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구원에 대한 유혹
사람에게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종교마다 구원과 기복신앙 및 치유효과를 내걸며 유혹하고 있지만 진정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난 뒤를 생각해보면 과연 그러한 문제들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가치가 있는 것들인가를 한번쯤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몸만 나으면 천하라도 들었다놓았다할 기세로 이야기하지만 막상 아픈 몸이 깔끔하게 낫고 보면 이제는 현실에서 부딪히는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행운의 여신이 도와 경제적인 문제까지 깔끔하게 해결된다면 과연 더 이상 고민할 문제가 없어지는지 또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은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 문제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통 속에서 산다하여 항상 고통스럽지는 않듯이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색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희망을 갖고 살아가듯이 우리에게는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낫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숨 줄을 놓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프리카나 공산국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라!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대로 목숨을 유지하며 살아가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에 의해 로봇처럼 조정되듯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신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을 사전에 막을 수 없듯이 인간은 신의 손을 뿌리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내재되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죽은 후에야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신의 뜻대로 산다하여 모두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듯이 신의 비위나 맞추며 살기에는 세상이 각박하고 험난함을 알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이 보다 더 긍정적인 삶이 될 것이다.
누구한테 의지하며 사는 것만큼 비참한 현실은 없다.
궁지에 몰려 꼭 의지해야만 극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도 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일어서며 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성서에 그려져 있는 하느님을 보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인간은 잠깐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처럼 취급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툭하면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를 퍼부으며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붓는 것은 과연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 맞는가하는 의심스러운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도대체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누가 큰소리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러한 인간들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엑스트라 인생으로 취급하며 싹쓸이하듯 멸망시키려는 기세는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름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을 그토록 알리려고 선지자들을 내보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25억 명에 욱박하는 현실이지만 현실은 여전히 복잡하고 악의 소굴에서 지내는 듯한 인상으로 살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더욱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새로 태어나면 백지상태의 삶에서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듯이 누구나 그래왔던 것처럼 배우고 익히고 생활하며 살아가는 일은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시대가 급박해질수록 배움의 양은 더 늘어나고 시간을 압축해서 줄였다 늘렸다하며 살아가야하는 일만 더 커짐을 알 수 있다.
세상은 항상 이중성내지 양면성에 의해 굴러가다보니 성서라고해서 공존하는 선악에서 예외일 수 없지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구약성서는 ‘악의 성서’로 불리고 신약성서는 ‘선의 성서’로 선회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선의 성서’인 신약성서 또한 완전한 선의 성서가 아니듯이 ‘악의 성서’인 구약성서 또한 완전한 악의 성서는 아니다.
다만 구약성서가 악의 비중이 높다보니 그렇게 불리 운 것이며 신약성서 또한 선의 비중이 높다보니 그렇게 불리우게 된 것 뿐이다.
이렇게 공존하는 선악은 하느님을 비롯하여 성서나 경전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삶보다는 지구라는 땅덩어리에 던져진 생명체라면 스스로 헤쳐 나가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함을 알 수 있다.
살다가 진짜로 힘이 든다면 그때 가서 가상의 신이라도 붙잡고 하소연해보아라!
물론 이미 그러한 신들이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져 종교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면 그에 의존하는 일이 더 빠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보상에 대한 대가는 항상 지불해야하는 것임을 잊지 말고 할 수만 있다면 정신적인 위로를 받은 만큼 보수는 톡톡히 지불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세상은 준만큼 되돌아오는 것이다 보니 주고받는 일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1. 엑스트라 인생
인간도 자신을 내세우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듯이 수천 년을 두고 젖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하느님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의심 많은 인간을 위해 증거와 역사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점에서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성서를 통해 감동받을 수 있는 것은 성서 안에 녹아있는 뼈와 살이 되는 감동적인 말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끊임없이 보내는 하느님의 인내심이다.
사람이라면 수천 년을 두고 인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창세기 이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은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마 앞으로도 우주가 소멸되고 다시 탄생되어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신뢰를 보낼 것이다.
다만 원시적인 의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의 발단인 악의 소굴로 정의해놓은 선악과의 기본적인 문제를 벗어나서 왜 하느님은 처음부터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인 선한 사람과 믿음이 강한 완전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고 복잡하고 난이도 높은 시험문제처럼 하늘이 선택한 사람을 통해 전도를 하려고 하는지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의문시되는 점은 복종에 불복하거나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물이나 불타는 유황 그리고 전쟁이나 내분을 통해 분열시키거나 멸망시키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느냐하는 문제이다.
