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
하늘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종교이든
그것이 철학이든
그것이 과학이든
무소부재의 허공을 메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그것이 참된 종교라 생각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면
그것은 참된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판단이며 기준인가?
불교가 좋으면 불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고
기독교가 좋으면 기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선택한 종교가
반드시 자신에게 이익만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리고 타종교를 비방하거나
자신이 믿는 종교보다 더 낮게 평가하거나 최고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주는 참으로 넓고 이해할 수 없는 숱한 의혹의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전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머리보다 더 크고
부분에 묻혀 앞을 바라볼 수 없는 미세한 생물보다 더 작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이자
기도를 통해 나타나는 거대한 우주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신의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 움직이는 우주에너지이자
강한데서 약한데로 이동하며 치유효과까지 지니고 있는 신비한 존재이다.
종교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면
우주에너지 또한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한없이 달려도 잡을 수가 없고
한없이 멈춰도 놓을 수가 없다.
그냥 서있는 그대로 삶을 즐기든지
그냥 서있는 그대로 삶을 느껴야한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해도
살아야할 사람은 살고
죽어야할 사람은 죽는다.
하늘이 그렇게 정했고
하늘이 그렇게 살아라하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다.
기독교를
손뼉 치며 웃을 수 있게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그리 많지 않다.
일상의 생활처럼
나와 우주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노래하며
가장 먼 곳에 계신 분을 불러들이거나
가장 가까운 곳으로 인도하는 일은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칭하지 않고
가장 친근한 존재인 아버지라는 말로 부를 때
예수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거나 묵인된 채
가장 위대한 신의 아들로 주목받고 있듯이
만약에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불렀거나
언어의 마술사보다 더 아름다운 말로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아직도 멀고도 먼 이질감으로 틈새를 벌려놓았을지도 모른다.
장경동 목사 또한 기독교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생활에서 꺼내온 언어와 몸짓으로 단상에 서서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라 말하며
가장 알아듣기 쉬운 말로
가장 알아듣기 쉬운 노래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설교하고 있다.
신도들의 직위가 집사일 때 집을 사거나
권사일 때 또 집을 사거나
장로일 때 더 집을 사두어야 한다는 말로
장난 아닌 유머로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집사=집
권사=또 집
장로=더 집
다 합하면 한 채에서 세 채까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만
장점이 단점을 누를 수 있다면 면죄부를 면할 수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듯이
마음을 열게 하고
손을 들어 올리게 하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정에 다다른 설교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왜곡하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면
지금껏 설교해온 소중한 이미지들이 손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도 수입해온 종교이고
기독교도 수입해온 종교인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전하고자하는 궁극의 뜻은 같다할 수 있다.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교가 난립하고 있는 가운데 토착화되어가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이지만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엔
어김없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 종교이기도하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펴야할 화두는
진리를 발견하기위한 도구로 사용되거나
기복신앙에 있는 것처럼
종교의 위대성은 인간을 하나로 묶거나
우주와 하나 되게 하는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교가 정적인 종교이자 그 모든 것을 누르며 홀로서기에 강한 종교라면
기독교는 동적인 종교이자 천국에 드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품에 의지하도록 의타정신을 강조하고 있는 종교라 말할 수 있다.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듣다보면
즐거움이 생겨나거나
손뼉 치며 웃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욕심 때문에 패가망신하거나
욕심 때문에 자수성가하거나
욕심 때문에 살아가야할 사람들이지만
욕심보다 더 큰 것은 사람이라 말하며
사람보다 더 큰 것은 우주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 칭하고 있다.
“하나님 > 사람 > 욕심”
사람이 욕심에서 빠져나오거나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달려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실한 신도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 당장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사후에 주어질 천국의 문이 열려있거나 예약되어져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고
이보다 더 든든한 마음은 없을 것이다.
무소유!
소유하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없이 버리고 또 버린 후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무소유가 아니다.
무소유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무소유를 체념이라 해석하거나
무소유를 현실도피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거나
무소유를 포기라 생각하면 안 된다.
분명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을 수가 있고
분명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무소유를 논한다면
처음부터 우주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가 정적인 종교이자 수평적 주종관계인 자립형 종교라면
기독교는 동적인 종교이자 수직적 주종관계인 의존형 종교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종교마다 색다른 감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교가 선적인 깨달음을 위해 동안거와 하안거를 거치는 동안
한걸음씩 나아가는 일어서기를 충실히 하고 있다면
기독교는 기도를 통해 한걸음씩 나아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품으로 귀의하는 기도의 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가 접근하기 어려운 종교라면
기독교는 접근하기 쉬운 종교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선교나 포교하기가 쉽다는 뜻은 아니다.
빠르면 며칠에서
늦으면 수십 년을 공들여도 선교나 포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접근성에서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불교보다 기독교를 선호하는 나라를 살펴보면
잘사는 국가 30개국 중 28개국이 기독교 때문에
경제대국을 이룬 나라가 많다고 한다.
이는 정적인 불교의 교리보다는
동적인 기독교의 교리가 실생활에서 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며
봉사와 희생정신을 발휘한
신도들의 아낌없는 배려 때문에 생겨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독교가 좋다고 해도
불교를 폄하하거나 타종교를 비방하는 듯한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자
경솔한 일로 치부되어지기에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해서
남이 가본 길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우주를 대변하는 신을 찾아가는 일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고 더 낮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종교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할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서로의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달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모자라면 채워주고
넘치면 나눠주는 세상에서
우리들끼리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의 정이고 하늘이 원하는 진정한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1년 12월 12일 월요일
숭의동 제2교회에서 부흥사경회 초청 대전 중문교회 담임목사이신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나서…….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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