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신앙생활과 갈등
믿음은 소중한 것이다.
믿음의 크기에 따라 기적도 불가능도 현실로 옮겨놓을 수 있다.
학문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요 신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다.
믿음이라고 하면 종교에 대한 믿음만 생각할 수 있지만 믿음의 종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크게 분류하자면 학문에 대한 믿음과 종교에 대한 믿음으로 나눌 수 있다.
믿음은 신뢰와 통하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과 계약을 맺는 일이며 이 둘의 관계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약속은 신뢰할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음을 생각해볼 때 약속은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믿음은 곧 약속이자 약속은 곧 믿음이다.
믿음의 크기는 기적으로 이어지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루어지도록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믿음에 대한 이해를 반드시 신과의 계약이나 약속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적인 믿음이나 대인관계의 믿음에서 살펴보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믿음은 종교적인 행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믿음과 관련된 연관성을 찾아볼 수가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힘과 관련성이 있고 그것은 곧바로 신과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신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소원이나 기도를 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신들의 존재를 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밝혀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우리들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어렵거나 힘들 때 신부터 찾는 습관이 있다.
그렇다면 분명 신들은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 우리들의 과학적 지식으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신들의 존재를 밝혀내는 일은 과거부터 있어왔지만 괄목할만한 성과나 명쾌하게 밝혀낸 것은 아직까지 없다고 볼 수 있다.
추상적이며 손에 잡히지 않는 신으로 존재하며 계속해서 과학적 지식이 성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초보적인 과학적 지식을 뛰어넘어 영적인 부분까지 밝혀낼 수 있을 정도의 과학으로 발전한다면 그때는 신들의 존재를 손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목마른 사람들의 갈증이 더욱 심화될 수 있기에 이론적인 접근방법이나마 살펴보는 일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밝힐 수 있단 말인가?
우선 차분하게 동양철학에서 연구해온 우주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는 이기론으로 신의 존재를 살펴보자.
이기론에 관련해서는 마지막 장인 <17장 우주사상>에서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고자한다.
신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기론에 관련된 이해가 요구되어진다.
우주 구석구석에 분포되어져있는 생명에너지인 기(氣)는 충분하게 이해되어져온 부분이고 기의 작용을 이끌고 있는 이(理) 또한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면이 많지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기를 움직이는 것이 이고 이를 움직이는 것이 제7의 힘인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理)는 언뜻 보기에는 제7의 힘으로 통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나 이원론적 이론처럼 기와 이를 살펴볼 수 있지만 그 중간에서 작용하는 작용체의 존재가 빠져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이분법적인 이론이나 이원론적 이론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삼위일체나 삼분법적인 요소가 스며들어야함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기(氣)라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이(理)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지식(知識)이라는 삼분법적인 논리가 적용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공존하는 선악을 대변하는 논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과 악에서 힘겨루기를 시도하고 있는 신들 말이다.
신들은 바로 이기론의 굴레에서 우주를 헤집고 다니면서 선악의 양면성에 노출되어진 채 공간과 시간성을 지닌 인간들의 행동에 간섭을 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신들이 탄생될 수 있는 통로는 이기론의 틈바구니이다.
이기론의 틈바구니가 없었다면 또는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대표하는 공존하는 선악이 없었다면 신들은 애초부터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셋 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도 존재하고 이도 존재하고 공존하는 선악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묘한 일인가?
손에 잡을 수도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분명 영적 감각으로 잡아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들이 호흡 수련법과 기도이다.
특히 호흡 수련법은 심신을 단련시킬 수 있는 천연적 웰빙 성격을 가진 수련법으로써 널리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공간은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물질적 그릇이라면 시간은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고 지식은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도록 작용을 일으키는 일들을 해낸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은 천변만화의 일들을 지시하거나 일어나게 만드는 신 같은 존재이다.
신의 존재는 지식을 이해하면 쉽게 와 닿을 것이다.
지식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이 있듯이 신들의 행동은 그래서 우주 같고 곳곳에 스며있는 자연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머무르기보다는 무소부재의 거처에서 생활하기를 좋아하는 신들은 우리들의 심장을 비롯하여 우리들의 생각까지도 모든 것을 통솔하며 지시하기를 좋아한다고 볼 수 있다.
공간이 육체라면 시간은 혼이고 지식은 신의 지시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속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는 우주 속에서 한 호흡으로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곧 인간이요 인간이 곧 신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신인합일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구분할 것이 없는 하나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인간과 신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구속하려는 신들을 따로 내세우지 않고 깊은 수련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를 체험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구속되어져온 신들의 꼭두각시놀음에 더 이상 놀아날 이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렇게 마음한번 크게 먹으면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듯이 인간과 신들의 구분 자체가 없어진다.
참으로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깊은 수련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당연한 현상들이다.