다 같은 사람인데 그리고 멸망시킬 사람들 중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도 있을 텐데 한꺼번에 몰살시키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물론 하느님의 기본생각은 선한 사람보다는 악한 사람을 더 사랑하여 탕아나 악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한 후 거듭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구원을 해주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사후에 하늘에서 보상해줄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써 지녀야할 기본 권리를 박탈시키는 치명적인 단점만큼은 피해갈 수 없다고 본다.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엑스트라 인생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든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이야말로 질투심이 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에게 비춰진 하느님의 모습은 항상 인자하고 자애로운 모습의 하느님 같지만 성서를 통해 바라본 하느님의 모습은 분노의 신으로써 질투심이 강해 화낼 때 화내고 기쁠 때 기뻐하면서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꾸밈없이 드러내며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심리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기야 하느님도 인간을 다루다보니 인간적인 면에 물들어 자신도 모르게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좀 더 넓고 우주 같은 마음이라면 모두를 용서해주고 지금이라도 원죄를 사하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보통사람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깊고 넓은 뜻이 분명히 숨겨져 있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무신론자들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하다할 것이다.
2. 선택받은 인류
모든 문제를 확인할 수도 없는 선악과로 돌려놓고 인류를 구원해주겠다는 하느님의 의중은 한마디로 고도의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내려온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영특한 인간을 설득하기에는 많은 점에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지구상의 인류 중 3분의 1에 해당할 만큼 많은 수의 기독교인이 존재하지만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인류는 극히 일부분밖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더 반성하며 회개한 후 거듭나야하는 문제가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하며 완벽하게 하늘의 뜻에 따라 살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인간의 방종과 게으름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느님이 주신 성공과 축복을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오히려 방종을 즐기며 게으름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일일이 하느님의 지시를 받으며 종의 몸으로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적게 먹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리며 살고자하는 욕망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3. 진노하는 하느님
성서에 그려져 있는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를 내리는 하느님의 모습 말고 필사자들이 고의적으로 성서 본문의 내용을 변개함으로써 내려지고 있는 저주의 글을 살펴봄으로써 왜 하느님이 틈만 나면 저주를 퍼붓는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필사자들도 기존의 성서 본문보다는 좀 더 나은 내용으로 꾸미려하거나 본의 아니게 문맥이 맞지 않은 구절이나 내용상 첨가해야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변개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변개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원본문의 보존은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볼 때 저자의 원뜻은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보존되어져야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강력한 법적 보호를 받고 있는 저작권법의 탄생도 바로 이러한 일을 밑바탕으로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좀 더 명확한 뜻에 접근해보자.
“오늘날 여러 연구에 따르면,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은 정반대의 상황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통’ 측의 필사자들도 적지 않게 본문을 변개시켰다는 것이다. 이단 기독교인들이 성서 본문을 오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성서 본문이 자신이 믿는 교리에 더 잘 들어맞도록 하기 위해 본문을 변개시켰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필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문서의 본문을 얼마든지 변경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문서를 잘 보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실질적인 위험이었다. 위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인쇄기, 출판사, 저작권도 없었다. 그런 시대적인 배경 아래, 기독교 세계의 초기 필사자들이 문서를 베껴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의 저자들은, 책을 써서 회람시킬 때 자기가 쓴 책의 본문이 변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요약하면, 당시의 저자들은 변개를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주가 전부였다. 자기 허락 없이 본문을 변개시킨 필사자들을 저주한 이유가 여기 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초기 기독교 문서 가운데 하나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런 종류의 저주가 나온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작품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무시무시한 경고를 덧붙였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요한계시록 22:18-19).’
종종 이 구절은, 독자가 이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믿어야 한다는 위협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말은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베끼는 필사자들에게 던지는 전형적인 위협이었다. 이 책에 어떤 말을 덧붙이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던 것이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이와 비슷한 저주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라틴 산학자인 루피누스가 오리겐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를 번역하면서, 그 번역과 관련해 선언했던 사소 엄중한 위협을 살펴보자.
‘진실로 내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앞에서 이 책을 필사하거나 읽는 모든 이들에게 간절히 명하고 청한다. 앞으로 올 나라에 대한 믿음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와 사탄과 마귀들을 위해 준비된 저 영원한 불을 두고 말하노니, 누구든지 기록된 것에 어떤 말도 덧붙이지 말고, 어느 말도 빼지 말며, 첨가나 변경을 가하지 말라. 오직 자신이 베낀 본문을 대본과 비교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이를 갈고 울면서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죽지고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이 말은 본문에 써 있는 어떤 단어도 고치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이다. 저자는 조금이라도 본문을 변경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지옥불과 유황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다. 일부 저자들은 자신이 쓴 글이 전혀 변경되지 않고 처음 모습 그대로 전달되도록 해야겠다고 작정했다. 하지만 저작권법이 없던 세상에서 본문을 마음대로 변개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필사자들이 있는 한, 그 어떤 험악한 위협도 본문을 그대로 지키는 힘이 될 수는 없었다.”
4. 오늘날까지
한․영․일․중 온라인 성경의 대명사 ‘Holynet-다국어성경 HolyBible’ 검색창에서 입력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까지’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꽤 많은 양의 내용들이 딸려 나온다.
