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성령과 기(氣) - 열 번째

청아당 2013. 11. 17. 22:17

성령과 기() - 열 번째

 

성령(聖靈)과 기에 대해 포럼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성도들 간에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새신자라고해서 그야말로

새로 입문한 새내기 성도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새신자의 반대가 헌신자이자

내공이 특출한 성도들이 줄지어 서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고

특히 기에 대한 해설과 더불어 성령과 기와의 관계를 주고받다보니

기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 부류이자 제3위의 서열 속에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을 뜻하거나

신자들이 영적 생활을 하도록 근본적인 힘이 되어주는 본체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람의 육체 속에 깃들여 있어

정신 작용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영묘한 성정이라고 풀이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뿌리를 흔들면 우주로 연결되어지는

하나의 세계이자

그 끝이

빛이 될 수도 있고

어둠이 될 수도 있는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온 우주를 다 헤집고 다니는

우주에너지이자 신의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기는 영묘한 성정과 영적 생활을 하는데

근본적인 힘이 되어주는 본체이기에

관점을 돌려보면

기는 곧 성령이자

성령은 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볼 수가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깊이를 안고 있고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인 마음과 관련되어져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대로

예수나 성령의 모습으로 바꾸거나

물질을 비물질로

비물질을 물질로 바꿀 수 있듯이

어떻게 보면 무리한 대입 일수도 있지만

각종 치유능력과 영적능력을 강화시키고 있는 기() 또한

성령의 위치에서 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라고 하면 단순하게 생명에너지라고 불리어지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기의 세계는 하나의 빛이요

내면에서 타오르는 우주의 불꽃이자

빛이 뭉쳐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단()의 형태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온 우주를 광휘로 뒤덮고 있는 우주의 빛이자

신의 에너지이기에

기를 그냥 기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에 대한 불손한 행동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기는 살아있는 눈이요

기는 살아있는 귀요

기는 살아있는 코요

기는 살아있는 입이요

기는 교만을 잠재우는 질책자(叱責者)

기는 소통의 대명사요

기는 우주 본원의 세계에서 달려온 우주에너지이자

기는 삶에 대한 질을 높여주는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거나

인간과 신의 존재를 하나로 묶으려는 노력을 행하기보다는

스스로 나타났다가

스스로 사라지는 신묘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나 성령이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기 또한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성령이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존재 그 자체를 포기하려거나 인간을 회유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듯이

기 또한 우주의 안팎을 드나들며 끊임없이 그 모든 것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고 다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하여 느끼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보지 못하면서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하나님이자 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무소부재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면

기 또한 무소부재의 영역을 넘나들며

필요한 곳에 언제든 달려가는 고마운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7:20-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성령(聖靈)

종교에 입문한 사람이나 선택된 사람에게만 기를 보내주고 있다면

()

종교를 떠나 우주의 어떤 형상이라도 기와 연결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령과 기의 관계는 부부이자 형제자매요

감사함의 시작이요 축복의 끝이자

본래부터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기의 존재를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우리들의 생명줄과 이어져있기에

우리들의 발걸음이 움직이는 데로 기가 따라 다닌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기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인 삼세를 내다볼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인체나 벽을 투시해볼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인체부양이나 순간이동을 해볼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천안통이나 우주를 통과하기도 하고

기를 통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유체이탈(遺體離脫)을 경험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방언이나 선무(仙舞)를 행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소우주인 소주천을 행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두정을 뚫고 타오르는 활화산(活火山) 같은 대주천을 행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천지가 개벽하는 영통개안을 체험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도()의 경지인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각종 기적과 이적이 나타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치유능력과 영적능력이 강화되어질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종교와 신의 세계에 대해 더 빠르게 이해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굴곡진 삶을 초월하여 안정된 삶의 지름길로 달려갈 수가 있다.

그리고

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옥황상제를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염라대왕을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석가모니를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예수를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성령을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고체와 액체를 기화시켜 초미립자의 세계를 경험해볼 수가 있고

기를 통해 각종 상위그룹의 신과 하위그룹의 신들을 만날 수가 있고

기를 통해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살펴볼 수가 있다.

