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雅堂 수필시집 詩선집』/공존하는 선악-깨달음과 마음

2장 왜곡된 성서역사

청아당 2007. 7. 23. 11:52

2장 왜곡된 성서역사

 

종교에 대한 무방비상태로 지내는 신앙인에 의해 종교는 유지 발전되어져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도하기보다는 종교에 대한 효과에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더 관심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된 연유도 다 따지고 보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종교의 난해성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도 아니고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들춰내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미 최고의 지성인들에 의해 완벽하게 우상화된 성자들의 삶은 하나의 전설이나 신화처럼 판에 박혀 사건의 일부로 해석되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적어도 생소한 언어를 3개국 이상 익혀야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전문가도 쉽사리 해독할 수 없는 각종 난해한 필사본을 연구하기란 생업을 포기하지 않는 한 쉽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난해한 종교의 역사를 추적하여 분석하기보다는 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는 진리와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는 목사나 종교지도자의 열정에 또는 친근한 정에 얽매어 정신적으로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종교적인 신성함보다는 끈끈하게 맺어주는 인간적인 정 때문에 약해질 때가 많다보니 난해한 교리를 해석하기보다는 조직사회가 주는 안정적이며 유대관계가 확실한 사람들끼리 모여 종교적인 효과를 나누어 갖는 것이 더 효과적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일은 종교에서 내걸고 있는 각종 까다로운 조건처럼 복잡하지가 않다.

스스로 판단하고 이분법적인 잣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그때그때의 상황에 적응해나가는 것이 전부이다.

쉽게 말해 복잡하고 힘든 현실을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다보니 종교라는 매력덩어리를 발견하게 된 것 뿐이다.

만약에 종교가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신을 위한 종교였다면 애초부터 종교에 의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종교지도자들이 내걸고 있는 거창하고 위협적인 겁주기로 단합된 종교에 대해서는 솔직히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년에서 40년 이상 다닌 사람들을 세워놓고 물어보아도 종교의 깊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거나 간절함이 묻어나는 믿음생활이 전부이다. 그리고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기복신앙을 일으키게 하는 기도와 믿음이 먼저인 것이다.

가끔씩 헤드라인 전면을 꽉 채운 종교지도자들의 부도덕한 문제에 대해 폭로를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부동의 자세를 보면 참으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과거부터 양심 있는 신학자들에 의해 원본문을 추적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시도해오고 있지만 원본문을 발견하기도 전에 종교의 발전은 계속해서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어쩌면 들춰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보다는 시대에 맞게 포장되어진 필사자들의 노고에 종교지도자들은 더욱더 깊은 감사를 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가 발전하게 된 것도 원본문보다 더 알차고 멋있는 신화적인 요소가 첨가되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필사자들의 노고가 종교에 대한 환상과 효과를 유발시켜왔음을 알 수 있다.

왜곡된 성경역사를 끝까지 추적하여 더듬는 일보다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온 필사자들의 노고에 더 값어치를 매기는 것은 그만큼 종교적인 요소가 더욱 풍부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환상적이면서도 신화적인 요소가 빠진다면 종교로서의 생명력은 그만큼 감소될지도 모른다.

후진국일수록 법체계가 정비되지 못하여 난개발을 비롯하여 각종 범죄유혹으로부터 노출되어져있듯이 문화수준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질수록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는 속도가 그만큼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치 억압적인 족쇄에 묶인 채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듯 법체계가 정비되어져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은 항상 선 범죄, 후 입법이라는 공식으로 되어져 있어 신종범죄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야 법이 제정되어지고 있음을 볼 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바로 법률제정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법제화되어질 때는 이미 우후죽순처럼 발생된 사건의 뒷북을 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부동산 투기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를 채운 듯한 각종 제제를 가하는 부동산법률을 강화시켜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법보다 더 빠른 피해가기 식 아이디어로 손쉽게 빠져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일반투자자보다 정보가 빠른 투기꾼들은 법망사이로 쉽게 탈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미 한바탕 손 털고 떠난 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기꾼들은 법보다 한 발 앞서나가거나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내는데 그 누구보다도 특출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요즘에는 세계 경제위기로 인한 재정악화와 가계부채의 증가로 인해 국가에서 각종 세제를 완화시켜주거나 취득세와 등록세 및 양도소득세를 일정기간 면제해주어도 분양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반값 아파트를 실현하고 있지만 여전히 투자를 하려는 매수자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건설업체에서 각종 현수막을 동원하여 파격적인 할인분양을 내걸어도 매수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하다.

