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마음은 신도 어쩌지 못한다

청아당 2018. 7. 12. 10:20

마음은 신도 어쩌지 못한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다.

 

 

신이나 성자들치고

인간들에게 욕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없다.

 

그것이 깨달은 사람들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제자가 적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젓갈이 되어 돌아오자 그 다음부터는 젓갈에 손도 대지 않은 것이나

예수가 신성한 교회를 더럽힌다고 상인들을 향해 분노한 모습이나

석가가 가섭의 미소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이나

신의 분노가 하늘과 땅을 뒤덮은 경우나 다 마찬가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서 한권만 분석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신의 분노는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과

그 이상의 향연들이 만연한 곳이

성서다.

 

물론 신과 인간에 있어

주종관계로 맺어진

성직자나 목회자 및 신도들에게는

천인공노할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쁘게 평가할 목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분명

신을 떠나서 배울 점이 많은 것이 경전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어도 주종관계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본다.

 

배울 점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되

주종관계에서 자유로워져야만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만 보더라도

수없이 선지자들을 내려 보내

인간들을 교화하거나

유화정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직자들을 희생시켰는가?

 

보내고 또 보내고

끈질기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판단에

가끔씩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분노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중의 최고신도 저러할 진데

도대체 인간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지 암담할 뿐이다.

 

 

인간이 칠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정당한 것이다.

 

신도 자신의 마음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판에

인간이라고 예외가 될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는 각자나 선승들도

분노할 때는 마음껏 분노하고

슬퍼할 때는 마음껏 슬퍼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칠정을 자유자재로 쓰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깨달음위에 서 있는 것이

신위에 서 있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 누구도 어쩌지를 못한다.

 

그래서

신도 욕을 먹는 것이고

깨달은 사람도 욕을 먹는 것이고

성자들도 욕을 먹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너무 우상화시켜놓았다.

 

인간은

성자를 너무 우상화시켜놓았다.

 

인간은

깨달은 사람을 너무 우상화시켜놓았다.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은

우선 이것부터 숙지한 후

가고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것 하나만큼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교만은 하늘도 결코 묵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만 교만에 물들려고 하면 겸손이 다가와 안부를 묻는다는 사실이다.

 

아니

벌떼처럼 달려들어 교만을 잠재우려고 한다는 점이다.

 

 

교만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신도 교만하고

성자도 교만하고

깨달은 사람도 교만하다.

 

아니

교만이 몸에 배어있다고 생각하면 좋다.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오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기에

깨달은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곤욕 아닌 곤욕을 치러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알면서도 교만을 억누르지 못하거나

겸손에 밀려 교만을 폭발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래서

신도

인간도

성자도

각자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칠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

큰 틀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환상에 젖어 살기를 꿈꾼다.

 

깨달음만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을 것 같은

꿈을 말이다.

 

하지만

깨달은 순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닫게 된다.

 

살면서 깨달아야할 것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

초기에 깨달은 사람들은

사회에 나오게 되면

경륜이 있는 보통사람한테 일격에 당하는 것은

사회적인 깨달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저절로 먹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얻는 것이

나이이다 보니

그리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수련자 간에 있어

주종관계보다는 역할론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에서다.

 

수련자가 주종관계로 달려들면

지도자는 역할론으로 견제하려든다.

 

세상이치를 잘 분석해보면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공부는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않은 사람이나 평생을 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다.

 

서로에게 배우는 것은

보기에 좋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훈훈한 인간미는 없기 때문이다.

 

2018712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