물론 위의 현상들을 경험해보거나 체험해보려면

호흡을 통해 이루어지는

수련이라는 고도의 기법이 필요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온 선인들의 경험담을 통하더라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기를 추적해보거나

기의 기능이나 속성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우주에서 달려온 기를 우주에너지 또는 천기(天氣)라 하고

지구에서 올라온 지기(地氣)를 지자기(地磁氣)라 하듯이

그리고 우리 인체에서 순환하고 있는 기를

인체전자석(人體電磁石)이라 정의하고 있듯이

기의 종류나 기의 본질을 알려면

직접 수련에 임해야만 알 수가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기는 전자기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보니

자석의 N극과 S극이 만나

서로 당기거나 끌어들이려는 인력(引力)

같은 극끼리 서로 밀어내려는 힘인

척력(斥力)에 의해 반발력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가우스의 세기가 커질수록 자석의 반발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의 느낌인 기감은

생각만 해도 기를 불러들이는 신단(神丹)이나 기도처럼

가벼운 수준의 부력감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수련이 깊어질수록

수호령처럼 오로라(aurora)가 자신을 감싸주듯이

폭넓게 에워싸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오로라(aurora)는 주로 남반구와 북반구의 고위도에서 상층 대기 중에 나타나는 빛을 발하는 현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태양으로부터의 대전 입자(帶電粒子)가 극지 상공의 대기를 이온화하여 일어나는 현상으로, 빨강, 파랑, 노랑, 연두, 분홍 따위의 색채를 보인다고 한다.

 

우리 인체에는

1. 수태음 폐경에서 시작하여 2. 수양명 대장경 3. 족양명 위경 4. 족태음 비경 5. 수소음 심경 6. 수태양 소장경 7. 족태양 방광경 8. 족소음 신경 9. 수궐음 심포경 10. 수소양 삼초경 11. 족소양 담경 12. 족궐음 간경에서 끝나는 12정경이 있고 12정경의 줄기에 넝쿨처럼 뻗어있는 365(세계보건기구에서는 361)의 혈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밖에 기경 팔맥과 정경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아시 혈이 임상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기경(奇經) 팔맥(八脈)1. 독맥 2. 임맥 3. 충맥 4. 대맥 5. 음유맥 6. 양유맥 7. 음교맥 8. 양교맥으로 구성되어져 있고 십이 경맥의 기혈 순행을 돕고 있다.

동양의학에서 경혈은 기와 혈이 흐르는 일종의 생명선이라 지칭하고 침을 통하거나 기구를 이용하여 혈 자리(경혈 ; 經穴)를 자극하여 오장육부 기혈의 허실을 바로잡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환언해보면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의미는

현상계의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현상계의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물질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어지고 있다.

알듯 모를 듯한

오묘한 선문답은

우주의 본체가 어떻게 생성소멸 되어져 왔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배경은

수행이 깊어질 때 나타나는

빛의 세계와 공의 세계를

접해봄으로 해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빛의 세계인 색이 나타나고

색조차도 사라져버린 공의 세계가 나타난다.

색은 환희를 불러들인다면

공은 적멸을 불러들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주만물의 탄생과 소멸이 나타나는 근원이요

시작과 끝의 세계이자

색과 공의 조화가 이루어지거나

공과 색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세계는 확대되어져

마음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하게 되고

그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것은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단어에 회귀되어져 영구히 보존되어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일체유심조는 논리적 모순점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라기보다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면 실상이 그대로 사라지거나

분명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참으로 황당한 사건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논리로만 따질 수 없는

스티븐 호킹(영국의 물리학자) 박사에 의해 수정된 블랙홀 같은

기이한 현상들이 줄지어 서 있다 보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존재조차 부정하거나

새로운 각도에서 보려는

우주적인 안목을 키워나가고 있기에

이러한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논리적인 모순으로만 풀려만

당장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벽에 갇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것 또한 논리적 모순이 낳은 최대의 단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단순히 이론적인 설명으로 풀어볼 수 없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고

우주 본체의 진실이 그 속에 포함되어져 있다는 사실은

깨달음의 세계가 어디까지 연결되어져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인 백과사전 해설에 의하면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한 많은 사례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병 고침예언귀신축출방언 등은

특별히 성령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심밖에 있었던 성령과 기와의 관계가

깨달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호기심과 궁극의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깨달음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이란?