‘오늘날까지’라는 의미는 과거를 지나 지금 현재를 상징하는 단어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때 당시에 쓴 글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기억해내서 썼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물론 과거부터 시작하여 지금 현재로 연결되어진 내용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들은 빼고 과거를 회상하며 쓴 듯한 내용들만 살펴보자.
사람들의 기억이란 믿을만한 것도 꽤 되지만 신뢰할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도 꽤 발견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짧게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에서 수십억 년이 될 만한 내용들을 기억해내거나 구전이나 전설로 내려오는 것을 기록해야하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그때 당시의 말씀들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천지창조까지 들먹인다면 그야말로 암담할 뿐이다.
하기야 그러한 사실들을 영감설이나 하느님이 말씀해주신 내용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원본문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과연 그러한 사실들이 설득력이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오늘날까지’라는 시간적 개념이 모호하거나 기준이 없다보니 오늘날까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시간적 간격은 얼마가 되는지 역사적 배경을 더듬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계산해내기가 어렵다할 것이다.
아래의 내용은 온라인 성경에서 검색해낸 내용들이다. 참고삼아 살펴보기 바란다.
온라인 성경이라고해서 일반 성경과 다르다는 내용이 아니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함을 인식하기 바란다.
그리고 과연 어떠한 생각이 들지 잘 판단해보기 바란다.
현재진행형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과거형으로 바뀌면서 현재형으로 고정되는 문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문맥부터 어색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재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래도 아닌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문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22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구약성서 <창세기 26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구약성서 <여호수아 5장> [우리말성경] 두란노서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전투할 수 있는 모든 남자가 다 죽을 때까지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전에 주겠다고 조상들에게 맹세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가 그들의 아들들을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들은 광야 길에서 할례받지 못해 아직도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마친 후 그들이 나을 때까지 진을 친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굴려 내버렸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이 오늘날까지 길갈이라 불리게 됐습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7장> [우리말성경] 두란노서원
“전리품 가운데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와 *은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 그것들은 내 장막 안 땅속에 숨겨져 있고 은은 그 밑에 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사자를 보냈고 그들은 그 장막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로 거기 장막 안에 그 물건들이 숨겨져 있었고 은은 그 밑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장막에서 물건들을 가져다 여호수아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져왔고 여호와 앞에 그것들을 펼쳐 놓았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과 함께 세라의 아들 아간과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아간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의 소, 나귀, 양 그리고 그 장막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아골 골짜기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네가 왜 우리를 괴롭혔느냐? 여호와께서 오늘 너를 괴롭히실 것이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 죽이고 가족들과 재산들을 돌로 치고 불태웠습니다.
아간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제야 여호와께서는 그 맹렬한 진노를 돌이키셨습니다. 그리하여 그곳 이름이 오늘날까지도 *아골 골짜기라 불리게 됐습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8장> [표준새번역] 대한성서공회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사람은, 복병이 그 성을 점령하고, 연기가 그 성에서 치솟는 것을 보고는, 돌이켜서 아이 성의 사람들을 무찔렀다.
복병들도 아이 성의 사람들과 맞서려고 성 안에서 나왔다. 이제 아이 성 사람들은 앞뒤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쳐 죽였으며, 그들 가운데서 살아남거나 도망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 성의 왕만은 사로잡아 여호수아에게로 끌고 왔다.
이스라엘 사람은 광야 벌판에서 자기들을 뒤쫓던 모든 아이 성 주민을 다 죽였다. 그들이 모두 칼날에 쓰러지자, 온 이스라엘 군대는 아이 성으로 돌아와서, 성에 남은 사람을 칼로 죽였다.
그 날 아이 성 사람 남녀 만 이천 명을 모두 쓰러뜨렸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모든 주민을 전멸시켜서 희생 제물로 바칠 때까지, 단창을 치켜든 그의 손을 내리지 않았다.
오직 가축과 그 성의 전리품은,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차지하였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불 질러서 황폐한 흙더미로 만들었는데,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구약성서 <여호수아 22장> [개역한글] 대한성서공회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구약성서 <역대하 10장> [개역한글] 대한성서공회
“온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하도람을 보냈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저를 돌로 쳐 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구약성서 <에스겔 20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을 멸망하게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 하셨느니라 너희 조상들이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노하게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 제물을 부어 드린지라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27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신약성서 <마태복음 28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카베오상 13장> [공동번역] 대한성서공회
“온 이스라엘 사람이 몹시 통곡하며 그의 죽음을 여러 날 동안 슬퍼하였다.
시몬은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의 무덤 위에 앞뒤를 매끈하게 간 돌로 기념비를 높이 세워 먼 데서도 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부모와 그의 형제 넷을 기념하는 피라밋 일곱 개를 만들어 쌍쌍이 마주 세워놓았다.
