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기도의 힘-그냥 믿어라!

청아당 2013. 6. 30. 19:51

기도의 힘-그냥 믿어라!

 

종교를 믿기 위해서는 교리를 알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향해

믿음을 요구한들

그에 응하지 않을 사람들 때문에

목회자나 전도사의 임무가

허망하게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거나

보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종교의 힘은

공동체예배를 통한 기도의 힘에서 나오듯이

기도의 힘은 바로 종교의 힘으로 연결되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유형의 존재보다

무형의 존재가 더 신비롭고

형이상학적인 고귀함을 지니고 있기에

평범이라는 틀을 깨어가면서까지

신비의 장을 열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

오감으로 먼저 느껴보고

그것도 안 되면

육감으로라도 느낄 수 있게

바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곳곳에

그물을 펼쳐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믿는다는 것은 보는 거와 같기에

본다는 것은 믿는 거와 같기에

그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감동하고

스스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가 하나로 통합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영접하며

각각의 별칭에 맞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무로 우주와 인간과 교감을 나누고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님의 분신으로 인간과 교감을 나누고

성령님은 또 다른 하나님의 분신으로 영적능력을 구현해가며

우주적인 원에 뛰어들어

시작과 끝이 하나인

한 몸으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독교에서

하나님보다 먼저 예수를 전면에 내세워

연결고리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을 헤아려보면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삼위일체 중의 하나이지만

분신술까지 써가며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영적교감을 나눌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모르는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별화를 시도하기위한

숨은 노력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는 6천 년

과학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는 지구만 45억 년

거기에다 인간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600만 년 전에 살았던 아프리카 유인원으로 추정되고

더구나 천지창조를 시작으로

우주창조의 역사를 더듬어 올라가보면

그 오류는 참으로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과연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는 비교조사 해봐야 알겠지만

성경이든

과학이든

논리적으로 모순이 많은 것만은 피할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미 물과 불로 인간을 심판해보았지만

그 끝은 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하드디스크에 보존된 귀중한 자료나 정보가 포맷된 후

계속해서 새로운 자료나 정보가 축적되는 과정과 비슷하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허망한 심판인가?

아마도 끝을 보기보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인간위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보다 인간이 먼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는 우주선과 같다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종교가 없었다면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가면서까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한없이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영감축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내세우고 있는

기독교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예수 없는 기독교는 그 어느 곳이든

설 땅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기독교를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예수의 존재는

구약과 신약을 주관하고 있는

하나님조차 함부로 관여하지 못한 채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엮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느끼고 실천해야할 일은

삼위일체에 녹아든 신성함이기에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하나님과 영적교감을 나누기 위해

하늘 문으로 통하는 절차를 밟는 일일 것이다.

 

본인의 말처럼 연약한 몸으로 버티고 서있는

빈태국 목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보통 엘리트나 스마트한 사람일수록

전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을 직접 보여주면

믿겠다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있어

참으로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솔직히 종교를 통해 기적이나 이적을 경험하는 일은

종교이전이나 종교이후인 지금도 계속해서 내려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석가나 예수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기적이나 이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는 소리이다.

다만 체계적으로 운영되어지고 있는 종교인가?

그렇지 않은 종교인가? 에 의해 그 길이 다르지만

그 근본은 늘 하나에서 여럿으로 흩어졌다

다시 하나로 모이는 작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세월동안 각인된 화석처럼

진리라는 말로 우리들의 귀와 눈 그리고 손발을 묶은 후

입까지 통제해가면서까지 논리적인 합리성보다는

영적인 기적으로 몰아가는 비논리로

우리들의 모든 것을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토속신앙을 비롯하여 샤머니즘, 애니미즘, 토테미즘이나

또는 종교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잠시 인터넷에 올려 진 『유나기의 일상다반사』의 글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도교나 유교 또는 불교 등

그 지방에 내려오는 고유한 신앙인 토속신앙,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힘이

샤먼에 의해 현실세계에 나타난다는 샤머니즘,

모든 사물에는 혼이 있고 생명을 지닌 다신교적 애니미즘,

다음에 올려 진 국어사전에 의하면

토템이란? 원시사회 또는 현대의 일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부족 또는 씨족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어

