 검증되지 않거나 확인할 수 없는 언행들은 나중에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손이 가감된 각종 현란한 말로 치장된 성서가 만들어졌듯이 직접 하느님을 믿는다면 따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비롯하여 성서나 경전을 살펴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모순된 교리 때문에 성서자구에 충실하려는 목사님들의 아전인수격 억지해석이 생겨났듯이 잘못된 부분은 인정을 하면서 인자하고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본래의 하느님모습을 복원하여 보다 현실적인 해석으로 풀이해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일일 것이다.

언제까지고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속 좁고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에게만 편애하는 하느님이 아닌 우주를 통째로 망가뜨려도 허허! 하고 웃을 수 있는 너그럽고 인자한 하느님을 이제라도 복원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4. 퓨전 종교

앞으로 퓨전 종교가 탄생되어질지도 모른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2가지 또는 3가지 이상의 종교가 혼합된 퓨전 종교가 탄생되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 종교마다 특징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장점들을 모아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인 장점뿐만 아니라 요가나 명상의 장점을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탄생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기존의 종교나 이단(같은 기독교내에서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취급될 수도 있음.)이라 불리는 종교 속에 퓨전 종교가 포함되어져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놓기가 불편하여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거나 많은 수의 종교에 눌려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퓨전 종교의 기반은 닦여져 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신도들의 믿음을 바르게 이끌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퓨전 종교의 장점을 남모르게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존의 종교가 포화상태에 있다 보니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퓨전 종교가 생겼다하여 별다를 것은 없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종교보다 더 효율적이고 기복신앙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쉽게 마음의 문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상숭배를 금지해놓았지만 인간은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살아있어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종교가 탄생되어지고 있듯이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5. 주종관계

하느님과 인간을 주종관계에 올려놓고 노예제도가 보편화되던 시대에 살던 구시대적 발상인 종의 개념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친구처럼 허물없는 사이로 보아야한다.

지금껏 하느님을 높고 커서 함부로 올려다볼 수 없는 수직적인 관계로 설정한 후 2차원적인 접근법으로 시도해왔지만 앞으로는 어머니나 연인처럼 또는 친구처럼 누구에게나 친근하면서도 친밀도를 높일 수 있는 4차원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수평관계로 놓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벽이라는 것은 만드는 사람에 의해 설정되게 되어져있다.

벽을 허무는 것 역시 사람에 의해 가능하다고 본다.

인식의 차이이자 접근의 차이이기에 얼마든지 시대적인 흐름에 맞춰 새로운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본다.

국가마다 삶의 기준이 달라 법률적 해석이 다 다르게 적용되어지듯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발상인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영원한 주종관계로 끌고 가는 모습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본다.

성역이라는 것은 특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과 합리성을 보장받기위해 만들어 놓고 있듯이 과거의 왕이나 현재의 대통령을 대우해주기 위해 성역화 시켜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요즘은 대통령 스스로도 성역화를 없애고 국민들과 좀 더 친근하게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듯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재설정해야하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지위가 무너지거나 하느님의 지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기에 접근성에 있어 좀 더 동적이면서도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장점을 부각시키고자하는 뜻이기에 거부감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수직관계는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는 복종관계로 작용하지만 수평관계는 격식과 형식을 제거한 후 자유롭게 대화하며 배려와 순종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4차원적이면서도 입체적인 관계이기에 친밀감에 있어서는 수평관계가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딱딱한 벽에 가로막혀 서로의 의사소통이 곤란한 수직관계보다는 그래도 배려와 미덕을 베풀 수 있는 수평관계가 좀 더 원만한 관계로 발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손만 내밀면 언제든 달려오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며 기도하는 모습은 오히려 평안하고 가까이 있는 하느님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수직관계에서 오는 딱딱하면서도 격식과 형식을 갖춰야하는 고전적인 불편함으로 계속적으로 하느님을 대한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겉으로만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남을 줄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조건적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종교에서 특히 유념해야할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탄핵

하느님도 대통령처럼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느님 말씀이라고 항상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통령도 잘못된 정책을 펴거나 실패하면 국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거나 무소부재의 권력을 사사로이 남용하면 의회에서 탄핵의 대상이 되듯이 성서의 말씀이 항상 옳고 정당한 내용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볼 수 없다.

