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의 나를 본다
드러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혼돈의 상태인 무극에서
음양이 탄생되니 그것을 태극이라 말한다.
공은 텅 빈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아(無我)는 비아(非我)를 말하며 공과 시간을 합쳐
우주의 안팎을 설명하고 있다.
0이 공간이라면
1은 시간이다.
0과 1의 조합은 우주 탄생의 비밀이자
빛으로 우주를 뒤덮은 화엄계의 세계이다.
1차원이 평면(가로)이라면
2차원은 수평(가로)과 수직(세로)이고
3차원은 입체적인(가로, 세로, 높이) 형상을 말한다.
4차원은 암울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지하세계를 말한다면
5차원은 상승된 빛의 차원이요
6차원, 7차원, 8차원, 9차원으로 상승할수록
빛의 밝기는 더욱 밝아지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차원은 인위적인 구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차원이 상승할수록
빛의 밝기와 더불어 영격이 높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극의 세계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결시켜주는
컴퓨터의 운영체제와 같다.
0과 1은 마법의 공간이다.
공간만 있으면 현상계는 따로 노는 곳이지만
시간이 더해지면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타임머신과 같아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세계와 같고
손에 잡히는 일체유심조의 발현과도 같다 할 수 있다.
텅 빈 허공에서 바람이 일어서는 것과 같고
바람은 한곳에 오래 서 있지 않고
자유롭게 어디든 달려가는 모습과 같다 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무극이다.
참으로 위대한 우주의 섭리이다.
무극은 모든 재료가 다 갖추어져 있어
언제든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우주의 저장고이자
우주의 안팎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속살로 존재한다.
소승불교가 수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르게 한다면
대승불교는 보살도의 행으로 이끌도록 노력한다는 점이다.
깨달음에도 깊이가 있다.
깊이 측면에서는 소승불교가 장점으로 부각하지만
베풂 측면에서는 대승불교가 장점으로 부각한다.
정중동 중에서
정이 소승불교에 해당한다면
동은 대승불교에 해당한다.
큰스님이 소승불교에 해당한다면
스님들은 대승불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둘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청아와 청아당이 마주하고 깨달음을 논하면
갈림길일지라도 결국에는 만나는 지점이 있듯이
천 개의 강과 천 개의 강줄기가 바다로 모여들듯이
그렇게 하나로 합쳐져 함께 굴러가는 것이
대승불교이자 소승불교인 것이다.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어차피 모든 것은 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야만
한 덩어리로 또는 하나로 뭉쳐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극은 이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변화무쌍한 세계를 예고하기 있기에
태극을 앞세워 우주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있음도 없음도
무극에서 출발하여 무극으로 되돌아오니
처음과 끝은 무극에서 시작하여 무극에서 끝을 맺는다.
2022년 4월 16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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