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지학(心性之學) - 성선설·성악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심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중심을 잡아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이루고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사람들이 이름을 붙여 정리하기 전부터
우주에는 이미 리(理)와 기(氣)가 존재하고 있었고
심성의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주는 그 근원을 손에 쥐고 있었다.
다만 뒤늦게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을
손과 발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감각을 키워왔고
그래도 부족하여 몸과 마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학문적인 정리가 필요했었던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보다는
손에 잡히는 것이 좋듯이
오감을 통해 느끼고 말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리와 기의 존재를 느끼고
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느낄 수 있도록 힘을 길러놓고 있다.
우리가 우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우주가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듯이
사람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형상에 대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우주에너지의 뿌리를 찾아 정리해 놓았던 것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나중에 발견하여 정리하는 것보다는
비록 처음에는 부족하지만
창조적인 발견을 정리해놓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과학이 발달하고
철학이 발달하고
종교가 진화하고 있듯이
처음은 창조에 대한 파괴이자 새로운 도전에 대한 매체로 군림하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오늘도 즐거웠고
내일도 즐거울 것이라는 우주와의 대화로 연결시켜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주가 텅비어있다고 해서 우리들 마음까지 텅 비어있지 않듯이
마음은 우주의 안팎을 드나들며
심성에 대해 알고 싶으면 심성에 대해 논의하고
리와 기에 대해 느끼고 싶으면 우주의 오감을 터뜨려가면서까지
진지하게 논의하여 왔다.
안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만지며 느끼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은 허공을 한번 휘젓는 것으로 관심을 끊는 일이다.
그만큼 앎과 무지에 대해 사람들은 이중적인 관심으로
바람에 흔들려가며 더 깊이 우주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다.
공자의 심성지학이나 맹자의 성선설 그리고 순자의 성악설 또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주적인 사실을 찾아내어
학문적으로 밝혀낸 노고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늘 새로운 것을 밝혀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에 힘입어 과거부터 전해져온 하늘빛 길을 밝혀가며
우주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을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다.
심성은 욕성, 인성, 지성을 찾아낸
공자로부터 시작되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인의예지(仁義禮智)
그리고 사단인 수오지심, 측은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성선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여 극도로 혼란한 시기에
사람이 살아나가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치적인 청사진이나
삶의 방법에 있어서
이상향을 그려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중의 하나라고 본다.
더구나 주나라의 예를 중시하며 강조하는 공자의 정치적인 이상은
현실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말 그대로 꿈이었거나
현실정치에 맞지 않는 이상향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번거롭고 까다로운 격식을 갖춘 인(仁)과 예(禮)는
지금도 거부현상을 일으키거나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시대에 따라 정치적인 활동도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잠깐 아래의 내용을 음미하며 공자의 정치적인 행보를 알아보자.
“13년 동안 72명의 군주를 만나 설득했지만 ‘상갓집 개’처럼 박대를 받고
죽음의 위협에도 시달리다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힘을 바탕으로 먹고 먹히는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내세운 인(仁)의 철학은 설 곳이 없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공자였지만 저술에 힘쓰고
3,000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전념한 결과
학문적으로는 성공한 공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자의 인(仁)을 통해 완성된 맹자의 성선설은
인을 심(心)위에 올려놓고 출발한 선견지명은
그 모든 잡음을 완화시키거나 발전된 후학들의 안목으로
더욱 견고하게 발달된 이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이제는 아무리 흔들고 싶어도 흔들 수 없는
절대적인 학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시작이 중요한 것처럼
그 출발이 미진하거나 완성된 학문이 아니더라도
세월에 도태되지 않고 견뎌내는 인고의 힘만 내재되어져있다면
그 나머지는 후학들의 몫이 되어
그만의 개성으로 새롭게 해석되어지거나
완성되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동양적인 맹자의 양심본능으로 출발하고 있는 성선설과
서양적인 칸트의 이성과 감성으로 유사한 성선설의 해석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인 환경에도 큰 영향이 있지만
서로 바라보는 시각과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후세계가 하나로 통일되어져 있지 않고
동서양의 사후세계와 심지어 같은 종교 안에서조차
서로 다른 사후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면
동양적인 성선설과 서양적인 성선설은
한길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같은 동양권에서조차 서로 다른 논리를 펴고 있거나
원저자에 대한 이해력 부족으로 인해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 주장한 맹자의 본뜻은 맹자만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직까지도 많은 의문과 새로운 비평을 받고 있는 성선설이지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듯이