가없는 우주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일이자

우주를 통째로 들어내거나

가슴에 박힌 천년 묵은 체증이 사라지는

깊고도 깊은 호흡이요

그 모든 것을 껴안고 함께 달려 나가거나

높은 수준의 우주세계를 향해 함께 걷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호흡을 통한 우주세계는

깨달음의 세계이자 일상의 일이기에

그 본모습은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의 본체이자 우주의 그릇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고체라고해서 영원한 고체가 될 수 없듯이

액체 또한 그렇고 기체 또한 그렇다.

하지만 생각이 탄력적으로 휘어지거나

명상의 세계와 연결되어져 있는

빛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극미한 소립자로부터 시작하여

금강석 같은 다이아몬드나 강철

그리고 바위나 나무 등

그 어떠한 물질이든지간에

자유롭게 휘어버리거나 투명인간이 벽을 통과하듯이

내면에서 우주의 빛을 투과하며 내부의 모습을 살펴볼 수도 있다.

빛의 세계에서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다보니

빛이 달려라하면 달려야하고

빛이 멈춰라하면 멈춰야한다.

그만큼 빛의 세계는 현묘한 현상을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우주영역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기에

빛보다 더 빠른 마음조차도

빛의 명령을 기다리며 가없는 시작과 끝을 존중해주고 있다.

그리고 지구의 끝이 아니라

우주의 끝이라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처럼

발끝 닿는 곳이 바로

우리가 달릴 수 있는 길이자 영원한 생명줄로 통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빛의 세계에서는

굴절된 세계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새로운 각도에서

탄력적으로 살펴보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료용 로봇보다 더 정밀하면서도

그 끝을 정할 수 없는 깊이로 존재하면서

우리들 내면의 눈인 심안(心眼)으로 살펴볼 수 있는 일이자

빛의 세계에 들어가

마음껏 헤엄쳐 다닐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깨달음의 세계가 우주보다 넓고

한편으론 마음을 다루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령과 예수는 하나님의 또 다른 분신으로 존재하면서

성삼위일체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성삼위일체이기에

그 어느 곳이든

하나님과 닿지 않은 곳이 없지만

그 역할만은 분명한 경계를 지으며

성령은 성령답게 영묘한 성정으로

각종 기적과 영적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고

예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추정된 육적인 나이 33세의 짧은 생애를 맞이하며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듯이

우주에너지인 기()는 신의 에너지이자

성령과 맞먹는 각종 영적능력과 행위들을 통해

치유와 성령이 행해지고 있는

모든 과정들을 함께 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기는 우주와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거나

깨달음에 대한 촉매재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러한 행운은 발상의 전환이라기보다는

수행의 깊이에 따라 나타나는

우주적인 현상이요

자연이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소중한 체험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고체가 기체가 될 수 있고

액체가 기체가 될 수 있듯이

기체가 응축되어져 액체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플라즈마는

고체와 액체와 기체의 모든 것을 대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들을 감지하는 고급정보력은

단순히 지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수행의 깊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단한 노력과 목숨을 던질 용기로 도전하는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깨달음의 전초전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말하다보면

그 끝과 시작점을 통해 발을 넓혀가고 있지만

그 끝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나만의 공간으로 자리하거나

우주만이 알 수 있는 공간으로 확대되어져 있어

함부로 깨달음의 공간을 흔들 수 없도록

가장 안전하면서도 튼실하게 보존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원초적인 본능과 종교에서 내세우고 있는

신들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하나로 합쳐진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로 귀결되어진다는 사실에

암묵적으로 또는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과 신과의 만남은

운명적이거나 숙명적인 관계 속에서 윤회하며

우주를 순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티끌 하나 없는 우주의 원초적인 모습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과 우주적인 본능이 낳은 호기심이기에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라기보다는

스스로 그러한 상태가 되고자

자율적으로 행위 되어 지고 있는

자연의 섭리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호기심이 있기에 알고 싶어 하는 것이고

보다 근본적인 뿌리를 찾아내고자하는

인간의 의지이자 모두가 알아야할 내용이기에

그 의혹은 더욱더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의 세계를 노크하며

수시로 드나들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에

우리들에게 있어

깨달음만큼 소중하고 귀중한 것은 없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시간들을 할애해가면서까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만이 지닌 지적 호기심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깨달음의 세계를 접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꿈이요 희망이지만

이미 그러한 세계에 진입하여 있거나 빠져나온 사람들이라면

신비의 무덤이 평범이라는 사실도 함께 깨닫게 될 것이다.