사실 법률은 모든 상황을 전제로 구성되어질 수 없는 단점도 있지만 원칙과 예외라는 기준으로 형성되다보니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할 사람도 집행유예나 무죄로 풀려나옴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언론과 네티즌의 힘이 가세한다면 그러한 위력도 물거품이 되어지는 것이 요즘 세상이지만 법률 또한 공존하는 선악처럼 이중성내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법은 사람을 겁주거나 위협을 가할 수는 있어도 모든 수족을 묶어두기에는 알맞은 도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현실에서는 법보다 주먹이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종교도 마찬가지의 원리에 의해 교리보다는 절실한 기도와 믿음을 통해 먼저 발전되어져가는 속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숱하게 양심 있는 신학자들의 노고로 오류투성이의 성서를 지적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쉽게 반영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오류투성이의 교리인 성서를 바탕으로 발전되어져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문제가 많은 종교일수록 더욱 발전되어져가는 것을 보면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종교의 힘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딱히 신의 존재를 그려낼 수도 없는 종교의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종교적인 효과에 만족하며 릴레이 선수가 바톤을 넘겨주듯이 계속해서 후대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믿는 신으로부터 시험이나 혹독한 시련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놓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렇게 취약한 사람들의 허점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 종교인 것이다.

종교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면 그때는 종교의 의미는 상실되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매력 없는 종교는 더 이상 갈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취약한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할 전부이다.

종교는 인내심과 희생정신으로 뭉쳐진 조직이다.

하나님이 수많은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하는 것처럼 종교도 인내심을 갖고 희생을 필요로 하는 취약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종교가 인간을 위해 해주는 것보다 인간이 종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릴 사람이 없어질 때 종교도 문을 닫아야할지 모른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종교는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어져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한시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가 탄생된 것이다.

모순과 오류투성이의 교리위에 세워진 종교이지만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게 된 밑바탕이자 신도들의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1. 잘못된 원본문을 선택해서 번역했다면

원본문이 보존되지 않은 상태에서 1500년 동안 필사되어온 필사본을 갖고 원본문에 해당되는 글을 찾기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무리수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한 번도 아니고 수십 수백 번의 필사과정을 거치다보면 원본문의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추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원본문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상 필사본은 어디까지나 필사본인 것이다.

원본문을 변개시킨 이유를 추적하기보다는 차라리 시대에 맞게 변개되어온 필사자들의 노고에 더 깊은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부터도 필사를 하는 과정에 있었다면 어색한 문장을 발견하거나 띄어쓰기가 되어있지 않은 문장을 옮겨 적는다면 옮겨 적을 때 실수를 하거나 문장을 좀 더 보기 좋게 다듬으려는 마음이 먼저 들 것이다.

더구나 지적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필사를 시도했다면 실수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역사가 끊임없이 변개되어온 사실보다는 그러한 교리를 바탕으로 지금껏 명맥을 유지해왔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원본문보다 더 효과적인 문장으로 형성되어져있기에 지금에 와서 그러한 내용들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러한 내용들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만한 노력과 시간을 들였는지를 이해한다면 혹시라도 원본문이 발견된다하더라도 원본문을 채택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더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지금상태의 성서내용이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온갖 정열과 혼을 불어넣은 역작이기에 그 누가 함부로 바꾸려하겠는가?

과거의 기록방식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마음 넓은 독자나 신자들이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잡음이 발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통해 성서의 다른 면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사본 전승을 연구하면 할수록, 역사의 기나긴 세월동안 필사자들이 성서를 베끼고 또 베끼면서, 그 본문이 얼마나 심하게 변개되어왔는지 점점 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성서 번역자들이 잘못된 본문을 선택해서 번역했다면, 어찌하겠는가? 실제로 그런 일이 예전에 있었다. 영어 성서 번역본 킹제임스역은 근본적으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서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에라스무스의 신약성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던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사본을 토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그것도 12세기에 만들어진 후대의 열등한 사본으로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 번역되어나오는 현대어 성서가 킹제임스역과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킹제임스역 성서만을 믿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은 그리스어 원본 성서가 아니라 킹제임스역에 영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런 자신들의 태도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제임스 왕이 사도 바울에게 호의적이었다면, 나도 킹제임스역이 좋다’는 옛 속담 그대로다.

킹제임스역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라 17세기 초, 여러 명의 학자들이 번역한 영어 성서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번역본은 결함이 있는 그리스어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 이후의 번역자들은 더 훌륭한 그리스어 본문을 번역한 번역본들을 내놓았다. 이것들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당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그 성서도 이 책에서 논의한 본문 문제의 영향을 받고 있다. 엔아이브이NIV나 표준개역RSV이나 신표준개역NRSV이나 신미국표준역NASV이나 새킹제임스역NKJV이나 예루살렘 바이블JB이나 복음성서GNB, 또는 그 밖의 다른 영어 번역 성서 모두 다 마찬가지다. 모든 성서들은 이곳저곳 변개되어온 그리스어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번역본들에도 원독법이 아닌 것 같은 본문을 여전히 전하고 있는 부분들도 있다. 이미 본문에서 마가복음 1장 41절, 누가복음 22장 43-44절, 히브리서 2장 9절을 예로 들어 논했지만, 어디 이 세 가지뿐이랴! 경우에 따라서는 원본문이 무엇인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승의 연결고리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디에선가’는 분명히 끝이 나게 되어 있다. 그 종착점이 바로 ‘자필원고autograph'인데, 저자가 직접 쓴 글이던가, 아니면 저자가 불러주는 것을 누군가가 받아쓴 글일 것이다. 즉 인쇄 기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거의 1500년 동안 필사되어온 기다란 사본 사슬의 맨 처음 것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현장에서 기록한 듯한 기록들

속기사나 사관이 독자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경전은 구술이나 신앙심이 돈독한 저자들의 손에 의해 씌여졌다고 본다.

