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부활과 깨달음 - 여섯 번째
예수가 죽고 난 후 3일 후에 부활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물론이고 성경 그 자체도 부정되었을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분신으로 태어난 예수가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정과 희생으로
서민들에게
낮은 자세로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예수의 존재는
우리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약에서 유독 예수를 강조하는 것은
구약인 유대교와 차별화를 시도하기위한 목적도 있지만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하기위한
새로운 발상에서 나온 구제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4대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처음 접하는 성도들의 눈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만
구약이든 신약이든
미세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양심을 찌르듯 흔들어대는
현란한 글로 적혀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혼을 또는 정신 줄을 빼놓게 하는데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거기에다 하늘도 감동시키는 언어의 마술사이자
각종 기적과 이적으로 명맥을 유지해나가지 못했더라면
그 역시 존재감 없는
한 인간으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그렇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 충만한
영감축자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성서무오설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 숫자에 맞춰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써야만 하는 수작업과
그때 당시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인도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세계의 각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와
객관적인 눈으로 작성되어진 성경이라기보다는
주관적으로 기록되어진 필사본이기에
그 정통성에 대해
아직도 수많은 신학자에 의해 해부되어지거나
문제가 많음이 지적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하며 환기시켜야할 부분은
또 다른 목회자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신약 중 ‘로마서’ 는
성경속의 또 다른 작은 성경으로 통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의 엑기스로 불리는 ‘로마서’ 는
성경 전체를 축소시켜놓은
『꼬마성서』 로 통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로마서’ 를 믿는다는 것은
‘창세기’ 를 믿는다는 뜻이기에
로마서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단에서는 삼위일체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즉,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신흥종교 수장인 사이비교주들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신종범죄가 발생하는 온상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새 신자들에게 귀신 들린 영적체험을 유도하여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만들어나가고 있기도 하다.
물론 깨달음의 세계에 진입하여
너와 나를 구분할 수 없는
내면의 공간에 들어서면
그 모든 현상과 그 모든 존재에 대해 초월한 후
남겨진 나이기에
어떻게 보면 하나님조차 뛰어넘거나
존재이전의 세계에 몰입하여
우주의 진공상태에서 느끼다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신앙과 깨달음은 엄연히 구분되어져있거나
명상이나 그 깊이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을
하나님의 존재로 내세우는 일은 없어야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특히 성(聖) 삼위일체 존재여부에 관한 확연한 대답일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해 존재감을 인정하는 일은
신앙에 대한 첫 믿음으로 통하기도 하고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기에
성부, 성자, 성령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하나님 자신인 성부요
하나님 아들이신 성자요
하나님 영이신 성령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나
다 같은 한 가족이자 한 몸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신앙이 보수성이 강한 믿음이라면
신학 또한 보수와 진보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 아니라
신앙을 껴안고 있는 큰 틀로 이해해야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우주의 본체이자 기의 본체인
신의 에너지에 의해
각종 기적과 이적을 행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통하거나
예수님을 통하거나
성령님을 통하거나
그 통로는 한곳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이 그동안 곡해하거나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은
‘예수 믿고 천국가자!’ 또는 ‘예수 믿고 구원받자!’ 라는 구호일 것이다.
왜, 곧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반드시 예수를 통해서만 믿어야 되는가? 에 대해
절차상 문제와 기술적인 접근방법에 대한 문제로
혼란과 혼선을 빚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져있기에
어떤 통로를 이용하든지간에
우주 품에 안기는 것은 다 똑같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을 모독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인간이 없었다면 신도 없었을 것이고
신이 없었다면 인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생각이 따로 있다는 뜻도 되지만
인간의 생각도 따로 있다는 뜻과 부합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신이 있기에 인간이 있는 것이고
인간이 있기에 신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발생하는 일이기에
우주 그 자체는
인간의 생각이 어떠하든
인간의 마음이 어떠하든
불변의 원리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No나 아니라고 부정하면
그것으로 끝이기에
이러한 일들은
신 위주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 때문에 발생하는 폐단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그 모든 일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우주 신일지라도
인간의 사고방식을 바로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자주 강조하는 말이지만
인간이 필요로 하는 곳엔
그 무엇이든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장점으로 부각되어지고 있다.