그리고는 그 주위에 큰 기둥들을 세우고 그 기둥 꼭대기에 영원한 기념물로 여러 가지 전리품을 장식하고 그 전리품 곁에는 배를 조각하여 붙여놓았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볼 수가 있었다.
모데인에 세운 이 묘소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5.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
위에서 ‘오늘날까지’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듯이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에 대해 살펴보자.
대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저주를 퍼붓는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우주신인 하느님이 이러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말까지는 토해내지 않는다고 본다.
섬뜩할 정도의 악랄한 악담을 통해 하느님이야말로 악의 신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도대체 이러한 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사랑과 자비로 베풀어야할 우주신이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악담을 늘어놓는다면 어디 무서워서 그러한 신을 받들 수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성서에 기록되어져있는 것을 보면 누구를 위한 배려인지 가늠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분노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신앙심을 유지해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기복신앙 때문에 다니는 신자들은 바로 분노하는 하느님을 가장 무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파괴할까봐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들은 평안을 얻는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지만 분노하는 하느님을 내세우는 이유 중 또 다른 면은 이단자나 반대 세력을 완화시키기 위한 면도 있다. 그리고 멋모르고 한번 기독교에 발 들여 놓은 사람들을 함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분노하는 하느님의 위력은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신자 스스로 분노하는 하느님을 떠올리며 저주를 퍼부을까봐 흩어진 신앙심을 바로잡아나가는 데 중심을 잡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심으로 교육받으며 함부로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가?
마치 과거의 노예생활처럼 올가미에 철저하게 묶어두고 주인의 말에 복종하기만을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웬만한 배짱이 없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기에 성서에서 가장 강력한 위협적인 겁주기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은 항상 즐거운 일과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십갑자가 순환하듯 길흉화복의 운세가 결정되어지듯이 길흉화복의 연속선상에서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어느 곳을 밟아도 터지게 되어있는 지뢰밭에 갇혀있는 형국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흑백논리와 같은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길흉화복은 두 가지 개념에 속한다할 수 있다.
한마디를 던져서 맞으면 영웅이 되는 것이고 틀려도 크게 질책당할 일이 없다보니 성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분노하는 하느님을 곳곳에 배열해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감하게 승부수를 띄우기위해 인간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정경으로 채택하여 올려놓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은 착각이나 오류에 쉽게 빠져들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함정을 파놓고 기다려도 쉽게 빠져드는 취약한 점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 인간이다.
이러한 취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기에 지탄과 비난의 화살을 맞아가면서까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약성서 <신명기 8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구약성서 <신명기 28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피부병으로 너를 치시리니 네가 치유 받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치는 것과 눈머는 것과 정신병으로 치시리니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겨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원수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네 토지 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말미암아 네가 미치리라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를 생기게 하여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네가 자녀를 낳을지라도 그들이 포로가 되므로 너와 함께 있지 못할 것이며
네 모든 나무와 토지 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그에게 꾸어주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보살피지 아니하며 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 마침내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마침내 너를 멸절시키리라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남자까지도 그의 형제와 그의 품의 아내와 그의 남은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가 먹는 그 자녀의 살을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까닭일 것이며
또 너희 중에 온유하고 연약한 부녀 곧 온유하고 연약하여 자기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자기 품의 남편과 자기 자녀를 미운 눈으로 바라보며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구약성서 <신명기 29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여호와께서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그를 구별하시고 이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언약의 저주대로 그에게 화를 더하시리라
너희 뒤에 일어나는 너희의 자손과 멀리서 오는 객이 그 땅의 재앙과 여호와께서 그 땅에 유행시키시는 질병을 보며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격분으로 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물을 것이요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구약성서 <여호수아 22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여호와의 온 회중이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오늘날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브올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재앙이 내렸으나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얻지 못하였거늘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하여서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그 죄악으로 망한 자가 그 사람 뿐이 아니었느니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이스라엘 천만인의 두령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우리가 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혹시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혹시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어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구약성서 <예레미야애가 3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구약성서 <나훔 1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6. 이단과 정통
이단(異端)과 정통(正統)이라는 기준이 모호할 때가 많다.
이단 사이비 대책위원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이단이란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회들은 한마디로 이단인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정통성을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계명인 엄격한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그러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를 향해 오히려 이단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무엇이 이단이고 정통인지를 구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은 엄격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교파들을 이단으로 몰아 부치면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 되어 진다.
자신이 믿는 종교나 교파가 정통이고자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을 높이고 싶은 만큼 타종교나 다른 교파들의 뜻도 존중해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지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가는 일은 자중해야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그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그 자신이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릴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도 그 출발선에부터 이단이 아니겠는가?
이단으로 출발한 기독교가 어떻게 정통성을 내세울 수가 있겠는가?
지금도 여전히 유대교에서는 구원자로서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있듯이 같은 기독교내에서 서로 이단이라고 면박을 주는 일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세상에 진정한 정통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온 만큼 정통도 많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신도들의 선택이라고 본다.