인간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처럼 필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대를 비롯하여 녹음기나 영상매체가 없던 시절에 마치 현장에서 기록한 듯한 선명한 기억이나 기록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전해져내려 왔다고 볼 수 없다. 또한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라틴어에서 영어나 독일어로 그리고 각국의 나라말로 번역하다보면 원어를 사실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단점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원어만이 가지는 독특한 느낌을 번역과정에서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연구자나 학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진 그리스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콥틱어로 씌여진 필사본들을 대하기란 참으로 힘든 과정임을 감안한다면 전 세계의 현장에서 신도들에게 마치 원본문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듯한 목사들의 언어능력을 재평가해보아야 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위의 필사본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져있거나 신학적인 지식으로 무장되어져있음을 살펴볼 때 의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경의 언어구약히브리어신약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했으며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합쳐 총 66권으로 되어있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성서나 경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3자의 입장이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는 형태의 문체로 되어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예수나 석가가 직접 기록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제자들이나 신앙심이 돈독한 저자들에 의해 씌여졌음을 알 수 있다.

원본문은 사라지고 필사본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진위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거나 그 정확성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만들어낸 종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스라엘 국가 위주로 성서에 기록되어지고 일부 아시아나 한국 기타의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세계지도가 완성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남북분단이나 지역주의처럼 동서양을 편 가르는 방식으로 아시아 쪽은 석가의 중심무대로 삼도록 방치해놓았다는 점이다.

물론 성서의 입장에서 보면 석가의 행동은 우상숭배이자 사탄이고 마귀이지만 여전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을 크게 존중해주었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세계화되어 있다 보니 천국과 지옥도 동서양이 혼합된 형태로 보여 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동서양의 천국과 지옥도가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져 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주에서 보면 조그마한 지구덩어리 안에서 이렇게 동서양으로 편 가르기 식 사후세계를 남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주적인 관점에서 성서나 경전의 기록을 사실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3. 문학적 표현이 뛰어난 성서

성서나 경전을 쓴 저자나 학자들의 글 솜씨는 가히 작가나 시인에 버금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문학적 작품성이 뛰어난 성서나 경전의 내용들은 시적예술성 없이는 인간의 심리를 뒤흔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성에 있어서는 작가나 시인 그리고 예술가보다 더 오랜 생명력을 견뎌내는 것을 보면 불멸의 작품에 버금간다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적 표현은 분야를 불문하고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문학적 표현이 잘된 작품일수록 인구에 회자되어지듯이 문학적 표현이 뛰어날수록 그 작품성은 불멸의 영광을 입기에 충분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

글은 표현력이 생명이다.

표현력이 부족하다면 글의 생명력은 그만큼 감소되어지기 때문이다.

문법적으로 완벽하게 익힌 사람일지라도 글을 쓰는데 있어서 오히려 소재의 부족으로 서투를 수 있듯이 글은 잘 발달된 영감과 오랜 경험 그리고 발로 뛰며 확인하는 현장학습 없이는 설득력을 키우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다.

한권의 책속에 수백 수천 권의 내용이 함축되어질 정도의 노력을 기우려야하는 것을 보면 글을 쓰는 일이 보통의 노력으로는 안 됨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만인이 읽는 성서야말로 모든 분야를 망라한 집대성임을 감안한다면 필사자들의 오류를 지적하기보다는 필사자들의 경험과 노력 그리고 관점과 견해에 따라 씌여진 작품은 어느 면에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본다.

아래에 제시된 두 시인의 시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면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그 뜻이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김광림 시인의 《현대시의 이해와 작법》에서 인습의 파괴와 놀라움의 표현에 대한 해설을 들어보자.

“시나 예술은 일종의 파괴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실을 재미나게 꾸미기 위한 파괴입니다. 다시 말하면, 따분한 인생을 따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전통을 파괴합니다. 속된 현실을 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습을 파괴합니다.

시는 전통이나 인습에서 잠자는 감각을 일깨우는 꾸준한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시라고 해서 오늘날에도 그런 놀라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속되고 따분해질 뿐입니다. 하나도 놀라운 사실이 못됩니다.

현대시는 돌연한 이미지와 이미지를 부딪쳐서 새로운 이미지를 색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은 마귀의 사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을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적이 있습니다만 참으로 좋은 시에는 요기가 서린 듯한 마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한 번 사로잡으면 놓아 주지 않는 그러한 마력, 이것이 시의 생명인지도 모릅니다. 속된 것을 속되지 않게, 따분한 것을 따분하지 않게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이 마력인 것입니다.

종교는 무조건 내세의 행복을 가정해야 하지만, 시는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시는 언제나 현실에 발디딤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우리를 위로하지만 시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다음은 이형기 시인의 《현대시 창작교실》<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에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표현에 대해 들어보자.

