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고요의 극점 – 무위자연, 무아, 색즉시공 공즉시색, 진공묘유

청아당 2022. 1. 10. 11:10

고요의 극점 무위자연, 무아, 색즉시공 공즉시색, 진공묘유

 

무위자연은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형이하학적으로 말하면 실존하고 있는 현상계를 말하며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무극의 상태인 본래의 면목을 말한다.

 

위대한 깨달음이나 영원한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수행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이 모든 현상을 경험하거나 깨우치고 싶어 하는 데 있다.

 

스승은 본래 가르칠 것이 없다. 다만 길잡이 역할은 할 수 있다.

깨닫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며 스스로 있는 자가 공 속에 존재하는 실존을 깨닫는 것이며 실존 속에서 공함을 깨닫는 것이다.

 

무아사상은 고요의 극점과 일맥상통한다. 한마디로 무극사상이다. 형체 이전의 상태는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만 우주가 탄생하고 나면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진공묘유가 등장하게 된다. 진공묘유는 진실한 있음다시 말하면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 공에도 유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진공묘유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유사하다.

 

다시 정리하면 고요의 극점(무극(無極), 우주의 본원지)=무아(無我), 비도(非道), 진공묘유(眞空妙有, 참나, 불성, 해탈, 견성)=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 나 스스로 존재하는 것, 이 우주는 본래부터 그렇게 존재해왔다.

 

언어로 구분하거나 사념으로 분별하여 쪼개고 나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우주와 자연을 따로 구분해서 볼 것이 아니라 본래의 진면목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끝인 것이다. 거기서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을 따로 구분하거나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주본원지로부터 전달된 에너지체가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원안에서 한 바퀴 돌다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념도 들지 않을 때까지 마음을 고요히 해라. 그렇게 되면, 그때 당신은 모든 것을 갖게 된다.

- 레스터 레븐슨 -

 

여러분은 진리를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답이 있습니다.

자신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말 그대로 여러분의 의식, 여러분 마음 자체가 모든 진리의 답이라는 말입니다.

진리란, 깨달음이란, 그리스도의 경지란,

지나간 과거나, 또는 미래에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조금 역설적으로 들리실 수 있겠지만,

진리란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내 마음 안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물과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에는 어떠한 정해진 이치가 있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을 하다 보면 쏟아지는 빛의 세계를 보게 된다.”

현실은 명멸하는 빛이다.”

현실은 한 장의 명멸하는 빛의 이미지일 뿐이다.”

육안의 시야로 빛이 들어와 보이는 한 장의 이미지로 남을 뿐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된 고정된 실체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물질은 공(빈 허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다.’라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색이란 물질, 형태, 색깔,

보여지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보여지는 모든 것이 곧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죠.

또한 일체유심조라는

말씀과도 상통합니다.

일체의 현상계는

마음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는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현실은 빛의 환영이다.’

<왓칭 1, 2> MBC 기자였던 김상운 -

 

 

그대로의 벌거벗은 마음 알기입니다.

즉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곧 해탈의 길이라고 제시합니다.

윤회와 열반을 모두 수용하는 한마음에 절한다.

그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 영원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며

그것은 항시 투명하고 항시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빛나고 명료하지만

인식되지 않는다.

 

1.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것은 우주의 본체

 

있는 그대로의 마음 알기 =

현상계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자연스럽게 해방시키는 가르침

 

보편 편재 의식

그것이 실재

 

공성(空性)

변화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는

원초적인 본질

생멸의 우주적 근원

그대로의 벌거벗은 마음 알기<티벳 해탈의 서> -

 

 

완벽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부린다.

그 어떤 것도 붙잡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응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장자 -

 

 

첫째, 자신만의 신앙과 습관을 따르며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마음을 알 수 없다.

 

둘째, 유형과 무형의 진실을 모두 포함하는

중도여야 집착을 떠난 법을 실천하여

이 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세 번째, 그것은 열반의 축복과

모든 슬픔을 품은 한마음이다.