신도들은 영악한데가 많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롭지 않은 것은 함부로 선택하려들지 않는다.
정통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 어떤 혜택을 누릴 수 없다면 스스로 빠져나와 그곳이 이단이나 사이비라 할지라도 좀 더 좋은 곳으로 더 많은 혜택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고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가장 먼저 반성해야할 부분은 국가가 이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듯이 타종교에 대한 존재도 함께 인정해 주어야한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나라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기나 한 것처럼 타종교에 대하여 이단이나 사이비로 몰아가는 일은 참으로 몰상식한 처사라고 본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려는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종교의 자유는 국가마다 보장하고 있듯이 타종교의 숭고함도 함께 인정해주며 손을 맞잡고 나아갈 때 보다 큰 종교로서 그 몫을 다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7. 우주신(宇宙神)
우리들은 하느님(천주교)이나 하나님(기독교)하면 우주의 유일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유일신이란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신을 일컬음을 놓고 볼 때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세계 3대 종교의 하나. 7세기께에 아라비아의 마호메트가 창시한 일신교. 교전은 알라가 계시한 코란경. 교리는 아라비아 민족 신앙에 그리스도교·유대교를 가미하여 전지전능한 알라에게 귀의하는 것. 성지 메카를 중심으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지에 널리 퍼져 신도 약 4억을 헤아린다. <동의어> 마호메트교. 모하메드교. 회회교.)의 유일신인 알라나 도가에서 말하는 옥황상제(玉皇上帝)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염라대왕(閻羅大王) 등 우주에는 하느님 말고도 각 종교마다 내세우고 있는 유일신들이 별도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로아스터교(조로아스터가 창시하여 페르시아에서 일어난 고대 종교의 이름.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일어났고, 아베스타를 경전으로 한다. 선과 악의 대립·투쟁을 가르치는 이신교인데 한때는 국교로서 성행했다. <동의어> 배화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최고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내세우는가하면 유럽에서 성행하고 있는 다신교의 신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음을 놓고 볼 때 우상숭배를 그토록 꺼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한마디로 자신을 믿지 못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기분이 나쁜 것이다.
그래도 전지전능한 지고신인데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나 권력에 누수현상이 생길 것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올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자신을 강조하며 자신만 믿어달라고 끊임없이 조르며 선지자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주에는 우리가 생각한데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일신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한 성자들이나 신흥종교를 탄생시킨 교주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신들의 세계와 신들의 품격이 정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유일신이 하나로 통일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지만 성자들이나 교주들이 바라보고 있는 신들의 모습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은 평소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은밀한 방법으로만 자신을 믿도록 강요한 신들에게 있지만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한 성자들이나 교주들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눈높이는 우주에서 보여준 만큼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지금 또 다른 성자나 교주들이 유일신을 만들어낸다면 그 역시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유일신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는 것은 보는 관점과 특색에 따른 점도 있지만 인종과 언어를 통일시키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맞물려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세계를 대표하는 세계어가 나돌고 있지만 인종적 차원에서 국가마다 다양하게 구사되어지고 있는 가장 편리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기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옷도 자신의 몸에 맞아야만 편리하듯이 언어도 자신의 구강에 맞아야만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듯이 언어도 그 나라의 지역적 여건에 맞는 구성체계로 갖추어져있기 때문에 한 나라 안에서조차 각종 방언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언어의 통일성이 얼마만큼 힘든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종과 언어가 통일되기 힘든 만큼 유일신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힘든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생각만큼이나 우주의 세계가 크고 넓지만 언젠가는 과학의 발달로 이 우주를 대표하는 유일신을 하나로 통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좀 불편하겠지만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유일신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일이 서로의 견해를 존중해주는 길이 될 것이다.
신이 있어라하면 신이 생겨나고 없는 신도 만들면 생겨나는 것이 이 우주라고 했다.
신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은 채 자신의 존재만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려는 것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우주에는 하느님 이외의 신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들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사후세계가 맞춤형으로 바뀌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우주는 그러한 신들의 영역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며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우주는 참으로 크고 넓은 마음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별들의 전쟁처럼 신들의 전쟁조차도 모두 포용하는 모습은 과연 우주다운 큰 그릇의 모습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8. 자신을 강조하는 하느님
“너희가 나 여호와인줄 알리라”(개정 전), “나 여호와가 말하였노라”(개정 전)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개정 후),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개정 후)
대표적으로 에스겔 2장부터 시작하여 에스겔 46장까지 자신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사람들도 자신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일인데 하느님이 하신 일들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부분만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예레미야 23장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13장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아모스 8장 :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9. 모순
에스겔 34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느님은 가끔씩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에스겔 34장에서 굳게 약속한 것처럼 다시는 이 땅에서 여러 나라의 수치나 멸망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다짐한 일이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약속한 내용들을 지키지 않고 우물쭈물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세월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약속한 내용들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도 인간적인 면이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물론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를 일삼거나 하느님을 배신한 대가로 인해 약속한 내용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하느님이 인간한테 굳게 약속한 내용인데 속 좁은 인간처럼 쩨쩨하게 약속을 거둬가 버리는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탄생된 종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 그토록 이스라엘 민족만 감싸고돌며 다른 민족들은 마치 잠깐 출연했다가 사라지는 엑스트라 인생처럼 다루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사탄이나 마귀의 조정을 받는 악귀와도 같은 존재로 취급하는 일이 매우 불쾌할 때가 많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어차피 하느님이 만든 것 같은데 자신을 믿지 않는 족속들은 사탄이나 마귀의 조정을 받는 부류로 취급하여 언제든지 죽여도 아무탈없는 것처럼 몰아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전지전능하다는 소리가 무엇인가?
