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해부당하는 기독교
1장 기독교인이 반성해야할 부분
문을 열고 나가면 산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는 것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구원을 해주겠다는 신앙보다는 허물없이 친구처럼 대할 수 있는 자연이 좋을 때가 많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조건자체를 내걸지 않는 자연과 같은 믿음생활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신앙일 것이다.
조건이나 구속을 요구하지 않는 자연은 만인의 아버지이자 친근한 어머니 같은 품으로 존재하듯이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는 자연이야말로 이 우주를 대표하는 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허물이 없어 좋다.
구속하거나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 앞에 서면 모든 것을 놓게 하는 힘은 자연만이 지닌 신비감과 경외감일 것이다.
본래의 하나님처럼 자연과 같은 하나님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일일 것이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야말로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 일인가?
성서에 그려진 그림처럼 까탈스럽고 조건 많은 하나님이라면 거부감부터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믿음생활은 교과서적인 성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누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앙탈을 부리거나 숱한 선지자들을 보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각인시킨단 말인가? 더구나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하나님이 그러한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필요에 의해 생겨난 종교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주신(主神) 제우스처럼 우연찮게 우주를 대표하는 신을 찾아내어 전체를 다스리려는 신을 놓고 어찌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강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도 자신을 내세우기가 부끄러운 세상에 어찌 자신을 믿어달라고 조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는 종교를 떠나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라는 위협적인 겁주기로 일침을 가하며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 믿게 하는 데에는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나 밝혀서는 안 될 취약한 약점이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마치 공산정권에서 일삼는 숙청이나 독재정권에서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권좌를 위협하는 정책에 반대되는 자들을 남모르게 제거하는 일과 같은 일이다.
아무리 무소부재의 권력을 지닌 하나님이라도 게눈 감추듯 멸망과 환난 그리고 분노와 저주를 퍼부어서야 되겠는가?
아마도 성서에 그려져 있는 인정머리 없는 하나님이라면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성서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도 같은 친근한 하나님을 따르며 기독교를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이념이 다른 종교이지만 서로가 정성을 다해 모시는 타종교라고 하더라도 서로가 존중해주는 습관을 가져야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최고라고 우긴다면 타종교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단순함보다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생각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종교라면 그러한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을 위해 종교가 존재해야하듯이 필요에 의해 생겨난 종교라면 신을 위하기보다는 인간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봉사정신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믿으며 생활하는 자연인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가장 신실한 신자가 될 수 있듯이 유흥업소의 호객꾼처럼 서로 고객을 모시겠다는 경쟁자가 아닌 이상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이 인간으로써 지녀야할 기본덕목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자신들만의 철학이 있고 우주사상이 깃들어있듯이 필요에 의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신흥종교를 보더라도 기존의 종교에 반감을 갖거나 만족할만한 종교적 체험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해 선택의 폭을 넓혀놓는 것이 좋다고 본다.
어차피 기존의 기독교도 전통적인 기독교의 반열에서 많이 물러서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교파가 다른 기독교도 이단이나 사이비 등 각종 루머에 휘말릴 수 있음을 볼 때 정통성을 따지는 종교일수록 이단일 확률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유난히 기독교에서 이단이 많이 나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만큼 성서가 지니고 있는 교리에 문제가 많은 것은 아닐까?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은혜나 피해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현명한 판단은 개인적인 의무이자 선택권이기에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불미스러운 일은 자신이 떠맡아야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 지식에 대한 새로운 해
6․25동란을 전후한 50년 전이나 조선말기인 100년 전만해도 또는 전쟁 중이거나 내란 중이었다면 이러한 글을 쓸 수 없음은 명백한 일일 것이다. 또한 각종 매스컴의 혜택과 더불어 발달된 과학적 지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정보의 부재 속에서 이러한 글들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수족을 풀어놓은 사상의 자유가 풍부한 오늘날에 이러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옳고 그름을 떠나서 행운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되어져있는 한반도의 남쪽에서 편안하게 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지식은 시대적인 배경과 환경에 의해 탄생되어지고 있다.
누적된 과거의 지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끊임없이 새롭게 도전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지식이 없었다면 지식은 숨 막혀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식은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공간과 시간 속에서 함께 숨 쉬며 삼위일체로 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하며 끊임없이 탐구해나가고자 하는 상향적인 욕구가 강하다.
과거의 지식이 현재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거나 새로운 시선으로 검증받아야할 일이 생긴다면 과거의 지식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할 수밖에 없다.
시대적인 관점과 견해에 따라 새롭게 해석해야할 일들이 많다보니 어떤 때는 과거의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어 지거나 더 이상 선망의 대상에서 머물 수 없는 경우를 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지식도 많지만 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과거의 지식을 검증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르고 있는 한 과거의 지식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성서에 대한 분석이 그렇고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그렇다.
이렇게 새로운 각도에서 시험해보려는 노력이 뒤따르고 있는 한 미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거대한 힘을 막아낼 수 없듯이 지식의 거대한 힘 또한 막아낼 수가 없다.
세상은 한쪽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세발달린 솥처럼 평형감각을 지니고 있기에 종교든 지식이든 아니면 과학과 철학이든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전에 바로 잡으려는 복원력에 의해 중심을 잡아나가려는 것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평온하게 유지되어져가는 것은 다 남모르게 수고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힘에 의해 작용되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느낌 하나면 충분하다
성서를 연구하다보면 모순과 오류투성이의 내용들에 몹시 당황하거나 수긍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무엇이 그토록 성서를 지금껏 떠받치도록 했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위해 거부감이 거미줄처럼 쳐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갖고 앞으로 전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저자나 필사자들의 관점과 견해에 의해서 교리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등에 업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왜곡되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기까지 꾸준한 연구가 필요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인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성서에 그려져 있는 두 얼굴을 지닌 하나님의 모습 때문에 몹시 불쾌하고 이치적으로 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얻고 매우 실망했지만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왜곡된 성경역사를 살펴봄으로써 개인적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고 본다.
느낌은 예리하고 지식을 넘어선 영역까지 파헤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살아가면서 느낌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에 설득력이 실려 감을 확인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바트 어만의 《성경 왜곡의 역사》도 결론적으로는 성서해석을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어차피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신화적인 요소가 들어가다 보니 현실과 괴리된 현상과 더불어 논리적인 추론의 맥을 끊어놓는 문맥 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부분이 발견되지만 종교는 학문적인 접근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보니 종교의 근본 취지인 믿음의 크기로 밀고 나가야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에서 주춧돌역할을 해온 믿음을 빼놓는다면 종교로서의 면모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여러 장에 걸쳐 기독교가 반성해야할 부분들을 나열해놓았지만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반성하며 나아갈 길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한다고 막가파식으로 거부하거나 신학적 지식이 일천한 신자들조차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본다.