신성하게 여기는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말하며

그 힘이 샤먼이란 대리인이 아닌 동식물처럼

눈에 보이는 자연물로 대신 된다는 토테미즘을 통해서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그 중심의 내면에는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신의 에너지인 생명에너지를

얼마만큼 효율적으로 다루고 있는가에 의해

그 효험이나 영적능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종교이기에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 그 자체가

인간이나 신으로써 검증이 안 되다 보니

이단을 자처하는 많은 교파들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둘째나 셋째 아들이라고 주장하거나

조금 더 심하면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케 하는

목회자(이만희→신천지교회, 안상홍→하나님의 교회, 문선명→통일교,

정명석→JMS의 공식 명칭은 기독교복음선교회,

박태선→신앙촌 창시자 박태선 승사 : 천부교 등)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명상을 통해

우주의 내적세계를 접하다보면

신의 에너지라 불리는 강력한 우주에너지를 접할 수가 있고

고요의 극점에 도달하다보면

우주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듯이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서

종교의 장단점을 파헤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유럽과 아시아에 따라 종교의 색깔이 다르다보니

동서양의 신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각기 다른 임무로 존재하고 있음을 볼 때

종교가 다르다하여

기적이나 이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기에

그 근저에는

우주가 워낙 넓고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한마디면 그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바로 마음에서 비롯되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 거짓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 참이 될 수도 있기에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참도 되었다가 거짓도 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음 한 번 뒤집어보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에서 끝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세계를 통합하지 못하는 각 개인의 책임 또한 크다 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신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또 다른 의식세계에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며

다윗의 아들인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말을 인용하며

전도서에 기록된 내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하고 있듯이

인생무상, 삶의 회의를 수시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맥락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물론 종교뿐 아니라 일상의 현실에서조차

마음 한 번 먹는 순간

새로운 관점에서

무로 변하거나 유로 변하는 모습을 살펴볼 때

 

한번 결정된 종교에 대해서 진실로 믿으며 설교하는

순교자이신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이자 모태목사이신

주승중 담임목사님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목회자나 사역자를 진정으로 존중해 줄줄 아는 성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그냥 믿고 시작하는 신앙심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신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또 존중해준다면

하나님 또한 우리들을 존중하고 또 존중해줄 것이라고 한다.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처럼

하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따라하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그런 신도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시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것도

하나님을 섬기라고 온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우리들을 위해 섬기로 왔듯이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남을 존중해 줄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직분에 연연하지 말고

목사는 목사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해나가면 되고

장로는 장로의 직분으로

권사는 권사의 직분으로

안수집사나 집사는 집사의 직분으로

성도는 성도의 직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서열이나 계급장이 없는 곳이

종교이다 보니

누구나 평등하게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종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나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을 잊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봉사와 희생정신이 강함을 알 수 있고

겉에서 보는 종교보다는

안에서 보고 읽히는 종교여야

참된 생각을 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종교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종교에 대해

불이익을 당하거나 은혜를 입는 일 또한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에

이유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이 져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잘못 선택했다가 패가망신하거나

세상의 우리 속에 갇혀 지내는 자신을 발견할 정도로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어리석음이 없기에

종교를 선택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기존의 신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세심하게 살펴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니요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기에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늘의 뜻으로 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기복신앙이야말로

그 모든 것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종교에 입문하는 첫걸음이 되기에

우리들의 마음에 따라

현실과 종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타종교에서는 먼저 마음을 비우라고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로 성령이 임재하고 있지만

타종교에서는

성도들이 먼저 불러들이는 신으로 알려지다 보니

기독교와 타종교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움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이 스스로 채워지거나

스스로 비워지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평생을 다 바쳐 노력한다하여도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논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날마다 시시때때로

마음을 비운다거나

마음을 채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불교 또한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마음을 비우라는 것은

공의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비우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능력을 기르기 위해 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이 맑고 깨끗하지 않으면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도 없거니와

사물에 대한 욕심을 비우고

집착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볼 때

불기둥 같은 성령 충만함도 중요하지만

비움의 미학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기에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의해

스스로 비우고

스스로 채워나가는 공의 상태야말로

비움의 역사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성령 충만함과 일체가 되어야하겠지만

자고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곳이 인간세상이다 보니

 

잠시 다음에 올려 진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반드시 점진적인 수행단계인

돈오점수(頓悟漸修)에 이르는 과정이 필요하거나

오(悟)와 수(修)를 한 순간에 모두 완성하는 것.

