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중론(중도(中道))

청아당 2022. 1. 23. 22:31

중론(중도(中道))

 

()는 길이다.

길은 도()이다.

 

()는 우주와 통하고 안팎을 휘젓고 다니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다.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본다는 것은 우주의 본원지와 연결된 나를 발견하는 것이며 투명한 우주의 눈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 무상(無常), (), 무아(無我)를 발견하는 것이며 고요의 극점에 다다르는 일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우주의 눈으로 바라보는 실체이며 기체가 액체로 액체가 고체로 변하는 과정이자 고체가 액체로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조건과 작용에 의해 우주의 형상이 생성소멸하는 것처럼 중도는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우주의 평행대이기도 하다.

 

우주는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작은 단위로 형성되었건 가장 큰 단위로 형성되었건 우주 안에서 생성소멸의 과정을 거치며 우주의 눈에 비치거나 우리들의 현실의 눈에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진공 속에서 묘유를 발견하거나 묘유속에서 진공을 발견하듯이 황금빛 찬란한 빛을 통해 공() 속에서 우주의 가장 안쪽인 고요의 극점에 이르러 더는 들어갈 수도 더는 나아갈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도()는 중도(中道)에 머물며 우주의 한복판에서 처음과 끝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리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하기도 하고 있음과 없음을 말하기도 하고 연기를 말하기도 하고 가없는 우주를 순식간에 다녀오는 마음의 본연을 말하기도 한다.

 

전변설과 적취설(연기설)에 의하면

전변설(轉變說)은 기독교를 비롯하여 힌두교, 회교, 유교, 도교 등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의 주재자가 창조해내거나 한곳에서 둘 이상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와 기가 하나로 움직이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처럼 일원론(一元論)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취설((積聚說), 연기설(緣起說))은 유일하게 불교에 의해 탄생되었으며 두 개의 형태가 하나로 움직이거나 조건과 작용에 따라 하나가 둘의 작용으로 펼쳐지며 생성소멸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포함관계에 있어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둘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둘이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고 볼 수 있어 이와 기가 따로 움직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처럼 이원론(二元論)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기일원론이든 이기이원론이든 결국은 한곳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보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더 옳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펼쳐질 때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처럼 움직이고 있어 혼동이 올 수 있지만 본원으로 추적해 들어가면 둘이 하나로 움직이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 더 명확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는 채찍이 필요할 때가 많다.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거나 바라보는 것은 그래도 쉬운 편에 속한다. 문제는 사성제(고집멸도)와 팔정도를 실행하는 일이다. 거기에다 연기론까지 합하면 심신의 자유는 억압으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고개를 내미는 것이 윤회이다.

 

우주는 수없이 윤회하며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거나 소멸시키는 운동을 끊임없이 해왔다. 과거에도 해왔고 현재도 해나가고 있고 미래에도 해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윤회조차도 맥을 못 추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영원히 한곳에 고정되어 더 이상 나아가거나 물러서지 않는 경계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쪼개고 또 쪼개다 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경우와 같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존하는 선악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균형을 잡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중도는 공존하는 선악과 유사한 면이 있다.

 

선이 악의 상황에 놓이거나 악이 선의 상황에 놓이거나 또는 이 둘의 관계에서 묘한 상황에 처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배열을 요구하고 있기에 중도는 곧 공존하는 선악과 많이 닮아있는 꼴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선악은 반드시 선과 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에 인과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 연기론과도 통하고 있고 사성제(고집멸도)와 팔정도(팔사도) 등 서로 연결성을 갖고 이어져 있어 공존하는 선악과 중도는 닮은 점이 많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중도(中道)는 바로 이러한 때에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기 위해 존재한다. 존재를 부정하거나 부정된 존재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어느 쪽에 놓아두든지 간에 마술을 부리듯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중도라는 묘수를 두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오뚝이처럼 어느 쪽으로 밀어붙여도 복원력에 의해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부정하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으로 부정하거나 실존하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공하다고 모두 다 공한 것이 아니듯이 실존한다고 모두 다 실존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 둘의 관계 속에서 연결성을 유지하며 있음과 없음을 연결시키고 유무의 생명력을 거둬들이거나 불어넣는 역할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주의 근본원리가 일원성으로 이루어져 있느냐 또는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점이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이원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독교 등 다른 종교에 의하면 일원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혼동이 오기 쉽기 때문이다.

 

우주의 근본원리는 과학이 밝혀내야 할 일이지만 인류의 성자들이 밝혀낸 바로는 현재로서는 일원성과 이원성이라는 양분론으로 갈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의 깊이는 모두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근본원리는 헤아릴 수가 있다.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통찰력이 발달되고 통찰력이 발달되면 우주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이 발달된다. 그것은 단순히 뇌의 기능인 생각이나 생물학적인 기능으로 추측해내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너지와 연결된 본원의 에너지체가 수행자의 몸과 최적화된 에너지로 결합될 때 발생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숭고하고 빛의 근원으로 파고들 수 있는 강력한 우주적인 힘이 깃들어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나 견성이나 열반 등은 바로 이러한 에너지체의 작용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우주적인 힘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아야 할 내면의 세계를 본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바라보는 학문이나 이론적인 현상을 바라보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바탕에는 인고의 세월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고행(시련이나 고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우주는 아무에게나 그 귀중한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는 아무런 말이 없다.

 

중도(중론)라고 말한 적도 없고 도()라고 말한 적도 없다. 더구나 공간과 시간을 말한 적도 없다. ()이니 무상(無常)이니 무아(無我)니 고()니 이러한 단어들은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고요함 속에서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이보다 더 아름답고 황홀한 것은 없다. 아니 이보다 더 간명하고 명쾌한 것은 없다.

 

우주는 말보다 행위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천체의 운행으로 작용되어질 수도 있고 숨겨진 영계의 우주로 작용되어질 수도 있다. 물질과 비물질, 생명과 무생물에게 필연적으로 작용하여 그 모든 것을 생성하거나 소멸시키며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에서 하나로 이어나가거나 하나에서 전체로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2022123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