성서를 조금만 연구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미 성서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문제점들이 밝혀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한국교회에서는 보수적인 성향과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종교지도자에 의해 번역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그 심각성은 더욱 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신학교에서는 원본문도 보존되지 않은 채 허공에 대고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내세우며 오로지 성서만으로 선서를 강요하는 것을 보면 그 심각성이 매우 염려됨을 알 수 있다.
무조건적인 믿음보다는 그래도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과거의 기록방식에 문제가 많았음을 정식으로 인정하고 또 기존에 구축되어진 다신교와 유대교의 벽을 넘어 신흥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만한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뒤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이단자인 내부인들과 유대인인 외부인들 그리고 전체로서의 바깥세상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교도들의 탄압이 필사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예기치 않게 성서 본문의 변개를 초래하거나 또는 기독교를 박해하거나 반대하는 세력과 논쟁함으로써 기독교를 향한 각종 고발을 무마시키려는 변증서가 탄생되기도 했다.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각종 안전장치로 둔갑한 초인적인 인물의 등장과 더불어 두 얼굴의 하나님이 탄생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힘으로써는 극복되어질 수 없는 초월적 저항을 지고신인 분노하는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 모든 해결책을 궁구해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여전히 신흥종교는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듯이 기독교가 자리 잡기까지 험난했던 과거를 생각해본다면 저자나 필사자들의 노고가 얼마만큼 힘들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믿음의 크기는 종교를 지탱하게해주는 큰 힘이다.
더구나 혼자의 믿음이 아닌 조직적인 믿음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함을 엿볼 수 있다.
믿음은 그만큼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큰 힘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종교는 그 어떠한 압력이나 무력으로도 복종시킬 수 없는 무소부재의 권력을 지닌 만인의 꿈이자 희망이다.
그 누가 종교의 힘을 꺾을 수 있겠는가?
다만 올바른 믿음만큼은 자신이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지식이 발달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종교이기에 인간적인 접근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만약에 지식이 발달하기 이전인 6000년 전이나 1만년 이전으로 되돌아가면 그 모든 의문은 한순간에 가라앉음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지식으로 온갖 향연을 베풀고 있는 각종 분야의 최고봉들의 부산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중에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과 철학 그리고 학문적 접근방법들은 자연이 그렇게 지내왔던 것처럼 그렇게 말없이 지내왔었을 것이다.
단지 토테미즘만이 하늘을 떠받치며 종교를 대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지음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자연은 언제나 말이 없는데 문제는 사람의 생각과 지식 때문에 조용한 이 세상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고 있는 것이다.
우주적인 충돌이 일어나든 자연재해로 지구가 멸망에 이르든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화려하게 피어내던 꽃들을 때가 되면 아낌없이 없애버리고 내년을 기약하는 것을 보면 자연은 부동심의 경지에 서서 오고감을 탓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에 대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을 잠재우게 하는 침묵은 그래서 좋은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다 포용하면서도 소리 없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자기식구만 껴안는 속 좁은 신앙인
“하나님”이나 “예수(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해서 듣다보면 세뇌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도 자주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환경에 동화되어져 차츰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껴가듯이 반복적인 되새김의 위력은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타종교에 비해 비교적 소란스럽고 요란스러운 기독교의 전도나 설교는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항심과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만 이상하게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숙고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무조건 타종교를 배척하거나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면에는 기독교의 장점을 전면에 내세우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지만 하나님의 거대한 권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기독교만이 가장 우월하다는 이기주의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하는 신앙인이라면 누구보다도 우주 같은 포용력을 갖추는 것이 기본예의이지만 선지자들의 잘못된 교리 때문에 자기식구만 껴안는 마음이 넓지 못한 신앙인으로 격을 낮춰낫다고 볼 수 있다.
4. 고대 그리스인들의 세계 구조
주변에서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면 대체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사고로 지적하면 성서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한 기독교인들도 평소에 익힌 목사의 설교를 따라 하기 방식으로 쏟아 내놓는 것을 보면 과연 모순된 성서를 보고도 아무런 감정적인 동요나 거부감을 느껴보지 못했는가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전부 그렇지는 않겠지만 20~30년 이상 오래 다닌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치 무뇌충이나 따라 하기 방식에 익숙한 앵무새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단의 실상》의 저자이신 홍태수 교수의 《진리를 아는 법》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소화되지 않는 음식은 위장에 탈을 일으키듯이 이해되지 않는 진리는 정신에 탈을 일으킨다. 그래서 머리가 무겁거나 골치가 아픈 것이다. 자기 사고가 없는 단순 사고자들은 남의 말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인다.
잘못된 진리는 곧 병든 진리이다. 잘못된 진리는 애초부터 그 진리 자체가 병든 진리이고, 아무리 좋은 진리일지라도 그것을 잘못 받아들인 진리는 잘못된 진리이므로 병든 진리가 된다. 따라서 진리에 의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 그게 바로 진리병 환자이다.
진리병은 자신만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게 아니라 남까지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산다고는 하지만 전체를 볼 줄 아는 지혜만큼은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부분적으로야 뼈와 살이 되는 좋은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시각에서는 신화에서 발견되는 일처럼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점이 발견되는 것이 성서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교권주의나 신권주의가 그래왔던 것처럼 성서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놓고 그 어떠한 상황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치밀한 보호 장치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신화(원제 : 신화의 시대(The Age Of Fable))》서론에 적혀있는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성서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소멸되었다. 이른바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사람은 현대인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신들은 지금은 신학의 부문에 속하지 않고 문학과 취미의 부문에 속한다. 이 부문에 있어서는 그들은 아직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금의 시와 회화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우선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 구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인은 이 그리스인으로부터, 그 밖의 국민은 로마인으로부터 그들의 과학과 종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지구는 둥글고 평평한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나라는 그 중앙에 있고 그 중심점을 이루는 것이 신들의 주거지인 올림포스 산, 혹은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의 성지라고 믿고 있었다. 이 원반과 같은 세계는 동서로 길다란 바다에 의해서 두 개로 나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 바다를 지중해, 그것으로부터 이어지는 바다를 에욱세이노스(흑해를 말함.)라 불렀다.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는 바다는 이 두 개뿐이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인은 자기 나라의 동방과 남방의 민족, 혹은 지중해 연안 근처에 민족이 존재하는 줄을 거의 몰랐다. 그래서 그리스인의 상상력은 지중해의 서쪽 땅에 거인․괴물․마녀들이 사는 것으로, 그리 넓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원반과 같은 세계의 주변에 신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민족이 행복과 장수를 누리며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성서에서도 신화적인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로마인은 이 그리스인으로부터, 그 밖의 국민은 로마인으로부터 그들의 과학과 종교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상기해보아도 《그리스․로마신화》와 성서의 관계는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5.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
가슴을 열고 우주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종교를 떠나서 모두에게 필요한 것처럼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세상을 살아가는 일보다는 우주 속에서 종교와 세상을 포용하며 가슴 넓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이 좋고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을 종교와 결부시키며 오로지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험난하고 각박한 면도 있지만 종교적인 지식으로만 채우기에는 편식을 싫어하는 잡식성 뇌의 기능이 너무나 크고 넓다.