신비롭다는 것은

생애에서 딱 한번 돌발적인 만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일상의 일처럼 자주 접하거나 평범한 세계에서는

신비의 존재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신비라는 것도

자세하게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새롭게 창조된 신상품이 이월상품으로 넘어가거나

계절이 바뀜에 따라 또 다른 신상품이 매장에 진열된 순간

이전의 신상품은 그 가치를 잃어버리거나 할인되어져

또 다른 공간에서 판매되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신상품을 향해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손에 쥐어진 순간 신문이 구문으로 변하듯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 그 순간이

신비이자 평범으로 변하는 경계선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평범의 세계를 흔들어 깨우다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신비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평범은 신비의 무덤이자

그 모든 현상과 비현상을 가슴에 껴안고

전혀 낯설지 않게 하루하루를 억누르며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깨달음에 대한 깊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과 같기에

성령이 충만한 세계나

기가 충만한 세계나 그 활동범위는 같다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곧 성령이 기요

기가 성령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분별심에 있는 것이지만

그 작용과 효과는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기를 단순하게 생각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좀 더 고급화되어져가는 정보에 관심을 보여야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분신이자 성스러운 성령과 하찮은 기를

하나로 보려는 노력은

어떻게 보면 종교를 모욕하는 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기는 처음과 끝을 달릴 수가 있고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보다 더 진하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하나님의 성령도 중요하지만

기가 없다면 물질적인 식량을 뛰어넘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기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에 속해 있기에

성령과 기와의 관계를 대입시킨다하여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기에

굳이 거부반응까지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종교에서 기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기 자체를 모르거나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분신인 성령과 동등한 위치에서

기를 논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성령에 대한 예의에 맞지 않거나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싶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기의 세계를 알던 모르던

매일 우리들의 몸에서 기혈이 활동하고 있고

기의 세계가 일부에 국한되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어

기를 부정한다고 해서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기를 알지 못해서

성령과 기와의 관계를 접목시키지 못해서 그렇지

한번 기의 세계에 빠져 기의 무한한 능력에 흠뻑 젖어들다 보면

기의 세계가 어디까지 연결되어져있는가를 깨닫게 되고

이것은 좀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까지

연결되어져있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순간

우주를 박차고 뛰어나가는 그런 황홀감에 젖어들거나

우주에서 숨소리조차 죽여 가며

우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기의 세계가

얼마나 오묘하고 신령스러운지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종교에서도 끊임없이 건전한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듯이

기 또한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건전하고도 맑은 정신으로

우주에서 잠자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 모아

우리들 몸에 순환시켜주는 행동은

오히려 격려의 박수를 쳐줄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한마디면

성령이 기가 될 수가 있고

기가 성령이 될 수 있다는 논거가 제시되기도 한다.

이 얼마나 경쾌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 얼마나 행복한 발걸음인가?

마음한번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우주적인 현상이

우리들의 가슴에

우리들의 생각에

그야말로 성령과 기와의 관계를 분석하기보다는

하나의 매체로써

우주적인 연결점으로 통합시켜나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을 뛰어넘어

태초부터 호흡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20131117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자료출처 :

 

여기서 잠시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성령 충만한 삶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령 충만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충만이란 말은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므로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그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16:14) 그리스도의 영(8:9)이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의 인격과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종교적으로 신비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메마른 극도의 이성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외적인 표현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성령에게 붙잡힌바 되는 것입니다.

 

2. 누가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3.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죄짓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요일 1:8).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라고 탄식했습니다.