그로인해
종교가 탄생하기도 하고
철학이 탄생하기도 하고
과학이 탄생하기도 하고
정치와 문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만약에
신이 우리 곁을 떠나거나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위적으로라도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을 만들어낸 후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요구하거나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남다른 노력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소통이 중요한 것처럼
하늘 문으로 통하는 통로만 확보되어져 있다면
그 어느 것도 부러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그렇고
처음부터 기독교가 부정되었다면
더 이상 종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지금껏 달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목회자도 없었을 것이고
성도들도 없었을 것이고
공동체 예배 처인 교회도 없었을 뿐더러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우주에서 만군의 하나님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면
오히려 인간에 의해
우주 밖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神이 없는 종교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 神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활은 예수뿐 아니라 성서의 내용에서도
여러 명이 부활되어지고 있음을 기록해놓고 있듯이
간암말기에서 버텨낸 나○○ 원로목사를 비롯하여
선교사에 의해 아프리카 오지에서
죽어가던 추장을 되살려 놓거나
휠체어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걸어 다니거나
각종 희귀병에서 탈출하거나
또는 세계 곳곳에서
기적과 이적이 끊이지 않고
신화처럼
전설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활의 의미는
반드시 육체적인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영적인 부활 또한 중요한 의미로 통하고 있기에
부활을 한곳으로만 고정시켜놓지 말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즉, 육신에 대한 부활만을 뜻하는 것보다는
영혼에 대한 부활을 뜻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움직이는 차량이 있는가하면
멈춰있는 차량이 있듯이
동적인 움직임과 정적인 움직임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들의 영혼이 살아 움직이며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한낱 꿈으로 그칠지언정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이
땅에서
하늘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하며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믿고 출발하는 것하고
불신으로 출발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에
부활을 믿는 자는 신의 혜택이 있을 것이고
부활을 믿지 못한 자는
신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가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숨 쉬며 살아가려면
종교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나마 조금은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기에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하여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구한테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비참하고 힘든 일은 없지만
좌절과 절망 그리고 밑바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한번쯤은 우주 신의 도움을 받아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본다.
그렇지만 부적절한 믿음이나 집착으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주의 최고신인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위해선
먼저 세뇌교육을 받아야하고
자나 깨나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하는 집착으로 이어져
불교에서 가장 싫어하는
집착에 얽매어 사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집착의 늪으로 빠져들도록 유도하는 장치이자
자신이 정해놓은 삶보다
신이 정해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지름길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살다보면
잡아야할 때가 있고
놓아야할 때가 있듯이
이 둘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기위해선
필사의 노력이 필요하고
필요이상의 집착으로 인해
자신을 망가뜨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미 수행의 깊이가 깊어져
무심의 경지에 이르거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우주 본연의 모습 속에서
자연 본연의 모습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기에
굳이 종교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람 사는 곳에선
홀로 서있거나
홀로 지내는 것보다는
깨달은 내용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함께 손을 잡고 달려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본다.
더구나 성서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는
‘침묵의 죄’에 갇히지 않으려면
보다 적극적인 나눔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교만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천국도 필요하지 않고
지옥도 필요하지 않고
그 누구한테 얽매이기를 가장 싫어하기에
천국도 지옥도 하나의 현상이자
일상의 일로 치부해버리기도 하지만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모든 현상과 비현상을 초월한 후
우주의 끝점이자 시작점인
고요의 극점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이곳에는 그 누구도 간섭할 수가 없고
오로지 나만이 내밀한 자신을 관찰하거나
태초(太初) 이전의 세계인 신의 에너지라 불리는
우주의 본체이자 기의 본체인 태허(太虛)에 드러누워
오고감이 없는 고요의 극점에 드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탄생 이전의 세계인
우주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먼지 한 톨 없는 텅 빈 공간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생명으로 탄생하거나
억겁의 시간을 두고 윤회하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
존재가 없는 비물질 세계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무의 세계에 묻혀 사는 일일 것이다.