세상을 살다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종교 말고도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 것이다.
적어도 세상을 바라볼 때는 편견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눈으로 보고자 노력해야함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승상인 여불위가 문하의 학자들에게 의뢰하여 편찬한 저서《여씨춘추》에서도 “성인(聖人)의 성색자미(聲色滋味)에 대한 태도는 생에 이로운 것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고, 생에 해로운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생을 온전히 하는 도(道)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버리면서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을 배우는 지혜가 필요할 때라고 본다.
6.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
성서가 그 글자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과 성서는 모든 역사적, 교리적, 윤리적 진술에서 무오하다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에 대해 살펴보자.
별도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의 모순점이 지적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기독교의 모순에 대해 해부하고 있는 학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올 김용옥 교수의 해박하면서도 날카로운 역사적 배경으로 해부하고 있는《기독교성서의 이해》<케리그마의 본질적 성격>의 글을 살펴보면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의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를 이렇게 한 줄 한 줄 분석해 들어가면 사실(史實)과 부합하는 것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사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분석방법이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려고 이 복음서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쁜 소식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선포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본문도 없이 변개된 필사본으로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각국의 어색한 언어로 번역되어진 성서로 그 본래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뜻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되어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무엇 때문에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주장하려고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오히려 그 대답은 간단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류와 오기 그리고 모순투성이의 성서를 그토록 믿게 하려는 근본적인 뜻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것이다.
조금 원색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믿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밥줄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목회자의 수만 헤아려보아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폐기해버린다면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추종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삶이 막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혹독한 시련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하기 위한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은 기독교에서 얼마나 큰 주춧돌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고 본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답답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추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지금에 와서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은 사실상 무의미한지도 모른다.
솔직히 신도들이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믿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다 목회자의 경영능력에 따라 목사와 신도들 간에 끈끈하게 맺어진 정(情) 때문에 다닌다는 사실을 목회자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래도 겉모양이나마 종교적인 위신을 세우기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7. 기독교의 오만함
성서를 읽다보면 하나님의 행동이 너무 편협 된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사소한 일까지 지시하며 간섭하는 것을 보면 언제부터 하나님의 마음이 속 좁은 인간의 마음으로 변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성서에 기록되어져 있는 데로 하나님을 해석하자면 마음이 좁고 툭하면 선을 빙자하여 악을 즐기는 하나님으로 비춰져 오히려 삶을 초월하며 살려는 도인보다도 못한 속 좁은 하나님으로 비쳐 보이는 것은 나 하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하나님이 간섭하지 말아야할 부분까지 세세하게 간섭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숨 막혀 살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악을 즐기는 속 좁은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 선지자들의 잘못도 크지만 이것을 여과 없이 현장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목사들의 잘못이 더 크다 할 것이다.
하나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올 리 없는 이치와 같이 기독교만이 가장 위대한 종교이고 기타 타종교나 무신론자는 사탄(악마의 우두머리 또는 악마)이고 마귀의 조정을 받는다는 식의 몰상식한 발언을 서슴없이 즐겨하는 기독교의 오만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그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기독교에서 사탄이라는 단어를 빼버린다면 존재할 이유를 찾지 못할 정도로 사탄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잘못은 다 사탄의 작용이나 역사로 돌려놓음으로써 사랑과 인자함으로 가득한 하나님과 대비시키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간단한 이원론적 대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좋은 일만 선한 일만 하도록 인간을 유도하는데 반해 사탄은 인간의 모든 잘못을 떠안음으로 해서 마치 쓰레기 수거를 담당하는 환경미화원 역할로 전락시켜 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한 이론인가?
잘한 것은 하나님 탓이요 못한 것은 사탄의 탓이니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조상 탓이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고 보면 사탄은 어지간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못된 짓이라는 짓은 모두 다 떠안고도 아무소리 못하고 수긍하는 눈치이니 사탄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우주심을 지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모든 목사들이 선보다 악을 더 강조하거나 시대정신에 어긋난 말씀을 즐기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수적인 목사들의 태도보다는 진보적인 목사들의 태도가 신도들의 가슴에 더 다가오듯이 잘못 번역된 성경을 조목조목 지적해가면서 개역판 성경을 권유하는 목사가 더 좋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거나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성이 있듯이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충분히 만인의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의 비리나 보수성이 강한 목회자들을 스스럼없이 비판할 줄 아는 목사가 있다는 것은 그래도 한국교회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의미한다.
8. 과신
자신을 믿는 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인식하지 않고 맹목적이거나 지나친 관심으로 발전한다면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을 알아야하듯이 중용의 위치에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단순사고자들의 단점은 공인된 사람이 말하거나 목사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무조건 믿는 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병으로 약국에 가거나 병원에 가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약사마다 처방이 다르고 의사마다 처방이 다 다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의학영상정보인 CT나 MRI, PET 등 다양한 정보를 판독하는 과정에서도 오진을 행하는 치명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맹목적인 태도보다는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똑같은 병을 놓고 약사마다 의사마다 색다른 처방전을 해주는지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똑같은 병이라 할지라도 약사나 의사마다 경험과 의학적 지식이 다르다보니 저마다 주관적인 처방전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그 효과 면에서도 다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할 것이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일처럼
“국민국가의 힘은 결코 군사력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기술적 자원과 기민한 외교정책 수행과 선견지명, 결단력 그리고 능률적인 사회적․정치적 조직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와 국민, 그들의 기량․활력․야심․기강․자발성 그리고 신념과 신화와 환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서도 구성된다. 게다가 국력은 그 자체만의 절대적 범위 안에서만 고려될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의무나 제국주의적 의무에 대한 상대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과의 상대적 차원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교만이나 오만함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빠져 그것만이 옳다고 믿는 과신에서 비롯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서에서도 교만을 경계하라고 수없이 경고하고 있듯이 성서와 반대되는 의견만 교만으로 몰고 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교만에 대해서도 자각할 줄 알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지나친 자긍심으로 생겨난 오만함 또한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아야할 것이다.