그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 동서로 분열된 남북이산가족처럼 편 가르기를 즐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좋은 능력으로 딱 한번만 세상을 바꾸어버리면 간단할 것도 같은데 그렇지 못하고 말로만 전지전능을 외치며 결국 인간적인 힘으로 해결하라는 말로 들리는 것은 나하나 만의 생각으로 끝나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교회에서 주일마다 기도하는 사도신경(개정)에 나와 있는 외아들 예수에 대해 들어보자.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로마서 8장).”
분명 사도신경에는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로 기록되어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편 2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의 아들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아담까지 합세한다면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들들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분명 하느님에게는 외아들 예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신도들의 대부분은 아들들이나 자녀들로 표현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녀라고하면 외아들은 무슨 말인가?
자녀가 따로 있고 외아들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자유자재로 아들들이나 자녀들을 만들어낸다고는 하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그리고 참으로 기이한 발상이 아닌가?
이미 수많은 자녀들을 놓아두고 외아들이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지 않은가?
누구의 발상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비전성경사전에 나와 있는 아들의 뜻이 첫째부터 시작하여 여섯째로 나눠 여러 갈래로 나눠지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점이다.
시편의 특성상 특정인물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분명 예수만을 일컫지는 않은 것 같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에게 딱 한명의 자식만 있다는 소리인데 이치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한명의 자녀만 두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는 부인이 없다는 점이다.
부인도 없이 딱 한명의 외아들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여러 가지로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흥종교의 교주들은 자신도 하느님의 둘째나 세 째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나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예수도 그 당시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없었듯이 지금의 둘째나 세 째 아들들의 존재도 역시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다.
<시편 2편>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10. 인간을 사랑과 자비로 감싸시는 하느님
아무리 악의 신이지만 악한 가운데서도 선함을 잊지 않는 선한 하느님이 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큰 위안이 될 것이다.
하느님 본래의 의중은 이렇게 인간을 사랑과 자비로 이끌며 언제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을 때 높은 곳으로 올려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큰 인물은 큰 고통과 큰 시련을 겪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고통과 시련은 누구에게나 주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내리신 징계는 그 이유를 불문하고 달게 받아들여야함을 알 수 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결국 하느님은 항상 우리 편에 서서 우리들을 돌보아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달리면 달리는 가운데, 서있으면 서있는 가운데, 잠들면 잠드는 가운데, 우리가 숨 쉬고 활동하는 가운데 무소부재의 힘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을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미소인가?
그리고 평안을 주며 그 모든 어려움을 들고 찾아오라는 위로의 말은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아래의 내용들은 구약성서 욥기 5장과 6장 그리고 8장과 9장의 내용이다.
하느님의 가슴 따뜻한 내용들을 살펴보자.
구약성서 <욥기 5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구약성서 <욥기 6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구약성서 <욥기 8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구약성서 <욥기 9장>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11. 두 얼굴의 하느님
구약성서를 “악의 성서”로 신약성서를 “선의 성서”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로 일관된 구약성서의 하느님으로는 이 험난한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예수는 이미 눈치를 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흥종교의 교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구약성서와는 다른 견해를 견지해야만 하는 막중한 책임감도 있었을 것이다.
유대교들의 판도를 뒤집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본다.
요즘 신흥종교 교주들의 입지를 보면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흥종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일은 참으로 험난함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언가 혁명적인 발상이 아니고서는 유대교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예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율법을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으로 말하면서 그 율법에 대해 자신은 기지를 발휘하여 보다 급진적인 해석을 덧붙였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예수 자신의 해석이 그만큼 권위가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드러내면서 결과적으로는 율법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율법의 권위를 인정해주면서도 혁명적이며 기지가 넘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밝혀 하느님의 존재를 친근하게 접근시키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정경을 확립하고자 최초로 시도한 마르시온의 독특한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마르시온은 유대인들의 율법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율법과 복음은 완전히 상반되며 절대적으로 구분된다는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율법과 복음이 구별된다면,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르시온은 예수(와 바울)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 하나님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하나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며, 그들에게 자신의 엄격한 율법을 준 유대인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창조자 하나님이 행하는 진노의 복수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의 하나님이 또 하나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성서를 읽다보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봉착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굳이 20회나 1000독 이상 다독하며 성서를 읽지 않더라도 성서를 주의 깊게 읽는 순간 이러한 문제로부터 고민하며 인간의 손길이 곳곳에 스며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에서 살펴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문제는 선지자의 말씀과 저자의 관점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똑같은 하느님을 놓고 이렇게 서로 다른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시대적인 상황을 감안한다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개입이 무서우리만치 치밀하고 정교함을 밝혀주는 일이기도 하다.
