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큐티(Quiet Time : 경건한 시간) - 여덟 번째(2)

청아당 2013. 11. 3. 21:05

큐티(Quiet Time : 경건한 시간) - 여덟 번째(2)

 

성찰기도를 통해 성령의 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신앙인의 신앙심에 커다란 경각심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성령의 조명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색한 만남이나 불유쾌한 만남을 통해

경고성 메시지로 다가와

내면을 조명해줌으로써 발생하는 일이자

하나님의 뜻으로 풀이되어지기에

신중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해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말없이 어눌한 사람이나

말을 아끼는 사람일수록 내공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30년 이상의 구력으로 신앙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온전한 믿음으로

건강한 세뇌교육이나 또는 건전한 세뇌교육에 몰입하여

새벽기도부터

그에 따른 부수적인 기도에 온 힘을 실어가면서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도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함부로 자신만의 주장을 내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거기에다 이단에 대한 친절한 설명까지 부연해서 설명해주는

자상한 모습에 또 한 번 깊이 있는 관심을 가져보기도 한다.

사실 이단을 통해 수많은 신앙인들이

물적 및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와 죽음까지도 피해가지 못하는

현실을 살펴볼 때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기회만 되면 주장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타락성과 상업성이 강한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눈길을 거둬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만큼 종교에 대한 신뢰성과 믿음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삶의 공간인 종교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처를 얻고자하는 노력으로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각박하면서도 치열한 현실에서

도피처로 사용되어지거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고자하는

인간의 꿈과 욕망이 낳은 마지막 공간이자

제3의 세계인 사후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겨두려는

또 다른 의지라고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다른 시야에서 접근해보면

성경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는 과정 중에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보니

진실을 전하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목회자의 입맛에 맞게

성도들에게 전하다보면

진실보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무모하면서도 맹신하게 만드는 헛된 꿈의 근원인가?

그리고 전체적인 성경의 뜻을 염두에 두고

성경에 기록된 유명한 글귀나 일부분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취한 채

자신에게 짜 맞추어지도록 해석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하루 세 번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잘못된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나가고자 하는 의지의 산물이기에

하루 30분 동안만이라도

큐티(QT=Quiet Time ; 경건한 시간 또는 경건의 시간) 공부를 통해

영적교류를 나누자는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외적활동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조명해볼 수 있는

자신만의 경건한 시간이자

내적 명상의 시간이기에

어떻게 보면 신앙인이나 일반인조차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조용하면서도 경건한 장소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절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를 성찰할 수 있는

잠깐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영양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뜬 후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것이 잘못을 번복하게 하는 일들일지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하든

무심코 행하든

그 어떠한 일들일지라도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져 있기에

참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삶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

과거요

현재요

미래인 것이다.

이 얼마나 경건한 순간인가?

하루를 조용하게

한 달을 편안하게

1년을 행복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우리 모두의 소원이자 희망이기에

폐허 속에서 자라난 풀 한포기의 소중한 마음처럼

경건한 하루를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을 곁에 두고 독서를 하거나

우주에서 방금 달려온 기운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예식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가 성찰기도를 통해

내면의 세계를 조명해보는 귀중한 시간이라면

불교는 화두를 통해

내면의 세계를 조명해나가는 길이자

깨달음의 시간과 함께할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

이 두 종교에서 나타나는 극명한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절차나 형식에 있어서

기독교보다는 불교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만

오히려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찰기도를 통해

더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이 기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불교는 스스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후

홀로서기를 통해

우주본원의 모습 이전의 세계를 경험해보거나

탐방하는 길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다.

많은 세월을 흘러 보내는 것보다는

많은 관심을 갖고 깊이 있는 집중력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들에게 있어 큐티 공부는

자신을 보다 더 상승시킬 수 있는 내밀한 활동이자

하나님과의 단독 면담을 통해

소통의 길을 열고자하는 일환이기에

큐티 공부를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기독교보다 한발 앞선 유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인 삼성(三省)과 유사한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끔씩 나이를 먹다보면

들으면서 잊어버리거나

쓰면서 잊어버리는 경우를 허다히 접해볼 때

우리들의 뇌구조에 문제가 있거나

뇌기능의 이상으로 인해 나타나는

각종 희귀병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을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전체적인 밑그림은 나와 있지만

보다 더 세부적으로 접근해 들어가고자 할 때

나타나는 사건들을 접하다보면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엮여져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상위그룹의 신들과 하위그룹의 신들을 통치하고 있는

우주 신인 하나님조차

신들의 전쟁이나 신들의 경쟁에서

한 치도 물러설 수 없음을

계속해서 공포하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한 후

기도와 믿음을 단순화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합작품인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종교 또한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되어지기에

궁극적으론

내밀하면서도 자신만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과 뜨거운 만남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삶에 있어서 하루를 되돌아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한 시간이기에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예의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소중한 시간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