9. 합리적인 사고
부분에 빠져들면 숲 속에 갇혀있는 새처럼 전체를 보지 못하고 헤매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조그마한 벽도 크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생각의 속도를 높이거나 변화의 틀을 깨뜨리다보면 우주처럼 넓고 큰 세상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문분야에 들어가 보면 저마다 정형화된 지식이 줄지어 서있음을 느끼게 된다.
단순하게 살아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몰라도 적어도 시야를 넓히려는 생각이 있다면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함을 알 수 있다.
진리의 교과서로 불리는 홍태수 교수의 《진리를 아는 법》에서
“육체가 음식을 먹고 살듯이 정신은 진리를 먹고 산다.”라고 설명하며 합리적인 사고로 살아가야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합리란 한자로 合理로서 제 각기의 이치가 서로 모여도 어긋나지 않고 일치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자기만의 이치에 맞는 것만이 아니라 여럿의 이치에 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생각이 옳아도 그것만을 내세워서는 아니 된다. 자기에게 옳다 해도 남에게 옳지 않으면 합당한 이치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합리적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자기의 주장이 옳다 해도 그것을 이치적으로 상대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면, 즉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하면 ‘비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이치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합리인 것이다. 합리란 합당한 이치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마땅히 이치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땅하다는 당(當)자가 합쳐져서 합당(合當)이 된 것이며 합당의 이치가 합리인 것이다.”라며 합리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항상 전체를 보는 눈을 키워야 부분에 빠져들지 않고 깊은 고뇌를 하는 성자들처럼 우주적인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듯이 다른 한편으론 시야를 넓히는 일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됨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 인간의 욕심
처음에는 제단에서 소박한 기도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뒤따랐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좀 더 편리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만족할만한 각종 진귀한 성스러운 제물과 값비싼 보석을 요구하며 성막이 만들어지고 성막도 부족하여 교권주의와 권위를 자랑하는 호화로운 성전까지 만들어 기도처를 마련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인간의 욕심이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도 인간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 시행착오와 실패를 끊임없이 해오고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선택한 사울왕도 하나님을 배신하여 가슴 아프게 하듯이 시행착오와 실패는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도 자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나 신들의 가장 큰 실수는 기복신앙과 치유효과를 빌미로 순종이라는 미덕아래 복종을 강요하며 인간을 구속하려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천 년을 두고 젖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보내 함부로 성서에 대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하도록 치밀한 안전장치를 설치해놓고 각종 위협적인 겁주기로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배신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포기할 만도 할텐데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 자신을 믿어달라고 선지자들을 보내는 것을 보면 인간으로써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강인한 인내심을 소유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우주적인 생각으로 사시는 하나님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듯한 성서 속에 그려진 하나님을 살펴보면 부모의 지나친 보호 속에 성인이 되어서도 경제적, 사회적으로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는 캥거루아이와 지나친 관심으로 자녀의 곁을 빙빙 맴돌면서 간섭을 멈추지 않는 헬리콥터부모처럼 유연성이 부족한 상명하달식 주종관계로 자신의 명령에만 따르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경쟁자인 다른 신을 믿는 우상숭배로 눈길을 돌린다면 가차 없이 그동안 베풀었던 혜택을 거둬 가버리고 멸망과 환난이라는 단어로 겁주며 분노와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도록 만든 다음 다른 유혹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만 착실하게 믿고 따르기를 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져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성서나 경전에 나타나 있는 신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인간적인 욕심과 인간적인 모습으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신들이 우주적인 생각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인간들과 똑같은 욕심과 질투심으로 과욕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11. 아전인수
오랜 시대를 거치다보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보다는 같은 기독교내에서도 침례교([浸禮敎].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침례에 특별한 의(義)의를 인정하며 이를 중시하는 개신교.), 장로교([長老敎]. 교회의 운영권을 장로들의 합의제로 하자는 칼뱅의 장로주의에서 이루어졌고 목사· 장로가 모여 노회를 구성한다.), 성결교([聖潔敎]. 미국 기독교의 여러 교파 가운데에서 특별히 성결을 내세우는 교파. 중생·성결·신유(神癒)·재림의 사중 복음과 오순절 성령 세례를 강조한다.), 감리교([監理敎]. 영국에서 1729년 존 웨슬리가 제창한, 예수교의 한 교파. 교리보다 사랑의 실천에 중점을 두며, 감독을 두어 엄격한 규율로 교회를 다스리는 체제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아펜젤러의 선교로 들어왔다.), 순복음교회(서울특별시 영등포구(永登浦區) 여의도동(汝矣島洞)에 있는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 1958년 전도사 조용기(趙鏞基)와 최자실(崔子實)이 서울특별시 은평구(恩平區) 대조동(大棗洞)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1961년 서대문 로터리에 순복음부흥회관을 설립하여 이전하였다. 이듬해 조용기 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명을 순복음중앙교회로 바꾸었다. 1973년 여의도에 새 교회건물을 완성하였고, 신도는 1만 8000명에 이르렀다. 1984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교회명칭을 변경하였으며, 교세는 계속 급성장, 1986년 신도 51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가 되었다. 서울과 근교지역이 22개 대교구와 13개 지성전으로 나누어져 있다.), 통일교회(문선명(文鮮明)이 서울에서 창시한 그리스도교계통의 신종교. 1954년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統一神靈協會. 약칭 통일교회)>로 창립하여 1963년 5월 사회단체로 등록하였고, 같은 해 10월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았다. 1994년 5월 <세계평화가정연합>을 새로 창립하였다가 1997년 4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와 <세계평화가정연합>의 두 단체를 통합하여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교리서는 <원리강론(原理講論)>. 우주의 근본원리(神)는 하나며 이 원리를 해명함으로써 세계 모든 교회를 통일해 하나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인류 대가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다. 기존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교리에 어긋난다고 하여 이단으로 간주한다. 1972년 이후 세계선교본부를 미국에 두고 세계 각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산하단체로는 리틀엔젤스예술단·유니버셜발레단·뉴욕심포니오케스트라·학교법인 선화학원·세계평화교수협의회·국제크리스천교수협의회, 미국의 《워싱턴 타임즈》·UPI통신사, 한국과 일본의 《세계일보》 등이 있으며, 북한과 베트남의 평화자동차를 비롯하여 국내외에 150여 개 기업이 있다. 현재 193개국에 약 400만 명의 신도가 있다. 본부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에 있다.) 등으로 교파가 나눠지듯이 선지자들의 편리한 교리해석(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유대교의 구원 조건-①하나님을 믿는다 ②할례를 받는다 ③모세율법을 지킨다, 예루살렘교회가 생각했던 구원 조건-①하나님을 믿는다 ②할례를 받는다 ③모세율법을 지킨다 ④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 바울과 안디옥교회가 생각했던 구원 조건-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한다(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다.))으로 처음 뜻이 왜곡되어지거나 와전되어져 후세에 잘못 전해져온 경우가 많다할 것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내용 전부를 부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성서의 내용 중 인간이 지녀야할 좋은 말씀들은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좋다고 본다.