성서에 씌여져 있는 내용 그대로 충실하게 해석하려는 목사들 중에는 논리의 부재에서 오는 부적절한 해석으로 신도들에게 강요하듯 이해시키려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아전인수격 억지해석은 오히려 신도들에게 거부감만 더 강하게 심어주는 결과가 되어 역효과만 날 수 있다.

인간의 기준으로 형성된 지식과 인간적인 행위를 평가절하하며 하느님만이 최고요 하느님의 나라만 찬양하거나 찬미한다면 목사 자신은 어느 세상에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냉정하게 뒤돌아보아야할 것이다.

종교도 인간의 철학적사고와 지식을 기반으로 형성된 신학적인 기준으로 운영되어지고 있듯이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기준은 그것이 종교가 되었던 신학이 되었던 인간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만약에 보통사람이 날마다 하느님에 대한 찬미로 일관하고 악의 소굴인 인간세계를 비하한다면 심각한 정신적 결함으로 인해 정신과적 상담을 받거나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온 목사님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지도자적 입장에 서있는 리더로서 천국과 인간세상을 보다 균형 있게 바라보며 설교해야할 의무를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틀에 박힌 신학적인 지식

종교가 탄생되는 그 순간부터 세상을 악의 소굴로 정의를 내린 후 줄곧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적인 시스템이 공존하는 선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치인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구원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그동안 구원을 받았으면 줄어드는 기색이라도 보여야하는데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커지고 오히려 구원받아야할 사람들이 더욱더 늘어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라고 본다.

틀에 박힌 신학적인 지식으로 구원을 외칠 것이 아니라 좀 더 인간적인 시스템의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해보면서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인 생각이라 틀릴 수도 있지만 세상은 종교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본다.

다만 종교가 생겨나면서부터 종말과 천국 그리고 구원문제를 내세울 때 문제의 발단은 시작되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나 테러 그리고 세계적인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평소에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라도 다 해결해줄 것 같은 종교적인 지도자나 성자 그리고 신들의 잔치로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실제상황에선 손 놓고 바라만보거나 운명 또는 인과응보적인 결과론으로 되돌리며 낮잠을 청하거나 딴청을 피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적인 구조자체가 공존하는 선악을 벗어날 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적으로 선만을 행할 수 있도록 해결해줄 것 같은 기대감을 주어 그것도 정당한 이유를 내세워 신도들의 뒷주머니만 털게 만드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믿음에 대한 보수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전혀 아깝거나 손해 볼 일은 없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평온하게 충돌을 즐기며 우주의 법칙대로 잘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놓고 종교마다 앞 다퉈 악의 소굴로 정의하는 일은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본다.

자신들부터 악의 소굴인 현실에서 살고 있으면서 자신들은 마치 악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별천지에서 살고 있는 듯 툭하면 사탄의 역사를 받거나 마귀라는 말로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더구나 악의 소굴을 벗어난 듯한 교회 안에서까지 정체를 숨긴 채 사탄의 역사를 받거나 마귀가 목사의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하도록 신도들의 귀를 막거나 방해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수준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멀쩡한 사람까지 사탄이나 마귀의 작용으로 몰아 부치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발 딛고 살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무당이 신기를 받아 굿을 하듯 목사 자신은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이 정겹고 좋아 즐겨 사용할 수도 있지만 듣는 사람도 생각하여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귀가 따갑고 거부감을 내비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그것을 가지고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이야말로 사탄이고 마귀라는 식의 자극적인 말로 몰아가는 일은 삼가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성자나 목사 자신이라도 늘 악의 소굴에 노출되어져있는 이상 그러한 말을 하는 자신만 사탄이나 마귀로부터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큰 착각 속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어찌 보면 하느님을 빙자한 사탄이나 마귀의 조정을 받아 목사 자신이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을 자주 인용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악의 소굴이라고 해서 항상 괴롭거나 깊은 슬픔에 빠져 사는 것이 아니듯이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유지하며 육십갑자가 순환하듯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알 수 있다.

