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통성기도와 관상기도 - 아홉 번째

청아당 2013. 11. 10. 23:39

통성기도와 관상기도 - 아홉 번째

 

묵상기도라고 하면 마음기도와 관상기도를 일컫는다고 한다.

성경본문 일부분의 내용을 발췌하여 암기한 후

마음속에 가다듬고

기도원 골방에서 2박 3일 동안

경건한 시간인 큐티(QT)를 통해 거룩한 읽기나

침묵기도이기도한 관상기도를 하다보면

예수님과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만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인형놀이를 즐기는 여자아이들처럼

자신의 취향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인형을 꾸밀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말없이 입을 다문 채

나무아래에서 한결같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어떤 때는 예수님과 대화나 의견을 나누다가도

기도원에서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면

예수님한테 양해를 구한 후 식사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식사를 끝마치고 눈을 감은 후 관상기도에 들어가면

여전히 나무아래에서 예수님이 목회자나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만남이 있어야 장소를 불문하고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듯이

주님과 만남이 없는 관상기도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통성기도와 관상기도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말과 행위로 행하는 통성기도와

침묵으로 행하는 관상기도에는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주여! 주여! 주여! 를 세 번 부른 후

또는

주님! 주님! 주님! 을 세 번 부른 후

두 팔을 높이 들고 통성기도를 행하다보면

각종 방언과 진동현상이

여기저기 곳곳에서 나타남을 목격할 수가 있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주에너지인 신의 에너지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좋은 자세로

통성기도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보통 금요철야예배나 주일예배 끝부분 때 행하는 자세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생명에너지와

우주에서 달려온 우주에너지와의 만남은

두 팔을 벌리게 하고

강한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기의 속성이

여지없이 나타나는

보기 좋은 장면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해보면

지구에는 지자기가 활성화되어져있고

태양에는 태양풍이 활성화되어져있고

우리들의 몸 심장에서 시작하여

온몸 곳곳으로 흘러 다니는 혈관 속에도

자기장이 활성화되어져있다는 사실은

우리들 주변에는 늘 자기력이 존재하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는 의미와도 같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삼위일체처럼

태양과 지구와 인간의 몸이 하나로 만날 때

우주에너지의 강력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이

우리들의 육체와 영혼이 빛의 폭풍 속에서

자정작용(自淨作用)을 거쳐 정화되어진 후

하늘 문으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목욕재계한 후

경건하면서도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이

성찰기도에서 침묵기도로

침묵기도에서 관상기도로 나아가는

지름길로 통하고 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명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개인적인 수행능력에 따라

기감을 강하게 느끼거나

기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종교 속에 갇혀

우주에너지인 신의 에너지를 성령으로 풀이해도 좋고

영적능력을 가진 우주에너지를 단순히 기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기를 기라고만 표현한다면

기의 속성을 세분화 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사장시켜버리거나

기의 소중한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우리들의 몸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에너지와

우리들의 몸에 더없이 좋은 우주에너지를

흘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열정을 갖고

기도 중에 우리들의 신체에서 변화가 생기는

관찰력을 동원해본다면

충분히 기의 존재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에 신의 에너지인 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온몸으로 느끼도록 노력해보면 될 것이고

그것을 성령이 임재 하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뜻은 같지만 분야에 따라 다른 표현으로 쓰이고 있는

전문용어나 현상은 표현하기에 달려있듯이

기도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이나 진동현상은

모두 다 우주적인 현상이요

우주 신의 춤사위이기에

그것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그것을 경락과 경혈을 자극하여 생겨난

기의 떨림 현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통성기도가 더 나은가

아니면 관상기도가 더 나은가에 대한 평가는 비밀에 붙여야할 것 같다.

통성기도는 통성기도의 효과가 따로 있고

관상기도는 관상기도의 효과가 따로 있듯이

사람들에게 한 가지에 만족하며 살아라한다면

틀림없이 반발심이나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 통성기도가 더 효과가 있는 경우가 있고

때에 따라 관상기도가 더 효과가 있는 경우가 있다.

쉽게 말하면

통성기도는

공동체예배인 단체로 행하는 곳에서 효과가 있고

관상기도는

자신만의 조용한 공간이나 골방에서 홀로 행할 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관상기도는 침묵기도나 성찰기도

또는 마음기도로 풀이해볼 수도 있지만

통성기도에서 너무 힘을 뺀 나머지

침묵조차 잊어버린 채 기도에 몰두하다보면

진정 자신의 정체성이나 우주본향으로 회귀되지 못한 채

동적인 움직임에만 신경을 쓰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에

활동성이 강한 동적인 통성기도도 좋지만

활동성은 낮으나 정적인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의 깊이를 재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본다.