즉 한 번에 깨닫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김필균 목사께서 성령에 대해 세부적으로 강의를 해주셨지만

여기서는 중요한 것만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1. 성령 하나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약속

(1)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

(2) 성령 하나님의 강림하심에 대한 계시의 점진성

(3)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를 통한 약속의 성취

(4) 성령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2.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성령 하나님의 인격성

(2) 성령 하나님의 신성

(3)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

 

3. 성령세례의 의미

(1) 한 성령 ▷ 한 세례 ▷ 한 몸

에베소서 4:4~6 :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는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응답되었다.”

 

(2) 성결의 영(롬 1:4), 권능의 영(눅 24장 49절) ▷ 하나님의 성결과 권능에 힘입는 삶

(3)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열매

(4)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성령 또한 성도들의 정성과 집중력에 의해

에너지의 강약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볼 때

성령으로 채우고 또 채운다하여

진정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늘 성령 충만함에 대한 갈급을 요구하게 되고

그로인해 오히려 새로운 집착에 걸려

진퇴양난에 빠져들 수도 있음을 알고 가야할 것이다.

다만, 기독교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하기보다는

타인을 위한 기도로 연결되어져있다 보니

만복의 근원이 바로 이로 인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타종교라고해서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일관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그 성향이 다르다보니

마치 자신만을 위해 명상을 하거나

교종이나 선종을 고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우주와 관련된 인간의 내면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다보니

타인보다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로 비춰지고 있을 뿐

일정기간 수행(동안거, 하안거 등)에 매진할 때를 제외하곤

결코 자신만을 위한 수행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잠시 한국상담치유연구소에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설문지인 MBTI에 대해 알아보자.

70년 동안 연구해온 모녀지간에 의해 완성되어진 MBTI는 심리학자 융의 심리유형론을 바탕으로 Katharine C.Briggs와 Isabel B.Myer가 오랜 세월 연구개발한 16가지 성격유형 선호지표로서, 자신과 타인의 성격역동을 이해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이다.

한정희 목사께서 다시 풀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반드시 자신과 닮지 않았다하여 무시하거나 차별을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성향에도 귀를 기울이며 존중해 줄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6가지 유형에서 예를 들어보면 어떤 이는 성인군자 형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사업가 형이 있고, 어떤 이는 아이디어 형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서로가 상극하는 형태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상생의 삶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면관계상 세부적인 설문내용은 제외하고 MBTI - 16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표현들만 살펴보자.

ISTJ : 사실적인, 철저한, 체계적인, 신뢰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실제적인, 조직화된, 의무적인, 분별있는, 근 면한, 믿을만한, 성실한

ISFJ : 상세한, 성실한, 전통적인, 충실한, 참을성 있는, 조직화된, 봉사적인, 헌신적인, 보호하는, 매우 섬세한, 책임질 수 있는, 동정적인

INFJ : 헌신적인, 충실한, 자비로운, 창의적인, 열정적인, 깊이있는, 결심이 굳은, 개념적인, 체계적인, 이상적 인, 신비로운

INTJ : 독립적인, 논리적인, 비판적인, 독창적인, 체계적인 마음, 확고한, 비전이 있는, 이론적인, 기준이 높은, 객관적인, 전체적인

ISTP : 객관적인, 편의적인, 실제적인, 현실적인, 사실적인, 응용적인, 독립적인, 모험적인, 자발적인, 융통성 있는, 자기-결정에 의한

ISFP : 돌보는, 부드러운, 온화한, 융통성 있는, 민감한, 예리한, 협동적인, 충성스러운, 신뢰하는, 자발적인, 이해하는, 조화로운, 겸손한

INFP : 자비로운, 부드러운, 고결한, 융통성 있는, 헌신적인, 모험심이 있는, 창의적인, 충성스러운, 헌신하는, 깊이있는, 과묵한, 공감하는

INTP : 논리적인, 회의적인, 인지적인, 초연한, 이론적인, 정확한, 독립적인, 사색적인, 독창적인, 자율적인, 자기-결정에 의한

ESTP : 행동지향적인, 융통성 있는, 재미를 좋아하는, 재주가 많은, 열정적인, 낙천적인, 민첩한, 자발적인, 실용적인, 느긋한, 설득적인, 개방적인