 

=진아=불성=

모든 것의 기반 = 공성

 

 

마음을 무어라 부르는가는 중요치 않으며,

마음은 진실로 하나이고,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티벳 해탈의 서> -

 

 

유일한 실재

한마음

 

물질은 마음이 낳는다.

 

자기 자신의 마음은

공성의 투명한 빛이고

법신이며

특성이 없고 구름 없는

하늘과 같다.

 

법은 마음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마음 이외의 다른 명상 장소는 없다.

법은 마음속 아닌 어디에도 없고

해방을 선사할 그 외의 법은 없다.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라.

<티벳 해탈의 서> -

 

 

2. 무경계의 참나

 

내관(內觀)을 통해

한마음을 인식한다.

 

나 자신(나라고 여겨지는 존재 의식, 있음 자체)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을 때,

거기에서 찾음의 목적이 달성된다.

또한, 찾음 자체도 끝난다.

 

행위와 행위자의 구분이 없으니, 행위자를 찾아도

어디서든 행위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 모든 성과 획득의

목표가 달성되고 또한 최후의 완성 그 자체에 이르도다.

<티벳 해탈의 서> -

 

 

라는 느낌.

존재성.

있음자체.

한마음.

참나.

 

 

내가 절대적인 보는 자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발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더욱 명백해진다.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발견해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것이 실은 모든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자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곧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는 자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곧 경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정한 나가 실제로는 외부의 현실과 하나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계가 곧 나의 몸이며,

보고 있는 내가 곧 보여지는 대상이었다.

<티벳 해탈의 서> -

 

 

있다고 여기는 모든 실체는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도다.

이슬 같으며, 번개 같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

금강경에서 말하듯이 맑은 마음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다.

그리고 이 진실을 이해하면 이기심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알아차림의 빔 속에서 자아감이 사라질수록 자연히 우리는 더 자비로워진다.

<금강경> -

 

 

보는 자가 없으면 보이는 대상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깨달은 사람은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 영상 모두가 임을 안다.

는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영상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영상이 비치지 않는 텅 빈 스크린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다.

그는 늘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깨달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한다.

현상계 자체가 이다.

인도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 -

 

 

모든 이원성을 초월한 마음 상태는 해방을 가져온다.

마음을 무어라 부르는가는 중요치 않으며,

마음은 진실로 하나이고,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티벳 해탈의 서> -

 

 

3. 삶이 곧 참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라고 믿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현재 생각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라고 부르는 내적 감각이 곧 세계라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의 삶이 곧 참나의 발현이다.

나와 세상에 경계가 없어질 때 그것은 하나로 보여진다.

영적인 옷을 입은 현실도피를 경계하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감수할 때

당신은 저절로 초월하게 된다.

모든 것이 마음 안에 있으며 참나의 표현이다.

영적인 것이라는 개념도 던져버리고

일상생활이라는 개념도 던져버려라.

오로지 나뉘지 않는 전체의 생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 삶은 경이로움이 된다.

늘 언제나 놀라워한다.

받아들임이 전부다.

보이는 모든 것이 곧 당신이다.

당신은 순수 의식 자체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

 

 

우리에겐 삶 자체를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어려움도 없고, 어렵지 않음도 없다.

모든 일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중도(中道)

자신의 불멸이나 절멸을 향한 그릇된 욕망에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와

다른 모든 이원론적 개념들을 초월한다.

 

깨달음 해탈이란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영원히 존재한다.

지금 여기가 해탈의 체험이다.”

지금 여기가 바로 그 체험이다.

해탈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도대체 왜 해탈을 추구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자신이 속박되어 해탈을 얻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해탈은 목적이 될 수 없다.

해탈의 문은 바로 지금 여기이다.

해탈이 목적이 되는 순간 당신은 그 문을 잃어버린다.

목적이 미래가 되기 때문에 모든 영적인 수행자들의 함정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서적을 읽고 그것을 상상하며 자신이 그 생각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에 존재할 때만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찾는 것을 포기하라.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 잊어라, 그저 즐겨라.

