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다섯 번째

청아당 2013. 9. 30. 10:52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 다섯 번째

 

우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전인수 격 대비일 것이다.

자신한테 맞으면 취하고

자신한테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버리는

그리고 역사와 과학까지 동원하여

앞뒤로 짜 맞추듯이 짜맞추어나가는

경전에 대해

혹독한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위적인 근거를 들어

증좌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일일 것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경전이 원하는 답을 해결해주는 과학이라면 채택하고

경전과 상충되는 과학이라면 과감하게 버리는

이중적인 고민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보고

듣고

느껴가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숫타니파타의 초기경전에서처럼

순수함과 아름다움과 소박함 그리고

투박한 진리의 내용으로 되어져있어도

오히려 인간적인 감동을 받을 수 있듯이

시대를 거듭하며 새롭게 탄생하는 경전과

학구적으로 완성된 경전을 멀리하려는 것은

신들이 지니고 있는 감성보다는

인간적인 감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필사본보다는 원 본문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로 통하기도 한다.

더구나 종교 창시자들이 직접 쓴 글이 아니고

제자들과 후대의 추종자들이

보고 듣고 경험하며

체계적으로 만들어낸 경전이기에

영감축자설이나 성서무오설이

탄력을 받지 못하는 원인이자

신화처럼

전설처럼 내려오는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인위적인 행위를 덧칠하는 것보다

자연적인 해석을 더 선호하는 것은

글의 내용이 좋아서 그러는 것보다는

인간적인 정과 희생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오류와 시대착오적인 경전을 반박하거나 비평하다보면

의도적으로 각종 저주와 악담으로

입을 틀어막거나 짓누르려는

경전이나 종교지도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도 하늘의 힘을 빌려 신을 모독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로 압박해 들어오거나

하늘이 인간에게 특권을 부여해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비평정신을 억누르려는 것은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되어질까봐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쉽게 말하면 자신들의 직장이자 신의 가호 속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는 것에 대해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각이 신의 생각을 뛰어넘거나

비하하는 듯한 내용이 보이면

가차 없이 신의 힘을 빌려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 또한 남모르는 고민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마지막 항변이자 비평정신만큼은

신들도 이해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의 정신을 핍박하거나

물적 빈곤을 통째로 들어다 놓거나

아예 발붙일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면

인간 또한 신에 대해

색다른 눈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강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빈태국 목사께서 초빙한

박준채 수석 부목사께서 2시간에 걸쳐 특별강연을 해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박준채 목사께서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역사서를 비롯하여

각종 자료를 수집하거나 현지답사를 통해 완성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비록 박준채 목사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미흡한 점은 있어도 계속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비전을 보다 더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기도 한다.

무엇이든지 그렇지만

처음 길은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큰 용기가 되겠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기가 될 수 있기에

다함께 지켜보며 완성의 미를 이룰 수 있도록

격려의 박수와 함께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 본다.

 

성경에 나와 있는 장자 권으로 시작하여

법궤와 대한민국 휘장 좌우에 배치된 봉황(수컷은 봉 암컷은 황),

삼족오와 삼족기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강연을 해주셨다.

 

설문해자는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으로

후한 때 허신에 의해 편찬되었으며

《설문해자》와 《설문해자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실린 설문해자 [Shuo-wen chieh-tzu, 說文解字]에 의하면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58경~147경)이 편찬했다. 본문은 14권이고 서목(敍目) 1권이 추가되어 있다. 9,353개의 글자가 수록되었고, 중문(重文:古文·籒文의 異體字)이 1,163자이며 해설한 글자는 13만 3,441자이다. 최초로 부수배열법을 채택하여 한자 형태와 편방(偏旁) 구조에 따라 540개의 부수를 분류했다. 통행하던 전서(篆書:小篆)를 주요 자체(字體)로 삼아 고문(古文)·주문(籒文) 등의 이체자를 추가시켰다. 글자마다 지사(指事)·상형(象形)·형성(形聲)·회의(會意)·전주(轉注)·가차(假借)의 '6서'(六書)에 따라 자형(字形)을 분석하고 자의(字義)를 해설했으며 독음을 식별했다. 고문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중국 고대서적을 읽거나 특히 갑골문(甲骨文)·금석문(金石文) 등의 고문자를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 송대(宋代) 서현(徐鉉)이 쓴 교정본이 남아 있다. 후세인들의 연구저작이 대단히 많으나 청대(淸代)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 說文解字注〉가 가장 자세하다.