반드시 신학적인 해석이나 잣대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장소를 벗어나는 순간 세상의 이치대로 살아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은 신학적인 해석이나 잣대에 짓눌려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목숨 줄보다 더 질긴 동아줄이라도 놓을 때는 과감하게 놓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상이다.

세상이 힘들어진 이유가 놓을 때 놓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욕망에 집착하는 바람에 힘들어졌듯이 그것이 종교가 되었던 인간사가 되었던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을 적절하게 판단하며 지내는 것이 삶을 보다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 말할 수 있다.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는 신에게 고과표에 따라 승진이 좌우되는 회사원처럼 점수를 많이 따서 사후에 편히 지내려는 마음이 없다면 사후세계도 중요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다할 수 있다.

직업적인 목회자야 신의 부름을 받은 입장이라 신에게 정성을 들이거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강요하거나 요구하는 것은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본다.

우선은 직업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르다보니 종교적인 장소에서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목회자가 되지 않듯이 틀에 박힌 신학적인 지식으로 모든 척도를 가늠해서는 안 될 것이다.


8. 결론 : 혁명적인 시스템

종교가 선을 행하는 경우도 많지만 종교야말로 악의 표본을 내세우며 악을 키우는 장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악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악을 행하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악의 표본을 내세우며 교과서적인 악을 조장하거나 교육시키는 장소로 돌변된 종교적인 장소야말로 악의 소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종교지도자나 목사의 영향을 받은 신도들은 현장에서 마치 실습이라도 하려는 듯 타종교를 믿는 신도들이나 무신론자들을 향해 전체적인 신학적 지식이 부족한 신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목사가 말한 그대로 성서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지식으로 믿음생활을 하면 안 된다거나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로 공격하는 것을 보면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워주게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세상은 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공존하는 선악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가 불변의 공존하는 선악으로 구성되어져있는 이상 그 누구도 이러한 시스템 자체를 변경시키거나 조절할 수 없기에 인류의 문제는 끊임없이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다고 본다.

종교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문제투성이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듯이 종교보다 더 강력한 혁명적인 시스템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인간의 문제는 늘 새로운 문제 속에서 성장 발전해 나가야하는 운명에 처해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종말보다는 과거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온 지구에 한정된 국지적인 종말이나 천국을 내세우며 구원을 외칠 것이 아니라 좀 더 냉정하게 인간적인 시스템을 정밀하게 분석해보며 하느님을 탄핵의 대상으로 만드는 신학적인 지식이 아닌 현실적인 구원정책을 연구해나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처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악은 공존을 통해서 생명력을 얻듯이 음양의 뿌리를 뒤흔들지 않는 이상 처음과 끝은 따로 구분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한 몸을 이루고 있다.

말세와 미륵불은 우주적인 순환에 비춰보면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


<말세와 미륵불> - 청아당 엄상호 詩


한쪽으로 기울면

복원력에 의해 바로 잡으려는 힘이 움직인다.

강하면 부드러워지려하고

부드러우면 강해지려는 속성이 존재하는 한

말세와 미륵불의 출현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처음부터

말세의 끝에서 태어났고

미륵불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따로 목청껏 부르짖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갈구인지를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사막의 오아시스인지

보석으로 치장된 천국 같은 세상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부와 편리함 그리고

논리적인 심신의 안정과 우주적인 행보를 추구하려는 것인지

믿기만 하면 행복이 보장되는 종교를 통해서

거듭 태어나려는 행동은 어찌 보면 인간적이기는 하지만

볼썽사나운 모습 또한 지울 수 없다.

세상은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져있는 것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여

천국과 지옥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을 위한 종교인지

신을 위한 종교인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살면서 선악의 경계에서 고민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알면서도 행하게 되는 것이 악이듯이

선만을 위한 삶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을

고결한 사람일수록 하루를 살고 반성하는 자세는

선악의 경계에서 방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선악을 벗어나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선악은 음양의 변화처럼 표리관계에 있으며

선은 음이요

악은 양이다.

