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수행자의 착각

청아당 2008. 1. 2. 11:35

수행자의 착각

 

현실에 서있는 자신을 내팽개치고

꿈속의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깨달음은 참나를 찾는데 있다는 말에

꿈속의 나만 찾으려하고 있다.

자신을 버리고

또 다른 자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깨달음은 참나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원에 뛰어들어봐야

그 끝을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자신을 찾는 일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통과한

고요의 극점에 안착하는 일이다.

끝에 이르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깨달음조차도 놓을 수 있는

고요의 극점은

처음부터

생각 없음에 이르는 길이자

만상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고자

깨달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고요의 극점에 이르는 일은

누가 대신해서 열어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반드시 자신만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느낄 수 있는 세계이다.

힘들게 알에서 부화되어져 나오는 새끼를 위해

어미 새가 대신해서 깨뜨려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홀로서기란 그래서 힘든 것이다.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숱한 수행자들이

자신을 찾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참나를 찾고자 오늘도

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허공에 숨겨져 있는 참나를 찾지 말고

고요의 극점 속에 숨겨진

우주적인 시야와 감각을 찾는 일이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체생활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갇혀 살게 된다.

깨달음은 그 틀을 깨는 일이다.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큰 깨우침으로

자신의 틀을 부수고

뛰쳐나오는 것이다.

인생을 뒤돌아보면

그 어떤 곳에 서있든지 간에

누구나

기본적으로 겪어야할 일들이 산적해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배움이 그렇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위해

경제가 필요한 것이 그것이다.

선각자들 중에는

경제를 벌레 보듯 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피하는 일과 똑같다.

종교도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경제는

가장 순수한 종교에서조차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는 삶을 지탱하게해주는 유일한 길이자

삶의 원동력이기에

수행자의 삶이라고해서 피해가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경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수행자일수록

경제를 피하려는 모순이 싹틀 뿐이다.

땅을 밟고 서있다는 것은

현실적이라는 말과 같다.

현실을 무시하면

가공의 세계인 이상적인 세계도 함께 무너진다는 말과 같다.

그 모든 현상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자신만 가공의 세계에서 꿈을 꾼다고

그것이 현실이 되겠는가?

마음만 깨닫고

몸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마음으로 깨닫는 깨달음만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지만

깨달음은 마음으로만 깨닫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처럼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함께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리면 안 된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

몸이 즐거우면

마음도 즐겁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 현상인가?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 깨우칠 수 있다면

누구나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깨우침에도 인연이 있고

원리가 있다.

운명 같은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 시간에

자신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기본적으로

고행이 필요하다.

깨달은 이후에 고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해도

하늘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처럼

아무에게나 큰 깨달음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고

어느 날 다가오는

현상 속에서 문득 깨우칠 수도 있고

생사를 가르는 수련 속에서

깨우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공격적인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우주적인 시야를 지녔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다.

깨달음 속에서 깨달음만 말하는 사람보다는

현실 속에서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모두가 깨달은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이어야 한다.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보통사람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분할 수 없다면

깨닫고 깨닫지 않은 것이 없듯이 말이다.

참나를 찾고

구분 없는 나를 찾으라는 말에

수행자는 귀를 기우릴 필요가 없다.

결국 깨달음은 참나를 찾는 일이자

우주적인 시야를 얻는 일이지만

자신만 찾으려는 행동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호흡 속에 나타나는

우주적인 시야와 삶의 원리를 깨우치면

깨달음은 저절로 다가와 안부를 물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손에 쥐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다.

등에 지고 다녀도 본 사람들은 느끼는 일이지만

바람조차도

귀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며 사는 일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깨달음이 있겠는가?

사는 일은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생명을 먹는 일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는가?

 

200812일 수요일

 

깨달음에 대해 수행자가 착각하는 것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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