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조직력과 기독교의 매력
사회적 조건은 조직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짜여진 조직에 의해 단합을 이룰 수가 있고 단합된 힘에 의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에서 조직을 빼놓으면 결속력이 약화되어져 전도생활이 어려워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일은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직장이나 단체생활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어떤 목표가 주어지면 결속력에 의해 단합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단합된 동작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일을 추진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힘의 크기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조직력을 바탕으로 기독교는 세계복음화에 앞장서며 전 세계를 누비며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목숨을 내거는 선교사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과거에만 그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위협하는 중국 등 공산국가나 테러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에서 자주 발생하고 있는 일임을 볼 때 해외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세계복음화를 위한 전도는 참으로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다할 수밖에 없다.
종교를 위해 흔쾌히 목숨까지 내걸 수 있는 용기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몰라도 그 용기만큼은 높이 치하하고 싶다.
기독교가 세계복음화에 성공한 것은 이런 희생정신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혹독한 박해를 받을수록 더욱 강하게 일어서는 민초처럼 기독교를 지탱해주고 있는 힘은 역시 봉사와 희생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건 없이 봉사하는 삶은 남을 위하는 일이자 결국 자신을 위하는 일이 되기에 사람들은 남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신실한 신자일수록 종교에 대한 겸손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비록 성서에 그려져 있는 하나님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는 있지만 신실한 신자들을 대하다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사보다 장로에게서 인자함과 화평함이 몸에서 묻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홀로설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이서 위안이 되어주는 신들이야말로 자신을 지탱하게해주는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진실로 신들의 세계를 존중해주면서 신실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역시 아름다운 일이다.
결국 가상의 신이든 우주에 실존하는 신이든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자신을 끝없이 낮추며 겸손함으로 살아가야함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1. 조직력
성서에 씌여져 있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성서신봉자나 성직자가 본다면 기겁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성서를 살피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내용과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 등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편애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축복을 무한하게 주다가도 배반하거나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물(노아의 방주(성서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가 서로 다를 수 있음) 및 모세의 기적)이나 불타는 유황(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그리고 저주를 퍼부으며 전쟁이나 내분을 이용하여 멸망시키기를 거리낌 없이 행하는 내용을 보더라도 성서를 바탕으로 기독교가 명맥을 유지하기보다는 목사나 리더의 능력에 힘입어 인간적인 탄탄한 조직력에 의해 유지되어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어차피 인간적인 면을 빼놓고는 그 어떠한 것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종교 그 자체는 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끊임없이 봉사활동을 통해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더라도 인간적인 조직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조직은 서로를 견제하는 역할도 하지만 서로를 보살피며 한길을 걷는 일이기도 하다.
조직은 만남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받으며 부족한 점들을 채워나가는 중요한 일들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직을 유지시켜주는 끈끈한 정이 없다면 쉽게 와해되어지거나 무산되어질 수밖에 없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조직이야말로 가장 탄탄한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그 어떤 단체보다도 조직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그 위력이 참으로 크다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선교를 위해 목숨까지 흔쾌히 던질 수 있는 종교의 힘이야말로 영적능력을 최대한 끌어다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종교의 힘은 순교자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기독교의 매력
기독교의 매력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거나 성서를 공부하기위해 열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인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성서를 연구하다보면 눈과 귀를 가리게 하는 거부감이 거미줄처럼 쳐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기독교의 매력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제제가 많고 정교하게 짜여진 금기사항이 많을수록 거부감이 강하게 다가오지만 그 반면엔 그것을 극복해보려는 노력 또한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7-8)”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한마디로 가슴을 열게 하는 성서의 말씀 속에는 인간을 위한 교훈이 거미줄처럼 쳐져있어 고난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정교한 국가일수록 각종 다양한 정책들이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듯이 종교도 격식과 형식이 엄격할수록 사람들의 매력을 더 끄는 것 같다.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실천하기 어려운 각종 제제나 조건들이 까다롭게 기다리고 있지만 믿기만 하면 물질적인 축복과 더불어 사후세계에 대한 염원이 보장되어있는 종교에 대한 장점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저절로 종교에 입문하게 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가장 큰 매력은 마음 놓고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무에게나 하소연할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고해성사하듯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종교나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이러한 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3. 결론 : 경각심
살다보면 경고를 알리는 메시지들이 난무함을 알 수 있다.
수시로 선의 경계에서 악의 경계로 넘어갈 때 울리는 경고성 메시지들은 강력하게 와 닿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고성 메시지가 울려 퍼지는데도 불구하고 악의 경계로 접근하기를 좋아한다.
특히 성욕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악의 경계로 이끌어 범죄로까지 이어지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식욕과 더불어 악의 근원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경고성 메시지는 분명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묵살되어지거나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일에 있어 가장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는 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신성을 제일로 치다보니 오로지 선만을 위한 삶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거나 또는 악의 경계에 접근하는 순간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경고성 메시지 중에 종교만한 경고성 메시지는 없는 것 같다.
전통적인 유교 윤리보다 더 신성함을 강조하고 있는 종교이기에 경고성 메시지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알 수 있다.
종교가 인류에게 이바지해온 것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윤리의식일 것이다.
윤리의식은 선을 대표하는 가장 민감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종교에서 신성함을 내세우는 가장 큰 이유는 한마디로 신과의 접촉을 위해서이다.
인간이 선악의 굴레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선의 경계로 끌어 올려주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터키 이스탄불에 세워진 성 소피아성당처럼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유도하는 일에 있어 인간의 힘이 가미되어지고 있지만 그 목적은 신과의 접촉을 시도하기위한 노력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신을 영접하기 위한 신성한 분위기는 순전히 인간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의 잘잘못을 판단하며 스스로 옳은 방향인 선의 경계로 이끌어나가고 있음을 볼 때 종교가 우리 인간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쉽게 말해서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이것도 하지마라 저것도 하지마라 부모님이나 아내들이 영양가 있는 충고와 더불어 잔소리를 하는 것처럼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소름끼치도록 싫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선악의 기준을 바로 잡아주는 천칭역할을 해오고 있음을 볼 때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종교는 신과의 만남과 인간의 경각심을 자극하기위한 하나의 경고성 메시지로 작동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세계> - 청아당 엄상호 詩
과거에는 주관적인 생각으로 신비롭게 여겼지만
현재는 객관적인 분석으로 하나의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지 않던가?
하늘의 뜻으로만 돌렸던
날씨만 하더라도
천기를 누설하지 않고도 요즘은 자유롭게 발표되지 않는가?
또 조그마한 창에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정보는
지구를 비좁게 느끼게 할 정도로
신속하고 빠르지 않은가?
앉은자리에서
환하게 앞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해볼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무턱대고 신비롭게 여길 것이 아니라
벗겨볼 수 있으면 벗겨보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동안 환상 속에서 산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믿기만 하면 죽어서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종교가 그렇고
성인이라면 사람이기 이전에 우상으로 모셨던 것이 그렇지 않은가?
과학과 세계적인 지식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주관적인 생각을 깨뜨리지 않았는가?
이제는 우주를 향해 달려야할 때이다.
사후세계도 과학에 의해 밝혀질 날이 올 것이고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될 날도 오지 않겠는가?
그리고 혼돈 속에서 질서를 이루며
생각만 해도 이루어지는 세계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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