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스스로에게 묻는다 – 무문관(無門關)

청아당 2025. 5. 25. 23:59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문관(無門關)

 

문 없는 문이 무문관(無門關)이다.

 

문이 없으면 갇혀있다고 생각한다.

 

문은 생각을 가두는 벽이다.

 

한 호흡 속에서 뒤돌아보면 문은 처음부터 없었다.

 

문은 벽을 뜻하기도 하지만 문안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살면서 숱한 문에 갇히거나 숱한 벽에 갇혀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주적인 에너지를 모아 있는 힘껏 밖을 향해 뛰쳐나가야 한다.

 

세상을 얻고 우주를 얻다 보면 교만이 하늘을 찌를 데가 있다.

 

교만을 통해 얼마나 많은 겸손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가?

 

평생을 통해 교만을 눌러도 다 누르지 못하는 것이 교만이다.

 

교만은 틈만 나면 고개를 내밀기에 겸손이 자리할 틈도 없이

제방이 무너지듯 터지고 만다.

 

세상을 얻고 우주를 얻다 보면 보이는 것이 없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가 아닌 우주적인 내밀한 속내이기에

그 화려함과 그 깊이는 자로 잴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중심이 자리 잡고 있다.

 

우주에는 기준점이 있어 그 기준점을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다.

 

하늘을 날고 우주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도

결국은 우주 안에서 떠도는 고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을 뒤돌아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최하층에서 최고 권력자라 할지라도

결국은 현재 나타나는 그 모습 그대로다.

 

명상으로 우주를 호령하여도

종교로 우주를 호령하여도

과학으로 우주를 호령하여도

재력으로 세상을 호령하여도

권력으로 세상을 호령하여도

뒤돌아서면 그 모습 그대로이다.

 

가장 밑바닥을 그리는 사람이라도

가장 높은 이상을 그리는 사람이라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다이다.

 

거기에서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우주의 일부 그 자체이다.

 

석가가 보았다는 우주관과 예수가 보았다는 우주관은 서로 다르다.

 

종교를 떠나서 똑같은 우주 안에서

서로 다른 우주관에서 살았다.

 

그 근본은 하나인데 그 뜻도 하나인데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주관을 그렸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살면서 느껴온 것이 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현실처럼

지구가 되었던

우주가 되었던

아니 사후세계가 되었던

우리는 늘 가상 세계에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의 경지에 올라도 결국은 그놈이 그놈이다.

 

생명체로 태어났으면 생명체로 살아나가야 하는 것처럼

무생물로 태어났으면 무생물로 살아나가야 하는 것처럼

삶 그 자체는 폭발적인 우주적인 현상을 경험했다고 해서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스스로 파괴하면서 존재한다.

 

생성소멸은 눈 한 번 감았다 떠보면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을지 궁금할 수 있겠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리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최선의 삶인 것이다.

 

오가는 길은 간단하다.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꿈과 희망을 다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살아있으니까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자신의 모습은 현재 그 모습이기에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하다면 종교나 명상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우주의 속내를 알고 싶다면 과학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재력과 권력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우리는 믿음과 기적을 경험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 주변을 배회하며 손만 내밀면 언제든 달려오는 것이 기적이기 때문이다.

 

음양이 공존하며 끊임없이 자연과 우주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나가듯이

공존의 기술인 음양의 조화 그 자체인 공존하는 선악으로 중심을 잡아가며

산처럼 물처럼 흘러가면서

그중에서 하나는 잡고 하나는 버려가며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도 우주는 배려심이 강하다.

 

강자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노약자를 배려하는 깊고도 깊은 우주의 혜안이다.

 

문제는 문 없는 문인 우주공간에 생각하는 생명체가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우주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우주의 세계가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우주는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주 본래의 모습이 더 중요하기에

바람이 지나간다고 그것을 바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놓고 자연과 우주에 대해 노래해도

우주는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우주는 모든 생명체의 중심축이기에

그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주가 임대인이라면 우리는 우주 일부를 빌려 쓰고 있는 임차인이다.

 

임차인이 임대인이 되려면 간단하다.

 

임차해서 쓰는 일부분을 또다시 임대하면 된다.

 

임차인이면서 동시에 임대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임차인이면서 동시에 임대인처럼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202552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