학문 또한 시대정신에 맞춰 해석하고 변론하며
그것으로 완성된 모습을 갖춰나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맹자보다 뒤늦게 태어난 순자의 성악설이
한때나마 전성기를 구가하며
제자들에 의해 표현되어지고 시대를 압도해나갔으나
불행하게도 제자인 이사에 의해 BC 213년 역사교육을 금지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지시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후대 모든 유학자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주희에 의해 맹자의 성선설은 탄탄대로를 걸으며
오늘날까지 공맹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동방의 주자’로 불리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의해
한국적인 이기론이 정리되어져 있지만
우리가 간섭하지 않아도
역사가 간섭하지 않아도
우주적인 학문이 필요하거나
인간적인 학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시대를 불문하고
참여할 인재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고는 하지만 묻혀버린 역사도 역사이듯이
오늘날에는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지닌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중적인 면모는
양면의 동전처럼 하나로 합치하고 있다.
심(心)은 우주를 통괄하고도 남는 강력한 파워가 있다면
성(性)은 본래의 모습 속에서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는
우주선처럼 우주본래의 모습인 성선설과 성악설을 아우르며
어떤 때는 성선설로 우뚝 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성악설로 우뚝 서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달리지 않으면 멈추거나
역사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채찍이 정신을 감싸고 있어
강한 모습으로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 성악설 덕분에
사회가 변화하고
기업이 변화하고
문화가 변화하며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거나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성악설의 장점이 그대로 현실에 녹아있는 모습들을 대할 수가 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성선설 또한
약한 모습만 보일 수가 없어
성악설과 정면으로 대결구도를 갖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있는 다고 다 서있는 것이 아니듯이 서있는 가운데서도
움직이거나 달리고 있다는 정중동 또는 동중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도 앞만 보며 열심히 달리고 있다.
공자의 심성지학은 포괄적이면서도 전체적인 구성으로 짜여져 있어
한방적인 처방의 형태를 닮고 있다고 보면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국부적인 치료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양방적인 처방의 형태를 닮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방적인 처방이 우수하느냐
그렇지 않고 양방적인 처방이 우수하느냐고 묻는다면
정답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둘 다 장점만을 뽑아 시대에 맞게 적용해나간다면
한쪽으로 기울기 싫어하는 하늘의 뜻이 가장 잘 전달될 수 있다고 본다.
무엇이든지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서있을 수 없듯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에는
단점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완벽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것을
하늘은 가장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보다는
우주의 문을 열어놓고 누구든지 안부를 묻거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허공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는 하늘이야말로
불완전한 모습 그 자체라고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포괄이라는 단어는
그 어느 단어로도 메울 수 없는 광범위한 단어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이야기하기도하고
우주 일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기의 세계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우주적인 단어이자
플라즈마로 형성된 태양의 안팎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우주심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맨 처음 만나는 관문이 호흡이다.
호흡의 벽은 지구를 뚫고 우주로 나가는
첫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해내고 있어
기의 세계를 알기위해선
반드시 우주적인 호흡을 통과해야만 하는 난관을 만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기의 세계는 빛의 세계이자 기체, 액체, 고체의 형상을 접한 후
우주로 나가는 심성의 본성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유분방한 사고력을 지니고 있기에
우주의 반대편을 다녀와서도 호흡을 고를 필요도 없고
지구의 가장 안쪽을 다녀와서도 두려움을 나타내거나
지구의 내부온도에 의해 뜨겁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기를 안다는 것은 마음을 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음을 안다는 것은 우주의 비밀을 안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하늘의 뜻은 침묵을 요구하고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도록 방화벽을 쳐놓고
그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지 않으려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는 기를 움직이는 리의 세계가 존재하고
리의 세계는 기의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이 둘은 하나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와 리의 세계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현상적으로는 둘로 보이기도하고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분명 우주에는 이 둘을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이 있고
그 끝을 알 수 없도록 우주적인 비밀로 덮어놓고 있음을 볼 때
우주적인 비밀을 알기위해서는 하늘이 감동할 정도의 노력이 뒤따라야하고
그 방법 면에서도
목숨을 내건 자기수련이 있어야만 우주심과 하나가 되어
그 비밀을 공유하며 호흡을 즐길 수 있다고 본다.