가끔씩 오해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지만

동적이라고 해서

항상 움직인다고 생각하거나

정적이라고 해서

침묵 속에 갇혀

조용한 움직임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얼마든지 정중동 동중정의 원리처럼

움직임 가운데서도 멈춤이 있을 수 있고

멈춤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중심을 잡고 있는 중용의 도처럼

이 둘의 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관상기도가 세상에 알려진 후

각계각층에서 나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성종교나 신흥종교들의 표적이 되어

루머에 시달리고 있지만

동서양의 융화나 화합을 내세운다면

좀 더 쉽게

좀 더 깊게 접근할 수 있는 기도의 방식이 있다면

한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 행하는 화두처럼

따로 시간을 내어 자신만의 공간이나 골방에서 행하는

관상기도를 행한다고 해서

말씀위주의 설교를 무시하는 처사나

성경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태는 아니기에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져가거나

적응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차세대를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색다른 관심을 불러들이고 있는

관상기도를 시도해볼만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간단하게 요가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행위 중에 명상을 유도하는

정적인 호흡위주로 동작하던 시대가 사라져가고 있는 대신

부작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역동성이 강조된

동적인 필라테스나 핫요가로 자리바꿈을 하거나

이보다 더 다양한 동작과 기구를 이용한

변형된 요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시대가 요구하는 소리를 무시하거나

보수적인 기존의 설교방식에 매달리게 되면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기에

신중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와는 별개이지만

가톨릭(카톨릭) 천주교와 개신교 기독교로 출발한 이단이지만

기존의 종교를 뛰어넘는 문학적 표현과 뛰어난 언변

그리고 신화와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 채

2000년 이상을 견뎌온 종교이기에

이제는 그 어떠한 비판이나 비평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지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타종교와 차별화를 위한 노력이 얼마큼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실증적인 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의 이러한 초능력적인 영적능력과

화려한 언변을 통해 지켜온 기독교가

언뜻 보기에는 굉장한 능력으로 보이거나

추월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 같아도

호흡을 가다듬고 세심하게 살펴보면

깨달음의 세계를 대표하는

선도나 불교에서 보여주고 있는 능력에 비하면

오히려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도의 깊이만 보아도 문제가 많음을 스스로 인정하거나

인간의 한계를 느끼는 모습들을 바라볼 때

어떤 종교이든지간에

신의 한계를 느끼거나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수 이전에도 기적은 일어났었고

예수 이후에도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반드시 예수이어야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없어도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할 것이다.

어떤 이는 예수는 곧 하나님의 분신이기에

예수 이전이나 이후에도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항변할 수 있지만

문제는 기독교를 접해보지 못했거나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리고 시간만나면 선지자를 동원하거나 예수를 내보내

자신을 믿어달라는 호소어린 하나님의 요구에 비쳐보았을 때

기독교에서만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나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나쁘게 바라보기위해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만이 최고라는 자부심 아닌 자부심을

너무 남발하고 있는 목회자나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겸손하면서도 낮은 자세로 임하거나

뒤돌아보라는 의미에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행동들은

역사 속에서 흥망성쇠를 같이했던 강대국들의 변천사요

약자가 강자를 누르고

새로운 존재감으로 일어서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에

말 그대로 과거에서 연결된

영지주의자나 신비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는

각고의 노력이 확대되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다만, 우월한 유전인자를 빌미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들거나

타종교에 대해 비하하거나

경쟁대상인 불교의 신성한 법당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거나 불미스러운 행동들을 감행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삼가고 또 삼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라는 자긍심을 내세운 채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이러한 행동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면

기독교의 앞날은 흑암의 세계로 떨어지거나

고등종교에서 격이 낮은 하등종교로

타락하거나 추락할 위험성이 있을 수 있기에

기독교인들이 반성해야할 부분은 반성하면서

새로운 차세대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각고의 노력이 배가되어져야할 것이다.