현재 머무는 강렬함만이 필요할 뿐

미래를 향한 욕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허용하라

그대가 이미 깨달은 존재이다.

그저 알면 된다.

당신은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해탈은 우리의 본성이자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

명상하는 일 없이, 방황하는 일 없이,

참상태를 들여다보라.

거기에 자기 인식과 자기 이해와

자기 조명의 찬란한 빛이 있다.

그와 같이 빛나는 이것을

보살의 마음이라 부른다.

<티벳 해탈의 서> -

 

 

4. 법의 화신인 보살의 도

 

삶과 죽음을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모든 존재가 신성한 하나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그 자신은 비록 목표를 달성했더라도 그와 함께 전체를 이루는 다른 모든 존재들 역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한 달성된 목표를 충분히 향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삼계를 두루 살펴도 마음속 아닌 어디에서 붓다를 찾을 수 없다.

개인의 마음은 다른 마음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한마음의 본질을 깨달으면

삼신(三神)이 영원히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참나는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이며 자발생의 지혜이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품는 삼신의 표현이다.

첫 번째 방식인 법신(法身, 본질적인 몸)

원초적이고 변하지 않으며 형태가 없고 영원히 자존 하는

깨달음의 본질이다.

두 번째 방식은 보신(報身, 반영된 깨달음)이며

그를 통해 천계에서 선정불과 다른 깨달은 존재들이

초인적인 형태로 구체화된다.

세 번째 방식은 화신(化身, 육화한 몸)인데

신성하고 순수한 인간의 상태

인간 관점에서 본 실제적 깨달음.

한마음의 인식은

모든 것을 해방시킨다.

지적인 작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깨달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 안에서

그대 자신의 지혜를 찾으라.

그것은 넓고 깊음이로다.

크고, 크고, 크도다.

신성한 지혜여.

윤회계 전체가 텅 빌 때까지

이 가르침이 끝나지 않기를.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라.”

 

2022110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참고 :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티벳불교의 비밀 경전. 있는 그대로의 벌거벗은 마음 알기. 해탈의 서 1- YouTube

 

위키백과,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오온 :

5(五蘊팔리어: pañca khandha, 산스크리트어: pañca-skandha) 불교에서 생멸 · 변화하는 모든 것, 즉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는 (· (· (· (· ()의 다섯 요소를 말한다.[1] [2] 이들을 각각 색온(色蘊: 육체, 물질· 수온(受蘊: 지각, 느낌· 상온(想蘊: 표상, 생각· 행온(行蘊: 욕구, 의지· 식온(識蘊: 마음, 의식)이라고도 부른다. 5온을 5(五陰), 5(五衆) 또는 5(五聚)라고도 한다.[3]

 

육근 :

육근the six organs of perception, the six sense faculties , 六根육입(六入), 육처(六處), 입입처(六入處), 내육입(內六入), 내육입처(內六入處), 육내입처(六內入處), 육촉입처(六觸入處), 육촉처(六觸處), 육정(六情), 육정근(六情根)

 

요약 지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육입·육처·입입처·내육입·내육입처·육내입처·육촉입처·육촉처·육정·육정근

연원 및 변천

불교 인식론은 대상을 반영, 인식하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 pañca skandha)과 이것을 세분화한 십팔계(十八界, aṣṭādaśa dhātava)로 이루어져 있다.

십팔계는 여섯 가지 인식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 육경(六境, ṣaḍ viṣayā)과 이것들을 지각하는 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인 육근(六根, ṣaḍ indriyāṇi), 그리고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에 각각의 식을 붙인 육식(六識, ṣaḍ vijñāna) 등 총 18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십팔계를 구성하는 육경과 육근을 십이처(十二處)라 세분화하기도 하여 육경을 외처(外處), 육근을 내처(內處)라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불교 인식론은 이 오온 십팔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안이비설신이라는 오근은 감각기관인 눈····몸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섯 번째인 의근(意根)과 이로부터 파생한 제육식(第六識)은 부파불교 시대 이후부터 항상 논란이 되어왔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업과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인도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발생한 불교가 서구의 순수 인식론적인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 해석하는 것을 넘어 신통, 윤회와 같은 비형이상학적인 주제 또한 인식론을 통해서 설명해야 되는 배경 때문이었다.