“시각적 이미지 중에는 현실의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킨 것도 있다. 그리고 같은 감각이라도 모양이나 색깔을 가질 리 없는 감각적 지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꾸어 놓은 것도 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요술사와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모양이나 색깔을 갖지 않은 대상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한 어떤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 말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게 해 준다.

보이지 않는 것, 막연한 것, 모호한 것을 볼 수 있게, 그것도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내면 낼수록 그 표현은 잘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4. 안전장치

태어나면서부터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듯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달고 태어나고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위협이 가해져오기 전에 방어 자세부터 취하는 것을 보면 방어능력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잘 발달되어져있다고 본다.

지나가는 개를 건드려도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오인하여 방어 자세부터 취하는 것을 보더라도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자극에 대한 반사작용처럼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완벽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교리나 경전을 지키기 위한 종교 추종자들의 노력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달리하여 정리된 성서(구약성서(구약전서) 39권, 신약성서(신약전서) 27권 합하여 총 6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대한 기록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선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환경과 연령,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저자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성령(아버지인 하나님의 영)을 내렸다. 성령으로 충만한 저자들은 시, 예언, 역사, 연가, 전기 등의 형식으로 성서를 기록했다. 물론 저자의 성격, 교육수준, 환경, 직업, 시대 등에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문체는 상당히 다르다. 최초로 성서가 씌여진 때가 기원전 1500년경이고, 완성된 때가 서기 100년경이므로 집필 기간은 무려 1600년에 달한다. 또한 등장인물은 약 3000명에 이른다.) 경전이 저자나 학자들의 손을 거치다보면 내용상에 첨삭이 가해짐과 동시에 문학적 소질이 뛰어나고 영감이 풍부한 저자나 학자들에 의해 일관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과 시적 아름다운 운율이 내재되어져 물 흐르듯 경쾌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한 신이나 하나님을 믿게 하기위한 안전장치를 동원하다보면 처음과 끝이 인간을 두렵게 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내용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안전장치란 신학적 지식은 높이 치켜세우면서도 툭하면 지식이라는 잣대로 배수의 진을 치며 영성을 갖춘 채 올바른 지식으로 종교를 분석하려는 학자나 올바른 분석력으로 성서의 모순된 점을 지적하려는 선지자를 거짓선지자나 교만이라는 올가미로 씌워 논 채 입과 수족을 묶어놓은 치밀한 안전장치 등을 통칭한다.

문제를 일으키게 하는 성서 자체의 모순점은 뒤로하고 모순점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행동자체를 나무라는 성서의 이중성은 한마디로 지탄받아 마땅하다할 것이다.

홍시 맛이 나면 홍시라고 말하듯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데 따로 이유가 있겠는가? 그것을 가지고 나무라면 그것이야말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거처럼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교권주의나 신권주의처럼 눈과 귀를 막고 수족을 묶어둔 채 복종을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오픈된 세상에서 과거처럼 눈과 귀를 가린 채 수족을 묶어둔다고 해결이 되겠는가? 그리고 성서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을 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말하는 중에도 좋은 점은 좋다고 말하지 않는가? 단점보다 장점이 많으면 장점을 쫓아가듯 단점을 보완해나가면서 장점을 키워나간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지식이나 종교도 중요하지만 살아가면서 느낌 하나면 충분하다고 본다.

종교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어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종교였더라면 문제의 소지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를 발견하는 사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문제의 발단을 수정하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며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종교가 큰 버팀목으로 존재하는 것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듯이 아무리 단점을 들추어내도 지금껏 단점을 덮을만한 큰 장점으로 명맥을 유지해왔다면 앞으로도 기독교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게 하는 모순된 교리를 수정하지 않은 이상 문제의 발단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지도자나 선지자들이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모순된 성서로 고집하며 나아가는 이상 끊임없이 문제를 낳으며 제2, 제3의 비판자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서나 경전으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한권의 성서로써 면모를 갖추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는 희생이 따른 후에야 완성되어진 것을 보더라도 성서의 내용 그대로를 믿는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근간은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내용일지라도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내용보다 글이 지니고 있는 속성에 의해 본래의 뜻보다 과장되어지거나 포장되어지게 마련이다.

아무리 현란한 영적체험을 한다 해도 직접 경험하다보면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점잖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수선을 떨며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이 가장 우월하다거나 우쭐대는 기분으로 사실보다 과장되게 설명은 할 수 있어도 결국 뒤돌아보면 크게 남는 것이 없는 거와 같다.

 

 

5. 축복의 땅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는 이상적인 땅일지라도 막상 살다보면 내적요인과 더불어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하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발견되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모세(기원전 1525년~1406년)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머문 기간 기원전 1876년~1446년) 동안 노예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성서에는 출애굽이라 부른다)한 뒤 40년 동안 시내광야(사막)와 네게브의 광야를 떠돌며 생활하다 여호수아(군인. 기원전 1390년경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는 110세의 생애를 마침)에 의해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는 이상적인 땅을 밟는다면 이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땅은 없겠지만 반드시 가나안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은 아닐 것이다.