한마디로 신에게조차 잊혀 사는
하나의 비생명체로 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담대한 일인가?
존재조차도 존재할 수가 없고
유에서 무로
무에서 유로 자유롭게 변신하며
고요의 극점에서 뛰놀며 달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꿈꾸는
마지막 쉼터이자 안식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신을 초월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그런 눈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생각해보면
신도
인간도
우주도
모두 다 텅 빈 공간에서
드나듦이 없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꿈은 꿀 수 있기에
깨달음의 극치이자 시․공간을 인지할 수 없는
그런 곳에서 호흡을 멈춘 채 살고 싶은 것이다.
물론 고요의 극점으로 달려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태초(太初) 이전의 세계인 태허(太虛)에 이르러
진공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궁극의 세계이자
무의 세계이기에
잡을 것도
놓을 것도 없는
그야말로
신도
인간도
모두가 하나로 묶여
영혼마저 사라진 상태에 이르고자하는 것이
우리들이 꿈꾸는 마지막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이보다 더 행복하고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 모든 것을 짓누르며
홀로 승화되어져
우주의 안팎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화도 아니요
전설도 아니요
현실도 아닌
공허이자 우주 그 자체이기에
부러움도 없고
슬픔도 없고
떠나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처럼
남아야할 때를 알고 남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 숨 쉬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 허허로운 삶인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처럼
우리들에게 부여된 수많은 수식어를 걷어낸
모양새로 살아가는
그야말로 신비의 무덤이자 평범의 극치에 이른
그런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생명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일로 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후회도
깨달음도
모두가 함께 손을 흔들며
자신의 모습이 감추어진 세계에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꿈이자
희망으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나 성자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공존하는 선악을 무시한 채
오로지 악을 멀리하며
선만을 위한 삶을 강요하거나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통제하려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신이나 성자들이 저지르는 과오 중
가장 잘못된 행위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성자들이 살았던 시대에서조차
모든 인간을 통제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듯이
이러한 일들은
우주 신조차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힘든 난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신이나 성자들도 인간의 행동에 대해
통제나 불필요한 간섭에서 벗어나
지나친 애정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자식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다루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월권행위이자
지나친 과잉보호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신들도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뇌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자
반도체의 회로 판처럼 무수한 미로조차
인간의 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뇌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모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주 강조하는 목회자의 말씀처럼
순도 100% 믿음은 아닐지라도
살다보면 종교에 대해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믿음이 약화되어지거나
일상으로 복귀되어져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3일 예배이고
새벽기도로
수요예배로
금요철야예배로
구역예배 및 정시기도로 연결되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행사와 수많은 교육프로그램이 준비되어져 있는 것은
돌아서면 잊어버리지 않도록
건강한 세뇌교육을 하기위한 의미도 있지만
불신(不信)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강력한 처방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포기한 일을
신이 해결해주고 있는 우주 같은 품은
우리들의 영혼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가끔씩
인간이 해낼 수 없는 불가능한 일들까지 찾아내어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있는 것은
종교가 도태되지 않도록
성도들의 가슴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물론 종교의 매력을 찾아 나서려면
많은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지만
지금껏 기록되어지거나 발표되어진
기적이나 이적만 살펴보더라도
충분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신앙인과 불신자 사이에
자신을 내던져서라도 의지하고 싶은
믿음만 존재한다면
등에 진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거나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이 내린 혜택이자
깨달음이 낳은 총체적인 집합소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준다는 것은
삼위일체로 통하는 길이자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기도 한다.
2013년 10월 6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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