같은 주제의 내용도 강사의 능력이나 접근하는 표현방식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나듯이 선지자들의 권위주의적이며 명령조의 교리해석과 선지자들의 편리한 교리해석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던 부동의 교리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처음 뜻에서 변형된 채 각종 교파로 전파되고 있으며 작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오만함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라도 아전인수 격으로 하나님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는 순수한 하나님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는 지름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2. 신흥종교
앨빈 토플러의 《제3물결》에서 밝히고 있는 신흥종교의 비결에 대해 살펴보자.
“신흥종교들은 고독한 사람들에게는 우선 격의 없는 우정을 베풀어 준다. 통일교회의 어떤 간부는 ‘누군가 외로운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그에게 말을 건다. 세상에는 고독한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새로운 신도가 생기면 사람들이 몰려가 우정을 주고 환대를 한다. 대부분의 신흥종교들은 공동체 생활을 요구한다. 이 갑작스러운 온정과 친절이 큰 보람을 주기 때문에 신도들은 그 대가로 자기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접촉을 끊고 모든 재산을 신흥종교에 바치고 마약이나 심지어 섹스까지도 멀리하게 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신흥종교가 파는 것이 공동체만은 아니다. 신흥종교는 사람들이 절실히 요구하는 구조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신흥종교는 신도들의 행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신흥종교는 엄청난 규율을 만들어 요구하며 때로는 구타와 강제노동, 자체적인 추방이나 투옥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여 징벌하는 것을 강요하기까지 한다.
신흥종교들이 판매하는 마지막 중요한 상품은 ‘의미’이다. 그들은 각기 나름대로 편협한 현실관-종교적․정치적․문화적-을 갖고 있다. 각 교파는 유일한 진리를 내세우면서 그러한 진리의 가치를 인정치 않는 외부세계 사람들은 무지하거나 사탄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신흥종교의 메시지가 새 신도에게 밤낮으로 주입된다. 그 신도가 신흥종교 특유의 인용문, 특유의 용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특유한 존재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기 시작할 때까지 끊임없이 설교가 계속된다. 신흥종교가 전달하는 ‘의미’는 외부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신흥종교 메시지의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거의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다. 그 힘은 종합명제를 제시하여 우리 주변의 단편화된 순간영상 문화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 주는 데서 나온다. 신흥종교의 새 신도가 일단 이 테두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외부세계로부터 밀어 닥치는 온갖 혼돈된 정보를 조직화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생각의 테두리는 그것이 외부현실과 부합되건 않건 간에 신도가 데이타를 받아들여 저장할 수 있는 깔끔한 작은 방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이렇게 하여 무거운 짐과 혼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다. 신흥종교는 진리 그 자체를 제공해 주지는 않지만 질서와 의미를 제공해 준다.
신흥종교는 신도들에게 현실은 의미 있는 것이고 또 이 의미를 외부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얼핏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세계에 목적과 일관성을 부여해 준다.
그러나 신흥종교가 판매하는 공동체․구조 및 의미는 그 대가가 엄청나게 비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포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인격적 파탄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흥종교의 실체가 드러난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너무나 비싼 대가이다.”
종교가 삶의 길목에 서있는 우매한 사람들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음을 볼 때 쇼핑몰에서 쇼핑을 할 때처럼 사전에 정보를 철저하게 알아보듯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선택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보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선택되어질 수 없는 개인의 삶은 순전히 자신이 책임져야함을 인식해야할 것이다.
인생은 소중한 것이다.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듯 살아갈 수 없는 일이다보니 삶의 기로에 선 사람들은 특히 종교적인 선택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함을 알 수 있다.
99마지기의 논을 소유한 부자가 100마지기를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마지기의 논을 소유한 가난한 사람의 땅을 빼앗듯 오히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정신과 물질을 노리는 종교단체들을 조심해야할 것이다.
13. 영역 지키기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반복적인 단어를 되새김으로써 영적인 신성함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한 단어를 반복적으로 되새기다보면 리듬이 생겨나고 리듬은 운율과 집중된 에너지를 일으켜 하나님과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연결고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확고한 믿음 없이 출발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위험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자나 깨나 하나님께 의지하며 주인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로봇처럼 자신을 끊임없이 낮춰 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혹시라도 기독교에 대한 오해나 비판하는 자가 있다면 관용의 미덕을 베풀기도 전에 신자나 목사를 가리지 않고 성서말씀대로 믿지 않는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모든 척도를 전설적으로 내려온 단골메뉴인 사탄(사단)이나 마귀의 조정으로 몰아가며 신기어린 눈빛을 띄며 더 나쁜 말로 자신을 비하시키기를 서슴치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독교가 명맥을 유지해나가는 것도 바로 이러한 목숨 줄보다 더 강한 단골메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오히려 그러한 말을 자주 강조하는 사람들이 더 사탄 같고 마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한 지식인을 설득하기가 곤란할 때 으레 하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낯선 침입자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침입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와도 같은 것이다.