어원을 통해서 살펴보면 육근이라고 불리는 싸드 인드리야(ṣaḍ indriya)’‘6’을 뜻하는 싸뜨(ṣaṭ)’가 후행하는 모음 ‘i’삼디(saṃdhi)’의 영향으로 바뀐 싸드인드리야가 결합된 것으로 인드리야는 한역의 제석천(帝釋天)’, 즉 번개를 무기로 쓰는 인드라(Indra)와 관련되어 있다. 어근에 대한 몇 가지 해석들이 있으나 어근 인드(indh)’에는 ‘(자기 스스로) 붉을 밝히는 것(lighting)’이라는 뜻이, 어근 인드(ind)’에는 힘을 갖춘(to be powered)’이라는 뜻이 있다.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 śāstra)가장 수승[最勝]한 자재(自在)이며, 빛나고 현저[光顯]하기 때문에 근이라 이름한 것이니, 이에 따라 근은 증상력(增上力:탁월하고 뛰어난 힘)의 뜻이라는 것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다.’라고 나오는 것처럼, ‘자재 현광의 증상력을 갖춘 것, 즉 지각기관으로서의 자기 힘을 갖춘 것이라는 뜻이다.

 

탐진치 :

불선근(不善根) 3  욕계 (· (· ()3가지 번뇌 또는 번뇌성 마음작용(심소법)을 말한다.[1] 불선근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도 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욕전탐(欲纏貪: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탐, 욕계에 속한 탐, 욕계의 탐) (: 진 즉 유정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은 오직 욕계에만 있음[2] [3] [4]) 욕전무명(欲纏無明: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무명, 욕계에 속한 무명, 욕계의 무명) 3불선근(三不善根)이라 하며, 각각을 탐불선근(貪不善根· 진불선근(瞋不善根· 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부른다.[5] [6]  탐불선근 3 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 만을 가리키며진불선근의 경우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4] 진불선근  그 자체를 가리키며치불선근 3 무명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 무명만을 가리킨다.

또한불선근(不善根) 3(三毒), 3(三火) 또는 3(三垢)라고도 한다. 그리고  ·  ·  탐욕(貪欲· 진에(瞋恚· 우치(愚癡)라고도 하며(· (· ()라고도 하며, 또는 (· (·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1] [7] [8]

 

육바라밀 :

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의 실천행이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 이상경인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실천수행법인 육바라밀은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의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6바라밀다(六波羅蜜多)·6(六度)·6도피안(六到彼岸)이라고도 한다.

6바라밀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로 이루어져 있다.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는 산스크리트 '파라미타'(pāramitā)를 음역(音譯)한 것으로 완성·피안(彼岸) 등을 의미한다. 원래 바라밀의 개념은 원시불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파불교(部派佛敎)의 논서인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에서는 보시·지계·정진·반야의 4가지 바라밀을 논하고 있다.

6바라밀은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계((()의 삼학(三學)과 대승불교의 수행이 목표로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이념에 근거하여 팔정도(八正道)를 비롯한 모든 수행법들을 대승불교의 차원에서 체계화한 것이다 (자리이타).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 6바라밀은 곧 대승(大乘), 즉 보살의 큰 수레로 표현될 만큼 중요시되었다. 6바라밀의 내용과 순서 및 상호관계 등에 대한 해설은  마하반야바라밀경 摩訶般若波羅蜜經을 비롯한 여러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과 대지도론 大智度論등의 여러 대승경론에 자세히 논술되어 있다.

화엄경 華嚴經십지품 十地品에서는 반야바라밀을 다시 방편(方便((()4바라밀로 나누어 모두 10바라밀이라고도 한다.