ESFP : 열성적인, 융통성 있는, 쾌활한, 우호적인, 명랑한, 사교적인, 표현적인, 협동적인, 느긋한, 관용적인, 개방적인, 낙천적인

ENFP : 창의적인, 호기심 있는, 열성적인, 재주가 많은, 자발적인, 표현적인, 독립적인, 우호적인, 열정적인, 상상적인, 활동적인

ENTP : 진취적인, 독립적인, 솔직한, 전략적인, 창의적인, 융통성 있는, 도전적인, 분석적인, 영리한, 자원이 풍부한, 의심스러운, 이론적인

ESTJ : 논리적인, 결정적인, 체계적인, 효율적인, 객관적인, 실제적인, 조직화된, 비개인적인, 책임질 수 있는, 구조화된, 성실한, 지도력 있는

ESFJ : 성실한, 충성스러운, 사교적인, 개인적인, 책임질 수 있는, 조화로운, 협동적인, 재치있는, 철저한, 감동하기 쉬운, 전통적인, 동양적인

ENFJ : 충성스러운, 이상적인, 개인적인, 언어적인, 책임질 수 있는, 표현적인, 열성적인, 열정적인, 외교적인, 염려하는, 지적인, 마음이 맞는

ENTJ : 논리적인, 결정적인, 계획이 많은, 강인한, 전략적인, 비판적인, 조절된, 도전적인, 직선적인, 객관적인, 공정한, 이론적인

 

이런 점에선 기독교보다는 불교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궁극적인 깨달음에 대한 접근이 좀 더 쉬워 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벼루에 방금 먹을 갈아놓은 상태라면

불교는 묵향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가 끊임없이 기도문을 외우며

동적인 기도로 성령을 불러들인다면

불교는 고요와 침묵 속에서 묵언수행을 통한

정적인 기도로 자신의 내면을 비우는 과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종교를 믿는다하여

인간이 겪어야할 재난이나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사고 등

각종 예상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살아있는 동안은

위의 현상들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삶의 근본적인 뿌리이기에

원죄를 풀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 그 자체는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은

신의 보호 속에서 평안과 위안을 얻을 수가 있고

무신론자는

스스로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거나

하늘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거나

또는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할 때

자신을 포기하거나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공부만 주어져도

기도에 대한 응답을 충분하게 받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성령의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

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지 다 그렇지만

여기서 좀 더 강조되는 부분은

김영국 목사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조금 더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기도를 한다고 해서

진정한 기도라 말할 수 없듯이

기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해 먼저 알아야만

진정한 기도로 연결되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살다가 힘이 들거나 부족하다면

경건함과 숭고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야 되겠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신이 아닌 우리들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은 가족 같은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친근함과 더불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은 하나님한테 억지를 부리거나

애교 섞인 기도도 해볼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고

감사하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마워하며 살아가는 것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닥까지 떨어져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하나님 아버지시여!

정말로 힘이 듭니다. 우리들을 도와주십시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한 것처럼

기도를 올린다면 그 또한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언제나 부족할 때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 당신은

우리들의 힘든 모습을

충분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성도가 되거나

한솥밥을 먹는 가족처럼

하나님 아버지라 부르며 다가가다 보면

남보다 하나라도 더 소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새벽기도나 금요 철야예배 등

적극적인 기도나 봉사를 통해

등에 진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떼를 쓰거나

채워달라고 앙탈을 부려가며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면

그에 맞는 소원을 성취시켜주고자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응답에 대한 대가에 대해선

기도를 포함하여 십일조나 감사헌금 등으로 충분하게 지불해야만

서로 주고받는 아름다운 행위를 경험할 수 있듯이

한쪽으로 기울기보다는 양쪽으로 형평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다 더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기본적인 사항

다함께 모여 공동체예배를 통한 믿음과 헌금

그리고 남을 위한 봉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모든 것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스스로 붕괴되어지거나 도태되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신성한 종교라 할지라도 경제력이 없는 종교는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헌금에 대한 이해는

바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있는

소규모 교회부터 시작하여

대형 교회까지 목회자의 능력에 따라

완전하게 또는 불완전하게 갖추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헌금에 대한 문제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만큼만

헌금을 낸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능력이 되면 헌금을 많이 내면 될 것이요

능력이 안 되면 최소한의 헌금만내도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잠시 헌금의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구역예배헌금, 절기감사헌금,

일천번제예물, 경로대학헌금, 특별헌금 등이 있다.