목사 자신도 신학적인 지식으로 종교를 유지해나가면서 지식인에게는 성서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거나 성서말씀과 충돌을 일으키는 지식으로 종교를 이해하려고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일침을 가하며 자신의 영역을 커버해나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종교적인 장소에서는 종교가 최고일 수 있지만 삶에 있어 종교만이 전부가 아니듯이 시야를 넓혀 우주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전쟁을 불사하는 종교전쟁 및 수시로 발생하는 종교적인 충돌과 더불어 공존하는 선악으로 살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순진한 어린애처럼 세상이치를 무시하고 오로지 종교적인 해석으로만 몰아가는 일은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본다. 그리고 성서 그대로 따라 하기 방식이 아닌 예수의 혁명적인 설교처럼 거부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친밀한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의심 없이 믿어야한다며 자포자기 설득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혁명적인 예수의 설교라 하더라도 누구나 다 수용하거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끝까지 설득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기존의 관습을 뒤흔든 기지가 넘치는 설교는 본받을만하다고 본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말이라 목사 자신도 모르게 나올 수도 있지만 원죄를 발생케 한 사탄이나 마귀의 조정으로 돌리기전에 관습적으로 내려온 받아먹기식 설교보다는 누구를 위한 설교인지 근본적인 문제를 연구한 뒤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14. 대담한 용기
우주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교처럼 열린 가슴을 갖고 너그럽게 이해하려는 포용력이 부족한 편이다. 마치 국지적이자 부분을 강조하는 의학적인 사고방식에 집중되어져 있어 전체를 진단하며 우주적인 생각을 놓지 않는 심오한 동양적인 한방정신을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할 수 있다.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가슴이 넓어질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주종관계에 얽매어 국지적인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불교처럼 부처 자신도 짓밟을 수 있는 대담한 용기가 과연 기독교에는 없는지 매우 궁금하다.
물론 400년 동안 노예생활의 관습이 몸에 배어 함부로 씻어내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나 좀 더 커다란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상명하달식 수직관계보다는 어버이 같은 따뜻한 품인 수평관계로 다가간다면 훨씬 더 편안한 신앙심으로 자랄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15. 하나님에 대한 믿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보스기질이 강한지도 모른다.
무엇이든지 당신의 마음에 들도록 로봇처럼 조정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숙명적으로 종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보스기질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도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어머니 같은 마음을 늘 유지하기에 하나님을 욕하면서도 다시 응석을 부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믿음은 이분법적인 발상이자 흑백논리가 분명하게 적용되는 곳이다 보니 수련을 하든 기도를 하든 처음부터 100퍼센트 확고한 믿음을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일단 자신이 믿고 행하는 것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의심이 없어야한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련을 통해 우주에너지와 교감하거나 기도를 통해 신성한 곳으로 인도되어져가는 것이나 그 결과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방법적인 측면이나 마음가짐에서는 서로 큰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영적인 신성함이 가득한 근원의 뿌리에 도달하고자하는 간절함은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말한다면 그 믿음은 처음부터 신뢰가 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신자들도 처음부터 의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온통 머리에 가득차서 신앙생활이 온전하게 진행될 리 없다.
확고한 믿음 속에서 자신 있게 말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믿지 않으려면 몰라도 믿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과감한 결단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16. 누구를 위한 믿음인가
먼저 하나님을 믿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하나님을 위한 믿음인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믿음인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믿음이란 목적의식이 없으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소리쳐 불러볼 수도 없는 그야말로 허공에 대고 빈 줄을 잡아당기는 꼴이 되기 때문에 믿음의 목적을 분명하게 정해놓고 출발해야한다.
믿음이란 한마디로 자신을 위한 믿음일 것이다.
자신을 위한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누가 강요한다고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믿음을 키워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 기복신앙과 치유효과를 얻고 그리고 운이 좋다면 사후에 천국에 들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 위해 믿음생활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믿음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들은 하나님의 배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믿음을 키워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버지 같은 정겨운 분으로 인식하며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잘 알기에 하나님을 부모처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17. 위험한 발상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이 반항적인 태도나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전철이나 공공장소에서 너무 요란하게 전도하거나 말이 많아서이다. 또한 불교를 비롯하여 타종교 및 무신론자들을 향해 툭하면 사탄이나 마귀라는 말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등 왜곡된 부분이 많아서이다. 그리고 나라마다 고유하게 고집하는 풍속 및 문화를 무시한 채 기독교 문화로 세계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의 제사문화를 몰아내고 기독교적인 묵상으로 해결하거나 오히려 한국이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며 선교대상의 나라와 문화적인 충돌을 거침없이 즐기는 사실을 보더라도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은 가히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일은 어떤 기준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져있다.
국가마다 개인마다 삶의 기준이 다르듯이 자신의 이익을 내세운 국가주의나 개인주의 때문에 세상은 늘 하루도 편할 날 없이 문제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으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지듯이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그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위험한 발상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물론 65억 명중 20억 명에 달할 정도로 기독교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링컨 대통령을 비롯하여 루즈벨트 대통령, 아인슈타인, 발명왕 에디슨, 키신저, 록펠러, 카네기,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신바람 건강 황수관 박사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통해 각 분야에서 성공과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이웃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화적인 파급효과 또한 크게 작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도하는 입장에서 좀 더 포용적이며 우주적인 차원에서 껴안을 수 있는 넓고 큰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18. 결론 : 학습공동체
PC와 인터넷의 발달로 군사정보를 비롯하여 학교, 사무실, 가정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가 하나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발품을 팔지 않고도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는 홈쇼핑을 비롯하여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면 못생긴 원본사진의 이미지를 여과시켜 작품성 있는 사진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고 OA로 주로 사용하는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액세스 프로그램 등을 이용하여 역동성이 강한 문서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보검색사라는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써 정보를 좀 더 효율적으로 검색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킬 수도 있다.
또한 멀티미디어(포토샵 CS, 나모, 드림위버, 플래시, 액션 스크립트, 자바 등) 프로그램을 이용한 홈페이지를 비롯하여 C언어나 비주얼베이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도 있고 설계가 필요한 사람은 CAD를 배움으로써 건축설계부터 시작하여 기계설계 등을 자유롭게 다룰 수가 있다.
