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소수서원(=백운동서원) –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청아당 2020. 7. 16. 12:51

소수서원(=백운동서원)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소수서원 입구
소수서원 주차장
학자수 숲길
경렴정
사료관 지붕 위로 펼쳐진 청람빛 가을하늘

 

 

소수서원(=백운동서원. 1543년 건립) - 경상북도 영주시

남계서원(1552년 건립) - 경상남도 함양군

옥산서원(1573년 건립) - 경상북도 경주시

도산서원(1574년 건립) - 경상북도 안동시

필암서원(1590년 건립) - 전라남도 장성군

도동서원(1605년 건립) - 대구광역시 달성군

병산서원(1613년 건립) - 경상북도 안동시

무성서원(1615년 건립) - 전라북도 정읍시

돈암서원(1634년 건립) - 충청남도 논산시

 

2019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9곳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白雲洞書院)4번째 방문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단양팔경을 지나 부석사를 향해 가는 도중에 자리 잡고 있다.

 

90년대 울진을 가기 위해선 단양을 거쳐 부석사를 향하게 되어있다.

 

지금처럼 길이 쭉 뻗어있지 않은 단양팔경에 한눈을 판 사이 소수서원에 도착하다 보면 문 닫을 시간에 도착하게 된다.

 

2~3번을 그렇게 놓치게 되었다.

 

이번에는 안동을 가기 위해 영동고속도로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내비게이션의 오작동으로 인해 풍기IC 국도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이왕 온 김에 소수서원을 들르기로 하였다.

 

풍기인견으로 유명한 풍기읍을 지나자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이 송림에 뒤덮인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침햇살을 듬뿍 받아서인지 수백 년 된 적송군락으로 이루어진 송림사이로 영롱한 빛줄기가 서기롭게 비치고 있다.

 

솔 향기가 풍부한 아침 공기가 아침햇살과 함께 가슴을 꽉 메운다.

 

가을에 노송 사이를 걷다 보니 하늘은 높고 창창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향기로운 바람이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의 깊이가 푸른 산호초처럼 푸르다. 말 그대로 청람빛 하늘이자 눈이 부실 정도이다.

 

소수서원(=백운동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현재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 명륜당, 일신재, 직방재, 영정각, 전사청, 지락재, 학구재, 서장각, 경렴정 등이 있다.

 

 

109일 한글날 소수서원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서원 입구에서 학자수(學者樹)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좌우로 배치돼 있는 적송군락과 죽계수를 따라 걸을 수가 있다. 더구나 건너편 시냇가에는 시와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취한대(1550(명조 5) 당시 풍기군수였던 퇴계 선생이 지은 정자)와 경()자 바위(주세붕 선생 글씨)가 있어 한국의 멋을 좀 더 깊이 있게 관찰할 수가 있다.

 

서원 입구 학자수 우측으로 당간지주(보물 제59. 신라시대 때 창건한 숙수사)가 반갑게 맞이해준다.

 

한국의 소나무는 멋을 내지 않아도 멋이 풍겨난다. 자세를 낮춘듯한 겸손은 자연에서 배운 걸까 아니면 학문을 닦던 소수서원에서 배운 것일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균형 잡힌 몸매로 곡선미를 그려나가는 여백은 한국의 소나무를 더욱 멋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공간에 대한 우주적인 여백은 한 호흡 사이에 배치돼 자연에다 풀어놓은 것 같다. 거기에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는 바람은 서원과 정자 그리고 취한대가 세워져 있는 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중심을 잡고 서 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고고한 자태는 소수서원만의 자랑이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천혜의 배경이 되고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유가 있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빛 햇살이 송림 사이를 뚫고 문을 열 듯이 밝게 비춰줄 때 자연이 품을 수 있는 넉넉한 여유가 되살아나고 있다.

 

소나무의 자세와 각도에 따라 사선을 그으며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곡선과 직선의 조화가 눈부시도록 시린 청람빛 하늘을 잡아끌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말할 수 없는 곳이 소수서원이다.

 

사람들이 인성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인성을 배우며 서 있는 곳이기에 감히 따로 학문을 논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송림 사이에 우뚝 서 있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다.

 

보호수

 

품격 : 나무

고유번호 : 11-28-7

지정일자 : 1982. 10. 26

수종 및 수령 : 은행나무 500

소재지 :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84번지

 

 

은행나무를 지나면 진입 영역안내문이 나타난다.

 

영귀봉(靈龜峰)

학자수(學者樹)

소혼대(消魂臺)

지도문(志道門)

성생단(省牲壇)

경렴정(景濂亭)

 

 

서원에 들어서기 전 지도문(志道門) 우측 계곡 아래에 펼쳐져 있는 취한대와 사선으로 눈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이 경렴정(景濂亭)이다.