이기일원론이나 이기이원론이나 그 결과는
몸으로 체득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착시현상으로도 보일 수 있겠지만
우주에서 날아오는 기의 에너지를 놓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한 몸으로 날아드는
기의 에너지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볼 때
분명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본다.
기의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체득하다보면 알게 되는 일이지만
기를 움직이는 또 다른 존재가 우주를 장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도대체 그 끝은 어디인지 줄기차게 파고 들어가 보면
잠시 장막을 쳐서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혼란을 야기 시키기도 하지만
그 뜻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장막을 걷어낸 후
고요의 극점인 우주의 중심에서 하나로 합쳐 보여주기도 한다.
결국 이기일원론이 마음에 해당된다면
이기이원론은 본성(本性)인 성선설이나 성악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주의 비밀은 그 끝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이 도사리고 있어 언제든지 이 둘의 이론은
반론으로 자리매김하며 끝없는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크다고 본다.
그렇지만 어떠한 관점으로
이 둘의 관계를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적어도 우주적인 현상이나 사건들을 접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이론적인 접근방법으로
이기일원론이나 이기이원론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를 몸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이기일원론을 먼저 대하고
그 다음 더 깊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이기이원론적인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기일원론과 이기이원론을
하나로 합쳐놓은 고요의 극점에서는 이 둘의 관계가 하나로 합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체유심조로 통하는 마음은
이기일원론으로 통하기도 하고
이기이원론으로 통하기도 하면서
관점에 따라 둘로 갈라지기도 하고 하나로 합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기일원론인 기의 상태만 접해도
온 우주를 얻는 듯 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되지만
차츰 그 강도가 강해지면서 퇴적층을 이뤄가는
기의 형태를 접하게 되면
리(理)와 기의 관계가 신묘한 모습으로 변해
기가 리(理)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즉 다시 말하면 리(理)는 형이상학적인 모습으로
절대자인 우주의 신 하나님을 일컫는다면
기(氣)는 형이하학적인 존재로 우리들의 신체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적인 현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수련이나 명상 그리고 기도를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의 세계는
우선적으로 지구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다음 태양에너지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 다음 우주에서 날아드는 우주에너지인 기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물론 인체 내에서 작용하고 있는 기의 세계와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로 합쳐져서 우주에너지와 하나로 합치되어져 가거나
천지인이 하나로 합치듯 태양과 지구 그리고 인간이 하나로 귀결될 때
우주에너지인 기의 흐름은 더욱 강력하게 형성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잠깐 맹자의 글귀를 살펴보자.