의미라는 것은 의미를 두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자연처럼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할 수밖에 없다.
하나로 통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수련인 것이다.
우주는 본래부터 하나였듯이 우리도 하나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현들이 하나같이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왔듯이 우리들도 하나의 세계를 이해해보자!
하나의 세계는 큼도 없고 작음도 없다.
우주를 통째 뒤흔들기도 하고 우주의 고요 속에서 깊은 숙면을 취하기도 한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주의 안팎을 문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경지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의 세계는 생각보다 크고 넓고 아름다운 세계임이 분명하다.
꿈을 가지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에게 구속되어 살기보다는 신과 함께 호흡하며 우주를 뒤흔들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1. 신앙생활
모든 출발은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어진다.
올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듯이 얼마만큼 적극적인 행동으로 수련생활과 신앙생활을 해왔는지에 따라 그 결과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나쁜 자세와 비뚤어진 마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수련을 하거나 기도를 해도 그 결과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결과로밖에 나올 수 없다.
수련이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혼신의 힘을 다해 적극적인 배움과 봉사활동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봉사활동과 십일조를 잘 낸다하여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듯이 진심으로 하느님을 믿고 성자들처럼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신앙생활을 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에는 성자들처럼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신실한 신앙심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하여 주눅이 들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성자들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숱한 고뇌와 방황을 통해서 차츰 신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듯이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 다니기보다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2. 기도와 응답
정시기도나 무시기도 또는 작정기도를 통해 간절한 소원을 말하다보면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이 있게 된다.
믿음에 대한 응답은 진실한 기도로부터 이루어지고 있고 또 하느님이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소원과 더불어 간절함이 극에 달할 때 믿음에 대한 응답이 더 강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기복신앙으로부터 시작하여 개인의 신상이나 질병, 입시, 취직, 사업, 가정의 행복, 국가의 평안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원을 다 빌게 되면 하느님은 어떻게 아시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소원자의 소원대로 대부분 들어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도를 한다하여 항상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도 소원자의 기도가 절실한지 아니면 불로소득을 원하며 소원을 말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기에 여러 가지 시련이나 시험을 내린 후 소원을 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응답을 받은 신자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이미 하느님과 한 몸이 된 신자들은 모든 영광과 감사함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을 끝없이 낮추기도 한다.
축구선수가 골을 넣고 난 후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나 교회에서 처음으로 음반을 내며 신도들 앞에서 발표회를 갖는 집사의 모습에서 또는 시상식에서 공개적으로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감사함에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의 은혜를 그만큼 많이 받아왔음을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살고자하는 의지가 강한 신자들 중에 암이나 불치병 같은 혹독한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쾌유의 소식을 듣거나 정성껏 낸 십일조의 위력을 느낄 때면 하느님의 존재는 더없이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조금 의아한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직업이라고 하면 판・검사부터 시작하여 각종 다양한 직업이 있지만 살인, 강도, 강간, 사기, 폭력배, 소매치기에 이르기까지 소원자의 직업에 개의치 않고 그러한 일들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후 거듭나게 되면 더욱 크게 환영한다는 점이다.
역시 하느님의 마음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와 같다할 수 있다.
인간의 눈높이로 판단을 하지 않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은 모두에게 공평함과 사려 깊은 판단을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결론 : 신에 대한 갈등
종교에 대한 갈등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과연 어떤 종교가 가장 진실 되고 하느님이 원하는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오고 있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꾸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기도를 올릴 때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못했다면 과연 종교의 힘이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기도를 올릴 때마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신에 대한 그리움을 키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신의 모습은 동서양을 통해 다 다르게 비춰져 왔다. 그리고 어떤 신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주는지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깊다.
물론 지정학적 입지조건과 문화적인 환경요소가 크게 작용되어져 그 나라에 맞는 종교로 치우쳐지는 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주에는 어떠한 형태로 생각하든 모두 다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태양신을 믿든 월신을 믿든 아니면 우주신인 하느님을 믿든 우리의 생각대로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반드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물론 하느님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생각해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지만 하느님을 배제한 상태에서도 이 일이 일어나는 데에 큰 문제가 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논리로 풀리지 않는다면 새로운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아니 초월해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 어떤 것에 짜 맞추어도 안성맞춤인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줄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형체를 지니지 않았지만 천변만화의 형태를 짓고 풀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그것은 형체도 냄새도 없지만 빛이 되어라하면 빛이 되고 어둠이 되어라하면 어둠이 되는 물질이면서도 비물질인 형체를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하느님이 되어라 하면 하느님이 되고 신이 되어라 하면 신이 되기도 하는 알 수 없는 묘연한 근원체 말이다.