 

팔정도 :

8정도는 고집멸도(苦集滅道) 4성제 중 마지막 도제(道諦)의 구체적 내용으로서 설명된 것이다고집멸도4성제는  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구성되어 있다.[4] 여기에서  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고집멸도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1]

상좌부 불교에서는 8정도가 순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나열한 것으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천 수행이라는 측면에서는 8정도를 크게 (· (· () 3(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정견 · 정사유 에 속하며정어 · 정업 · 정명 에 속하며정정진 · 정념 · 정정 에 속한 것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  · 는 서로를 도와 깨달음 증득하게 하는 것이지만, 크게 보아 에 의지하여  하고에 의지하여  한다고 본다.

8정도(八正道산스크리트어: āryāṣṭāṅgamārga, 팔리어: p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Noble Eightfold Path}}), 8성도(八聖道) 또는 8지성도(八支聖道) 사성제 가운데 마지막의 도제에서 가르치는깨달음(멸제)을 성취하는 원인이 되는 "여덟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길, 수단 또는 실천 덕목"이다.[1] 737도품의 마지막 그룹인 제7과의 수행법이다. 8정도의 반대를 8(八邪) 또는 8사행(八邪行)이라 한다. 8정도를 청정한 수행 또는 실천이라는 뜻에서 범행(梵行)이라고도 한다. 8정도를 구하는 것을 범행구(梵行求)라고 한다.[2] [3]

팔리어에서 ()은 막고(maggo)라는 단수형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덟 개의 이 전체로서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은 나머지 일곱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여덟 개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실천되면 다른 일곱 개의 이 그 하나에 포함되어 동시에 행하여지는, 서로 포섭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팔정도의 영어 번역어도 'Noble Eightfold Path (고귀한 팔중의 길)'라고 하여 길(Path)을 복수가 아닌 단수로 표현하고 있으며, 여덟도 단순한 여덟(eight)이 아닌 팔중(eightfold, 八重)으로 표현하고 있다.[1]

팔정도의 여덟 구성요소 또는 여덟 개의 길은 다음과 같다.[1]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유(正思惟·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정정진(正精進·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인의예지신 :

떠도는 생각

인의예지신과 오행

선묘(善妙) 2021. 6. 6. 12:53

 

오상五常은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道理나 덕목德目을 뜻한다. 바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오상五常이라 한다. 삼강오륜과 함께 유교 윤리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데, 한대漢代에 이르러서 동중서董仲舒라는 사람이 이전에 맹자가 주창한 인···에 신을 포함시켜 인간이 항상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기본덕목으로 설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오상五常도 양생법의 관점에서는 오성五性의 생리로서 심리상의 도덕(仁義禮智信)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국선도의 청산선사께서는 수도를 깊게 하면 할수록 자연히 심성心性이 변하여 오성의 실행實行으로 나타나는데, 누가 가르쳐서 또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수도함에 따라 자연히 생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오상五常을 오행五行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은 하늘로 뻗어나가는 나무의 작용인 목에 해당한다. 은 베풀어 모든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주관한다. 그리하여 봄의 상징은 하늘이 사랑을 베풀어 봄에는 모든 만물의 생명이 탄생되는 것이다. 은 인자함이나 자비를 베푼다는 뜻인데, 그것은 생명을 소생시키고 탄생시키는 덕이다.

는 위로 치솟으며 타오르는 불의 작용인 화에 해당한다. 만물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여름의 화는 성장과 발전을 주관하여 모든 사물이 질서를 유지하여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는 문명을 나타내며 밝음을 상징한다. 하늘에 떠있는 일월과 같이 세상을 훤히 비추어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처리하는 예와 같다. 항시 밝은 상태를 유지해 자신을 비추어보고 예절로써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확실히 표현한다.

은 건실한 흙의 작용인 토에 해당한다. 사계절이 성실하게 운행되도록 하는 토는 후덕하고 묵묵한 흙의 형상으로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며 목화금수木火金水를 주관하여 믿음과 성실, 신용으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근본이며 조화의 상징이다.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믿음과 신용을 보여준다. 오행五行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또 각기 계절의 끝에 붙어 있으면서 오행五行 상호간을 조화로써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토, 한 계절이 지나갈 때면 반드시 다음 계절을 맺어주는 신용을 지킨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믿음과 신용으로 서로 의지하며 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이 파괴될 때는 불신과 배신과 사기가 일어나며 질서가 파괴되어 모든 분야에서 파멸이 오게 된다.