 

유교백과사전에 실린 단옥재(段玉裁)에 의하면

대진의 고음운(古音韻) 연구를 계승한 그는 학문에서 고핵(考?: 핵심을 자세히 조사함)을 중시하여 \"의리(義理)와 문장(文章)은 고핵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터득할 수 없다\" 고 하였다. 후세의 학자들이 이를알지 못하고 의리·고핵·문장 셋으로 나누는 것은 큰 오류이며, 고경(古經) 자체의 훈고문자(訓?文字) 등에 대해 고핵을 하여 그것이 더욱 정밀해지면 마침내 성(性)과 천도(天道)에 통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또한 경(經)을 중시하였으며, 통상 십삼경(十三經)이라고 하는 데에 불만을 갖고 『예(禮)』에는 『대대례기(大戴禮記)』를, 『춘추(春秋)』에는 『국어(國語)』·『사기(史記)』·『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보태고,또 『이아(爾雅)』 외에 『설문해자(說文解字)』·『구장산술(九章算術)』·『주비산경(周 算經)』 등을 보태 이십일경(二十一經)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문자훈고(文字訓?)에 주력하여, 대진의 설을 기본으로 제가(諸家)의 설을 참작한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를 찬술하였다. 또 고음(古音)을 연구하여 『육서음운표(六書音韻表)』를 지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에 전시되어져 있는 삼족기는

환저형 토기로 세 개의 다리를 받쳐놓은 그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함과 동시에 삼위일체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김천 송죽리에서 출토된

환저형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櫛文土器))로도 불리고 있다.

서울 한강 암사동의 빗살무늬토기도 환저형 토기의 형태이고

부산의 범방패총의 빗살무늬토기도 환저형 토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중국 또한 환저형 토기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처음에는 환저형 토기에 세 개의 다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삼이라는 숫자는

하나보다 낫고

둘보다 낫고

넷보다도 낫다고 한다.

즉, 가장 안정된 자세이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도 같기 때문이다.

 

원래는 20시간 분량의 내용이지만

특별히 부탁하여 이루어진 강연이라

10분의 1로 줄여서 함축적인 강의를 해주신 것이다.

 

형제의 나라이자 투르크족 전사인

터키 아라랏 산(노아의 방주가 묻힌 곳)에서 시작하여

몽고를 지나 한반도까지

노아의 직계가족인 셈족이 우리들의 조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라랏 산에 존재하는 노아의 방주는

과학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하고

성경에서는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어느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는 차후의 문제이고

일단은 노아의 방주처럼 생긴 거대한 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스프리 공식 블로그’에 의하면

아라랏 산은 해발 5,137m의 대아라랏[Greater Ararat] 산과

해발 3,896m의 소아라랏[Lesser Ararat] 산으로 구분되며 산세가 높고 험준한 휴화산이다.

산 정상이 30%의 만년설로 뒤덮여있다.

 

‘세계사이버대학 선교과 동문회’에 의하면

성경은 B.C. 2357년경에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대적해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한 뒤 온 세상에 흩으셨다고 명시합니다.