살다보면 가장 힘들 때나 고통과 좌절에 처해있을 때 꼭 새겨들어야할 맹자의 글귀를 되새겨보면 우리가 살아가야할 이유를 깨우쳐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고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하고 그 체력을 피로하게 하며 그 뱃가죽을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행함에 그 하는 바를 혼란시키는 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견디게 하여 그 할 수 없는 바를 증가시키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잘못을 한 연후에 고칠 수 있으니 마음에 시달리고 생각에 거슬린 이후에 분발하며 얼굴빛에 조짐이 보이고 음성에 나타난 이후에 깨닫는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하늘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매번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있지만
사람들은 한쪽으로 기울기위해 인생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착하게 살던가,
악하게 살던가,
둘 중 하나는 경계에서 넘어지고 있지만
악하게 사는 것보다는
착하게 사는 것이 삶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공존하는 선악처럼
인간시스템 구조자체가 선과 악을 행하지 않으면
하루도 발을 뻗지 못하기에
눈을 뜨자마자 악과 선의 경계를 넘나들며
중심이 맞아 떨어지도록
공동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내려온 천지인(天地人)을 분석해보더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서있는 것은
위로는 하늘의 뜻이 있고
아래로는 땅의 뜻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사람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하늘의 뜻을 살필 수도 있고
땅의 뜻을 살필 수도 있고
사람의 뜻을 살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이미 하늘을 관장하는 절대자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때
기복신앙의 대표적인 메뉴인 덕과 복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땅에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은 다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땅에서 먼저 일어나야 하늘이 감동하고
하늘이 감동하고 나서야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마다 우주에너지인 기를 사람에게 보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통로를 만들어놓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 천지인을 공자의 심성지학에 적용해보면
욕성은 천에 해당하고,
인성은 사람에 해당하고,
지성은 땅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욕성은 하늘의 뜻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고
인성은 사람의 뜻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고
지성은 땅의 뜻이 있어야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하늘과 땅은 인간을 위해 조성된 안전장치이자
근접경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늘과 땅 사이에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루라도 하늘과 말을 나누지 않거나 안부를 묻지 않는다면
심신이 불안해서 발을 구르거나 안정이 안 되어 서성거리게 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원활한 삼각관계가
중심을 잡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로 볼 수 있다.
처음은 항상 불완전한 이론으로 시작되어지고 있듯이
공자가 그렇고
맹자가 그렇고
순자가 그렇고
육구연과 왕수인(왕양명의 본명)이 그렇고,
정주(송나라의 유학자 정호, 정이형제와 주희)가 그렇다.
세월이 갈수록 정치적인 논리와 시대상에 맞는 해석으로
다듬고 또 다듬어
2천년 이상의 세월에서도 견뎌낼 수 있도록
철저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
옛사람들의 철학이자 지혜로 통하고 있다.
심성지학은 하늘이 사람에게 내린 가장 신성한 덕목이자
우주의 중심에서 호령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무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처럼 수많은 성현들의 말씀으로 벽을 이루고
수많은 현자들의 말씀으로 담을 쌓아놓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현들의 말씀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한번 간 길은 이미 낯이 익어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걷지 않으면 발에서 쥐가 날 정도로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새로운 길이 아니면 갈 수 없다고 떼를 쓰거나
자신이 직접 새로운 길을 만들어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시대에 맞는 진리가 있고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시대에서는 공자만이 지니고 있는 인품과 그 길이 있고
맹자의 시대에서는 맹자만이 지니고 있는 인품과 그 길이 있고
순자의 시대에서는 순자만이 지니고 있는 인품과 그 길이 있고
주희의 시대에서는 주희만이 지니고 있는 인품과 그 길이 있음을 볼 때
하늘은 새로운 것이 아니면 인간을 시험하지 않는다는 철칙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기세로 서있음을 알 수 있다.
바람도 숲에서 머무는 동안은
과거의 바람이 되기도 하고,
현재의 바람이 되기도 하고,
미래의 바람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똑같은 바람이라도 시대에 따라 바람의 형태나 입체적인 곡선미가
서로 다 다름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
『맹자의 성선론 연구』의 저자인 양쩌보(揚澤波)는 맹자가 논한 성선의 많은 장 중에서 「고자(상)」제6장이 가장 대표적이다. 왜냐하면 배경으로 보면, 이것은 맹자가 제자들의 질문에 회답하여 자기의 성선론과 다른 인성이론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지만 논술의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고자의 논쟁과는 달리 다만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어 정면에서 성선론을 전면적으로 논술한 것이니 이와 같은 전면적인 논술은 『맹자』속에서 찾아내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정과 같은 것은 선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른바 선한다는 것이다. 불선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타고난 재질의 죄가 아니다. 측은지심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고 수오지심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고 시비지심을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仁)이요, 수오지심은 의(義)요, 공경지심은 예(禮)요, 시비지심은 지(智)이다. 인·의·예·지는 밖에서부터 나에게 녹아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구하면 얻고 내버려두면 잃는다.’라고 하는 것이니 혹은 서로 간에 배가 되거나 다섯 배가 되어 계산할 수 없는 것은 그 재질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시경』에 ‘하늘이 많은 백성들을 낳으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백성들은 마음에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이 시를 지은 자는 도를 아는구나.’ 그러므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으며 백성들은 마음에 떳떳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론 연구』의 저자인 양쩌보(揚澤波)는 이 단락이 성선론의 기본방향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향은 순서대로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논술하였다.