가나안보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나라가 많듯이 굳이 가나안이라는 땅만 고집하는 일은 인간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주종의 관계로 영원히 계약을 맺은 듯한 약속은 분명 축복받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노예근성적인 발상이 엿보인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6. 만인의 아버지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위해 먼저 《하룻밤에 읽는 성서》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세상의 행복은 돈과 명예, 지위와 쾌락을 얻는 것이다. 또한 주위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거나 표창을 받는 것, 정부에서 훈장을 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사회운동이나 자선사업 등을 하는 사람도 많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상 설교나 율법 정신은 이런 것들과 정반대의 것을 하나님의 복음(좋은 소식 또는 예수를 믿는 신앙)으로 가르친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면 불행해지는 가르침이라고까지 생각된다. 예수의 가르침은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혁명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혁명 사상을 따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다. 우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당신의 보석’이라고 불렀다. 또한 예수는 ‘누구든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 한쪽을 미워하며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무엇을 먹으면 좋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사람의 생명은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보다 중요하며 육체는 옷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 것보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하늘의 아버지는 하늘의 새와 들의 화초를 기르고 있지 않은가. 당신들은 새보다 훨씬 뛰어나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 그리고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이다.’

예수는 너무 먼 미래를 걱정한 나머지 지금 해야 할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경계했다. 즉 ‘내일을 위해 걱정하는 것은 소용없으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고생은 그날그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흠을 잡거나 사람을 놀리기 위해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사람은 남의 눈 속의 티끌은 금방 알아차리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커다란 들보는 보지 못한다. 우선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한 다음, 타인의 눈의 티끌을 제거하여라.’

또한 예수는 상대를 본 다음 복음을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지도했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성스러운 것을 개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 또한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돼지는 진주를 발로 짓밟고 방향을 바꾸어 너를 공격할 것이다.’

‘돼지에게 진주’라는 것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되므로 의연한 태도를 취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최후의 도전으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에 응용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느 쪽이나 비바람은 불어올 것이나 단단한 기초가 없는 집은 쓰러질 것이다.’

예수의 설교를 끝까지 들은 군중은 너무나 놀랐다.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혁명적인 설교를 과거에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예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일들은 종교를 떠나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질적인 문제로써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한 예수가 종교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인간의 죄를 대신 받은 일보다는 추상적이며 손에 닿지 않는 “하나님”을 “만인의 아버지”로 표현한 점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님을 예수는 “아버지”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완성시켜놓은 것이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폐부를 찌르는 말인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예수는 해놓은 것이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을 우주에 홀로 떨어져있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닮은꼴인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통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놓았다는 점에서 예수의 공헌이 컸다고 본다.

언제든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로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리고 함께 숨 쉬며 어려움에 당했을 때 언제든 달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따뜻함이 묻어나는 모습으로 비춰 보이기도 한다.

 

 

7. 신화의 진실성

종교에서 신화를 빼놓는다면 종교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야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신화적인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요 이상이기에 가상의 신화라도 만들어놓는 것이 종교로서 가져야하는 의무이자 명맥을 유지해나가는 종교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화는 그만큼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진제이자 깊은 고통과 좌절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도록 꿈과 이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 신화를 빼놓는다면 마치 단팥 없는 찐빵처럼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신화의 내용이 대부분 확인할 수 없거나 인간의 역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신화적인 일로 향연을 베풀고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적인 인간의 꿈과 이상을 현실로 옮겨놓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지 과거의 기준에 맞춰 현실에서도 그와 같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면 혼란과 모순된 내용 때문에 그 결과를 확인하지 못한 채 예상보다 가치가 더 크게 감소된 소모성 감가상각처럼 심리적으로 고통 받는 일만 더 늘어날 것이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예수의 실존성에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는 신화다≫에 나오는 소개 글에 있는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실제 로마인들이 믿었던 것은 디오니소스 미스테리아(Mysteria). 디오니소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불렸던 신의 이름이다. 그는 12월 25일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결혼식 때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 냈으며, 영성체 의식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눈 이다.

4복음서가 증거하는 예수의 행적과 정확히 일치한다. 곧, 기독교는 이교도의 신화를 차용한 종교로 유대인들의 종교와 로마인들의 종교가 다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누가 들어도 황당한 이 주장은 인용문의 출처, 참고 서적, 기타 보충 내용에 대한 풍부한 각주에 의해 지탱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의 실존성을 떠나 성서에 표현된 내용을 분석해보는 것으로 대신함을 양해해 주었으면 한다. 어차피 그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때 서로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이상 변명할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신화를 빼놓는다면 톱니바퀴 없는 거대한 기계와도 같을 것이다.

