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존재하는 자처럼
봄비와 함께 바람이 라일락꽃을 흔들고 있다.
과거의 성자들은 존경할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우주와 자연의 이치에 비춰보아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공존하는 선악만큼이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을 잡고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다.
어느 특정인 하나 때문에 우주와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극한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여
우주적인 혜안과 통찰력 그리고 영적 능력이 강화돼 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시대적 환경과 정보의 부재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들
그 깨달음이 온전한지는 지켜볼 일이다.
우주의 세계만 해도 넓고도 넓어 진정으로 다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적인 깨달음과 영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다 합쳐도
모자라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깨달음을 특정 전문가처럼 하나의 세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물론 달인의 경지에 이른 전문가의 수준보다는 훨씬 깊고 넓지만
우주와 자연을 대할 때는 어린애와도 같은 수준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끝없이 사유의 세계를 넓혀나가야 하는 마당에서
잠시 고요의 극점에 안착하여 드나듦이 없는 세계를 누린다고 해서
이 우주를 모두 통째로 다 얻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후만 하더라도 수시로 변화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자리에 영원히 멈출 수 있는 진공상태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우주와 자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극초미립자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손이 안 가는 곳이 없다.
그렇지만 이래라저래라 말하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 같아도
스스로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역할이다.
각종 현학적인 말과 형이상학적인 말을 만들어낸
철학자나 깨달은 자의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홀로 고고한 척
홀로 최상의 세계에 이른 척 해봐야
자연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와 자연은 그 안에서 노니는 모든 사물을 아우를 수밖에 없다.
모가 나도 안아야 하고
둥글어도 안아야 하고
잘나거나 못나도
다 안아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우주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모두가 일심동체이자 하나인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세계가 되었던?
그것이 현실 세계가 되었던?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비바람은 불고 싶어서 부는 것이 아니다.
계절은 오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의 의중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존재하니까
존재자의 곁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는 허무는 것이 좋지만
벽은 허무는 것이 좋지만
경계가 날마다 새로 생겨나는 것은
벽이 날마다 새로 생겨나는 것은
변화라는 양날의 칼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4월 19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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