우주 신을 대표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본래부터 사랑과 자비가 풍부한 인자함과 화평함을 내세우는 포용적인 하느님이었다.
그러한 하느님을 분노하는 하느님으로 만들어놓은 추종자인 선지자나 저자 그리고 필사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사람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으로 만들어놓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본래의 하느님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노력을 기우리지 않는다면 진정한 믿음생활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효과가 좋은 종교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앞뒤가 맞는 논리적인 교리를 펼쳐야 만인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역시 처음부터 인자함과 화평함을 내세우는 포용적인 하느님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친근한 시선으로 다가올 것이다.
왜 무섭고 두려운 존재의 하느님으로 만들어놓았을까?
과거에는 자신이 필사해놓은 사본에 다른 필사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본문의 내용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거나 첨가하는 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음을 앞에서 언급했던 <3절 진노하는 하느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안전장치를 해둘만한 곳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점잖고 인자하며 화평한 하느님을 분노하는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과거의 어둡고 칙칙한 하느님의 모습에서 벗어나 시대에 맞는 하느님을 강조하는 것이 종교가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지혜일 것이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자라고 있는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친구처럼 편한 하느님! 을 대한다면 성서에 나타나있는 그 어떤 경고성 메시지도 우리들에게 위협적인 문구는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친구처럼 편한 하느님!”
이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12. ‘두 얼굴의 하느님’ 에 대한 역사적 배경
그동안 두 얼굴의 하느님에 대해 고민 아닌 고민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구약성서가 ‘악의 성서’라면 신약성서는 ‘선의 성서’로 선회하고 있는 것을 놓고 어떻게 한권의 성서 속에 두 얼굴의 하느님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에 적지 않게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과거의 기록방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고 나면서부터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의문은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통해 확연하게 풀렸다.
다음은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초기 기독교 가현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했고,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했고, 그들에게 엄격한 율법을 주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에게 벌을 내리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다른 하나님,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이 하나님을 지고신(至高神)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의 진노의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지고신이 세상에 예수를 보낸 것이다. 예수는 물질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세계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예수가 사실 태어날 수도 없었고, 육체를 가질 수도 없었고, 실제로 피를 흘릴 수도 없었고, 정말 죽을 수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환영(幻影)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죽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완전한 희생 제사가 되었고,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이 죽음을 죄의 대가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것을 믿으면, 이 진노의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본문 전승의 교리적 배경>에서 하느님이 둘도 아니고 서른 심지어는 365분의 하느님까지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통해 살펴보면 ‘두 얼굴의 하느님’에 대한 베일이 자연스럽게 벗겨질 것이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그 당시에는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했다. 즉 주후 2세기와 3세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반면에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둘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는 구약의 진노의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신약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두 하나님은 한 하나님의 두 얼굴이 아니었다. 정말로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서의 두 하나님이었다. 놀랍게도, 이미 앞서 언급한 마르시온의 추종자들을 포함해, 이것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이 가르침이야말로 예수와 사도들의 참된 가르침이라고 고집했다. 또 다른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이 단지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열둘이라고 역설했다. 하나님이 서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365분의 하나님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견해를 제기하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모두 자신들의 견해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가르쳐준 참된 견해라고 단언했다.
물론 신약성서를 읽었다면, 이런 엉뚱한 주장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신약성서를 읽지 않았을까? 신약성서를 읽었다면, 자신들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신약성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신약성서로 알려진 27권의 문서들은 그 당시에 이미 전부 기록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들 외에도 수많은 다른 문서들이 있었다. 이 다른 문서들 역시 신약성서의 문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이 쓴 저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4복음서 외에 다른 복음서들이 있었고, 사도행전 이외의 행전들이 있었으며, 다른 서신들과 다른 계시록들도 있었다.
신약성서는 하나님(또는 복수의 하나님들)에 대한 이러한 갈등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2세기와 3세기에만 해도, 이렇게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합의된 정경도, 합의된 교리도 없었다. 정경과 신학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을 뿐이다. 다양한 교리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다양한 교리적 견해들은 당시의 다양한 문서들에 기초하고 있었고,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문서가 예수의 제자들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13. 피의 제사
하느님을 시작으로 신들은 산 제물의 정결한 피를 좋아하는 것 같다.
