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1
나무를 산에 심으면
산에서 자란다.
나무를 정원에 심으면
정원에서 자란다.
그리고 가로수는
매연을 마시며 자란다.
똑같은 나무라도
환경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불교가 좋은 사람들은
산에서 수행을 즐기고
기독교가 좋은 사람들은
세속에서 수행을 즐긴다.
산에서 수행을 즐기든
세속에서 수행을 즐기든
다 인연에 따라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옳고 그르다고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마음에 의해
선택할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간섭할 수가 있겠는가?
자신의 마음이 불교에 끌리면
그렇게 하면 되고
자신의 마음이 기독교에 끌리면
그렇게 하면 된다.
어차피 크게 보면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로 이 우주를 대변하지 못하다 보니
인간이 만들어낸
아니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를
마음이 가는 대로 선택하며
수행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숱한 신흥종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만 먹는다면
또 다른 종교가 생겨날 수 있는
이 마당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선택한 종교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면
그리고 기복신앙을 얻는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의지할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너도나도
남들이 효과를 보았다는 말에 쉽게
유혹 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절대자의 존재가치보다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기복신앙에
더 매력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깨우치는 일에 열중하지만
기독교는 절대자에 대해 복종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둘 다 확연한 개성으로 출발한 종교이지만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둘 다 터득하고 있다.
먼저 인간을 생각하고
희생하는 정신이
저변에 깔려있다.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것이다.
역사가 깊은 종교일수록
희생으로 서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희생으로 서 있는 것은
그만큼 역사가 길 수밖에 없다.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서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이 겪어야 할 고통은
자신이 겪어야만 한다.
깨달음에 이른 선각자들도
하늘이 내린
자신의 고통만큼은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
깨달음은 단지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삶은 행동하는 것이고
현실이다.
깨달음만으로는 배고파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숱한 수행자들이
깨달음만 얻으면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것 같은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꿈만 꿀 수 없는 곳이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이 냉혹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나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현실인지도 모른다.
현실은 피부에 와 닿는 삶의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이구동성으로
한눈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사는 곳이
세상이다.
맞춤형 상품처럼
성자들이 말한 데로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좁은 것도 있지만
똑같은 사물을 놓고도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사는 곳이 현실이기도 하다.
인연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이
곧 자신의 삶터인 것이다.
비록 불만으로 가득한 곳일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다른 세상을 찾지 않는 한
그곳에서
지내야만 하는 악연 같은 인연인 것이다.
살다 보면
운명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크게 보면
자신의 성격이 그렇게 만들었고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만들었다.
종교의 힘은
성격과 행동을 순화시키는 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구를 잠재우는데 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연은 발길 닿는 데로 움직이는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것처럼
삶 자체가 인연으로 뭉쳐진 것이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며 사는 것이다.
천년만년 영원히 볼 것 같은 사람들도
내일이면 헤어지고
모레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사는 것이다.
인연은 아름다운 것 같으면서도
냉정하다.
평소에 주고받는 연습에 서투를까 봐
강제로라도
회자정리(會者定離) 시키며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1월 4일 금요일
인연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