신화는 부작용도 크지만 인간에게 있어 삶의 꿈이요 이상이기에 신화적인 일은 인간에게 가장 큰 희망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모든 종교가 신화적인 일로 출발하고 있지만 신화가 가져다준 부가가치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선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가 신화적인 일로 향연을 베풀어도 신을 믿음으로써 돌려받는 보상가치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되어지기에 종교를 믿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신을 믿었는데 종교적인 효과가 없었다면 신의 존재는 인간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신들은 영악한 인간들의 소원을 어떻게 아는지는 몰라도 믿음의 크기에 따라 적절한 배분을 효율적으로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 신화론

어렸을 적에 신화를 읽다보면 신화가 주는 의미는 놀라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있을법한 일이다 생각하면서도 전설에나 존재할만한 일로 되돌리곤 하는 습관을 잊지 못한다.

신화를 분석하거나 측정하는 도구인 과학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과거처럼 신화의 진실성을 깨닫지 못하고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의 생각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마도 종교지도자들이 그토록 과학을 불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한없는 혜택을 내려주신 신의 모습이 보고 싶다고 그렇게 애원하는데도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을 들이대면 신들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기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더구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침범 당하기가 죽기보다 싫을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의 상상력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필사자들의 오류와 오기로 인해 앞뒤가 맞지 않는 종교적인 구성 체계부터 시작하여 신화가 주는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와 닿는 이유는 신화의 진실성을 발견하는 일보다 종교가 받을 충격 때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화라는 가상적인 신들이나 초자연적 힘을 소유한 인간의 등장이 없었다면 종교의 의미는 그만큼 퇴색되었는지도 모른다.

초자연적인 힘의 등장이나 초자연적인 인간의 등장으로 발생하는 각종 크고 작은 사건들은 좌절과 고통에서 헤매는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도록 끊임없이 상향적인 욕구로 불타오르게 한 커다란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신비의 무덤이 평범이듯이 신화라는 것도 자주 접하다보면 어느 덧 신화라는 인상보다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아래의 내용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벌써 100년 내지 200년 전에 단순하게 믿었던 바와 같이 신화를 ‘모든’ 역사의 왜곡이라는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신화를 연구하여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와 환경을 신화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신화학자들은 옛 선인들에 비해 희소하지만 시사에 넘치는 이 설에 더 한층 주의 깊게 눈을 돌리고 지나치게 완전한 형태를 갖춘 신화를 경계한다. 엄밀한 구성은 바로 후대인의 손질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엄밀한 구성 체계를 갖춘 신화일수록 후대인의 손질이 첨가되었음을 암시함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살펴보면

“이와 같이 이들 신화는 고전시대가 한창 융성할 때도, 또한 그 후까지도 계속 생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종교적 신앙의 지주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우리도 알고 있듯이 체계적인 종교도 그 신비스런 궤적 속에 이것들을 따 넣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체계적으로 형성된 종교조차도 신화의 영향아래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동안 숱한 종교전쟁을 치르면서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종교단체들의 향연 속에서 고민하고 의심하면서 많은 의문점을 제시해왔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왜 수많은 종교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수백 수천의 종교단체들로 즐비한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내왔다.

그리고 지금의 종교도 포화상태에 있는데 계속해서 신흥종교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기존의 종교들이 충족시켜줄 수 없는 내용들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생각은 단순함보다는 다양성을 좋아하다보니 인간의 생각만큼이나 종교의 수도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내에서도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계파를 달리하여 생겨나고 있음을 볼 때 신흥종교의 수적 증가를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수많은 신흥종교의 수적 증가는 시대에 따라 요구하고 있는 인간의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성서나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위협적인 겁주기는 신흥종교를 창시한 교주들에게는 한낱 말장난에 불과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지각 있는 영적 소유자라면 원본의 사본의 사본도 아니고 원본의 사본의 사본의 사본도 아닌 그것도 각기 다른 내용으로 구성된 성서나 경전의 신화적인 내용에 있어 모순점이 많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다보면 어색한 번역이나 사본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지거나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시리아어, 콥트어를 배워야만 그나마 사본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소수층의 엘리트만을 겨냥한 성서이기에 그 문제점이 심각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 신앙인은 사본과 전혀 다른 내용을 읽히거나 어색한 번역에 만족해야만 하는 불완전한 이해 속에서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서양을 비롯하여 각국의 사후세계가 언어와 인종 그리고 지역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르게 형성되어져온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신흥종교의 교주들은 또 다른 사후세계를 만들어내며 계속해서 새로운 신들의 탄생을 조작해내기도 한다.

왜 종교가 통일되지 못하는가하는 문제보다는 왜 사후세계를 통일하지 못하는가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기존의 종교의 위치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의 교권주의나 신권주의가 누렸던 화려한 신성불가침의 영역까지 확대해서 살펴보면 그 의문은 더욱 증폭되어질 수밖에 없다.

왜 그토록 의심하지 말고 자신의 신만 믿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저마다 자신들의 신들을 내세우며 유흥업소의 호객꾼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듯 서로가 자신들의 종교가 더 좋다고 끌어당겨온 속내를 알고 난다면 실망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세속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신성한 종교단체라도 어차피 단체를 조직하여 운영하려면 하나의 기업과 똑같은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이는 신성한 종교단체라도 경제논리 위에 존재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귀한 신분으로 세속을 싫어하면서도 세속인의 경제는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신성한 종교를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역시 경제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분명 종교도 새로운 직업군에 속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제 와서 그것을 이해 못할 종교인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른 척 지내는 것 같으면서도 각종 헌금을 요구하는 종교단체들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기(後記)에서 밝히고 있듯이 지금에 와서 종교의 지위를 흔들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밝힌다.

