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완성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청아당 2019. 3. 10. 10:25

완성의 길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다

 

완성의 길은 누구를 위한 길인가?

 

자신을 위한 길인가?

우주를 위한 길인가?

 

아니면 성자들을 위한 길인가?

아니면 신을 위한 길인가?

아니면 인간을 위한 길인가?

 

 

우리가 가야할 길은 완성의 길이 맞다.

 

가다가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완성의 길은 깨우침의 세계보다 더 험난하고 먼 길이다.

 

깨우침이야 영적인 세계이기에 그렇고

완성의 길은 영육 간의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나만 깨우치기에도 이렇게 힘이 든데

둘까지 깨우치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물론 깨우침 안에는 영육 간의 내용도 포함되어져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완성의 길을 향해 가고 또 가야한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목표나 지침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가다가 변곡점을 만나더라도

과감하게 뚫고 나가야하는 길이기에

완성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가다가 넘어지더라도

상처를 입거나 자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깨우침을 얻었다고

고매한 인품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깨우침을 얻은 것뿐이지

나머지는 생활 속에서 얻어야할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매한 인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일도 없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듯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고매한 것도 포장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자연스러운 인품이나 고매함이 아니라

인위적인 고매함이 묻어날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성자들이나 각자들이 욕을 먹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고매할 수 있어도

모든 이가 고매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위적인 허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매하다는 기준도 모호하고

설령 고매하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우침도 별거 아니라고 낮게 평가하고 있는데

고매한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현실과 이상은 구분되어져야한다.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너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보는 습관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지금도 죄 많은 사람들이라고 시간만 나면 이야기한다.

 

그것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죄 많은 인간으로 몰아간다.

 

하나님한테 의지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신다고 한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완성의 길이라는 것을 선택하며 가야하겠는가?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고

진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론을 차치하더라도

사람들은 처음부터 죄를 짓고 태어났다.

 

그 기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이다.

 

살다보니까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잣대에 의해서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뒤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살면서도 꾸준하게 죄를 지으며 살고 있고

죽을 때까지도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일인가?

 

관점의 차이이다.

 

어떤 각도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고매해지기도 하고

천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고매했던 사람이 천해 보이기도 하고

천해 보였던 사람이 고매해 보이기도 한다.

 

이 무슨 조화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의 길은 가야하는 길이다.

 

가다가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본분이기에

상처를 입든

자책을 하든

어떤 기준에 맞춰야할 길이기에 가는 길이 맞다.

 

그렇지만 완성의 길이야말로

환상의 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 같은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뒤돌아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부분적으로는 완성의 길에 들어설 수 있지만

완전한 완성의 길은 머나먼 꿈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억겁의 세계를 돌더라도

지구에 태어난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굳이 그 머나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지

아니 환상과 이상향에 사로잡혀있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지구(또는 다른 행성)에 태어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 난제가 주어져 있다.

 

이것을 무엇으로 채워 넣어야 할지

고민 아닌 고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깊이 있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다고 본다.

 

 

사람들은 정형화된 길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자유분방한 길을 더 좋아한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면서 살게 되어 있다.

 

그렇다보니 본의 아니게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런 것이 사람 사는 일이고

더 맛깔 나는 삶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을 향해

꼭 가야하는지도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시간낭비는 아닌지

차라리 사람답게 살다가 가는 것이 더 낫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뒤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본다.

 

완성의 길로 가자고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인지

신인지

우선 이것부터 분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를 위한 완성의 길인지를 확인하는 작업부터 한 후

따라 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수행을 통해서만 완성의 길로 가는 것은 아니다.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완성의 길은 많다.

 

그렇지만 완성의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무엇이든지 그 끝이 있어야하는데

완성의 길은 끝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주가 무한대라고는 하지만

분명 그 끝은 존재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인위적인 완성보다는

자연적인 완성이 좋듯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삶은 아닌지

깊이 있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따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고

세상이 이를 방관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전도사가 아이들을 상대로 설교를 마친 후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한 아이만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저도 천국에 가고 싶은데

교회에서 끝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씀 때문에

천국보다는 집에 가야하기 때문에 갈 수가 없다고 한다.

 

천국도 좋지만

우선 집에 가야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순진한 발상이지만

그 아이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2019310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