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고려궁지(高麗宮址)

청아당 2018. 1. 17. 11:25

고려궁지(高麗宮址)

 

빈터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아니다.

 

발굴지안내판과 함께
외규장각(外奎章閣)
400 세월을 함께한 느티나무와 함께  있다.

 

 

궁궐은 무너져도 역사는 살아있다.

 

지워진 역사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가 아직도 숨 쉬고 있다.

 

역사의 근성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다.

 

국민이 원하고 있고

국민이 살아있는 한

역사는 잊혀지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1232년 고려수도를 강화로 천도하였고

1234년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

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1627년 강화유수부로 승격하였고

1781~1782년 외규장각(왕립 도서관)을 건립하였고

1866년 병인양요로 많은 건물이 불에 타고

2003년 외규장각을 복원하였다.

 

 

그렇게도 보고 싶은 고려 땅위에
새로운 조선이 들어서고
병인양요 때 왕실주요 행사인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를 약탈당하고
대한민국에서 다시 임대방식으로 되찾아왔고
2003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 외규장각이다.

 

 

입장료 900원을 내고 
고려궁지 계단으로 올라서면 
승평문(昇平門) 두 팔을 벌리며 반겨주고 
고려궁지연혁과 고려시대조선시대 안내문이 
친절한 설명을 해준다

강화동종과 이방청, 강화유수부 동헌이 

손님이 올 때마다

한걸음에 달려와 반갑게 맞이해준다.

 

그리고

강화유수부 동헌엔
영조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을 남겨 놓았고 
 옆으론  400  느티나무가 

빈터만 남아있는 고려궁지를

주인처럼 반갑게 맞이해준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을 따라 올라가면

용흥궁(龍興宮)이 있고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한국정통양식과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서 있다.

 

세상을 향한 당찬 설욕전

전설(湔雪) 마녀(魔女)’ 촬영지이기도 하다.

 

2018 1 16 화요일

 

청아당    

 

 

자료출처 :

안내문에 따르면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고종 19(1232)에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환도(1270)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 외에도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 등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있다.

 

 

안내문에 따르면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고려궁궐이 있었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崔瑀)2,0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을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후 대몽항쟁기 39년간 고려왕궁으로 사용하다가 몽골과의 화친 후 고려왕이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자(1270) 몽골의 요구에 따라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행궁, 유수부 건물과 함께 민가까지 들어서면서 고려시대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다. 현재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궁궐의 영역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래는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대규모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궁궐터인 이곳에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광해군 14)에 봉선전(奉先殿 : 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고, 1631(인조 9)에는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으며, 1638(인조 16)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여, 1654(효종 5)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숙종 21) 장녕전(長寧殿), 1713(숙종 39) 만녕전(萬寧殿)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정조 6)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을 약탈해가고 건물은 불태웠다.

1964년 고려 궁궐터는 사적 제133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복원 정비되어 현재는 유수부 동헌, 이방청, 강화동종과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이 있다.

 

외규장각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크게 주목 받게 되고 국왕과 왕실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정조6(1782)에 건립하였다.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여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본 성당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주교가 1900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 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 길이 10) 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물양식은 한국정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안내문에 따르면

강화도령 첫사랑 길

강화도령 첫사랑 길은 원범(元範, 철종 아명 1831~1863)이 강화도에서의 귀양살이 중 강화도 처녀 봉이(鳳伊)와 나누었던 풋풋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 가는 도보여행길입니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 원범이 5년간 살던 초가집을 그가 왕이 된 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와집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이후 수차례 고쳐지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범이 왕이 되던 그 해(1849) 봄부터 한줄기 밝은 빛이 원범이 살고 있던 초가집 쪽으로 비추어서 용()이 일어날 조짐이라 하였다. 그 해 6월 원범을 모셔가기 위한 봉영단 일행이 강화도 도착하기 하루 전에야 그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용이 일어난 집’, ‘용흥궁(龍興宮)’이라고 불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