“첫째, 양심으로 성을 논하였고 둘째, 양심은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며 셋째, 양심본심은 성선의 근거이고 넷째, 악은 그 재질을 다하지 못하는데 있으며 다섯째, 성선은 사물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양심본심은 성선의 근거이다.
“양심본심은 내재적이지만 그것은 스스로 멈출 수 없고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나타난 것이 바로 인·의·예·지의 성이다. 이것도 본 단락에서 이미 말한 것이다. ‘측은지심은 인이고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고 시비지심은 지이다.’ 측은·수오·공경·시비의 심이 인·의·예·지의 성으로 분별되어 나타난다. 즉 성의 근거가 온전히 양심본심에 있으니 양심본심이 바로 성선의 기초이다.”
『맹자』속에는 유사한 논술이 매우 많으니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고시대에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그 어버이가 죽자 들어다가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에 거기를 지나가는데 여우가 파먹고 파리가 빨아먹고 있었다. 그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곁눈으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였다. 땀을 흘리는 것은 남들 때문에 흘리는 것이 아니고 속마음이 얼굴에 나타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들것으로 흙을 담아다가 덮었다.”
이러한 도리는 맹자가 「진심(상)」제21장에서 더욱 간결하게 말하였다.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심에 근본 하니 그 생기 있는 안색이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가득하며 사지에 베풀어져서 사지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맹자의 성선론 연구』의 저자인 양쩌보(揚澤波)는
“군자의 본성은 인·의·예·지가 그의 심에 근본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오는 안색은 순수하고 온화하여 얼굴에 나타나고 등에 반영되어 사지에 이르니 사지가 말하지 않아도 다만 행동거지에 따라 다른 사람이 한눈에 환히 알 수 있다. 때문에 반드시 내재하는 인·의·예·지의 심이 있어야 비로소 외재하는 군자의 성이 있을 수 있고 내재하는 인·의·예·지의 심이 있어야만 반드시 외재하는 군자의 성이 있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얻을 수 있다. 즉 맹자는 실제로 이미 일종의 새로운 도덕본체론 - 본심본체론(本心本體論)을 창립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맹자에서 내재하는 것은 심이고 외재하는 것은 성으로 양심본심을 포용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타나는데 그 나타난 것이 바로 선성(善性)이기 때문에 심은 선의 근거이고 성의 원두이다. 따라서 심이 없으면 선도 없고 성도 없으니 결국 모든 근거는 하나의 양심본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해에 근거하여 우리들은 맹자의 양심본심을 본심본체(本心本體)라고 칭한다. 이것은 첫째, 양심본심이 성선론 속에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고 둘째, 양심본심의 도덕본체론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데 있다.”
맹자는 사단을 대체로 두 가지 각도에서 논하였다.
첫째, 종적으로 어린아이에게 인·의·예·지의 단서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어린아이는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않음이 없고 자라서는 그 형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 이 방면의 논술은 많지 않다.
둘째, 횡적으로 사람마다 모두 인·의·예·지의 단서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소가 무고하게 피살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거나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마땅히 그 단서를 확충하여 부단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면의 논술은 비교적 많지만 전형적인 것은 「공손축(상)」, 제6장에 나온다.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이고 그 군주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할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다. 만일 그것을 채울 수 있으면 사해(四海)를 보존할 수 있거니와 만일 그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도 섬길 수 없다.”