국내 사학자들이 터키 아라랏 산 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만주에 이르는 여정을 탐사한 결과 민족이동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셈족의 특징인 환저형 토기와 생활용기가 발견되었고, 우리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를 사용하며, 아라랏 산에만 있는 흑요석 공구를 사용하고, 대홍수와 까마귀에 대한 설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중국의 이벤허 박사가 조사결과를 중국 북경 대학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북경대학도 한 민족의 민족 이동설을 인정한 것입니다.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고, 대홍수는 B.C. 2458년에 일어났으며, 바벨탑 사건은 B.C. 2357년에 일어났습니다. 고조선의 건국이 B.C. 2333년이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4년 만에 만주에 도착한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셈족이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민이었고, 조사단이 볼가강 하류의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 달린 집을 발견함으로써 이동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의 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제단이 있는데, 천제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에서 섬겼던 하나님께 경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3600개의 고대 암각화 중 70%가 수메르나 셈족의 것으로 추정되며, 가고시마 현의 거석에 새겨진 수메르 양식의 고대 선박도 이를 입증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노아의 홍수 이전까지는 가인의 후손 이외의 셋의 자손은 대개 한 곳에 모여 살았다. 그러다 노아의 홍수 이후 세 아들에 의해 온 땅으로 백성이 퍼져 나갔다. 그런데 그 때에도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시날(Shinar) 평지에서 성읍(city)과 대(tower)를 쌓아 이른바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자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이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 즉, 인류의 문명사는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살던 구석기시대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점차 세상에 퍼져 살던 신석기시대 및 바벨탑 사건 이후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지고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청동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가인 및 셋의 후손은 노아의 홍수로 대부분 멸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신석기시대를 살던 인류는 언어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청동기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문명(civilization)을 열어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출생연도가 기원전 2166년인 것으로 보아,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출생년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노아의 홍수는 대략 기원전 3000년경에 일어났다고 보아야 하며, 바벨탑 사건은 벨렉이 살아가던 시기이므로 대략 기원전 2400년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알타이산맥을 넘어 중국의 서북부 지역인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세웠다는 것과 그 아들 단군이 조선을 건설하였다는 기원전 2333년은 바로 바벨탑 사건 이후의 세계 판도와 연결된다. 또한 유태인의 기원을 이루고 있는 히브리인(Hebrew)이 벨렉의 아버지인 에벨(Eber)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볼 때, 인류의 옛 언어는 모두 이 지역의 고대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수메르문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고

터키에서 한반도를 지나 일본에까지 연결되어져있다고 한다.

 

《다음 국어사전》에 의하면

우랄알타이 어족은 과거에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을 같이 같은 계열로 보고 하나로 묶어서 이르던 말이지만 현재는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을 별개의 두 어족으로 나누고 있어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다. 우리말은 이 가운데 알타이 어족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우리말이 알타이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견해로부터 알타이 어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 진위야 어떻든 아라랏 산을 등산 전문가와 함께 2회 등정하며

현지답사까지 할 정도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역사적 고증과 더불어 유독 한국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게 된 원천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리산 종주를 비롯하여

시간만 나면 등산을 즐기고 있다한다.

본래부터 배달민족과 단군의 자손을 예로 들어가며

명절 때 색동저고리를 입는 풍습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색동저고리는 무지개색깔을 의미하고

흰떡은 백의민족을 뜻한다고 한다.

평면의 지도로 보는 것보다 지구의(地球儀)로 보면

터키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이동거리를 연결해서 살펴보면

마치 무지개형태의 반원형으로 보인다고 한다.

노아의 자식인 셈, 함, 야벳 족보 중 그중에서

한국이 가장 큰 복을 받은 셈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고 한다.

중국은 야벳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서열을 말할 때 반드시 장자가 먼저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1순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삼족오는 고구려를 상징하고 있지만

고구려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 까마귀는 전 세계적으로 길조에 해당하지만

까마귀가 흉조로 변한 것은

‘역사왜곡의 달인’인 일제치하 때 생긴 일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의 문화와 피를 이어받은 일본인이기에

자신의 조상을 부정하려는 반발심이

역사왜곡의 발원지로 등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손의 자녀들이자

홍익인간의 이념 속에서 출발한 동방예의지국의 대한민국이기에

일본인으로써는 한국에 대한 강한 저항감이 뼛속까지 스며있는지도 모른다.

 

셈족 이동의 증거는 무궁화라고 한다.

2,000여 년 전 중국 고대의 기서인 《산해경(山海經)》은

원저자와 출간연대가 분명치 않으나 한나라 유향 ․ 유흠 부자가

18권으로 분류한 것이 현전본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은 산경(山經) 5권과 해경(海經) 13권으로 짜여있다고 한다.

온갖 분야를 아우르는 고대 지리서이자 백과전서 성격의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이 름 : 무궁화

원산지 : 시리아(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함) 또는 인도와 중국(학계에서 인정)

학 명 : Hibiscus Syriacus(시리아에서 온 꽃)

rose of sharon : 사론의 들꽃(성경에 나오는 꽃). 즉, 무궁화는 예수를 뜻하거나 예수님을 상징하는 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 어사화(무궁화)

신라시대(또는 삼국시대 이전을 지칭) : 근화지향(槿花之鄕)=목근화(木槿花)=근역(槿域)=군자국(君子國)

 

그 이론적 배경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어도

한자문화권인 중국에서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연구과정에 있어

아직까지는 눈여겨볼 학술적가치가 있다고 본다.