사람들은 천성이 누구한테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 한시도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하다보니 가상의 신이라도 만들어서 의지하라고 적극 권장해주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신화와 관련된 종교를 들먹인다고 종교지도자들이 오랜 세월 깔아놓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자신 있게 버티며 그동안 누려왔던 화려한 생활을 계속해서 누려나갈 것이다.

호흡의 비결은 충돌과 회전에 있고 종교의 비결은 절실한 기도와 믿음의 크기에 따른 효과에 있음을 볼 때 그 효과가 계속해서 지속되어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명맥을 유지해 나갈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르본 대학 교수인 피에르 그리말의 <신화론>에 표기되어있는 그리스 신화를 살펴봄으로써 종교와 신화의 밀접한 관련성을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原典)과 유물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 신화란 기원전 8~9세기, 즉 호메로스(호머)의 시편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교(異敎)’ 세계의 종말인 그리스도 탄생 후, 즉 기원후 3~4세기에 걸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여러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갖가지 불가사의한 설화와 전설을 총괄하여 붙인 명칭이다.

이것은 지극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명확하게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복잡한 기원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정신사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민족은 발전의 어느 시기에는 불가사의한 전설이나 설화를 갖게 되고, 한동안은 적어도 어느 정도 그것을 사실로 믿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전설에는 초자연적인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종교의 영역에 속하게 되어 있다. 이런 경우 그것은 다소를 막론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일관된 체계가 되고,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사적(事蹟)은 하나하나가 창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그 결과 세계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형에 속하는 것으로 인도 문학의 장엄한 종교적 서사시가 있다.

사상의 보고(寶庫)인 신화는 곧 이성과 신앙의 중간에서 고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그리스인의 모든 고찰은, 그리고 또한 그들의 먼 후계자들의 일체의 고찰은 신화에서 시작되고 있다. 비극시인은 소재를, 서정시인은 이미지를 신화에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덕분에 ‘신성불가침한 것’에 대한 공포감은 없어지고 정신의 모든 영역에 걸친 고찰의 길이 열리고, 시는 예지가 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전설을 이용하거나 혹은 수집한 고대의 작가 및 학자의 노작은 그것들이 보여주는 놀랄 만한 다양성이나 아니면 무통일성을 은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핀다로스, 아이스킬로스 등은 과연 명확한 체계를 형성하는 신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며, 거기서는 신들과 영웅들이 뚜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일정한 삽화를 포함하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인상은 가장된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인상은 주로 위에 열거한 시인들(《신통기》의 작자 헤시오도스는 제외하고)이 거의 예외 없이 암시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들의 계보나 설화를 교과서식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은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다소나마 주의 깊게 분석해본다면, 동일한 저서에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많은 저서들을 비교해보면 곧 상이점이나 모순점을 발견하게 된다. 동일성은 단순히 인위적․부차적인 것에 의해 도입되는 데 불과하다. 철학이나 신학 또는 과학의 체계처럼 신화는 하나의 계통이 세워진 전체로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식물처럼 마음대로 싹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과(科)와 종(種) 또는 변종(變種) 같은 것을 감별하는 것이 신화학자가 할 일이다.

이와 같은 신화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민족적 조건과 더불어 발달하는 것이어서 때로 신화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면 잊혀 졌을지도 모를 상황의 뜻하지 않은 증거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귀중한 연구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벌써 100년 내지 200년 전에 단순하게 믿었던 바와 같이 신화를 ‘모든’ 역사의 왜곡이라는 따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신화를 연구하여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와 환경을 신화로 하여금 설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신화학자들은 옛 선인들에 비해 희소하지만 시사에 넘치는 이 설에 더 한층 주의 깊게 눈을 돌리고 지나치게 완전한 형태를 갖춘 신화를 경계한다. 엄밀한 구성은 바로 후대인의 손질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연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어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책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발전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 신화인 것이다. 지극히 복잡한 기원을 가진 것, 인위적으로 종합되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여러 단편, 학자나 작가나 시인의 오랜 세월에 걸친 노작을 멋대로 덧붙이고 깎아놓은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원시적인 민간 사상이나 민간 신앙에서 생겨난 것 등이 뚜렷이 구분된다. 거기서는 학문적인 것과 자연발생적인 것, 살아 있는 것과 인공적인 것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 분석을 꾀한 것은 근대 과학의 커다란 명예며,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인간 정신의 본질적인 하나의 사고방식에 진정한 의의와 능력을 부여해주고 있다.