역사는 인간이 생각하는 데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잘 생각해보아야한다. 신도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역사 아무리 신의 힘을 빌려 멈추려 해도 멈추어지지 않는 앞만 보고 달리는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할지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학이 왜 발달되어야하는 것인지 과학의 부작용과 그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이 과학을 그토록 신봉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한번쯤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과학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나가고 있는 것은 과학의 생명인 새로움에 도전하기 위해서이다. 과학에서 새로움을 빼놓는다면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어져버리기 때문에 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의 힘은 새로움을 먹고 살기에 가능한 것처럼 과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신화를 창출해나갈 것이다.
과학이 불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신도 말렸을 것이다. 그냥 방관만 해두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아니면 신도 과학이 끝에 다다르면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조그마한 기대라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신에 대한 갈등은 동서양을 비롯하여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 다 해당될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간접적이나마 분명 신의 체취나 음성을 들을 수 있기에 다급할 때는 무신론자들조차 신의 존재를 어렴풋이 이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딱히 자신이 좋아하는 신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신과 계약을 맺기 위해선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 응답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지불해야하고 까다로운 격식과 복종이라는 강력한 조건을 요구하기에 이 모든 조건을 의심 없이 수락할 수만 있다면 신과의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하지만 신과의 약속이 결렬되거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신화와 모순된 교리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받아먹기 식 목회자의 모순된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신의 권능보다는 신의 선택은 사람에게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으로 신의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신의 권능보다는 사람의 힘에 의해 신의 권능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뜻한다.
추종자의 능력에 따라 신의 권능이 부활함을 볼 때 종교는 추종자의 단합된 힘에 의해 형성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옷을 벗고 하나가 된 나무들> - 청아당 엄상호 詩
싸우지 말라고 한다.
나중에 돌아갈 곳은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
신 때문에 싸우지 말라고 한다.
뜻도 모른 채 맨 처음 기도를 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신이 무엇인지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어설프게 기도를 할 때마다 도움을 주다보니
단맛이 들어 이제는 툭하면 기도를 올리며 어려움을 부탁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영생을 꿈꾸며
믿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일로 착각을 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믿을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영생불사를 시켜주겠다는 말을 믿었기에
남들이 흉을 보아도 그런 대로 참으며 오늘도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생각을 해 보아라?
우리가 생각하는 영생불사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한 영생불사가 실제로 우주 안에 존재하는지를
신도 막연하게 믿는 사람들을 경계한다고 한다.
신을 이용하여 돈을 벌 목적으로 자신의 영달을 이룰 목적으로 믿는다면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두 손을 모으면 기도가 되지 않던가?
그리고 그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 기도가 아닌가?
자신에게 도움을 줄만한 대상
바로 그것이 신이 아닌가?
반드시 신의 형상이 보이지 않아도 좋고
혹여 보인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닌가?
기도를 통해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신을 찾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기도를 한다고 기도를 할 때마다 다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럴 때는 신도 피곤할 수 있기에 그러나보다 하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던가?
만약에 연속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서서히 실망을 할 것이다.
처음에는 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신도 이제는 죽었나보다 라고
그렇다.
신이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때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때이다.
고통만 내려주는 신은 대접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대접받으려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눈치껏 알아서 챙겨 주어야한다. 그래야 신다운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사람들은 영악하다.
어떤 신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내려주는지
자신의 취향을 잘 알아주는지를 안다.
그리고 서로 다툰다.
자신의 신이 가장 많은 혜택을 내려준다고
한번 믿어만 보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과 똑같은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은 갈등을 일으킨다.
우주신인 하느님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신들 때문에 혼동이 온다고 한다.
도대체 이렇게 많은 신들을 다 모셔야하는지 아니면
하느님만 믿어도 되는 것인지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아예 무시해버리고 신은 없다고 해야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라고 한다.
동서양마다 신들의 모습이 다르고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없는 신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지 않느냐고?
그리고 아무렇게나 만든 신을 향해 기도만 올리면 신기하게도 기도를 들어주지 않더냐고?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어떤 때는 하느님조차도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다 싶은 것을 하나만 전 세계인에게 심어놓았더라면 지금에 와서 이렇게 혼동이 오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너무 방관만 해오다보니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느님도 이제야 자탄을 한다고 한다.
인간을 만들어낼 때 좀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지금에 와서 많이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까지 넘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선악이나 구분하면서 살아갈 줄 알았지
신이 어떻고 하느님이 어떻고 하면서 기어오를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다.
그동안에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더라도
이제부터라도 조용하게 명상이나 하며 살아가라고 한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신을 믿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신을 믿지 말라고 한다.
그놈의 신 때문에 제발 싸우지 말라고 한다.
신! 신! 신! 하는 바람에
하느님도 이제는 지쳤다고 한다.
두 눈을 감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데로 믿고 살아라한다.
어떤 신을 믿든 안 믿든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아가라고 한다.
대신 자랑은 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믿고 살아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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