는 만물을 서늘하게 하고 쪼그라들게 하는 쇠의 작용인 금에 해당한다. 만물의 결실을 맺게 하는 가을은 오행 중 금의 기운이 가장 강한 금왕지절金旺之節이라고 한다. 살릴 것은 살리고, 죽일 것은 죽이는 살벌殺伐한 기운이 감도는 계절, 이것이 바로 금이다.

<적천수適天髓>에서는 가을을 숙살지기肅殺之氣라고 하고, 홍범구주洪範九疇에서는 종혁從革이라고 했다. 은 단단하지만 외부의 충격이나 힘에 의해 모습을 바꾼다는 뜻으로,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시기에 전혀 굴하지 않고 뜻이 통하는 사람끼리 서로 목숨을 걸고 하나가 되는 의리義理야말로 금이 말하는 덕목德目이다. 나라에서 범죄인을 다스릴 때 여는 것이 추국청推鞫廳인데, 이때의 가 바로 가을의 숙살지기肅殺之氣이다. 그러므로 가을은 모든 것이 열매 맺는 시점에서 추살과 불의를 냉정하게 처벌하는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

는 속을 잘 감추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물의 작용인 수에 해당한다. 겨울 운동의 시작은 가을의 살벌한 심판이 끝나갈 무렵에 땅에 떨어진 것을 밑으로 가두고 응고 시키려는 활동에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지혜를 상징하며 모든 것이 완성을 이루어 동면에 들어가서 통일과 수렴을 주관한다. 가 수와 닮은 점이다.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태이며 이것을 라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겨울은 만물의 씨앗을 잘 감춰서 다음해의 봄(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담는 그릇에 따라 그 형상形象이 달라지는 유연한 자세와 안으로 내실을 다져 씨앗()처럼 단단하게 응고시키는 능력이야말로 수가 말하는 지혜를 구하는 자세이며 덕목德目일 것이다.

-부정적 예
인자함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 타인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
의로움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 의롭지 못한 세상만사를 보며 분개하는 사람
예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재미를 느낀다 : 타인을 깎아 내리며 험담하는 사람
지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슬픔을 느낀다 : 당면할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없어 슬픈 사람
신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욕이 생긴다 : 사람이 마땅이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맹세, 즉 신의를 잃은 사람이 욕망에 잠식된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희노애락이 부정적이라고 볼 순 없다.

욕망없이는 사람이 사람이 아니기 때문.

-긍정적 예
인자함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 게임을 할 때 상대방에겐 봐주지 않아야 재미있다.
의로움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 때론 화를 내며 풀어야 적당히 건강한 정신이 유지가 됨.(그래서 화낼 타겟을 찾음 = 가십)

예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재미를 느낀다 : 절친한 친구들끼리 욕하면서 만담을 나눔
지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슬픔을 느낀다 : 슬픔으로 감정을 정화한다. (그래서 비극적 작품을 찾음 = 카타르시스)
신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욕이 생긴다 : 적절히 개인적인 욕망을 꿈꾸어야 정신이 삭막해지지 않는다. 삶의 추동이 생긴다.

-정리

패턴을 보면 특정 상황에서 특정 정서를 느낌. 여기서 특정 상황이란 오상이 사라진 상황을 말함.
, 이러한 욕망을 중심으로한 사람의 정서는 오상의 결여태.

유가철학은 사회가 마땅히 나아갈 질서에 관한 담론
(도가철학은 그 마땅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담론)

유교와 심리

의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노함을 느끼기 쉽다.
인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희함을 느끼기 쉽다.
예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락함을 느끼기 쉽다.
지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애함을 느끼기 쉽다.
신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욕이 생겨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