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통개안은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 않는다 – 민감도에 따라
박○현 도반님
“꿈처럼 지나가서 어리둥절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심적으로 좋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힌트처럼 알려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통개안은 먼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리둥절하기도 하지만 말씀대로 현상은 현상이라는 걸
조금이라도 일찍 배운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러면서도 수련시 강한 기적인 체험도 없었는데 영통개안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저녁때 수련을 해보니 현상보다는 느낌을 갖고 노력하는 게 왠지 더 뿌듯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잡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영통개안 현상을 접하기 이전에
투시현상이나 몸이 가뿐한 현상은 나타날 수 있지만
특별하게 강한 기적인 체험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수련자에 따라 현상은 다 다르게 나타나기에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필자 또한 영통개안 이전에 특별한 현상은 없었고
몸에 힘이 넘쳐나면서 강력한 자기장이 몰려 듦을 느꼈습니다.
특이하다면
단전호흡 초기에 밤 12시경 잠자리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섬광이 비치면서 이마에 쏟아지는 빛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 빛이 좋아서 한참 동안
몰입해 있었던 기억은 있습니다.
그리고
아! 이것이 성령이구나 하는 생각은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초기 때 잠깐 나타났었던 것이기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았습니다.
인천에서 서울남산에 위치한 구차원단원에 가기위해
전철 1호선을 타고가다 보면
투시가 발생하여 영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인다거나
사람들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냄새에 민감한 모습을 보인 적은 있습니다.
아마도
자정작용을 통해 심신이 맑아지면서 오는 현상이라
견뎌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 기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한
또 하나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영통개안은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영통개안을 경험해도
그것이 깨달음 그 자체라는 것은 알 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남다른 현상이지
그것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 이러한 현상도 나타나는구나하는 정도의 큰 체험이라는 것만
몸으로 체득하고 그 다음단계를 위해 열심히 정진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영통개안이 끝이었더라면
거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판단은
자연스럽게 그 다음단계를 생각하며 정진한 것을 보니
그것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더욱 더 정진했던 것 같습니다.
수련 중에 나타나는 현상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이후로 자기장의 폭풍 속에서 다양한 현상들을 경험하다보니
영통개안은 지나가는 현상 중의 하나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필자보다
더 많은 현상이나
경천동지할만한 현상이나
경험들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수련자마다 주관적인 현상이다 보니
그 그림이 모두 다 일치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같은 영통개안이라도
필자가 경험했던 영통개안과 홍태수 회장님이 경험했던 영통개안과
그 내용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점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수련자마다 천국과 지옥의 모습이 다 다르게 그려져 있거나
경험한 현상들이 하나같이 일치하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슷한 경험이나 현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가 분석한 바로는
그 모든 현상이나 경험의 그림들이 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자기주도적학습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보니
주관적인 현상들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암시해주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저는
민감도의 크기에 따라
현상은 부풀어지거나
축소되어질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민감도가 큰 사람은
현상에 대해 부풀어진 상태로 말할 수가 있고
민감도가 작은 사람은
현상에 대해 축소된 상태로 말할 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생명에너지 밀도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적용해볼 때
민감도와 생명에너지의 축적된 밀도에 따라
현상은 다 다르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깨달음의 깊이까지 감안한다면
이 또한 깨달음에도
서로 다른 논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의 퇴적층에 따라
느끼는 현상이 다 다르듯이
깨달음의 퇴적층에 따라
깨달은 현상이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상보다는 깨달음을 중요시 여기고
깨달음보다는 고요의 극점을 중요시 여기는 것은
그 모든 현상이나 깨달음으로부터 탈피하여
신의 간섭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합니까?
더 이상 드나듦이 없다는 것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진공상태로 파묻혀있기에 간섭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2018년 8월 4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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