또한 웹을 구축하기 위한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사람은 각종 언어와 홈페이지에 관련된 기술을 배우면 된다.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라면 정보를 효율적으로 검색하여 논리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고 단어나 용어에 대한 궁금증은 인터넷에 떠있는 국어사전을 비롯하여 영한, 영영, 한자, 용어사전, 백과사전 등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열려있다. 그리고 번역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영어나 일어로 되어있는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할 수도 있다. 물론 만족할만한 결과치는 얻지 못하더라도 근사치의 값어치는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앱(애플리케이션(Application : 앱(App))→어플리케이션→어플)을 이용한 스마트폰(어플)이나 아이폰(앱 스토어) 등 날로 첨단화되어지고 있거나 오감을 자극하는 새로운 IT 지식산업이 결합된 상품들이 줄지어 생산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PC와 인터넷만 있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든 가상의 세계이든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기에 PC와 인터넷의 세계는 인류역사상 가장 지적인 산물로 활동하며 그 존재가치를 스스로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사 이래 세계 최고의 부호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인 빌 게이츠의 《생각의 속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교사들이 교실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지내는지 사람들은 아마 모를 겁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문 닫힌 교실 안에서 하루 종일 생활하기 때문에 동료 교사들과 교류하거나 서로의 경험을 나눌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은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밖에 모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e-mail이 그런 고립을 없애 주었습니다.”라고 웨스턴 하이츠의 교육감인 조 키친스는 말하고 있다.
“PC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교사가 교단에서 책을 읽으면서 가르치던 방식-을, 모든 학생들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유발시켜 자발적으로 수업에 참여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시켜준다. PC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능력에 맞는 정보를 찾고, 교과서 외에도 비디오와 오디오를 통해 배우며, 실험을 계획하고, 친구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해준다.
흔히들 혁신적이라고 표현하는 이런 자발적인 문제해결 방식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899년에 이미 죤 듀이와 여러 교육 개혁가들은, 설교식 교육에서 경험 교육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물리적인 설비를 구축하는 일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상의 가상체험 세계로 학생들을 들여보낼 수 있는 길은 활짝 열려있다.
모든 중요한 주제를 다룬 훌륭한 강의들이 인터넷상에 넘쳐날 것이다. 학교에서는 그것들을 핵심 강의 자료로 활용하며 주제별로 스터디 그룹과 토론 그룹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강의 방식에 대한 활용 정도는 학교마다 달라지겠지만,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핵심 강의를 되풀이하는 작금의 교수법에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인 내용의 자료와 학생들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수법을 자유롭게 개발하게 될 것이다.
PC는 디지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통신 및 생산성 제고용 도구이다.
PC와 인터넷은 한 가지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다. 모든 지역과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최고의 교육여건을 갖춘 학교의 학생들도 이용할 수 없었던 정보를 제공하며, 최고의 학습 환경에서도 이룰 수 없었던 협력의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것이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정보와 협력을 이용해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PC를 새로운 교수 및 학습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교육자들이야말로 변화를 이끌어갈 선구자가 될 것이다.”
위에서 밝히고 있듯이 설교식 교육 보다는 경험 교육을 중요시 여김을 알 수 있다.
현장에서 설교하는 목사들 또한 잘못 번역된 교과서 위주의 성서 강론보다는 성서의 근본취지를 살려 누구나 공동으로 참여하여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지털로 연결된 학습공동체의 창조를 목표로 설교한다면 그만큼 성도들의 이해를 더 쉽고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김광림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시는 전통이나 인습에서 잠자는 감각을 일깨우는 꾸준한 놀라움의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시라고 해서 오늘날에도 그런 놀라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속되고 따분해질 뿐입니다. 하나도 놀라운 사실이 못됩니다.”
위의 사례처럼 성서위주의 설교도 중요하지만 교과서를 읽는 듯한 따분한 방식의 설교는 신제품을 기다리는 소비자처럼 폭넓은 새로운 지식을 요구하는 지식노동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PC와 인터넷의 발달로 지식의 혁명은 이미 넘쳐나고 있으며 전통적이고 따분한 방식의 설교는 이제 지양되어져야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머니같이 자상하고 친구처럼 편한 하나님> - 청아당 엄상호 詩
마땅한 거처도 없이 바람처럼 허공을 다니지만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고 보살펴주시는 분
부르면 달려오는 모습이 자상한 어머니 같은 분
잘못을 해도 웃음으로 대신하며 등을 두드려주시는 분
허물없이 대하는 것이 친구처럼 편한 분
뜬눈으로 밤을 새워도
촉각을 세우며 귀를 기우리시는 분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해도
늘
웃음으로 사시는 분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면 함께 기뻐할 줄 아시는 분
넘어지면 오뚝이처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
자신을 욕해도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있을 거라 믿고
침묵으로 인내하며 견뎌내시는 분
걷거나 달리거나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달리시는 분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함께 하며 평안을 주시는 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분
죽을 때까지 함께 하며
죽어서도 함께 하시는 분
연인처럼 걷기도 하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걸을 줄 아시는 분
돌고 도는 순환의 법칙을 일깨우게 하고
노력한 만큼 보답을 아끼지 않는 분
겸손으로 세상을 대하며
가장 낮은 위치에서 자신을 높일 줄 아시는 분
그 모든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아껴 쓸 줄 아시는 분
평생을 벗처럼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는 분
혹여 잘못될까봐 자나 깨나 눈을 뜨고 귀를 기우리시는 분
<삼위일체 - 하나님(성부) ․ 예수님(성자) ․ 성령님(영적능력의 구현 또는 기적)> - 청아당 엄상호 詩
한 몸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다.
분신술을 써서라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가끔씩 우리들은 하늘의 뜻을 살필 때가 있다.
몸과 마음이 고단할수록
고통과 고난이 극에 달할수록
족쇄에 묶여 빠져나올 수 없을 때
물이라도 떠놓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삶속에 묻혀 사는
기복신앙이기에
틈만 나면
두 손을 모으거나
마음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자신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크면 클수록
‘간절함이 묻어나는 기도’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드시 부와 명예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염원하고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비록 죽기보다 더 싫은 종교일지라도
종교의 깊은 맛을 느끼는 순간
종교를 통해서도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되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종교의 위대성을 한눈에 알아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람도 없는 텅 빈 곳에서
우주의 뿌리를 흔들면
하나님(성부)이 바로 나요
예수님(성자)이 바로 나요
성령님(영적능력의 구현)이 바로
나와 연결되어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에서 우주를 위한 기도로
진화되어져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내가 없으면
남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성령님도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끝나기에
내가 없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인식할 수 없다는데서
발생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위의 현상들은
삼위일체만이 지니고 있는
매력적인 순환요법인 동시에
힐링효과까지 지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하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보다
삼위일체가 하나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집중력과 다각적인 접근방식을 높여주기에
가능한 것처럼
느끼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고
보지 않아도 스스로 볼 수 있는
참으로 깊고도 깊은 치유의 손이자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 나겸일 원로목사께서
5회에 걸쳐 학습할 수 있는 책으로 엮어 만든 <새가족 성경공부>와
주승중 담임목사와 김훈 목사의 설교를 통해 살펴본
성령 충만한 생활이란?