다시 한 번 세부적으로 내용을 열거해보면

절기감사헌금 내에는 신년감사, 부활절감사,

맥추감사, 추수감사, 성탄감사 등이 있고,

특별헌금 내에는 건축헌금, 선교헌금,

장학헌금, 구제헌금, 기타헌금 등이 있다.

그건 그렇고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악한 하나님이었다면

신약에서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착한 하나님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신을 믿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만 믿어 준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면

신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뜻과 같다할 수 있다.

특히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의 말씀을 읽고

다양한 프로그램 과정의 하나인 《새가족 성경공부(5주)》,

새로운 삶! 을 지칭하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라이프(New Life 8주)- 라이프 수련회 및 세족식 포함》,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16주)》 등

준비된 코스를 이수하거나

기타 과정을 이수한 후

온몸으로 믿으며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신학자가 아닌 이상

종교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더라도

기도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간편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복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종교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복신앙 없는 종교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듯이

기복신앙의 또 다른 이름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삶의 뿌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일방적인 것보다는

양방향적인 것이 더 좋은 것은

정보의 소통이 원활한 것도 있겠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통제해나가면서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불필요한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 자신만 믿어준다면

그 모든 것을 다 채워주겠다는 우주신이야말로

우리들이 경외해야할 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다양한 신을 선택하는 것보다

우주를 대표하는 우주신을 선택하는 것 또한

신들에 대한 오해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믿어야할 신이라면

복잡하게 얽혀있는 신들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이미 검증된

우주신을 선택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에 대한 명칭만 다르게 부를 뿐

결국엔 하나로 통합된 하나님이기에

선택의 여지없이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신이 있다면

바로 그 신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한 명의라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듯이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의심 없이 믿고

의심 없이 들어만 준다면

기도야말로

온 우주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장 촉각이 발달된

안테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도 하지만

믿음에는

긴말이 필요치 않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개인에 따라 기도의 내용이나 큰 틀이 다를 수 있겠지만

다함께 모여 남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이 강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보기도 팀이 별도로 편성되어져 있거나

금요 철야예배 때 중보기도를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면

자신을 먼저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만큼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 본다.

물론 타종교 또한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로 일관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기도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기도에도 기도하는 비법이 따로 있듯이

숲을 보며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를 보며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혹시라도 기도에 대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숲보다는 나무를 보며 기도하는 것이

구체적이면서도 세부적인 기도로 이어질 수 있어

기도에 대한 응답이 더 빠르게 와 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에는

기도문이나 주문처럼 입으로 말하면서 행하는 기도도

좋은 효과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빌라에 살고 있는 권사가

건너편에 신축 아파트가 새로 생기자

다른 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데 왜 자신만 빌라에 살아야하는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처럼

세상에는 논리로 풀 수 없는 기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앉은뱅이가 일어나 스스로 걷거나

이명으로 고생하던 성도가 깨끗하게 낫거나

대장암과 간암으로 고생하던 목회자가 기적처럼 낫거나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새로 시작하는 병자들이 줄지어 나타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것을 보면

믿는다는 것은 기적을 일으키게 함과 동시에

본다는 것은 자신과 신과의 교류를 통해

우주적인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의 에너지가 우주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상

우주신의 효력은

손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세심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스스로 기뻐하고

스스로 나아가는 유쾌한 발걸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부터 시작하여

지구 온난화와 환경문제 등

세계평화와 인류를 위하거나

세계적 경제난을 극복하는 문제 또는

한반도의 평화통일 실현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

가정의 안녕과 화목함

각종 암이나 희귀병을 극복한 성도들의 치유경험

서로가 서로의 힘을 합쳐 기적을 이뤄내는 중보기도 등

자신의 고민을 기도로 극복하거나

타인을 위한 기도 등으로 인해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도록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성스러운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만큼이나

성도들에게 있어 크고 값진 경험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남을 위한 기도로

그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신앙심이야말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친밀감과

공감대를 형성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보다 남을 위한 기도로 시작하는 일이기에

감동 그 자체로

성스러운 의식이자 예식이기에

기도의 힘은 온 우주를 흔들고도 남는

귀중한 신앙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도야말로 새로운 절차가 필요 없듯이

기도를 통해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쉽거나

이보다 더 아름답거나

이보다 더 행복한 조건이 또 있을까?

