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 - 세 번째
보통 10여명으로 이루어져야하는데
최종 인원은 14명이다.
처음 11명으로 시작해서 3명이 더 늘어난 셈이다.
목회자라고해서 성경의 내용을
모두 안다고 볼 수 없다.
같은 병이라도 의사마다 처방이 다르듯이
목회자 또한 피해갈 수 없다고 한다.
어쩌면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의 존재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미궁으로 빠져들거나
구약과 신약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를 통해
삼위일체의 실체를 파악하거나
허구가 아님을 역사적 증좌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어인 한문을 통해서도
성경의 역사적 실크로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 연구해온
친분이 있는 목회자를 초빙하여 강의를 부탁해본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의 분신을 통해
펼쳐진 실화적인 이야기이기에
성경은 허구가 아닌 실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만약에 성경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목회자 자신을 포함하여 성도들 또한
갈 길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믿음 없이 출발하는 성경이라면
그 허구성에 놀라거나 반신반의하며
보다 더 강력한 항의나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주인이라면
인간은 피조물로써 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하기위해서
인간을 피조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장 잘 보이는 에덴동산 중앙에
1. 생명나무와
2. 선악과나무를 심어놓았는지
그리고 뱀의 유혹을 통해
하와(영어 이름은 이브)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했는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잔인한 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중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나 알고 있지 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물론 생각을 바꿔보면 관용의 위치에서
관망하고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치 경제용어에 등장하는 기회비용처럼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거나
포기할 수 있는 양면성을 포석처럼 깔아놓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죄를 범하든지
죄를 범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알았던지
처음부터 몰랐던지
아니면 알았지만 몰랐던지
중요한 것은 우리들은 원죄를 통해
끊임없이 죄의 값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원죄는
교만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운명론이라기보다는 예정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태초부터 구원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
인간은 점으로 연결된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은 면으로 연결된 사각형의 시간을 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서 하나님으로 옮겨간 형상이기에
크게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로 연결되어지거나
주종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돌려서 살펴보면
성막 안에 있는 번제에 드릴 번제물에 대해서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번제물은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는데 짐승의 피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불살라 드린다고 한다.
성경에는 5가지의 제사법이 있는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이 있다.
이것은 모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제사의 방법이라고 한다.”
흠 없는 번제물을 번제 단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보좌인 대제사장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
3가지 상징적 물건이 담겨져 있는
법궤를 통해 하나님께 고한다고 한다.
휘장 안으로 들어갈 때
대제사장이 죄가 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고 한다.
그래서 줄과 방울을 달고 들어가 방울소리에 의해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도구로 썼다고 한다.
법궤는 3가지 함축적인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1. 언약궤(십계명) 비석(돌판)
2. 아론의 싹 난 지팡이(모세의 형)
3. 만나 금 항아리(만나는 웨하스와 비슷한 맛이 난다고 함)
대부분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인
십계명으로 불리고 있는 언약궤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는데
모세의 형인 아론의 싹 난 지팡이나
만나 금 항아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와 이웃과의 관계야말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삶의 원천이기에
보다 폭넓은 관심을 가져야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나저나 번제에 대한 부작용은 상인들에게까지 미쳐
번제물의 값어치가 천정부지에 달한다고 한다.
가장 순결한 번제물을 올리는 번제이기에
매번 번제를 올리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살상을 통해 하나님께 올리는 제이므로
어떻게 보면 잔인한 하나님의 요구로 비쳐질 수도 있어
번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예수께서 휘장 안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려하자
휘장이 찢겨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이후부터 지성소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다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림으로써 인간의 원죄를 대신하며
번제에 대한 대속 물로 희생을 하신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앞으로는 번제에 대한 제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로 남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 간단한 일인가?
그동안 구약에서 행해왔던 번거로운 일이
신약에선 자유의지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으로 올리는 제야말로
그 어떤 것도 비견될 수 없기에
구약과 신약의 차별화를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본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의 분신이기에
자신이 행한 사건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현명한 신으로 떠받쳐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해보면
기독교가 소중한 것처럼
타종교에 대해서도 소중하게 여기거나 존중해 줄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는 점이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한곳에 너무 빠져들다 보면 다른 것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에
더욱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할 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 세상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신들의 행진이
너무 많다보니
자칫하면 오류를 범하거나
혹세무민의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고 있어
순간순간 각별한 집중력으로
종교를 선택해야하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해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을 포기하거나
신흥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이단성을 뛰어넘어
새롭게 탄생하는 기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별화는
바로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살펴볼 때
기독교야말로 구약과 신약을 껴안는
보다 폭넓은 종교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가는 길에
이보다 더 명쾌하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기에
비록 유대교에서 말하고 있는
이단이라는 꼬리표는 떼어낼 수 없어도
새로운 세계를 연 기독교야말로
양면성을 하나로 받아들인
성공한 종교로 성장 발전해오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끝을 파헤치거나 처음으로 되돌아갈 때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 속에서 출발한 종교이기에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기독교이기에
지성소에 있는 법궤의 비밀만큼이나
신성하고 아름다운 종교로 탄생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소규모 개척교회부터 시작하여
대형교회까지 별도로 세워진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초기교회에선 2명이상 한곳에 모이면
교회라는 명칭이 따라붙고 있어
교회의 역할이 얼마만큼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좀 더 뒤집어 생각해보면
구약과 신약의 연결통로가 생겨난 것도
구약보다 뒤늦게 쓰인 신약이기에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어야함과 동시에
일심동체처럼 느끼게 하거나 조화를 이루려면
연결성과 일관성에 대해 기록해야하는
단점이 노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굳혀나가고 있는 기독교이기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내용이야말로
인간의 근원과 함께 신과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를 조금 더 살펴보면
4대 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예수의 일대기를 기록한 내용이다.
하지만 저마다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록된 내용이므로
서로 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피할 수가 없다.
더구나 갈릴리 출신의 어부이자
12제자의 한사람인 도마(쌍둥이의 뜻. 헬라식 이름으로는 디두모)가
예수의 일대기를 모두 다 기록할 수 없는 것 또한
시․공간을 뛰어넘을만한 능력이 없는 것도 있지만
요즘처럼 CCTV나 동영상 촬영장비가 발달하지 못한 것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24시간 예수의 행동을 살펴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 당시에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성인들이 직접 기록한 내용보다는
후대의 제자들이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거나
좀 더 단단한 기초적인 지식부터 시작하여
삶의 역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진수만을 가려 뽑아 기록한 내용이라 어떻게 보면
순수한 초기경전보다 진실성이나 내용면에서
학구적인 내용으로 변모되어져갔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현실에 맞지 않거나 믿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도태된다는 진리를 적용해볼 때
인간에게 유익하게 작용하면
그것으로 소중하고 신성시화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냥, 믿어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는 말처럼
믿음으로 시작한 종교는
그에 합당한 내적울림과 내적기쁨을
충분하게 채워나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령으로 임재하며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반항하면 반항할수록
자신에게 불리한 신과의 전쟁을
피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냥 믿고 출발하는 것이 자신에게 훨씬 유익하기에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비록 오류투성이의 성경이나
의혹으로 가득 찬 교리로 중무장하고 있을지언정
자신에게 맞는 종교라면
이해하기보다는 믿음으로 먼저 출발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1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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