주희의 『맹자집주』에서는 “서는 단서이다.” 라고 하였으니 ‘단’은 막 생겨나는 것이나 시작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맹자는 측은·수오·사양·시비가 인·의·예·지로 분별되어 막 생겨나는 것이거나 시작이요 인·의·예·지의 최종적인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확충하여 부단히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거나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일단 사단을 채울 수 있으면 사해를 보존하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
실제로 맹자의 이러한 사상은 일관하는데 유관한 논술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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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난다는 맹자(孟子)의 인성론(人性論).
"〈시경 詩經〉·〈주역 周易〉 등의 경전에도 성선에 관한 사상이 보이며, 이를 체계화한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중용 中庸〉에서는 '천명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고 하여 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 사람이 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으로 규정했는데, 맹자는 이것을 선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그 근거로 사람이 누구나 남의 불행을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이로부터 4단(四端)과 4덕(四德)을 이끌어낸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선한 성을 타고나지만 모두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인의예지의 4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차별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의 실마리를 힘껏 배양하고 확충하지 않은 결과라고 보고 이것을 군자(지배자)와 소인(피지배자)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았다. 즉 군자는 그것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반면 소인은 보존하지 못하고 상실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또 이러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현실사회에서는 군신·부자 관계, 지배와 피지배 관계 등 사회 윤리의 측면에서 구현된다고 보았다. 즉 효친(孝親)·충군(忠君) 등의 윤리 행위가 모두 사람의 4단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이는 군자가 통치하여 그의 선한 성을 소인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인정(仁政)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맹자의 성선설은 유학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희는 인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고 본연지성을 순선(純善)한 것으로, 기질지성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가 말한 성선은 본연지성에 해당한다. 주희의 성론도 기질지성의 혼탁한 정도에 따라 성인·군자와 일반사람들로 구분된다고 하여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뒷받침해주는 이념의 역할을 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에 유입된 주자학(朱子學)이 조선 중기 이후 지배사상의 위치를 확고히 했기 때문에 주자학 내에서의 성 이해가 활발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주희의 본연·기질지성론이 당시의 신분제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사회질서가 동요되면서 그와 같은 논리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적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맹자가 말한 성은 선을 좋아하는 기호에 불과하다고 하여 성으로 인간을 규정했던 성리학적 사유를 부정한 정약용(丁若鏞)의 성기호설(性嗜好說)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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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性)은 원래 악하며,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한 중국 전국시대 순자(荀子:또는 筍卿)의 인성론(人性論).
“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만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에 따르고 그의 욕구에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한 뒤에야 사양하는 데로 나가고 예(禮)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했고 교육의 효과를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예치(禮治)·법치(法治)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었다. 즉 "옛날에 성인은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편벽되고 음험하여 바르지 못하고 패란하여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임금의 권세를 세워 사람들에게 임하게 하고, 예의를 밝혀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법도를 제정하여 사람들을 다스리고, 형벌을 엄중히 하여 사람들의 악행을 금지시켜 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다 잘 다스려져 선에 합치하도록 했다. 이것이 성왕의 정치이며 예의의 구현이다"라는 것이다. 이 사상은 백성을 정치적 권력에 의하여 규제하려고 한 이사(李斯)·한비자(韓非子) 등 법가(法家)에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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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Zhu xi(웨)Chu Hsi.