여기서 ‘고전적’인 신화, 즉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 고정된 정통적인 형태의 그리스 신화를 생각해보면,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갖가지 신화가 규모나 형태로 볼 때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떤 것은 세계의 형성이나 ‘신들의 탄생’에 관한 얘기인데, 가장 은밀한 의미에서 신화라는 말은 이런 얘기들에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때에 따라서는 그것들을 ‘신들의 탄생에 관한 신화’ 또는 ‘우주 생성 신화’라고 한다. 그 얘기들은 헤시오도스가 수집하긴 했지만, 이것들은 물론 헤시오도스 훨씬 이전의 것들이며, 어떤 것은 순수한 그리스적인 것이고, 어떤 것은 동양의 종교 또는 선사(先史) 그리스적인 종교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원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많은 경우, 그것은 극히 발달한 관념의 소산으로 신관계급에서 형성되어 점차로 철학적인 요소가 주어져서 마침내 분명한 상징적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들 신화는 고전시대가 한창 융성할 때도, 또한 그 후까지도 계속 생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종교적 신앙의 지주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우리도 알고 있듯이 체계적인 종교도 그 신비스런 궤적 속에 이것들을 따 넣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화는 몇 개의 범주로 분류할 수가 있고 그것에 의해서 분석도 용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에 속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주 한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 생성 신화가 전설권 또는 민담편으로 격하되는 수가 있으며, 연기설(緣起說)도 아주 용이하게 위의 어느 것으로 끼여드는 수가 있다. 대상이 살아 있는 물건일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해부학적인 분석에 사로잡혀서 신화의 궁극적인 모습이 갈기갈기 찢겨진 몸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유기체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9. 결론 : 교리의 핵심

그리스도가 세계 복음화에 성공한 직접적인 원인은 바울(그리스도교의 사도(使徒). 소아시아의 타르수스 출생. 유대인이며 헤브라이어 이름은 사울이다. 유대교 전통이 강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열렬한 바리새파였으므로 율법을 경시하는 그리스도교도를 용서할 수가 없어 박해를 하던 도중에 돌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신의 공적에 의한 것은 아니고 예수를 믿고 의지하여 모든 것을 맡기는 데에 있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의 전도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시리아의 안디옥(안티오키아)의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율법에서 벗어난 자유>라는 주장이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독립하여 주로 에게해 연안 각지를 순회전도하고, 이방인을 주체로 하는 교회를 세웠다. 《신약성서》에는 바울의 서신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부는 그의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후반은 주로 그의 활동을 전하기는 하나 사실을 엄밀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철저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복음은 한때 정당하게 이해받지 못했으나, 아우구스티누스·M. 루터, 근년에는 K. 발트 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의 힘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하는 할례와 잘 지켜지지 않았던 모세율법을 지양하고 오직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핵심적인 교리로 접근하여 이방인들에게 가장 큰 매력을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받을만하다고 본다.

간단하고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강한 절묘한 교리는 복잡함속에서 탄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간단명료한 단어 속에서 탄생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모든 교리는 현학적인 학문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의 손이 가감된 복잡한 교리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대중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간단명료한 단어로부터 시작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생각을 《성경 왜곡의 역사》에서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했다고 믿었다. 바울의 생각에 이들이 예수를 거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간직하고 있고, 또 그것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로마서 10:3-4). 하지만 바울의 생각은 달랐다. 구원이라는 것은 비단 이방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주어졌다. 그렇지만 그 구원은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로마서 3:21-22). 따라서 바울의 생각에 율법 준수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를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들 이방인들은 그저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결코 유대교로 개종할 필요가 없다(갈라디아서 2:15-16).”

 

 

<신화> - 청아당 엄상호 詩

 

꿈을 꾸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고단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기에

존재했을 법한 일들을 기억해내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과학이 끝에 도달할 때마다 신화는

자극을 주는 촉매제역할로

살아가야할 명분을 분명히 제시해주기에

과거의 꿈들은 더욱 화려한 꿈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기적

석가의 가르침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들이 한결같이

현실을 등에 업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이기에

어떤 자리에 서있더라도 그 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가 없다.

결국은 한길로 통하는 길이더라도

방법은 제각기 다르기에

신화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제 와서 신화를 비판하거나 없던 일로 되돌리려고 해도

이미 굳어버린 전설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처음 기억이 선명하게 남기에

마음이 옳지 않아도

옳다고 생각하면 옳은 것이고

마음이 옳아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은 것처럼

없던 일도 신화화하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다.

과거에 아무리 현란한 신화로 사람들을 현혹했어도

현재에 똑같은 신화로 나타날 수 없다면

과거의 신화로 남겨두는 것이 좋다.

지금에야 과학이 발달하여

막연하게 생각했던 축지법이나 분신술 그리고 순간이동 등이

이제는 현실로 다가와 서있지 않은가?

마음만 먹는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동화 같은 집들

궁전 같은 저택들

마천루 같은 초고층 빌딩 등

하늘을 날고

바다를 가르고

땅을 달리는 가운데

우주를 향해 과학이 열려있는 마당에서

과거의 신화를 운운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신화도 현실로 다가오면 담담할 뿐

신비는 단 한 번의 처음 느낌

두 번째는 평범으로 돌아가듯이

신비를 신비라 말하지 않는 평범이 더욱 신화적이라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