사실 신흥종교의 수장들이 행하는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기존의 종교를 누르고 새로운 승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건들을 만들어 내거나

예부터 인기를 누려왔던 영지주의나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 후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이중 삼중으로 쳐나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같은 기독교에서조차 서로가 이단이라고

치열한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오늘 내일의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되어진다는 사실을 안다면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해나가지 않는 종교는

수장되어지거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에

지난 세월에서 교훈을 받아들이며 함께 발전해왔던

동서양의 신비한 세계를 하나로 묶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거나

거기에다 신의 능력을 첨가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과 같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지거나 풀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면

계속해서 발생할 확률이 높기에

그에 맞게 대처해나갈 수 있도록

매번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때라고 본다.

그러고 보면

요가조차도 살아남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한 종교에서

기도방식을

과거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거나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성도들로부터 외면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수주의 또한

한번 잡으면 놓지 않으려는 정치권처럼

필요이상의 집착을 보여서도 안 될 것이다.

분명 잘못된 문제가 보이면

차세대를 위해서라도 고쳐나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렇지만 보수주의라고해서

영원히 보수주의로 살아가라는 법은 없기에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이 둘의 경계에서 밀월의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지금이라도 환골탈태(換骨奪胎)를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가치는 무엇인가?

종교는 종교다워야 하고

철학은 철학다워야 하듯이

새로운 시각에서 행하는 깊이 있는 관상기도이기에

온몸을 던져서라도 성경말씀 속에 잠들어 있는

진실을 깨우는 작업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실천하고 행동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솔직히 신화와 전설이 풍부하게 표현되어지거나

문학적 표현이 뛰어난 성경말씀만 가지고는

성경전체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부연설명이나 부분적인 성경말씀에

귀를 기우려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성경에 관련된 서적과 명상에 관련된 서적 그리고

심령학과 지구와 우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현상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깨달음과 연결된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이란?

남이 간 길을 따라 걷는 길이 아니라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는 일이자

모방이 아닌 창조의 길을 가는 길이다.

또한

우주적인 자유를 얻는 일이자

우주적인 평화를 얻는 일이요

우주 본향으로 안전하게 귀향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주 본원 이전의 세계에 안착하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의 본질을 알기 전에 먼저 알아야할 일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을 알아야만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갈 수가 있고

이와 더불어 인간의 일상사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간섭하고 있는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깨달음과 관련된 마음을 알아야만

더욱더 깊은 곳으로 찾아들어갈 수 있듯이

본질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나

지엽적인 일에 얽매여 행하는 설교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자

성도들을 오도하거나 오해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여

고난과 시험의 깊이를 더 깊게 파놓을 수도 있기에

목회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일깨워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다보면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한 채

관상기도의 위험성을 논하거나 이단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섣부른 지식이 낳은 유익함을 해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참으로 신중하면서도 깊이 있는 반성이 있어야하고

좀 더 나은 기도방식을 추구하는 일은

결코 나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단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해하거나 악영향을 끼친다고 보지는 않는다.

과거에 중국을 제외한 모든 우방국을

오랑캐라는 말로 호도하고 있듯이

이단이라는 말 한마디로

마녀 사냥하듯이 몰아가는 일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명 유대교입장에서는

천주교에서 파생되어 홀로 선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부르는 일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2000년을 넘게 버텨온 기독교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단 중에서도 유익한 종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고등종교(기독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그 위치가 이미 확고하게 굳혀져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관점이지만

빛은 선함을 대표한다면

어둠은 악함을 대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이 선함을 나타낸다고 해서 모두가 선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어쩌면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기에

선과 악의 관계를 다루다보면

서로가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준이나 관점에 따라

선도 되었다가 악이 되기에

명확하게 선악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와 바람이 만나

함께 달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자 행복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 일인가?

처음 그대로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퓨전화 되어져가는 종교 또한 이 시대에서 필요한 존재로 남으려면

그 무엇이라도 시도해보려는 노력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침묵하라!

고요하라!

묵상하라!

그리고 관상을 통해

우주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고요의 극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도전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종교이든

그것이 철학이든

그것이 과학이든

우리들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야할 것이다.

참으로 깊고도 깊은

명상의 시간이 아니던가?

현상과 비현상을 초월한 후

우주의 가장 안쪽인 고요의 극점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침묵으로 일관한 일이요

명상으로 일관한 일이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맺는 일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영혼의 다리이자

우주적인 만남이기에

이보다 더 간결하면서도 충만한 의미 있는 만남은 없을 것이다.

 

2013년 11월 10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