1130. 10. 18 중국 푸젠 성[福建省] 우계(尤溪)~1200. 4. 23 중국.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중국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주희는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했는데, 당시 그 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였다. 그가 맡은 첫 번째 관직(1151~58)은 푸젠 성 동안(同安)의 주부(主簿)였다. 이곳에서 조세·감찰 업무를 개혁하고 지방에 있는 서원의 서고(書庫)와 학칙을 개선했다. 또한 그때까지 없었던 엄격한 의례와 관혼상제의 규율을 제정하는 등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동안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동(李侗)을 찾아갔는데, 그는 송 유학의 전통을 지킨 사상가로서 주희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1158년 주희는 그를 다시 방문했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1세기에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간에 걸쳐 실추되었던 유학의 학문적·사상적인 우위성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동은 그 가운데 가장 유능한 후계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주희는 유교에 전념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동안에서 주부를 역임한 뒤 주희는 1179년까지 다른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꾸준히 발표했다. 공적인 일에 관여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공직을 맡는 일은 계속 거부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권력자와 그들의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파당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의 한직을 계속 맡음으로써 교사와 학자로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그가 이 시기에 보낸 공식 서한과 당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친구·학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 그의 사상과 학문은 점점 깊어졌다. 예를 들면 1175년에 그는 철학자인 육구연(陸九淵)과 유명한 철학논쟁을 벌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설복시킬 수는 없었다. 육구연은 내재성(內在性)의 절대가치를 강조한 반면, 주희는 책을 통해 배우는 것과 함께 연구·조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 같은 견해를 충실히 이행하여 그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돈이(周敦頤 : 1017~73), 장재(張載:1020~77) 등의 논문들을 편찬하면서 이 철학자들에 대한 존경을 표시했고 이들의 철학을 집대성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4명의 사상가들은 맹자가 죽은 후에 없어진 '도'(道)의 전통을 회복시켰다고 한다. 1175년 그와 친구 여조겸(呂祖謙:1137~81)은 이 4명의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뽑은 문장들을 집대성한 〈근사록 近思錄〉을 편찬했다. 이 시기에 주희는 〈논어〉와 〈맹자〉에 관한 집주(集注)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나타냈는데, 이 집주는 모두 1177년에 완성되었고 그 후 중국·한국·일본 등의 지식인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주희는 역사에도 깊은 흥미를 보여 사마광(司馬光)의 역사서인 〈자치통감 資治通鑑〉의 축약과 재편집을 지휘했다(→ 역사편찬). 그 노력의 결과로 1172년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이 완성되어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로서 J.-A.-M. 무아리아크 드 마야가 쓴 〈중국통사 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1777~85)의 토대가 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정부에서 실행하는 도덕적 원칙의 귀감이 되었다. 1179~81년 장시 성[江西省] 난캉[南康]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면서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다가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 후 8세기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했다. 서원들은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인품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도덕적인 정부를 강조한 책인 〈대학 大學〉에서는 황제가 자신의 마음을 수양하면 뒤이어 전 세계가 도덕적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189년 이 책에 대하여 중요한 주석을 달았고 평생 동안 이 주석 작업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1189년에는 〈중용 中庸〉에 대한 주석서도 써냈다. 〈대학〉·〈중용〉이 〈논어〉·〈맹자〉와 함께 유교 교과과정의 기본서인 4서(四書)에 편입된 것은 대체로 주자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과감한 직언, 소신 있는 의견, 부패와 사리사욕이 판치는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공격 등으로 인해 파면되거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정적(政敵)인 한탁주(韓胄侂)가 그의 학설과 행동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 1230년에는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후대에는 주희가 비판했던 것보다 더 전제주의적인 통치자들도 조정에 대한 주희의 정치적 비판과 이성적인 자세에는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그의 철학체계 만큼은 유일한 관학(官學)으로 삼았는데, 이 같은 풍조는 19세기말까지 지속되었다.”
퇴계 이황
위키 백과(다음(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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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
출생 1501년 11월 25일 (음력)
조선 경상북도 안동
사망 1570년 12월 8일
국적 조선
별칭 자는 경호, 호는 퇴계
직업 학자, 문인, 정치인
종교 유교
부모 이식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편집] 생애
“이황은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편집] 이황의 사상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편집]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 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출처] 이이 [李珥 ] | 네이버 백과사전(http://100.naver.com/100.nhn?docid=127580)
이이 [李珥, 1536~1584]
요약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을 지냈다. 선조에게 '시무육조'를 바치고, '십만양병설' 등 개혁안을 주장했다.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노력 했다. 저서는《성학집요》,《격몽요결》,《기자실기》등이다.
본관 덕수
호 율곡·석담
별칭 자 숙헌, 시호 문성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강원도 강릉
본문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 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2011년 5월 20일 금요일
심성지학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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