참으로 간단명료한 요구조건이자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명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믿어라!

그리하면 그 믿음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현상을 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 없는 과정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믿음생활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하여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인내하고 인내하는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빠른 응답이 있는가하면

시간이 필요한 응답이 있기에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기도에 대한 정성이 부족하다면

예부터 목욕재개한 후

가족을 위해 때로는 나라를 위해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한국의 어머니들께서

혹여 단 하나의 신이라도 빠뜨릴까봐

천지신명을 향해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에게

이른 새벽에 퍼 올린 우물물인 정한수(井寒水=정화수:井華水)

한 사발을 장독대에 떠 놓고

목숨을 던질 각오로 기도를 해왔던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하늘과 땅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 끝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그리스도, 메시아, 할렐루야(유의어 : 알렐루야), 샬롬, 호산나, 아멘에 대해 백과사전 및 인터넷에 올려 진 정보를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자.

 

그리스도 :

그리스도 : Christ 희랍어로 crivw (기름 붓다)라는 동사로부터 온 `受油者'란 뜻이다. 히브리어의 메시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히브리 인에게 있어서 국왕˙제사장˙선지자의 직분을 성별하기위한 표시였으나(출 29:7,삼상 10:1,16:13,왕상 19:16), 후에는 기름을 붓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담당하는 자의 뜻을 나타내는데 쓰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의 이상을 실현한 자, 즉 그의 한 몸에 영적 왕국의 예언자, 제사장 및 왕의 직분을 지닌 자로 하여 그를 그리스도로서 승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란 이름을 썼으나, 서한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 또는 단순히 `그리스도'라고 칭하여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드디어 나사렛예수의 고유명사로 되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인도자, 사명자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15:23, 갈2:17절 말씀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메시아 :

메시아는 예수님 맞습니다. 

메시아구세주,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바꿔서 말해도 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는 이유는

죄 지은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대신 죽으심으로써 죄로 부터 인간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자가 예수님 이며

하나님이 구원자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소식을 전하는 천사인데,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알렸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과 사이가 좋다 나쁘다 할 성격이 아닙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심부름꾼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님의 종도 됩니다.

 

메시아는…

성서에서 구주(救主) · 구세주(救世主)를 가리키는 말. 헤브라이어의 māša(기름을 붓다)의 명사형 messiah(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그리스어화한 말(Christos)로 ‘그리스도’의 어원(語源)이 된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기름부음을 받고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의 왕은 물론, 사제나 또 사울왕의 방패와 같은 물건도 메시아라고 부르다가, 장차 나타날 왕으로서의 ‘구세주’에 대한 기대(期待)로 메시아에 관한 많은 예언이 행하여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본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대행기관으로서의 은사를 받은 자(판관 8:22, 사무상 8:7)로 왕이나 대제사장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를 대제사장(히브 9:23~28)으로, 예언자로, 왕으로 믿은 것(마태 16:16)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역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선택-계약 관계에서 그 중간을 다리 놓는 것으로, 영(靈)을 받은 자, 신(神)의 의사를 전달하는 자, 죄를 씻는 제사의 희생제물 공여자, 재판장, 새 생명을 통치하는 자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또는 알렐루야 :

쓰기 : Alleluia

읽기 : -천주교 : 알렐루야

       -개신교 : 할렐루야

뜻 :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는 말 입니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는 똑같은 뜻으로 쓰이며 발음만 다르게 표현합니다.

 

샬롬은 예루살렘의 살렘과 유의어 :

"샬롬"은 "평화"(peace)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입니다.