때때로 자연인에게 있는 양심적인 생각이나 윤리적인 행동으로도 갈등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우리의 힘만으로는 영적으로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런 갈등을 이길 수 없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 신자들은 성령을 받습니다(8:16, 고전 12:3). 그 순간부터 신자들이 마음과 생활로 얼마나 성령님께 순복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살지만 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을 때는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화 과정 즉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성령이 우리를 계속 주장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성령 충만의 필요를 느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 충만을 받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2)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만일 죄로 인해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된다면 그것은 불순종의 행동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고백이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사함 받은 것을 믿으며, 그 죄에서 돌이켜 태도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백해야할 죄를 찾아내기 위하여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목마르게 사모하고,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모두 고백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따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자신의 생활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믿음은 다른 말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할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태도가 있는지는 상황이 좋을 때보다 상황이 나쁠 때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병으로 몸이 고통스럽거나, 파산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할 때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 신뢰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5. 성령 충만을 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때 필요에 따라 각종 은사를 주십니다(12:6-8, 고전 12:4-11).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 은사들을 주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6. 언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하십니다. 성령의 세례는 한 번이지만 그 이후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聖靈)에 대한 사전적 해석에 의하면

[기독][천주] 성부(聖父), 성자(聖子)와 함께 성삼위(聖三位)의 하나.

하느님의 영을 뜻하며 신자(信者)들이 영적 생활을 하도록 근본적인 힘이 되는 본체이다.

 사람의 육체 속에 깃들여 있어 정신 작용을 다스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영묘한 성정.

Paraclete, Holy Ghost(고대 영어로 '영혼'이라는 뜻의 gast에서 유래)라고도 함.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삼위일체의 제3.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임한 많은 사례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병 고침·예언·귀신축출·방언 등은 특별히 성령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야훼의 영에 대한 구약성서의 다양한 언급이 성령 론의 선구를 이룬다고 생각해왔다. 히브리어 루아흐(ruaḥ)는 보통 ''으로 번역되며, 하느님이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피조물을 창조한 것에 대해서나 피조물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는 활동에 대해 언급한 본문들에 나올 때가 많다. 이 용어는 특히 예언자의 말이나 메시아적 대망과 관련될 때가 많다. 그러나 성서의 유대교에는 독립된 신적 인격에 대한 명시적인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서도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지는 않다. 단지 또 다른 협조자 또는 중보자(paraclete)가 올 것이라는 요한의 복음서의 약속만이 이와 같은 신앙을 암시할 뿐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동등한 본질을 지닌 특별한 신적 인격이라고 정의를 내린 것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였다. 그 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를 잇는 끈이나 유대 혹은 상호간의 사랑으로 보았다.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연합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성령과 삼위일체의 다른 2위격의 관계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온 반면, 동방정교회는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서 나왔다고 표현해왔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사변보다는 교회의 성사생활에서 성령을 더 깊이 체험해왔다. 사도시대 이래로 세례 의식문은 삼위일체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견진성사(동방정교회에서는 성유식)는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성사로 인정하지 않지만 성령이 교회에서 하는 역할을 잘 보여준다. 동방정교회는 에피클레시스(epiclesis : 성령 강림을 비는 기도)를 드릴 때 성령이 예배를 드리는 회중, 성찬의 빵, 포도주에 강림하는 역할을 강조해왔다. 교회사 초기부터 제도적인 교회에 자유, 적극적인 사랑, 활력 등이 결여되었다고 불평한 많은 집단은 성령이 계속해서 부어지기를 간구했다. 이러한 운동 가운데 하나가 20세기에 일어난 오순절운동이다.삼위일체 

 

 

위키 백과사전에 의하면

반야심경(般若心經)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또는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핵심적인 이치인 반야바라밀다를 간결하고 명징하게 요약한 불교 경전의 정수에 해당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산스크리트어 제목은 프라즈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로 한자어 명칭에서 '()'마음[]을 뜻하는 치타(citta)의 번역어가 아니라 핵심 · 정수(精髓· 정요(精要· 에센스 또는 참된 앎[正知]을 뜻하는 흐르다야(hṛdaya)의 번역어이다.[1]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제목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반야바라밀다 또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의 핵심 또는 정요(精要)를 간추려 담고 있는 경전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세 번)

 

 

한글 번역[편집]

본래 갖추고 있는 위대한 지혜에 이르는 마음의 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 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멸도 했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나 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 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 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 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가자 가자 진리를 향하여 가자 평안의 저 언덕으로] 깨달아 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