 

큰 내가 잦아지고 다시 흐르는 도랑물 위에 서 있는 것이 경렴정이다.

 

정자하면 한국 고유의 멋처럼 호젓한 냇가에 서 있던 산 중턱이나 정상에 서 있던 시골길을 따라 서 있는 정자이든 정자는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유생이나 시인묵객들이 함께하는 정자는 어김없이 풍류와 함께 시를 노래하며 자연의 깊이를 갈구하기도 했다.

 

너를 너라고 부르지 못한 것이나 정자를 정자라 말하지 못한 것은 자연의 일부이자 바람과 한 몸이 되어 흐르기 때문이다.

 

풍성한 아침햇살에 휩싸인 고목과 함께 서 있는 경렴정은 그 멋이 더욱 고즈넉하게 다가온다.

 

 

서원에 들어선 후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관람객이 많지 않은 이른 아침인지 한국의 멋에 대해 촬영하는 팀이 다가와 직방재(안과 밖이 곧고 바르다)와 일신재(날마다 새로워지다)를 배경으로 촬영을 부탁한다.

 

본의 아니게 배우가 되어 아침부터 분위기를 잡아가며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되었다.

 

직방재와 일신재 처마 끝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걷는 모습이었다.

 

잘 나왔다며 흡족해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어렵게 소수서원에 들어온 만큼 뜻깊은 행적을 남긴 것 같아 뿌듯하다.

 

2019109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출처 : 안내문

소수서원(=백운동서원) | 사적 제55| Historic Site No.55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인 회헌(悔軒)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명종임금께 건의하여 서적, 토지, 노비 등과 함께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소수서원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유교로 넘어와 선비정신을 이어가는 유불 문화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숭유억불 사상의 영향이라는 견해도 있다. 서원 입구에서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의젓한 적송군락을 따라가면 맑고 맑은 죽계수를 만난다.

시냇가에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와 풍류를 즐긴다는 취한대와 경자바위가 있다.

 

경렴정과 지도문을 지나 만나는 서원 경내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통은 전당후묘(前堂後廟), 즉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 배치가 일반적인데, 소수서원은 동쪽이 강학공간, 서쪽이 제향공간이다.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 전통사상을 따른 것이다.”

 

주요 연표 | Major Chronology

1542: 사묘를 세우고 안향을 주향(主享)

1543: 사묘 옆에 백운동서원 건립

1550: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음

1633: 주세붕을 배향함

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면함

1888: 원생 최종입학(4,000여명의 원생 배출)

1963: 사적 제55호 지정

 

 

진입 영역

 

서원 왼편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둔덕은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처럼 보여 영귀봉(靈龜峰)이라 한다. 영귀봉 주변으로 수백년 된 적송이 장관인데, 소나무에게서 선비의 충절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자수(學者樹)라 불리기도 한다. 보기에도 멋진 소나무 숲은 서원의 품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영귀봉 위에는 작별의 정을 나누던 소혼대(消魂臺)가 있다.

 

서원 정문인 지도문(志道門) 앞 잔디 제단은 성생단(省牲壇)이다.

매년 봄, 가을에 안향선생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던 제단터이다.

 

지도문 오른쪽 경렴정(景濂亭)은 죽계수를 따라 펼쳐지는 멋진 경관을 바라보며 학문을 이야기 하던 곳으로 1543년 주세붕이 세웠다. 경렴정에는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썼다고 전해지는 초서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 1521~1567)의 현판이 남아있다.”

 

 

 

출처 : 다음백과

백운동 서원

白雲洞書院 사적 제55

 

요약 주세붕에 의해 지어진 최초의 서원으로서 경북 영주에 소재함.

 

소수서원(紹修書院)

백운동서원이었다가 나중에 소수서원의 이름을 하사 받았다.

Jjw/wikipedia | CC BY-SA 3.0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사적 제55.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기념하여 1543(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였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유명해졌다. 그후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으며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소수서원

紹修書院

 

문화재 지정 :

사적 제56

문화재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 등재 (2019)

 

요약 :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이었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했다. 이 시기의 서원은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황은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서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소수서원은 1868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했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201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적 제55.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중종 38)에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입원자편급제'(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후 1546(명종 1)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 공양절차(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운동서원은 약 30결의 토지 및 18명의 노비,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 이끌 인재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에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性理大全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를 굳혔다. 1633(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배향했으며, 1868(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563책의 장서가 있다.

 

소수서원은 201976, 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