법궤와 대한민국 휘장을 비교해보면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그 유사성에 대해 놀라울 뿐이다.

두 마리의 봉황과 무궁화의 상징적 의미에 있어

더욱더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각인시키고자하는 내용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뜻할 때는 석사(釋寺)로 풀이하고

기독교를 뜻할 때는 사(寺)로 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사(寺)는 교회를 뜻하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스님이 거주하는 절로 착각할 수 있지만

분명하게 절과 교회를 구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해석은

한국에 있는 백양사(白羊寺)는 과연 절이었을까?

백제 무왕 33년(632년) 창건 당시 백암사로 명명되었으며

조선 선조 7년 환양(喚羊 : 양을 부르다.)선사에 의해

백양사(白羊寺)라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것은 곧 절이 아니라 교회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어 1917년 만암 대종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한다.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http://www.baekyangsa.or.kr/) 소개에 의하면

백양사란 이름은 하얀 양을 제도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가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법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법회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내려와 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7일간 계속되는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는데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천국으로 환생하여 가게 되었다'고 절을 하였다. 이튿날 영천암 아래에 흰 양이 죽어 있었으며 그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양사라고 하였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였고,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였다. 15세기에 백암사(白巖寺)로 바뀌었다가 16∼19세기 중반에 다시 정토사로 고쳤다.

다시 백양사로 개액(改額)한 것은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환양이 백양사에 주석하면서 매일 ≪법화경≫을 독송하니 백양이 경을 읽는 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일이 많아 절 이름을 백양사라 개칭하고 승려의 법명도 환양이라 하였다.

그 뒤 1786년(정조 10) 환성(喚惺)이 중건하였고 1864년(고종 1) 도암(道巖)이 중건하였으며, 1917년 송만암(宋曼庵)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재지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백암산(白巖山)에 있는 절이다.

 

그렇지만 고불총림 백양사의 홈에 소개된 내용대로 대조해보면

다른 것은 몰라도 백양사가 교회의 기능을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로 꿰어 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우선은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스님이

고려 후기 때의 사람이고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환양선사를 예언하여

백암사에서 백양사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고려 때 사람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일연은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네이버 캐스트에 의하면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였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하여,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에 올랐다. 유교주의적 대의명분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해 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중세의 유교적 합리주의자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1075년(문종 29)∼1151년(의종 5). 고려 중기의 문신·학자·문인이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왕은 그를 도와줄 8인의 젊은 관료를 보내어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하였으며, 김부식은 인종이 죽기 직전인 1145년(인종 23)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해 바쳤다. 『삼국사기』의 편찬체재(編纂體裁)를 스스로 정하였고, 이에 따라 참고직(參考職)의 조수를 시켜 사료를 발췌·정리시켰으며, 사론(史論)은 자신이 직접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인종 초년에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고, 의종(毅宗) 초년에는 『인종실록(仁宗實錄)』의 편찬도 담당하였다.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한림원에 있을 때 선배인 김황원(金黃元)·이궤(李櫃)와 함께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보급에도 대단한 노력을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육조풍(六朝風)의 사륙변려문체(四六騈儷文體)에서 당·송 시대에 발전한 고문체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중찬도 이러한 문체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동문수(東文粹)』『동문선(東文選)』에 전해져 오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식(博學强識)해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고 평하였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을 만나보기도 하였고, 윤관(尹瓘)이 지은 영통사대각국사비문(靈通寺大覺國師碑文)이 잘못되었다고 문도들에 의해 문제가 제기되자 다시 짓기도 하였다.

1153년(의종 7)에 죽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흩어져있는 것을 한곳으로 모으는 작업이야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태초부터 시작하여 1이라는 의미는

도의 근원이자 우주창조의 발원지이기에

1의 의미는 천하를 다 준다하여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숫자이기에

1은 곧 우주신인 하나님을 뜻하거나

절대자에 대해 접근해 들어갈 때

가장 겸손한 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숫자이기에

더욱더 1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1은 곧 우주만물의 원천이요

1은 곧 자연이 낳은 가장 위대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1이 없었다면 2도 없었을 것이고

2가 없었다면 천도 없고 만도 없고 억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29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