피의 제사가 없는 제단은 하느님으로부터 열납(悅納. 히브리어로 라쫀. 마음에 들어 받아들이다, 관심을 두다, 기쁘게 보다, 존중하다.)받지 못하듯이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피의 제사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예수가 등장함으로써 이러한 폐단은 사라졌지만 피의 제사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고대의 신들이 공통적으로 즐겼던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가끔씩 고고학적 유물들이 발견될 때 신에게 산 제물로 인간이나 동물들의 피를 바쳤음을 증명해주는 어린아이나 동물의 뼈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이 매우 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고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피의 제사를 선호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지금도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피의 제사가 선행되어져야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처럼 굳이 그렇게 하기보다는 정성을 다해 믿음으로써 대신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4. 결론 : 성서의 양면성
기독교에 대한 매력은 성서를 많이 읽을수록 그 진가가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학자나 발명가 또는 시인이나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성서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 훌륭한 저서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볼 때 성서의 가치는 날로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베스트셀러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지만 각 분야에서 간접적인 영향까지 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성서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인 진가를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성서가 악의 표본으로써 또는 선의 표본으로써 교과서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선의의 목적을 위해 함부로 저주를 내리거나 전쟁과 살상 그리고 좌절과 고통을 당하도록 서슴없이 행하는 하느님의 행적을 보면 보통사람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마치 악을 정당화시킨 후 악을 조장하고 악을 옹호하는 듯한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면 과연 하느님이 맞는지 아니면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탄이 저지르는 행동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성서의 내용이 하느님을 빙자한 사탄의 지시에 의해 씌여진듯한 이미지가 풍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상황으로부터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치밀하게 준비해놓은 점을 보면 저자나 신학자들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물론 믿기만 하면 기복신앙의 혜택이 주어지는 일반 신도처럼 의심 없이 믿거나 학문적인 분석력을 동원하지 않고 성서의 단점을 덮어둔 채 장점만 부각시켜 결과론적인 접근법으로 믿는다면 성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단순하지 않다보니 깊이 있게 접근하려는 사람이나 성서와 코드가 안 맞는 사람에게 있어선 한번쯤은 속속들이 비교분석해보거나 은닉된 부분을 해부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시선을 의식하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차피 주어진 환경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적인 일로 보고자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악의 성서” 또는 “선의 성서”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어 이 둘의 조화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구약성서가 “악의 성서”에 해당한다면 신약성서는 “선의 성서”로 선회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내용이다.
하느님도 항상 나쁜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저주의 신 또는 분노의 신을 대변한 악한 모습에서 자애롭고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선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한 것은 부드러운 것만 못하다는 진리를 하느님도 뒤늦게 깨우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허구적인 이상세계> - 청아당 엄상호 詩
꿈을 그리는 일은 현실이 힘들고 고달 퍼서일 것이다.
가난하고 천대받다보면
부자를 꿈꾸는 일처럼
막상 부자가 되면 꿈이 없어지는가?
꿈은 꿈을 낳을 뿐이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자하지만
어떤 모습이 윤회를 끊는 일인가?
성자들처럼 절제와 검소함으로 평생을 수행하는 모습인가?
아니면 고등교육을 받고 부자로 살거나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시는 고해의 바다인 현생에 태어나지 않는 일인가?
못 배우고 무지한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은 것처럼
가난이 대물림되는 한
숱한 생들을 공전해야하는 사람들.
어쩌다 수련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인간적인 삶으로 부와 명예를 얻은 들
윤회는 계속해서 일어나야하는지도 모른다.
성자들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삶이
진정으로 윤회를 끊는 방법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의 숱한 생들을 뒤돌아보자.
현재보다는 과거에 사는 일이 더 불편하다.
모든 면에서
생활에 불편을 느꼈기에
필요에 의해 생겨난 각종 종교와 문명의 이기들.
“품격 높은 생활과 격조 높은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두뇌들로 이루어진 부산물들.
가장 신성시되어져온 자연이라는 영역을 침범해나가면서까지
삶의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늘어나는 인구를
인위적으로 막을 방법이 있는가?
그리고 성자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나갈 수 있는가?
처음부터 어리석은 꿈으로 이루어진 성자들의 생활방식은
소수의 몇몇 사람에게는 훌륭한 지침이 될지는 몰라도
다수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삶은 경제논리로 이루어져있다.
경제논리를 빼놓고 이상세계를 그린다는 것은
하나의 몽환이요
꿈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공존하는 선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세계를
일방적으로 편 가르기를 한다면
서로가 갈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자명한 일이다.
추종자와 학자들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완벽하게 꾸며진 성자들의 삶은
하나의 허구요
자기만족에 빠져든 이상주의밖에 안 된다.
사람들은 꿈을 좋아하기에 하나의 지침으로 세워둘 수는 있어도
반드시 그와 똑같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실망을 해서는 안 된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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