“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즉,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삶입니다.
2)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9가지 열매인 오직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22-23)는
①사랑 ②희락 ③화평 ④오래 참음 ⑤자비
⑥양선 ⑦충성 ⑧온유 ⑨절제라는
삶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섬김을 받으려오지 않고
인간을 섬기려 왔다는 사실입니다.”
<새가족 성경공부 - 일체유심조> - 청아당 엄상호 詩
초신자가 거쳐야하는 《새가족 성경공부》
주1회씩 1과에서 5과까지 준비되어져있다.
5과가 끝나면 수료증을 발급해주기도 한다.
주일마다 예배하기 전
권사께서는 다과를 준비해주시고
김훈 담당목사께서는 초신자에게 1시간여 동안
이해하기 쉽게 강연을 해주신다.
보통 초신자에게 소홀히 하는 교회일수록
신도들이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큰 교회이든 소규모 교회이든
초신자에게 정성을 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부흥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예 처음부터
성경공부에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준비해놓고
순차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담임목사 및 부목사들의 관심이 집중되어져있기도 하다.
김훈 목사의 말씀에 의하면
“맹목적으로 믿는 종교는 차라리 믿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기도는 방식과 격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적인 안식(평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다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한다.”
“구하는 자 = 찾는 자 = 두드리는 자는.
기도하고, 말씀 듣고, 말씀에 묵상해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여러 번 정독하며 읽어야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도 죄.”
“영생과 부활의 기독교.”
“성경 속에 진리와 지혜가 담겨있음.”
“성경은 눈물로 써 있다.”
“예배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림(물질, 찬양, 교회 주차요원 등).
즉, 하나님께 드리는 삶.”
“본질은 구원이고 말씀은 실천이다.”
“한순간에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무능력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기에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려 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섬기려고 옴.”
그러고 보면 초신자가 가장 먼저 벽에 부딪히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되어져가는 과정이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우주의 절대 신인 하나님께
곧바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물론 삼위일체의 한부분인 예수님이지만
처음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접견해야하는 과정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이해가 안 되거나 강한 거부반응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러한 절차적인 단계 때문에 교회를 다니다
그만두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음을 볼 때
먼저 삼위일체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철저한 교육이 있어야 된다고 본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어지거나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에서 끝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로 통하고 있듯이
삼위일체(하나님(성부), 예수님(성자), 성령님(영적능력의 구현 또는 기적)) 또한
서로의 위치는 다르지만 결국 하나로 합체되어져
둥근 원에 뛰어든 우주의 나비처럼
일체유심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정독하며 공부하는 과정과
진정한 예배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학자들이 정의해놓은 예배에 대해
따로 책이 만들어 질만큼
기도와 믿음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정한 예배를 위해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구장인 위미애 목사와의 만남과 더불어
전직 교수이신 주승중 담임목사께서
바쁜 와중에도 월1회씩 1년에 걸쳐
남성구역예배강의를 하기위해 특별히 102쪽에 걸쳐 편집해놓은
《쉽게 풀어쓴 예배 이야기》에 대해 강연을 해주시기도 한다.
여기서 예배의 신학적 의미를 간단하게 인용해보면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예배학자 마르바 던(Marva Dawn)은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을 높이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무한한 광휘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예배는 우상 숭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하나님의 무한한 광휘에 완전히 잠기는 것”에 대한 표현은
마치 깨달음의 세계와 같은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이자 가없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향해 달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바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 우주적인 체험이자 우주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명상이나 호흡을 통해 폭풍의 빛인 우주의 빛 속에 빠져들어 완전하게 침묵에 드는 과정이자 고요의 극점에 드는 과정과 유사하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깊고도 깊은 우주사상이자 눈을 감아도 보이는 내면의 빛의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예부터 유불선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는 한길로 통하거나 하나로 연결되어져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비록 서로 다른 길을 걷거나 경험하는 과정은 다르지만 종교적인 체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한길로 연결되어져있거나 하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만약에 예배에 실패하면 그 모든 것은 삼위일체와 단절된 채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하늘 문이 굳게 잠긴 성역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쉽게 보여주는 것은 가치가 작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 또한 크다는 것을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공부가 중요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들으며 실천한 후 직접 손으로 쓸 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성경공부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동안 예배에 대해 오해하거나 혼동하며
의식적으로 행해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지 기본을 잘 알아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종교 또한 끝없는 깊이를 파헤치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한 신자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결국 신비한 현상보다는 평범한 현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삼위일체(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알아보자.
나겸일 원로목사께서 편집한 40쪽 분량의 소책자로써
초신자가 알아야할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머리말에 해당하는 「새가족 성경공부를 펴내면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구원이 필요한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바로 갖기 위해서는 성경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고,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이 삼위 되시는 분을 알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갈 수 있고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새가족 여러분들이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가족 성경공부》의 차례를 살펴보면
제1과 : 인간과 죄
제2과 :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
제3과 : 하나님
제4과 : 성령과 생활
제5과 : 성경
부 록 : 성경의 구성,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으로 정리되어져 있다.
성경의 구성과 구분을 살펴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600년 동안 40여명의 저자들이 성경을 기록했으며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합쳐 총 66권으로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언어는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새가족 성경공부》에서 강조하고 있는 구원의 길을 살펴보면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가로놓여져있는 죄, 심판, 사망, 지옥에서 구원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컴퓨터의 구조에서 하드웨어(인간)와 응용 프로그램인 소프트웨어(하나님)를 연결시켜주는 OS(운영체제 ; 시스템 프로그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연결고리이자 중심축인 OS(운영체제 ; 시스템 프로그램)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드웨어는 생명이 없는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고 응용 프로그램인 소프트웨어 또한 무형의 유령으로 떠다니며 존재할지도 모른다.
결국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만남을 성사시켜 작동하게 하는 것은 해를 거듭하며 진화되어져가고 있는 운영체제인 OS(도스 및 윈도우즈8 등)인 것처럼 삼위일체의 한부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기복신앙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요구되어지고 OS가 업그레이드되어지는 만큼 하드웨어(인간)와 소프트웨어(하나님) 또한 진화되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주로 통하는 통로가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성령님이든 진정한 예배를 통해 연결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 모든 존재와 한 지붕 한 가족으로 맺어진 인연이기에 그것이 부모가 되었든 형제자매가 되었든 우리들의 관계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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