이 말은 "샬렘" (완전하다, 건전하다) 이라는 말의 명사형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평화”로 번역된 히브리어 샬롬은 전쟁이나 소요 사태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서(판 4:17; 삼첫 7:14; 왕첫 4:24; 대둘 15:5; 욥 21:9; 전 3:8), 건강, 안전, 잘 지냄(창 37:14, 각주), 평안(창 41:16), 우정(시 41:9), 전체 혹은 완전함(렘 13:19)의 개념을 전달할 수 있는 말이다. 평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에이레네)는 그 의미 영역이 히브리어 샬롬과 같이 광범위하며, 다툼이 없다는 의미에 더해서 복지, 구원 및 화합의 개념을 표현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 말은 “평안히 가시오.”라는 작별 인사에 나오는데, 그것은 ‘당신이 잘되기를’이라는 표현과 다소 흡사한 말이다.—막 5:34; 누 7:50; 8:48; 야 2:16. 삼첫 1:17; 20:42; 25:35; 29:7; 삼둘 15:9; 왕둘 5:19

 

성경에서 "샬롬"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평화, 또는 성장과 번영(172회 사용).2) 전쟁이 없는 평안한 상태(5-60회 사용: 예) 왕상 4:25).3)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축복을 비는 인사말(삿 19:20, 삼상 25:6,35).

이것은 영어로 "hello!" _ "goodby!" 그리고 우리말로는 "안녕하세요!" 정도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는 남에게 샬롬을 빌도록 명하고 있으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해 축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샬롬을 빌지 않는 것은 그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언약을 통해 주시는 축복(안녕과 평화) (민 25:12, 사 54:10 등).5)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류에 샬롬(평화)을 가져다 줄 "평화의 왕" 이라고 부른다(엡 2:14).

샬롬! 이라는 말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메일을 보내거나 만나서 인사할 때에 샬롬! 이라고 하는 것은

세 번째 의미로서 상대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인사말입니다.

 

샬롬의 종교 철학적 의미

샬롬은 하나님이나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든 계약 조건을 다 이행했을 때에 주어지는 완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샬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 죄의 채무를 지불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있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샬롬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에도 이웃 간에 샬롬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빚을 갚지 못했다거나, 이웃을 억울하게 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혔다면 그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모든 의미를 다 했을 때에 우리는 이웃과 완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이웃 사이에 샬롬이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샬롬은 이 외에도 불의가 없고 공의와 진실이 행해지는 완전한 사회를 샬롬이 있는 사회라고도 하고, 몸이 아프거나 병들지 않은 건강한 상태를 샬롬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샬롬은 하나님과 이웃 간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고, 공의와 진실이 행해지며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완전한 샬롬은 우리가 세상에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샬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세상에 다시 보내실 때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때에 그 백성들이 영원하고 완전한 샬롬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Amen) :

“아멘”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지만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구약이나 신약에 쓰인 아멘의 원어 뜻은 ‘신뢰하다’, ‘믿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 단어의 본래 뜻은 ‘진실로’, ‘참으로’라는 감탄의 말이다. 본래는 유대교의 회당에서 사용했으나 초대기독교에서 받아들여 기도 송영의 마지막에 쓰였다(고전 14:16).“아멘”은 하나님께만 쓰는 말로서 그 뜻이 너무 귀하고 인간의 말로서 해석할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어 세계 각국에서 이 단어는 원어만 쓰도록 통일되어 있다. “아멘”의 구약의 뜻은 첫째는 ‘그렇게 될지어다.’,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다짐하는 뜻이다(왕상 1:36,렘 28:6).

 

둘째는 언약의 성취에 대한 순종을 다짐하는 말이다. 즉 율법에 대한 백성들의 동의와 맹세, 서약을 의미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간절한 나의 소원을 뜻한다.

 

셋째는 예배 인도 시 기도, 찬양, 설교자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신27:15, 느5:13, 왕상1:36, 대상16:36). 신약의 경우는 구약의 뜻을 그대로 따르면서 기도와 찬양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영의 양식을 먹었다(롬1:25, 갈6:18, 유25). 특별히 말세교회를 위한 요한계시록 3:14에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는 말로 아멘을 그리스도의 호칭으로 사용했으니 “아멘” 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내가 체험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말이다.  

 

“아멘” 했을 때는 아멘 한 사실을 내가 책임진다는 책임까지의 뜻을 담고 있다. 만일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아멘” 했으면 그 아멘 한 것을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충성하여야 한다. “아멘”이란 ‘진실’의 뜻이 있으므로 열매 맺을 때까지 책임진다는 강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의하여 아멘하고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되니 “아멘” 했으면 반드시 내가 책임지고 시행하라.

 

호산나[{히브리어}hosanna] :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기쁨과 승리, 구원의 희망 등을 나타내는 말.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군중들이 외쳤던 말이다.

 

2013년 6월 30일 일요일 ~ 7월 28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