선은 부드럽고 겸손하여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악은 강하고 활동적이어서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이 둘은 태어날 때부터 굳은 언약식으로 출발하였기에

억겁의 세월이 지났다하여

이제 와서 파혼으로 몰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끝에 이르러 멸망에 이를지라도

세상은 선악의 균형 있는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져 가고 있다.

선이 강하면 논리적인 힘(부드러움과 화합, 평화 등)으로 나타나고

악이 강하면 물리적인 힘(강함과 충돌, 전쟁 등)으로 나타난다.

강한 힘 앞에서는 잠시 고개를 숙일지 몰라도

반발력에 의해 거듭 태어나려는 고통을 겪듯이

한쪽이 기울면

복원력에 의해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

태어난 데로 살다 가면 좋을 텐데

따로 욕심을 내는 이유는

자신만을 위한 미래에 보장된 행복 때문이다.

현상 속에서 허상처럼 살아가는 나날이더라도

주어진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듯이

허상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생생하다.

현실도 지나고 나면

허상처럼 다가오지만

현실 같은 허상인 세상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을

무엇 때문에 말세를 운운하고 미륵불을 애타게 기다리는가?

사후도 사후세계이지만

현실을 극복해내기가 힘들기에

말세를 등에 업고

미륵불을 통해

허리 좀 펴보고 멋있게 살아보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지 않은가?

미래에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면

고단한 현실이지만 허공에 뜬 꿈을 놓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차라리 치열한 현실을 위해 하나라도 더 노력한다면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생각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듯이

물리적인 부와 편리함 그리고 안락함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이고

논리적인 심신의 안정과 우주적인 행보를 추구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서로의 장단점이 존재하는 한

누가 더 옳은 삶을 살다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산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는 산을 그리워하듯이

정적인 삶 속에서

동적인 삶을 추구하고

동적인 삶 속에서

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말세를 운운하고 미륵불을 따로 찾는가?

오랜 세월 허공에 뜬 채

귓가에 쟁쟁한 소리들이 듣기 싫지도 않은가?

성자들이 줄지어 왔다갔지만

별 뾰족한 수를 찾았는가?

시대에 맞게 태어난 데로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을

혼탁한 세상을 걱정하고

자신만 깨끗한 척하는 성자들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살다간 범인들이 더 낫지 않겠는가?

세상은 선악의 굴레 속에서 회전하게 되어져 있는 것을

무슨 수로 막겠다고

그 난리들을 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니던가?

세상은 성자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혼란스럽지도 않고 잘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조용한데

자신의 잣대로 바라보는 세상이 더 혼란스럽지 않은가?

그렇게 밖에 굴러갈 수 없는 자연의 이치를 가지고

한낱 성자들이 막을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공존하는 선악을 인정하지 않고

한쪽에 서서 편을 든 성자들 때문에 생겨나지 않았는가?

아무리 종교가 색깔과 배경이 다른

주관적인 사후세계로 명맥을 유지해나간다고는 하지만

이분법적인 선악을 따로 구분할 이유가 있겠는가?

종교가 없어도

급하면 찾게 되는 것이 신이지 않던가?

지역주의처럼 분열된 형상화된 신들을

모셔놓고

누구를 위한 종교 잔치인가?

범접할 수 없는 형상

신성의 극치에 이르도록 해놓는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후가 존재한다면

사후에 가서 말하면 되는 것을

현실에서 사후세계를 왜 걱정하는가?

사후는 사후세계에 맡기고

현실은 현실세계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는 데로

한걸음씩 걷다보면 마감하는 인생

음양의 고리를 끊고

선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성자들이 있다면 몰라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변화를 어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적인 쇼를 한다고

자연이 끄떡이나 하겠는가?

말세를 통해서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

미륵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본연의 모습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고 듦이 없는 세계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형체이전의 세계만 하겠는가?

처음부터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처럼

예부터 지금까지

하고 싶은 데로 해온 자연이

이제 와서

성자들의 말에 의해

가던 길을 멈추려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말세를 운운하고 미륵불을 기다리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