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 일곱 번째 - 20131021
믿음의 본질은 구원에 있다고 한다.
믿음은 수도관에 비유할 수가 있고
구원은 저수지에 비유할 수가 있다고 한다.
즉, 믿음은 물의 근원은 아니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구원은 물의 근원으로 풀이해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믿음인데 다 같은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볼 수가 있는데
첫 번째가 복이고 두 번째가 은사라고 한다.
① 복은 영원해야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써 권세를 누릴 수가 있다고 한다.
즉, 구원 받는 것이라고 한다.
② 은사는 내 것이 아닌 것을 하나님에게 빌려 쓰는 것이라고 한다.
즉, 사용하는 것으로써 유한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사는 돈과 건강에 관련되어져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있고
믿음으로 천국으로 갈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믿음을 계량화해볼 수가 있다고 한다.
믿음에는 작은 믿음이 있는가하면
믿음에는 큰 믿음이 있고
믿음에는 연약한 믿음이 있는가하면
믿음에는 굳건한 믿음이 있고
믿음에는 구원에 관한 믿음이 있는가하면
믿음에는 죽은 믿음도 있다고 한다.
믿음에는 성숙한 믿음이 있는가하면
믿음에는 미숙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
믿음을 계량화 또는 수치화해보면
어떤 때는 80~90%의 믿음이 강하게 밀려들 때가 있고
어떤 때는 30%의 믿음이 약하게 밀려들 때가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어느 날은 기도가 잘 되다가도
어느 날은 기도가 잘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례를 받지 않았다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얼마만큼 하나님의 잣대에 공여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수치화된 믿음이 커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발전되어져가고 있음을 볼 때
아브라함의 믿음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믿음에는 희생과 섬김이 따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 위치한 성산일출봉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이미 다녀온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돈뭉치를 들고 은행에 들어가 창구에 있는 여직원에게
거금을 맡긴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으로 보일 수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거금을 맡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바로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만큼 지대한 노력이 필요하고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하기에
믿음만큼 신뢰를 쌓아가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들의 시야에
잘 보이거나 자주 나타났더라면
믿음에 대해 방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야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권세를 누릴 수가 있고
회개하여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라고 한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교회에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 안부나 물으며 평탄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고 태어났기에
그만큼 자신을 낮추며
오염된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참된 믿음을 통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음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교회를 알지 못했거나
교회에 모여들지 않았더라면
평생 동안 자신이 지은 죄를 모르고 살 뻔했다.
한편으론 믿음을 선언하거나
믿음에 대해 헌신하고자하는 성도들은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결혼은 최고의 믿음으로 통하기도 하지만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믿음에 관련된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신(信)의 기본적인 뜻은 믿음이지만 불교의 교학에 따르면 그 정의가 단순히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마음이 청정한 것이다. 즉, 청정(淸淨)은 믿음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불교용어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청정한 마음’ 또는 ‘맑고 깨끗한 마음’ 즉, 믿음을 심정(心淨 : 마음이 맑음, 마음이 깨끗함, 마음이 청정함) 또는 심징정(心澄淨) : 마음이 맑고 깨끗함)이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사람을 지고의 신이나 궁극적인 구원과 연결시키는 인간의 내적 태도나 신념 혹은 신뢰.
신의 은총을 강조하는 종교에서 믿음은 신이 직접 주는 내적인 확신이나 사랑의 태도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믿음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인 역사적인 계시에 대해 신의 감동을 받아 나타내는 인간의 반응이며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음'은 '종교'와 같은 것으로 정의될 수 없다. 내적인 태도는 모든 종교적 전통에 들어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중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나 고대 인도(베다 시대)에서 '종교'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대충 번역될 수 있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로는 번역할 수 없고 예배 의무나 예배 행위라는 의미를 담게 된다. 힌두교와 불교의 요가 전통에서 권장하는 내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영적인 교사인 구루에 대한 신뢰이지 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며 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헌신(산스크리트로 'bhakti')과 사랑 또는 자비(산스크리트로 'karuṇā')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에서는 믿음보다는 사랑(그리스어로 'agapē', 라틴어로 'caritas')에 가깝다. 대승불교와 비슈누파(힌두교의 한 종파)가 보여주는 헌신의 형태는 그리스도교 및 유대교 전통의 믿음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은 종교적 표현이다.
성서 히브리어에서 '믿음'은 주로 법률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믿음이란 사람이 계약이나 약속을 지킬 때 그리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그들 사이의 언약을 지킬 때 보이는 신실함과 성실함을 말한다. 전통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이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믿음의 개념이 이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슬람교에서 믿음(아랍어로 'ῑmān')은 신자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주체가 되며 동시에 〈코란〉에는 "알라의 뜻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믿음을 가질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코란〉 10:100). 성서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이와 비슷하게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고(Ⅰ 고린 12:8~9),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11:1)는 믿음(pistis)을,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일부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도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서구 종교에서 믿음이라는 개념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선지자 조로아스터(BC 628경~551경)는 인간 편에서 진리(asha)를 위한 새롭고도 의식적인 종교적 선택을 말하는 종교를 최초로 창시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색인 : 바울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믿음의 지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종교개혁 운동의 주된 쟁점 중의 하나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신학적 문제였다. 루터가 신뢰를 강조한 반면 칼뱅은 믿음이란 하느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강조했다. 19세기 독일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믿음의 주관적인 본질에 대해 저술했다. 그러나 카를 바르트를 필두로 한 20세기의 신학자들은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적 해석에서 벗어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색인 : 로마 가톨릭교, 의인).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종교에서 말하는 종교적인 신뢰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르다.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에서 말하는 '신뢰'(팔리어로는 saddhā, 산스크리트로는 śraddhā)는 환자가 의사에게 자신을 맡길 때 가지는 신뢰에 견줄 수 있다. 중국인은 '신'(信:신뢰, 성실)을 5가지 기본 덕목(五倫)의 하나로 삼았다.
믿음이라고 하면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나가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일상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와 관련된 믿음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 믿음이라고 하면
일상적이든 종교적이든
믿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믿음에 대한 중요성은
우리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기에
발생하는 것도 있지만
믿음만큼 우리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믿음은 복과 은사를 지칭하듯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기에
일상적이든 종교적이든
믿음에 대한 기대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이상으로 깨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믿음에 있어서 결혼만큼 이해가 빠른 것은 없는 것 같다.
남녀 간의 이성적인 만남에서 시작된 믿음이기에
이보다 더 가깝고
이보다 더 먼 경우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신뢰와 삶의 밑바닥을 통해 발견된 믿음이기에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참고로 믿음에 관련된 히브리서 11:1-13까지 살펴보자.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1: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11: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1: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2013년 10월 13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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